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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눌과 백대명산

마눌과 추는 춤 - 용문산 (100대명산 제 61산)

 

 

 

 

 

 

 

지난 과거의 추억일 뿐이지만 61살이면 회갑잔치를 했었다.

61년 삶의 고비를 넘기기 힘들었던 때였으니까

마눌과 100대 명산 주유를 시작하고서 60번 째 명산순례를 마무리하고 61번 째 출정을 앞두고

있다.

작년 귀연 회장직을 맡으면서 거의 시간을 내지 못하다 보니 순례의 기회를 그리 많이

만들 수 없었다.

산은 매주 빠지지 않고 갔으되 마눌과 함께 하는 100대 명산 순례는 늘 뒷전으로 밀려야 했다.

그래도 100대 명산 주유의 발길은 머뭇거렸지만 마눌과 함께 내 사는 가까이 대청호 둘레의 감추

어진 비경을  탐험하는 기회를 얻었으니 나름 의미 있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자연과 등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 보다 더 가혹한 삶이 있을까?

올해는 100대 명산 여행길이 더 잦아질 수 있을 것 같다.

귀연은 지난 해에 이어 셋째 주를 안식 주로 삼는 월 3회 산행을 계속하고 있고 올해는

산악회 일에서 자유로울 테니  15산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한밭산사랑산악회와 용문산에 간다기 5시에 일어나서 아침 일찍 밥을 먹었다.

7시에 평송 수련원을 출발해서 버스에서 한참을 졸다가 음성휴게소에 도착했는데 산악회에서

밥을 준단다.

1회용 도시락에 찰밥을 담아서 주려니 했는데 웬걸 1회용 공기에 수저 스푼까지 챙겨주고 반찬

으로 김과 김치 까지 제공했다.

모락모락 나는 김과 찰밥 위에 얹혀진 노란 밤알들을 보니 3시간 남짓 지났는데 허기가 다시

동한다.

김치 맛도 좋아서 집에서 먹는 공기 만큼 수북히 담은 찰밥을 다 먹어 버렸다.

거기다가 후식으로 빵빠레 하나와 사또밥까지

왜그러니?”

정말 매일 체중계에 올라 가믄서 우짤라고 그랴?”

 

양평

예전에 입사동기들과 한 번 왔던 지역이긴 하지만 용문산은 처음이다.

역시 수도권

10시가 좀 넘은 시간인데 즐비한 대형 버스와 오가는 사람들이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유서 깊은 절 용문사 때문에 통행료를 2000원 지불해야 하는데 매표소를 들어서자 흡사 공원처럼

잘 가꾸어진 주변 광장의 포스가 예사롭지 않다.

 

또 배아플려고 그러네.

예전에 회사 부지 때문에 양주인근으로 출장 간 적이 있었는데  주변에 많은 신도시 계획으로 인해

온통 개발 붐이 일고 있었다.

도시계획에 편입된 지역의 땅 값도 장난이 아니었다.

한남정맥길을 주유하면서 수도권을 가로지르는 한남 정맥 산허리들이 온통 파헤쳐지고 잘려나간

 모습을 보았다.

그 언저리에는 우스꽝스럽고 어색한 도시가 꿈틀거리며 산으로 기어 오르고 전원 풍경에 어울리지

않는 부조화스러운 아파트가 스카이 라인을 훼손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박근혜 정부는 또 수도권 규제완화를 들고 나온다.

뭔 말 하겄어?”

말은 나서  제주도로 보내도 사람은 나믄 최소한 경기도로는 보내야제…”

1993년 대전 엑스포를 통해 세계 도시로 화려하게 부상 할 뻔 했던 대전의 현주소는 초라하기만 하다.

마치 80년대의 거리를 걷는 듯한 구도심과 변두리 지역은 한반도의 중심, 교통과 교육 연구의 중심지란

말이 무색하다.

도시의 지역은 그리이스의 소도시처럼 이질화되고 단절되어 있다.

엑스포 과학공원은 용문산 진입 광장 만도 못한 애물단지로 전락했고 대전 구도심의 허파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유서 깊은 보문산 공원은 초라하고 남루하기 그지 없다.

선거철이나 표를 얻어내기 위해 요란하게 떠드는 과학벨트지 결국에는 죄 알맹이 없는 쭉정이 밖에

남지 않았던 바보 양반들의 핫바지 도시

 

도시의 메인 지하철이 수도권 변두리만 못한 경전철로 운행된다.

