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취지의 가족 여행은수포로 돌아갔다.
내가 중간에. 한 번 챙기지 못한 탓도 있지만 4월 30일 나와 전화통화를 한 이후에 미자는
정순누님 한테 우리 얘기를 한 번도 안 했고 자신이 참석 못한다는 사실에 대한 아무런
언급도 없었다.
형제모임 이틀 전에 미자에게 전화를 하니 평일인 그날은 함께하기 어렵다는 문자를 보냈
다고 했다..
미자는 내가 두 달 전에 연락을 해서 이번 방문의 취지와 상황 설명을 했을 때는 자기 아니
면 외할머니 산소 위치도 모른다고 평일에 바쁘긴 하지만 시간을 내 보겠다고 얘기 했었다.
내가 일정의 변동이 있으면 연락을 취해 일정을 조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았겠냐고
말하자 오빠가 일정 다 잡아놓고 내게 연락했고 내 일정이 안 되는걸 어떻게 하느냐는
황당한 얘기를 했다.
문제의 본질은 자신의 참여 여부가 아니라 일정 변동이나 차질에 대한 사전 연락인데
일을 곤란하게 만든 당사자가 오히려 내 탓을 먼저 하고 있는 거다.
어째든 일이 어긋나 버렸으니 정순누님 주소와 전화번호를 달라고 했다.
주소는 자기도 모른다고 전화번호만 내게 넘겨 주었다.
받은 전화번호로 몇 번의 전화를 해도 정순 누님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미자에게 전화를 걸어 낯선 전화라 안 받는거 같으니 네가 전화가 되면
내용을 누님께 설명하고 내 전화를 좀 받아 주십사 예기해달라고 했다.
그리고 저녁 때 쯤 미자 전화가 왔다ㆍ
요점은 누님이 바빠서 못 만난다고ᆢ
가을에 한가할 때나 오라고 한다고...
어째든 나는 정순누님과 직접 통화하여 취지 설명할 생각으로 밤 9시가 넘어 전화를
했는데 받지 않으신다.
5분 단위로 두 통을 전화를 더 걸었는데 모두 받지 않았다.
그 다음날에는 테리모한테도 연락을 취해보라고 했는데 마찬가지로 전화를 받지 않았다.
명백한 거부의 의사표현 이었다
전화하면서도 여러 생각이 교차했다.
궁색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으신 건지…
정순 누님입장에서는 사전 연락이 없었기에 갑작스럽고 일방적인 집단 방문이 부담
스러웠을 수도 있다.
그래도 웬만하면 전화를 받고 서로간의 얘기를 나누어야 맞지 않을까?
미자의 언행도 도통 이해가 안되었다.
참석 못한다고 보냈다는 메세지를 확인하니 전화하기 전 메시지 말고는 한 통도 들어
오지 않았고 전화도 나와 일정을 상의하며 통화한 한 통이 전부였다.
참으로 천역덕스러운 거짓말과 무성의의 극치였다.
아이들도 잘 키워 내고 대추처럼 야무지고 정도 많다고 생각한 외사촌 여동생이 이번에
보여준 언행은 참으로 실망스러웠다 .
사람은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더니 …..
그리고 모임 당일 형제들을 만나러 이동하는 중에 태리모가 전화를 했다.
정순 누님과 통화가 되었는데 대 놓고 한 서린 얘기를 매몰차게 쏟아 냈다고 했다.
대략이 요지는 이러했다.
“그 때의 좋은. 기억이란 하나도 없다.
그렇게 도움을 주고 싶었으면 돌아 가시기 전에 내가 어려울 때 도움을 주지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냐 ?
다 필요 없고 기억하고 싶지도 않고 만나고 싶지도 않다.. "
정순 누님의 얘기로 짐작하건데 어머니 살아 생전에도 서운함과 좋지 않은 감정이
많이 쌓여 있었던 것 같다.
