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저녁으로는 벌써 가을이다.
예전 같으면 지금쯤 설악산 고지를 한번 다녀와서 가을에 흠뻑 물들었을 텐데 여전한 도시의 땡 빛
아래 머물다 보니 가을의 정취를 가슴으로 느낄 수 없다.
마눌과 함께가는 100대 명산 길이 어느덧 종반을 치닫고 있다.
나의 인생2막 커튼이 내려올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처럼 조금씩 속도를 높여가며 앞으로만 가는
세월의 위력 앞에 당할 자 아무도 없다.
억새산 화왕산은 공식적으로 100대 명산 산행 시작 전에 마눌과 한 번 올랐었다.
10월의 억새산행의 적기이긴 하겠지만 내겐 9월의 억새 밭이 훨씬 아름다워 보인다.
노인의 흰머리처럼 부시시한 갈기가 아니라 윤기 흐르는 젊은 갈기를 바람결에 자랑하듯 흔들어
대는 푸른 억새들
아직 강한 햇살 아래서 반짝이며 가을을 노래하는 억새 평원의 풍경은 장관이다.
게다가 9월엔 그 아름다움을 함께 나눌 사람들도 그리 많지 않다.
바람에 일렁이는 드넓은 억새밭이 온통 나의 사유와 낭만의 뜨락으로 만날 수 있는 9월중순 이야말로
호젓한 억새 산행의 적기라 아니할 수 없다.
우린 더 아름다운 가을 여행 길을 꿈꾸며 여든 다섯 번 째 억새밭의 신명나는 춤사위를 위해 그렇게
화왕산으로 떠났다.
마눌의 마티즈를 손수 운전하면서….
창녕 화왕산 까지는 2시간 40분쯤 걸린다.
원래 송현리를 염두에 두었던 것인데 지명을 잘 모르다 보니 옥천리 화왕산 주차장을 네비에서 선택
하는 통에 우린 옥천리 쪽 주차장으로 도착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인적이 뜸할 수가?
주차장은 텅 비어 있고 조금전에 막 도착한 몇몇 산객 만 여장을 꾸려 들머리 쪽으로 올라가고 있다.
처음에는 정말 대형 무우인 줄 알았다.
무우 생김새의 큰 박이 전시되어 있던 어느 상점 가판대를 지나서 산행들머리가 나오는데 입구에
등산 개념도 안내판이 있다.
아뿔사 옥천리에서 화왕산을 오르는 길은 가파른 계곡 길을 따라 올라야 하는데 능선에 올라서도
화왕산 까지는 봉우리를 두어개 넘어 먼거리를 이동해야 한다.
우짜 이런 황당한 일이….
7~8년은 족히되었던 기억이라 전과 다르게 한산한 주차장 풍경에도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늘 선무당이 사람 잡는 법이고 조금 안다는 풍신이 자만심을 부추기는 법이다.
예전에 댕겨왔다고 지도 한 번 훝어보지 않고 왔으니… 그것참 “쌤통.” 이라 해야되나?
화왕산 정상부 아랫쪽에 분화구 위에 조성된 억새 평원이 있기 때문에 시간상 옥천리에서 올라 넓은
화왕산 억새군락을 산책하고 되돌아 오기에는 너무 먼 거리이다.
물론 화왕산 정상에는 올랐다가 돌아갈 수는 있겠지만 가을 정취 가득한 억새 군락지에서 소요하는
시간은 거의 포기해야 할 것이다.
마눌은 송현리로 가자며 뒤도 안 돌아 보고 주차장으로 내려가고 난 그 때 도착한 부부산님과 이러
저러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결국 다시 주차장으로 회귀해서 송현리로 넘어 갔다.
옥천리에서 송현리 까지는 차로 15분 밖에 걸리지 않는다.
게다가 옥천리에서 발급받은 주차권과 입장료는 송현리 매표소에서도 유효하다.
송현리는 옥천리 보다는 사람이 다소 많기는 했지만 때는 바야흐로 가을이고 화왕산이 우리나라 대표
억새 산행지 임을 감안하면 터무니 없이 평가절하된 화왕산의 가을인 셈이다.
길은 3코스로 나뉘어져 있다.
1코스는 우측 암릉 능선 길, 2코스는 가운데 계곡길, 그리고 3코스는 좌측 능선 길
7년전의 희미한 기억으로는 당시 우리가 올랐던 코스는 2코스 계곡 길이었던 것 같다.
그 길은 계단이 많고 낙차가 커서 걷고 난 그 다음 날 마눌은 다리가 많이 아프다고 했었다.
우린 3코스로 올라가서 화산분지 둘레 산성 길을 따라 억새 밭에서 우아하게 소요하고 1코스로
하산하기로 했다.
전망대를 거쳐 억새 평원에 오르자 시원한 푸른 하늘이 뻥 뜷렸다.
사방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가을 !
도시엔 아직 머물지 않는 가을이 화왕산에는 한창이다.
바람에 일렁이는 드넓은 억새밭을 걷는다.
인적은 뜸하고 무수한 억새는 보푸러기 없는 싱싱한 갈기를 흔들어 각박한 도시의 삶에 지친 이들
에게 작은 위로와 기쁨을 보낸다.
멀리서 새벽을 열고 여기 까지 힘들게 올라와야 누릴 수 있는 행복
화왕의 멋진 가을 선물을 가슴 가득 받았다.
산정에서 내려와 한 귀퉁이 능선에 올라 풍경 좋은 그늘진 공간에서 식사를 마치고 넓은 산성 길과
중간의 억새 길을 산책했다.
배바위는 꼭 올라 보아야 할 곳이다.
화왕산 정상 맞은편에 있는 바위봉으로 화왕산 정상과 분화구의 억새 군락지와 기골이 장대한 능선의
흐름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우린 시원한 바람이 쉴새 없이 불어주는 배바위 위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했다.
느리게 느리게…
산악회와 함께 오지 않고 직접 차를 몰고 온 날 둘만의 무릴 수 있는 여유로움과 낭만 이었다.
정지된 움직임으로 온몸이 으실으실 추워질 때 쯤 우리는 1코스로 하산했다.
1코스는 멋진 능선 이었다.
마치 가야산 만물상을 닮은 듯 기기 묘묘한 바위와 암릉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가파르게 내려 간다.
사람은 사귀어 봐야 그 됨됨이를 알 수 있다고 했던가?
단지 분화구의 분지 위에 피는 진달래와 억새의 아름다움으로 회자되던 화왕산이 그런 장쾌하고
멋진 암릉 길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을 예전엔 미쳐 몰랐다.
고기는 먹어보아야 하고 길은 걸어야 제 맛을 안다.
낙차큰 암릉들은 일대에 군계일학처럼 우뚝한 그 길을 걸어내리며 화산이 터져 오르던 선사
시대의 화왕을 떠올려 본다.
용암이 흘러내린 분화구 위에 진토가 퇴적되어 무수한 세월 비바람을 지새우고 나서 그 위에 꽃이
피고 나비가 날았다.
우린 태고 속을 불어 간 한줄기 바람이었다.
우린 그저 세상의 경이로움을 잠깐 스치며 불어갈 작은 바람
그 많은 집착과 욕심이 무슨 필요 있으랴?
오랫 만의 출정인 마눌에게는 다소 힘겨운 길이었지만 우린 스릴과 풍경을 함께 즐기며 그렇게 여유롭게
출발지로 되돌아 왔다..
제철 과일처럼 입에 착착붙고 몸과 마음에 다 좋은 멋진 가을 여행이었다.
2014년 9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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