거기 까지는 괜찮은데 이제 재원도 없고 땅굴파기도 힘드니 지상 고가 방식으로 건설 한단다.

 

아얘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몇 년 쓰다 버릴 것도 아닌데 그냥 냅싸 두었다가  먼 훗날 기술도 좋아지고 비용도 절감되는 최신공법이

개발되면 그 때 땅 속으로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양반들의 도시인데 늦더라도 좀더 조용하고 쾌적하게 만들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정원처럼 잘 가꿔진 공원에 활기찬 표정의 사람들이 오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심통이나서 

괜한 푸념을 해본다.

 

 

 

 

산 행 지 :  용문산

    :  화창하고 바람 좋다

    :  잘 몰라유

소요시간 : 7시간 (식사 약 20)

    : 마눌 (한밭 산사랑 산악회) 

 

         

시간

경유지

비 고

10:20

주차

용문산 주차장

10:30

일주문

 

10:45

용문사

 

11:24

계곡 나무다리

 

11:45

마당바위

 

11:54

나무다리2

 

11:55

용문산정산 1.45km표지

 

12:18

용문산정상 1.05km포지

 

12:30

능선 삼거리

상원사: 2.4km, 용문산정산 :0.9km

12:53

전망바위

 

12:57

용문산 정상 0.35km

 

13:15~13:35

점심식사로

 

13:50

용문산 정상

 

14:01

장군봉 갈림길

정상:110m, 장군봉 1400m, 용문사3300m

14:37

갈림길

장군봉:0.5km, 상원사3km, 백운봉 3.7km

14:51

장군봉(1065m)

 

15:37

상원사 방향표지판

흰바탕 파랑글씨(붉은 화살표)

15:42

상원사 나무표지판

상원사 0.8km

15:59

상원사  나무 이정표

장군봉:2.17km, 백운봉:5.39km,용문사:1.9km

16:01

상원사 앞 이정표

용문사:2060m, 용문산정상 : 3640m

16:38

절고개

 

17:01

용문사

 

17:15

일주문

 

17:25

주차장

 

 

 

 

 

용문산은 한강기맥 위에 솟아 있다.

한강기맥은 백두대간의 오대산 두로봉에서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양수리 까지 이어지는 160

 km의 산줄기다.

백두대간에서 분기하여 산세가 자못 웅장한 큰 산들을 아우르고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치는 두물머리

까지 진군하는 중  비슬고개에서 힘이 빠져 비실대다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 용문산과 유명산의 100

 명산을 이르키고  청계산을 거쳐 두물머리로 강하한다.

정맥길에 바금가는 강인한 포스를 자랑하는 걸출한 산 길이다.

 

 

광장을 지나 10 30분부터 용문사로 가는 진입로를 오르는데 숲 길이 너무 쾌적하고 기분이 좋다.

길은 큰 개울을 끼고 진행된다.

산이 커서 개울의 폭도 넓은 데다  엊그제 비가 와서 계곡의 수량도 풍부하다.

게다가 큰 나무의 녹음이 물결치는 길 안쪽 가장자리에 도랑을 만들고 맑은 물이 흘러내리게 하였는데

그 물소리가 정겹고 보기에도 시원하다.

 

용문사

와 크다. 은행나무

 

용문사는 신라 신덕왕 2(913) 대경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하며, 일설에는 경순왕(927~935재위)이 친히 행차하여 창사 하였다고 한다. 고려 우왕 4(1378) 지천대사가 개풍 경천사의 대장경을 옮겨 봉안하였고 조선 태조 4(1395) 조안화상이 중창하였다.
세종 29(1447) 수양대군이 모후 소헌왕후 심씨를 위하여 보전을 다시 지었고 세조 3(1457) 왕명으로 중수하였다.

성종 11(1480) 처안스님이 중수한 뒤 고종 30(1893) 봉성 대사가 중창하였으나, 순종원년(1907) 의병의 근거지로 사용되자 일본군이 불태웠다. 1909년 취운스님이 큰방을 중건한 뒤 1938년 태욱스님이 대웅전, 어실각, 노전, 칠성각, 기념각, 요사등을 중건하였으며, 1982년부터 지금까지 대웅전, 삼성각, 범종각, 지장전, 관음전, 요사채, 일주문, 다원 등을 새로 중건하고 불사리탑, 미륵불을 조성하였다.

경내에는 권근이 지은 보물 제531호 정지국사부도 및 비와 지방유형문화재 제172호 금동관음보살좌상, 천연기념물 제 30호 은행나무가 있다.