내가 들었던 어머니의 말씀과 내게 간직한 기억의 편린들을 떠올리자면 이번 방문에
대한 정순누님의 생각과 반응은 너무 뜻밖이었다.
정순 누님 혼사나 아이들 혼사에 어머님이 다녀 오셨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어머니
마음의 빚이란 게 금전적 문제를 떠나 다친 정순누님 마음까지 포함하는 것인지도
가늠하기 어렵다.
어머님 평소 성격으로 볼 때 저런 한 서린 마음을 풀어 주시지 않고 방치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정순 누님의 한은 오뉴월의 폭염을 잠재울 만큼 매섭고 차가웠다.
어머니의 유지를 받들고 옛날의 고마운 추억을 돌아 보자는 좋은 의도에서 출발한
형제들의 낭만 여행 환상은 여지없이 깨어졌다.
우리가 서로의 일정을 조율하는 것 말고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어머니
고향 방문은 마치 다른 세상의 사람들을 만나는 것처럼 그렇게 어려운 일이었고 무수한
세월에도 누그러지거나 씻겨 가지 못한 상처와 한을 확인하고 또 덧나게 한 뼈아픈 시간
이었다.
미자의 불참과 함께 이런 사실이 미리 확인되고 일정 조정이 되어야 했던 아쉬운 여행길
이었지만 어쨋든 정순 누님의 한은 뿌리깊고 어머니는 말씀이 없으니 이 일은 이쯤에서
덮는 편이 좋을 듯 하다.
머리가 멍해지는 비상식적고 미스터리한 사건은 그렇게 씁쓸한 뒷 맛을 남기며 끝이 났다..
예천 여행 !
야외 비박으로 진행한다고 늦추어 6월초에 잡았고 미자가 합류하도록 숙소를 하나
더 추가 했는데 궁극적인 우리의 계획과 의도는 모두 어긋나 버린 가족여행 이었다.
날이 겁나게 덥다.
바야흐로 거대한 불의 기운이 온 지구를 뒤 덮고 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은 더 깊어지는 양상이고 중동은 다시 세계의 화약고로
재부상하고 있다.
유럽과 손잡고 연일 러시아와 중국 때리기에 혈안이 된 미국으로 인해 푸틴과 시진핑의
가슴 또한 부글부글 끓고 있는 중이다..
아이슬란드의 땅은 여기저기 뚜껑이 열리면서 지표 아래 잠자던 뜨거운 용암이 솟구치고
인도에서 50도를 넘나든 폭염은 그렇지 않아도 세상에 시름시름 말라가고 있는 수 많은
늙은이들의 목숨을 끊어내고 중국 북부 또한 유사이래 40도가 넘는 폭염에 허덕이고 있다.
대한민국 역시 6월의 날씨가 30도를 넘마들며 절절 끓고 있는 중이다.
6월 중순이 이정도면 7월과 8월은 어떨 것인가?
기후도 그렇고 다시 이기적인 제국주의로 회귀하는 세상의 기류 역시 지구촌에 도래할
뜨거운 불의 시대를 예고하고 있다.
희수부가 대전에서 자지않고 인천에서 내려 오는 바람에 대전에 9시 30분 도착이라
태형네와 용궁 박달식당에서 11시 20분에 만나기로 일정을 조정 했다.
불볕더위의 위력은 대단하다.
제일 유명한 용궁순대 식당이긴 한데 요리가 특색 있고 정갈하긴 해도 내 입에는 대전의
순대보다 썩 맛있지는 않았다.
어머니 댁에서 라면 하나 끓여 먹고 나온 터라 모듬순대 한 접시와 막걸리 한 통을 들이
키고 나니 배가 방실해 진다.
마트에서 고기와 야채 등 저녁 삼겹살 파티 준비물을 사가지고 삼강주막으로 갔다.
700리 낙동강 길에 마지막 남아 있는 주막으로 예천의 관광거점 이다.
