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수록 커지는 정부 신용 위험
국가부채 급증, 성장률 하락 탓
위기 재발시 기업들도 비상"
이심기 부국장 겸 B&M 에디터
한국에 또다시 위기가 닥친다면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까. 비관적 시나리오를 보태보자. 1997년 외환위기의 경고음은 한 장의 보고서에서 시작됐다. 모건스탠리가 그해 10월 “아시아에 투자한 자금을 회수하라”고 전문을 날렸고, 이를 받은 외국계 증권사의 “지금 당장 한국을 떠나라(get out of Korea, right now)”는 보고서가 트리거가 됐다.
아직 한국의 구조적 위기는 표면화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징후는 명백하고, 냄새에 민감한 관료들은 사석에서 “시간이 얼마 없다”고 얘기하고 있다. 그게 1년인지, 5년인지, 10년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오지 않을 수도 있다. 다만 지금 상황을 방치하면 언젠가 그때가 올 것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거의 모든 경제연구소와 이코노미스트의 공통된 견해다.
구조적 위기가 돌이킬 수 없는 수준에 도달한다면 트리거는 한국의 크레디트 리스크(신용위험)를 지적하는 보고서가 될 것이다. 신용등급 하향 조정을 예고하는 국제신용평가사 혹은 글로벌 투자은행(IB)의 부정적 전망이 예고편처럼 나올 가능성이 크다.
지난 1일 무디스는 삼성전자의 신용등급을 Aa2로 한 단계 상향 조정했다. 한국 정부와 같은 수준으로 올린 것이다. 시장에선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반도체 혹한기’라는 시장 상황에 비춰 이례적이라는 분석이다. 무디스의 설명은 간결했다. “반도체, 디스플레이, 모바일 및 가전 등 각 사업에서 우수한 시장 지위를 보유한 점을 반영했으며, 업황 변동성에도 우수한 재무적 완충력을 갖췄다”고 했다.
국가와 같은 신용등급 대우를 받는 기업은 손에 꼽힌다. 미국에선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가, 일본에선 도요타자동차 정도다. 삼성전자는 이제 ‘돌파할 수 없는’ 천장에 도달한 셈이다.
이제 제기되는 문제는 한국의 국가 신용도(크레디트 리스크)가 지속 가능한가라는 점이다. (더 오를 것으로 보는 전망은 단언컨대 없다) 무디스는 지난 4월 한국의 신용등급과 전망을 ‘Aa2, 안정적’으로 유지했다. 견고한 성장 전망과 고령화 등 중장기 리스크에 대한 제도적 대응 역량을 이유로 들었다. 하지만 60% 선을 위협하는 국가부채 비율, 공적연금의 적자폭 확대는 돌이킬 수 없는 추세가 돼 버렸다.
내년에는 경제성장률이 잠재성장률 아래인 1%대로 떨어지면서 미국은 물론 선진국 평균보다 낮아질 것이 확실시된다. 긍정적 요인은 빠르게 사라지는 반면 무디스가 하향 요인으로 지목한 잠재성장의 구조적 훼손, 정부 재정의 중대한 악화는 가시화하고 있다.
일단 정부의 신용 리스크가 현실화하면 피해는 수습하기 어렵다. 기업의 신용등급은 소속 국가를 뛰어넘을 수 없다. 불문율이다. 기업의 성과는 사업을 영위하는 국가에 의해 좌우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갖고 있다. ‘주권 한도(soverign ceiling)’ 원칙이다. 국가가 디폴트(대외채무 지급 불능)에 빠지면 기업의 부도 위험도 높아진다는 논리다.
외환위기는 아무리 뛰어난 한국 기업도 정부를 넘어설 수 없다는 ‘낙인’을 찍었다. 정부 신용도가 A등급에 턱걸이하던 2000년대 초반까지 삼성전자의 신용등급은 투자적격 최하위 등급에 걸쳐 있었다. 나머지 대기업과 민간 금융회사는 모조리 투자부적격 판정을 받았다. 다시 이 순간이 다가오면 기업은 한국을 떠나는 자구책을 쓸 수밖에 없다. 지금 기업들의 모습이 딱 그렇다. 그동안 한국의 신용도를 끌어올린 민간 기업의 글로벌 성장을 정부가 제약하는 모양새가 될 것이다.
지금 누적되는 위기의 징후는 미래 세대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장기적으로는 국민연금 고갈과 저출산 고령화가 맞물리는 시점이 현실화하기 훨씬 이전에 위기가 찾아올 것이다. 그때쯤이면 재정으로 돌려막기한 이전 정부에 화살을 돌릴 여유도 없을 것이다. 예고 없는 참사는 없다. 신용평가사들의 태도가 돌변할 가능성과 명분은 착착 쌓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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