 

 

용문사 은행나무에 관하여

 

지정번호

천연기념물 제30

지정연도

1962 12 3

소재지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신점리 산 99-1

분류

은행나무

규모

면적 258. 수량 1그루, 나무높이 42m,
가슴높이 줄기둘레 14m,
가지퍼짐은 동쪽 14.1m, 서쪽 13m, 남쪽 12m, 북쪽 16.4m

 

천연기념물 제30. 면적 258. 수량 1그루. 1962 12 3일 지정. 추정수령 1100. 지정사유 노거수. 용문사 소유. 나무높이 42m, 가슴높이 줄기둘레 14m, 가지퍼짐은 동쪽 14.1m, 서쪽 13m, 남쪽 12m, 북쪽 16.4m이다.

용문사 경내에 있는 이 은행나무는 암나무이며, 줄기 아랫부분에 큰혹이 나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한국의 나무 중 가장 키가 크며, 우람하고 당당한 위엄을 풍기는 대표적인 명목이라 할 수 있다. 이 나무는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세자였던 마의태자가 나라 잃은 슬픔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는 길에 심었다고도 하고, 또 신라의 고승 의상대사(義湘大師)가 그의 지팡이를 꽂은 것이라고도 한다.

이 나무가 자라는 동안 많은 전쟁과 화재가 있었으나 이 나무만은 그 화를 면했다고 한다. 사천왕전(四天王殿)이 불탄 뒤부터는 이 나무를 천왕목(天王木)으로 삼고 있다고 한다. 이 나무에 얽힌 이야기는 많다.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는 소리를 내어 그 변고를 알렸다고 할 정도로 신령스런 나무로 인식되어 숭배의 대상이 되고 있다. 조선 세종(世宗) 때는 정삼품(正三品)보다 더 높은 당상직첩(堂上職牒)을 하사받은 명목(名木)이다.

 

 

 

본격적인 계곡에 접어들면 바위가 많은 너덜 오름길 계속된다.

계곡은 신록의 연두빛 신록에 쌓여 있고 큰 산의 깊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풍부한 수량을

자랑한다.

 

환갑잔치를 성대히 해야한다는 생각에 61번 째가 용문산이라 다소 실망스러웠는데 산을

오르는 중에  61번 째 산은 그 생각의 부질없음을 깨우쳐 주었다..

그 장대한 산세와 6월 첫날의 푸른 숲은 충분히 인상적이었다.

유명산의 평범함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그런 작은 체구에서 뿜어 나오는 엄청난 수량의

계곡을 보고 놀랐던 것처럼 우리는 정상에 오르기도 전에 100대 명산에 손색이 없는 산임에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유명산에서 바라본 용문산은 머리에 관을 쓴 채 뻘쭘하게 솟아 있었다.

(사실 나는 머리에 무언가를 얹고 있는 산이 정말 싫다.

무등산, 팔공산, 계룡산, 모악산 , 심지어 식장산 까지…)

정상부에서 거대한 안테나와 철조망에 실망하기 전에 나는 갈기를 세운 채 지칠 줄 모르고

하늘로 뛰어 오르는 거친 산릉과  각을 세우듯 높여 가는 고도에서 내려다 보는 멋진

조망에 반해 버렸다.

발 아래 펼쳐지는 무수한 산들의 파노라마와 신록의 바다에

 

그 산길이 치악산을 닮은 꼴이다.

마당바위를 지나 거친 바위 계곡을 치고 올라와 능선 위에 서고 나서도 길은 수직의 본능

으로만 솟아 오른다.

능선 위에서는 가파른 철계단이 12군데나 설치되어 있고 철계단 아래는 초록의 파도가

넘실 거린다.

용문산 주차장이 해발 50미터 이고 용문산이 1157미터 이니 우린 세시간에 110미터의 고도를

치고 올라야 한다.

우린 연신 땀방울을 닦아내며 급하게 올려치는 고도와 함께 드넓어지는 산세상에 탄성을

올려야 했다.

 

마눌과 함께 추는 100대 명산 춤은 우리 인생의 멋진 페스티벌 이었다.

자신 다음으로 소중한  나의 반쪽

그 멋진 풍경의 추억과 함께한 아름다운 추억만으로도 우리의 노후는 행복하지 않을까?

 

뜨거운 열기구를 타고 점점 하늘로 올라가는 기분이다.

호흡은 거칠고 몸은 뜨거워도 가슴은 점점 부풀어 오른다.

가는 길에 이사람 저 사람 잡고 사진을 찍어 달라고 했다.