삼강주막
주말에는 여러가지 이벤트가 열린다고 하는데 폭염의 금요일은 방문객이 별로 없는
한적한 풍경이다.
2006년 까지 남아 있다가 사라지 주막인데 지자체에서 문화예술촌으로 만들며 주막을
부활시켰다.
걸어서 삼강문화 전시관과 생태 공원들 까지 돌아 볼 수 있는 낭만산책 길이지만 폭염의
기세에 동생들에게 걷자고 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동생들은 정자에서 쉬고 나는 금천과 내성천 그리고 섬진강이 합류하는 삼강의 풍경을
둘러 보았다.
몇 일 비소식이 없었는데도 넓은 삼강에는 시뻘건 황토물이 도도히 흘러 가고 있었다.
거친 강물이 흘러 가듯 내 삶도 너울너울 잘 흘러 왔다.
인생은 늘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평생 흙에 묻혀 농부의 삶을 살아오신 할아버지는 오장육부가 다 썩어내리는 고통을
혼자 삭히시다가 세상을 떠났고 늘 감기한 번 안 걸리는 건강을 자랑해 마지 않으셨던
아버지는 80을 넘기지도 못한 젊은 나이에 세상의 기억들을 바람에 훨훨 날려 보내시고
낯선 곳을 떠돌다 생을 마감하셨다.
그리고 한 평생 마음 고생하시며 자식들을 위해 어려운 삶을 살아오신 어머니는 몸이
병들고 나서야 아들,딸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시다 엊그제 아쉬움을 간직한 채 먼 길을
떠나셨다.
인생은 늘 그 타령이다.
건강이 펄펄 살아 숨쉴 때는 세상을 떠돌 자유와 그것을 누릴 돈이 부족하고
오매불망 갈망하던 자유와 돈이 수중에 들어오면 더 이상 가슴은 울지 않고 다리가
먼저 후들 거린다.
어머니의 그리움을 따라 형제들이 함께 나선 그 길 마저 얄궃게 엉겨버린 운명의
실타래로 이렇게 막혀 버렸다.
베일에 쌓인 지난 고단한 삶의 애환은 그렇게 누군가의 아쉬움이고 또 누군가의 기억
하기 싫은 고통과 아픔의 시간 이었다.
그래도 우린 다시 살아가고 삼강은 계속 흘러 가리라
그래도 항상 자신감에 넘치던 삼촌을 초라한 모습으로 구천이 내다 보이는 강둑에
서게 한 건 단지 10년도 안된 세월이었다.
띠띠 동갑의 어머니 그리고 띠동갑의 삼촌.
머지 않아 삼촌과 종태형이 먼 길 떠나시고 나면 어느 날 홀연히 내 차례가 다가 올
것이다.
불꽃에 날려간 그 가까운 죽음들과 죽음을 향해 가는 세상의 늙은 삶들은 한결 같은
목소리로 내 남은 삶이 어때야 하는 지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씩씩하게 잘 살아 왔지만 오늘과 그 날 사이에는 또 얼마나 큰 상심과 상실의 강이
내 앞을 막아 설 것인가?
내가 사랑하는 산을 내려와야 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향한 내 발걸음을 버려야 하고
친구들도 하나 둘 떠나 보내고 세상 살이 재미도 하나 둘 모두 놓아버릴 것이다.
삶에 신물이 나고 살아 있음이 고통이 되어야
비로소 구천으로 떠나는 작은 조각배 하나 얻어 탈 수 있을 것이다.
이젠 다시 삼강에 돌아 올 수 없을 지도 모른다..
고향과 연결된 할어버지 할머니 묘 까지 파헤쳐 뜨거운 불길에 훨훨 다 날려 보냈으니……
할아버지와 할머니에 대한 죄스러움과 짠한 마음도 다 허망하고 부질없는 삶의 회환
일 뿐이다...
나는 세상에 허덕이며 할아버지 할머니 묘소를 살뜰하게 보살펴 드리지 못했고
부모님을 화장하여 절에 모신 마당에 그대로 남겨둔들 정성으로 돌봐 드린다는 건
약속하기 어려운 일일 뿐이다.
예천을 배회하는 오늘이 지나면 어머니 슬픔이 49제를 지나면서 묽어져 간 것처럼
난 다시 세상에 휩쓸려 생각보다 더 빨리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잊게 될 것이다.
죽음과 삶이 갈리는 순간 연결된 모든 인연은 끊어지고 산 자의 마음 속에서 그 죽음은
그리움으로 깃들 뿐이다.
죽음은 단지 자신의 세상을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교훈이고 추모란 거창한 의식과
절차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남은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생전의 은혜와 그리움을
떠올리며 더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낼 때 비로소 의미와 가치를 갖게 될 뿐이다.
시공을 초월할 수 있는 게 사랑 말고 또 무엇이 있으랴?
팥빙수와 커피 한 잔 씩을 마시고 폭염 속의 회룡포를 걸을 엄두가 나지 않아 가는 길에
있는 선몽대를 돌아보고 휴양림으로 일찍 넘어 가기로 했다..
선몽대는 450년 역사를 가진 유서 깊은 정자로 퇴계 이황의 종손 우암 이열도의 부친이
창건했 다고 전해지는 누각이다.
넓게 펼쳐진 내성천 백사장과 울창한 송림 숲이 조화를 이루는 한가로운 풍경이다.
예천 8경에 속하지만 예천에서 거리가 제법 떨어져 있어 예전에 돌아 보지 못한 곳이다,
방구깨나 뀌는 양반들이 문장과 풍류를 즐겼을 만한 빼어난 풍광이고 아름다운 강변이
잘 내려다 보이는 산자락 바위 위 한 켠에 정자가 세워져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진 운명이었다.
누군가에게 인생은 놀이터 였고 누군가에게는 전쟁터 였다.
인생이 슬픔과 큰 기쁨은 운명의 이름으로 이미 자기 몫이 정해져 있고 우린 자신의
노력으로 삶의 소소한 기쁨을 만들어 가고 삶과 운명이 주는 고통을 자신의 역량으로
극복해 간다.
빈천한 삶에도 희망과 기쁨이 있었고 권력의 단 맛에 빠져 있다가 역적의 모함으로
삼족이 멸문지화를 당하고 그 식솔들은 기생이나 노비로 전락하는 예측할 수 없는
인생의 쓴 맛도 있었다.
영고성쇠와 희로애락을 싣고 굴러가는 인생의 수레바퀴는 오늘도 멈추지 않는다.
아무리 노력해도 늘 허덕이는 힘든 삶이 있고 아무런 노력을 안해도 떵떵거리며
살아가는 삶도 있다.
그 삶의 지독한 불평등을 무로 수렴하는 게 늙음과 죽음이었다.
늙어가는 자여 !
그대가 그 길 위에 서 있음이
그대가 만났던 이 생애 아픔과 슬픔이 모두 너의 탓은 아니다..
하지만 이젠 더 이상 뒷걸음치지 말고 네게 남은 소중한 세상을 마음껏 누려라 !
떠나야 할 시간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그리고 죽음이 든든한 너의 뒷배를 보아 주고 있다.
노쇠와 죽음은 네가 걸어 놓은 비탄과 상심의 불빛을 등대 삼고 고통의 신음과
좌절의 통곡소리로 길을 찾는 법이다....
꿈틀거리지 않고 큰 소리 내어 웃지 않으면 노쇠와 죽음은 언제라도 너의 담장을 뛰어
넘어 그대를 영원한 평화와 안식의 땅으로 인도할 것이다.
개똥 밭에 굴러도 저승보다 이승이 낫다 했거늘 어짜피 갈 길 서두를 이유가 무에 있으랴?