오늘이 우리의 환갑잔치 날이라

 

예상했던 대로 정상의 조망은 나무랄 데 없이 훌륭했지만 세상의 편익을 위해 희생한 대자연의

얼굴은 황폐하고 수척했다.

훗날 인공위성이 모든 통신을 대체하는 그날에는 모두 사라지리라

언젠가 추억을 반추하며 이 자리에 다시 설 때는 단풍으로 활짝 웃는 건강한 용문산의 수려한

얼굴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린 능선을 따라 장군봉에 올랐다.

실제 장군봉은 통제구역이라 봉우리를 휘돌아 가고 장군봉 표석은 능선 안부 한 켠에 세워져

있었다.

표석에서 같이 대전에서 온 강선비와 인사를 나누고 마눌과의 기념사진을 부탁했다.

그는 혼자 산행하는 중이라 상원사 내림 길 동행이 되었는데 나이가 나와 동갑이란다.

산행을 시작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요즘은 매주 산행을 한다고 했다.

주로 솔개 산악회에서 산행을 했고 요즘은 좋은 산행코스를 쫒아 다닌 다고 한다.

 

느즈막히 산으로 돌아오는 산친구들처럼 그도 이젠 산으로 돌아오기 시작했고 산의 매력에 홀딱

빠져버린 듯 했다.

몇 년 전 지리산에서 만난 어느 나이든 시인이 그랬다.

내가 젊은 날엔 이런 멋진 산에 올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

그는 지리산에 오는 날에는 시를 한 편씩 쓴다고 했다.

아름다운 지리산이 자신의 글에 영감을 불어넣어 준다고….

어쨌든 강선비가 새로운 삶의 기쁨에 들떠 있는 것처럼 한결같이 산과 함께 했던 나의 인생길

또한 변화무쌍한 사계절의 산길만큼 아름답고 행복했던 길이 아니었을까?

 

상원사 까지 많은 시간 가파른 내림길을 내려 왔으니 이젠 한적하고 편안한 길만 남았으리라고

생각했다.

강선비와 물보충을 하고  비지도상의 비스듬한 산길을 휘돌아 용문사로 가는데 그 길이 여간

만만치 않았다.

산의 지릉이 부채 살 같이 퍼져 있어서 우린 4개의 지릉을 넘기 위해 4번을 오름 길을 다시

올라야 했고  마지막 절고개 까지 넘어서야  용문사로 회귀할 수 있었다.

개념도를 보고서 그 길의 강약과 고저를 가늠할 수 없는 상태라 거친 능선을 치고 내릴만큼

내렸으니 남은 길이 평탄하고 순조로울 거란 막연한 기대와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예상 소요 시간도 얼마나 주관적인가?

우리가 별다로 허비한 시간이 없이 7시간 걸렸으니 조금 서두른다 해도 6시간 반은 족히 걸려야

하는 거친 길이었다.

 

그래서 우린 매사에 조금은 신중하고 겸허해야 할 일이다.

잘난 체 하지 마라

아는 체 하지 마라

단정하고 속단하지 말고 마음대로 상상하지 마라

감정에 좌우되지 말아라

많은 정보를 수집하고 예측 불가한 변수를 고려하여 치밀하게 준비하고 냉철하게 판단하라.

 

어느 지릉사이 작은 계곡에서 잠시 다리쉼을 하고 등멱까지 하고 다시 길을 잡았다.

나 역시 예상했던 길이 거칠게 바뀌는 통에 힘이 부칠 지경인데 마눌은 요근래에 다시 대하는

거친 산길을 생각보다 잘 걸어갔다.

우리는 걸출한 산을 한 바퀴 휘돌아 내렸고 맛난 수육과 함께 시원한 막걸리를 벌컥벌컥

들이키며 7시간에 걸친 회갑기념 용문산 대장정을 멋지게 마무리 했던 것이다.

무릉객 만세… ! 마눌만세 …!.

 

해피 빤스데이 투유~~~~

 

 

 

 

 

 

 

 

 

 

 

 

 

 

 

 

 

 

 

 

 

 

 

 

 

 

 

 

 

 

 

 

 

 

 

 

 

 

 

 

 

 

 

 

 

 

 

 

 

 

 

 

 

 

 

 

 

 

 

 

 

 

 

 

 

 

 

 

 

 

 

 

 

 

 

 

 

 

 

 

 

 

 

 

 

 

 

 

 

 

 

 

작은 구조물 뒤에 보이는 봉우리가 용문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