세상과 마지막 이별이 가장 넘기 힘든 삶의 고개라 해도 사후의 복락은 이미 정해졌으니
저승사자기 데리러 올 때까지는 즐겁고 재미나게 살 일이다.
선몽대에서는 영화촬영이 있었다.
내년에 공개될 사극 "원경황후"로 태종 이방원을 왕으로 만드는데 큰 역할을 정실부인
원경황후의 일생을 조명한 드라마라고 한다.
주인공은 없고 많은 엑시트라 들을 동원해서 모래사장에서 씨를 하는 장면을 찍는
씬이었다.
진열해 놓은 소품들 사진을 좀 찍으려니 못 찍게 하고 촬영지 가까이 있으면 소음이 들리고
복장이 노출되니 좀 멀찍히 떨어져 있으라 한다.
백사장이 자기들 것도 아닌데 관광객들에게 불편을 주면 막걸리 한 잔이라도 따라 주어야
마땅한 거 아닌가?
요즘은 광대들의 세상이고 충신도 역적도 따로 없는 이기는 넘이 무조건 장 땡인 세상이다.
국민의 역적이 되어도 멸문지화는 커녕 떵떵거리고 잘 살아가고 한 밑천 챙기고 남한 산성
갔다와도 남은 세월 잘 먹고 잘 살 수 있으니 양심에 털이 숭숭 난 넘들에게는 참으로 복된
세상이다.
뜨거운 햇살이 차단되고 시원한 바람이 솔 숲을 불어가는 풍치 좋은 해변에서 보낸
여유롭고 한가로운 시간 이었다.
선몽대 한 켠에도 등산로가 있었다.
올라가고 싶기는 한데 더운 날씨에 휴양림 숲 길을 트레킹 하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아서
휴양림으로 이동하기로 하고 연우부가 합류해서 잠시 시간을 보내다가 휴양림으로
출발했다.
5시쯤 휴양림에 도착하여 야외 바베큐 파티장을 설치하고 잠시 휴얄림을 산책 했는데
햇빛에 노출된 임도의 숲 길이 너무 뜨거워서 내일 아침 시원할 때 산책하기로 하고
되돌아 왔다.
6시쯤 술과 함께 고기를 구워 먹기 시작했는데 배가 채 꺼지지 않았고 무더위 탓인지
여느 때 처럼 입맛이 펄펄 살아나지 않았다.
식사 후 12시30분 까지 시간을 정하고 피터지는 민속놀이.
다들 실력 평준화 탓인지 날씨 탓인지 큰 판이 많이 터지지 않는 국지전의 소강 상태의
전투 였다.
우리는 정해진 시간에 일정을 마무리 하고 각자 나누어 숙소로 들어 갔다.
미자는 오지 않았고 태리네 마저 아침에 가느니 밤에 먼저 간다고 올라가는 바람에 오늘도
숙소는 너무 널널 했다.
여행 2일차
학가산 정상
석송령
금당실 마을 – 십승지
초간정
용문사
새벽 6시 분 경에 태형모와 둘이 임도를 걸어 올라 임도 정상에서 산길을 타고 학가산
정상까지 올랐다.
임도는 꽤 멀었고 산길을 아주 가팔랐다.
그래도 시원한 아침바람을 맞으면서 오르는 산길은 상쾌 했고 황금 빛 아침 햇살에 밫나는
초록의 신록으로 뒤덮힌 산능성이들은 싱그러웠다.
내려오니 동생들이 텐트를 철거하고 김치 부대찌게를 맛있게 끓여 놓았다.
3시간여 걸린 꽤 빡센 아침 운동이었다.
석송령
아침 식사를 하고 석송령으로 이동했다.
아름들이 노송으로 전국에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600년 수령의 소나무로 둘레가 4.2m
그늘 면적이 324평이나 된다.
석송령이라는 자기이름으로 1191평 토지를 소유하고 종합토지세를 납부하고 또 재산의
수익금으로 동네 학생들에게 장학금도 지급하는 전국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부자 소나무
이다...
원래는 철책 밖에서 구경하게 되어 있는데 특별 개방 기간이라 우리는 직접 나무아래
까지 들어가 시주를 하고 기념사진도 찍었다.
다음으로 방문한 곳이 금당실 마을이었다.
예천에서도 사대부들이 많이 모여살던 마을답게 고택이 많은 곳으로 정말인지는 모르
겠지만 태조 이성계가 도읍으로 까지 삼으려 했던 곳이었다고 한다.
어쨌든 전국 명산 아래 많이 몰려 있는 십승지의 하나에 속하는 풍수지리의 길지가 바로
이 금당실 마을 이었다..
이 부자 마을은 앞을 흐르는 하천인 금곡천에서 사금이 생산되었다고 하여 금당곡 혹은
금곡이라 고도 불리웠다는데 금당실이라는 지명은 용처럼 꿈틀거리는 소백산맥의 형상과
연못과 같은 분지의 형상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정감록에 기록된 10곳의 은신처 십승지(十勝地)
십승지(十勝地)란, 정감록에서 기록된 현세의 이상향을 지칭하는 용어로 세상살이
근심없이 안심 하고 살 수 있는 조선 8도의 살기 좋은 10곳의 땅을 지칭한다.
원래 승지(勝地)란 경치가 좋은 곳, 또는 지형이 뛰어난 곳을 말하는데 십승지란 산으로
둘러 쌓인 천혜의 요지에 위치하여 외적의 침입이나 전쟁을 겪을 위험이 없고 천재지변
이나 질병이 창궐할 염려가 없는 안전한 땅이다..
게다가 물산이 풍부하여 굶주릴 우려가 없이 자손을 번성시키며 편안한 삶을 살 수 있는
풍수지리상의 살기 좋은 땅을 의미한다.
십승지는 태백산, 소백산, 덕유산, 지리산 등 명산 아래 자리 잡고 있으며 산이 높고 험하여
외부와의 교류가 차단되어 있는 오지 이지만 또한 도회지와 쉽게 연결될 수 있는 곳이다.
십승지 탐방은 뜻밖의 수확이었다.
글을 쓰면서 자료를 찾다가 우연히 알아 낸 것이다.
퇴직하고 나서 시간이 많이 남을 때 십승지를 품고 있는 우복동천이라 이름 붙은 걸출한
환형 산릉을 3회에 걸쳐 나누어 종주 하면서 속리산권의 십승지를 둘러 본 적이 있다.
그 때도 현실의 이상적인 복락원인 십승지의 아늑한 지세에 고개를 끄덕였었다.
내 고향 가까이에도 십승지가 있었다.
할아버지는 그 십승지 가까이에 있는 동로면에서 사시다가 율현리 교동에 정착하신 것이다.
이로써 내가 가보지 않은 십승지는 영월의 십승지 한 곳이 남은 셈이다.
그래서 돌아보는 내내 마을이 풍요롭고 넉넉해 보이고 마음이 편안 했던 모양이다.
풍수상 금당실 마을은 연꽃이 떠 있는 형상의 연화부수형 지형이라고 한다.
북쪽으로 매봉 서쪽으로 국사봉 동쪽의 옥녀봉 남쪽의백마산이 호휘하는 분지형 지형
으로 매봉이 조산(組山)이 되고 뒤로 길게 뻗은 소백산 줄기가 내룡을 상징하고 그
분지가 연못을 상징하여 금당실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정감록에 기록된 조선의 십승지
초간정
예전에 갔을 때 정말 남다른 풍류를 느꼈던 잘 지어진 정자다.
한국 최초의 백과사전 “대동운부군옥”을 저술한 조선 중기의 학자 초간 권문해가
1582년에 지은 정자로 그의 호를 따라 이름 붙였다.
현재의 누대는 입짐왜란과 병자호란 때 불탔던 것을 1870년 후손들이 개축한 것
이라고 한다.
용문면 원류마을 앞 계류의암반 위에 절묘하게 지어진 정자인데 주변의 산수와 잘
조화된 한 폭의 산수화 같은 풍경이었다.
오늘 같은 폭염에 천혜의 힐링 포인트로 그 진가가 유감없이 드러났다.
2개의 온돌방까지 붙어 있는 정자인데 조선의 양반들은 이곳 마루에 주안상을 펼치고
기생을 끼고 놀았을 것이다..
ㅎㅎ 권문해가 이곳에서 백과사전을 저술했으면 억울해 할 말이지만 양반이면 이
초간정의 절경을 두고 어디서 풍류를 논할 것인가?
못질 하나 없이 짜맞추어 지어진 정자 임에도 오랜 세월에도 변함없이 원형이 보존
되고 세월에 풍파가 탈색한 모습은 세월에 잘 늙어간 도인의 풍모처럼 여유로웠다.
정자는 바람길이었다.
30도를 넘나드는 무더워 임에도 가슴 속까지 시원하게 파고드는 바람은 시종 정자
부드럽게 불어 내리며 정자 마루를 떠나지 않았다.
유독 바람이 그렇게 시원한 것은 앞 개천의 물길이 바람과 공명하여 공기를 차갑게
식혀 준 탓인지도 모르겠다.
우린 바람 길을 떠나기 아쉬워 오랫동안 툇마루에 누워 힐링과 휴식의 시긴을 보내다
속절 없이 흐르는 시간 때문에 아쉬운 이별을 고하고 말았던 것이다.
용문사
세 군데의 유적지를 돌아 보느라 시간은 벌써 12시 40분을 넘어섰다.
그렇다고 예천의 대표 관광지 용문사를 돌아 보지 않고 일정을 마감할 수는 없었다.
우리는 초간정에서 3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용문사를 마저 돌아보고 식사를
기로 했다.
용문사는 직지사의 말사로 신라 경문왕 10년 (870년) 두운선사가 창건한 절이다.
태조 왕건이 이곳에 들렀다가 운무가 자욱하여 주변이 분간되지 않아 난감해 했는데
그 순간 홀연히 청룡 두마리가 나타나 길을 안내 했다고 해서 용문사라 이름 붙여
졌다고 전해 온다.,.
대장전과 윤장대의 국보 2점을 보유하고 9점의 보물을 보유하고 있는 대찰이다.
국보가 보관된 대장전은 수리 중이라 아쉽게도 천막에 가려있고 내부에 안치된 윤장대
역시 들어가 볼 수가 없었다.
국보 및 보물 목록
국보
대장전과 윤장대
보물
감역교지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
목조아미타여래좌상,
팔상탱
괘불탱.
예전에 한석규가 찍은 광고 CF가 있었다.
“또 다른 세상을 만날 때는 잠시 꺼두셔도 좋습니다.”라는 멘트와 함께 한석규와 스님이
대숲을 거니는 SK 텔레콤 광고가 훗날 예천 용문사 주지가 된 정안 스님이 찍은 것
이라고 한다.
대웅전 앞에 서니 큰 절의 풍모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이고 앞이 훤하게 트인 산세가 용문사가
예사롭지 않은 풍수의 길지임을 일깨워 준다.
우린 대웅전에서 부처님께 삼배를 올리고 천불상을 모신 법당까지 돌아보고 귀로에 올랐다.
4군데 명승지를 돌아 보다보니 시간이 훌쩍 두 시가 넘어섰다.
가까운 중식당에 들러 시원한 콩국수 한 그릇과 탕수육 한 접시를 먹고 조금은 아쉬운
형제들과의 고향 여행길을 그렇게 마무리 했다.
2024텬 6월 14일 ~15일
리소방 사진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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