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번 작심하고 떠났던 계룡 비등에서 분루를 삼키고 돌아섰다.
아윌 비백!
회사에서 벌크빈용 노끈을 챙기고 무르익을 때를 기다리던 차 생각보다 빨리 기회가
다가 왔다.
6월 21일 토요일은 조사장과 도락산에 갔다가 술 한잔을 치기로 한 날이다.
전국 장마비가 예보된 상태에서 바위산은 위험하고 혹시 조사장이 우비입고 가능하다면
용운동에서 계족산 종주 4시간 30분 강행할 생각도 있었지만 안전지킴이 조사장의 난색으
로 출정을 취소했다.
ㅎㅎ 재작년 4월에는 조사장과 수통골 도덕봉 – 산장산 우중 종주를 성사시켰는데 그 때
는 그나마 비가 오지 않다가 10시쯤부터 오는 것으로 예보가 되어 있었다.
상태를 봐 가며 비가 심하면 중간에 하산하는 단서를 단 산행이었는데 10시 30분이 넘어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고 약한 빗줄기에 조사장은 고를 외쳤다.
그리고 중간 탈출로를 지난 상테에서 빗줄기가 굵어 졌다.
조사장은 FM대로 내내 우비를 입고 산행했고 나는 우산을 쓰고 낭만적인 산행을 이어
갔다.
그렇지 않아도 땀이 많은 조사장이 후덥지근한 날에 계속 우비를 입고 산행한다는 건 완전
군장을 짊어진 우중 산악 구보격이니 아무리 체급이 낮은 산이라 해도 만만하지 않을 수 밖에…
땀에 흠뻑 젖으면서 비에는 젖으려하지 않는 조사장의 고집 탓이었다.
그 옛날 우리가 쌍코피 터진 곳도 내노라하는 큰 산이 아니라 증평의 동네산인 좌구산이
아니 었던가?
원래 서울 조폭이 동네 깡패들에게 줘터지는 거다.
재작년 여름 전날의 과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교통사고를 위로하기 위해 함께 동행한 조사장
이 6시간 만에 백기투항하며 마지막 능선을 포기했던 것도 동네 산인 식장산이었다.
사람들은 동네산 식장산에 고수들도 힘들어할 만한 7시간 산행코스가 있다는 걸 알기나 할까?
우린 맛있는 파전과 막걸리를 나누고 헤어졌지만 아마도 이 산행이 조사장에게 우중산행의
비호감을 심어주었을 둣 싶다.
비오는 두타 청옥 까지 같이한 적이 있지만 산행하다가 비를 맞는 건 몰라도 비오는 가운데
출정은 여전히 기피하는 조사장이라 이미 예견된 상황 이었다.
다행이 일요일은 날씨가 맑은 것으로 예보되어 나 역시 토요일에 무리할 이유가 없었고
비 온 후의 맑은 계룡의 아침은 황적비등 탐험의 호기로 다가 온 것이다.
점심 때 내려올 요량으로 간편식 아침을 챙겨서 출발했는데 들머리 인근에 주차할 곳이 한
곳도 없다.
할 수 없이 팬션들 앞마당을 기웃거리다가 주차 공간이 하나 비어 있는 곳에 파킹을 하고
산행을 시작하다.
6시 5분
어제 큰 비가 있었다.
등로는 젖어 있었지만 본격적인 바위능선을 탈 때 쯤에는 바람과 햇빛이 바위의 물기를 말려
줄 것이다.
비온 다음 날이 늘 그렇듯이 싱그러운 계룡의 아침이다.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되어도 어젯밤 비를 머금고 있는 숲길 등로는 상당 시간 여전히 축축
하고 시원할 것이다.
조금은 더 벌어진 일교차 그리고 본격적인 폭염으로 가기 전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는 한여름
틈새 산행 !
내가 좋아하는 여름 산행 스타일이고 그것이 멀리 떠나지 못하는 일말의 아쉬움을 상쇄해 준다.
거칠게 일어난 등로에서 풀과 나무 잎이 머금은 빗물이 살갗에 닿는 차가운 촉감이 좋다.
산안개와 이슬 그리고 비의 낭만을 사랑하게 된 건 백두대간 덕분이었다.
흠뻑 젖는 다는 건 꿉꿉함과 청승이 아니라 후련함과 낭만 이었다.
산안개가 피어나는 몽환의 숲 길을 파죽지세로 진군하여 무릉쉼터 도착 !
8시 가까운 시간에 아침 식사를 하다.
회군의 절벽에서 로프를 걸었는데 많이 감아 온 로프가 절벽 반도 내려가지 않는다.
생각보다 거대한 바위 슬랩이다.
그래도 위험 구간은 잘 내려 왔고 후반부 바위는 맨 손으로 내려갈 만 해서 큰 무리 없이 하강
하였다.
찬찬히 바위를 살펴 보니 역방향으로 산행하면 조심하면서 맨 손으로 돌부리를 잡고 올라 갈만
할 것 같다.
국공들이 어짜피 또 끊어 놓을 테니 가을 쯤 날씨 선선한 날에 도전 한 번 해보아야 겠다.
햇빛은 점점 강렬해지고 산허리를 감돌던 안개는 시나브로 사라졌다.
군데 군데 그늘 속의 바위들은 여전히 물기를 머금고 있어서 미끄러웠다.
쌀개봉으로 향하는 길은 점점 거칠어졌지만 익숙한 등로는 충분히 가늠이 되고 또 작심하고
나온 터라 그리 힘들지는 않았다.
고마울 따름이다.
난 아직 이런 거친 길을 걷고 싶고 내 체력이 능히 감당해 줄 수 있다는 사실이…
집을 나서서 고속도로로 30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큰 산이 있다.
한국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할 영험한 산
그 곳에 잡인의 범접을 허락하지 않는 고요와 묵상으로 난 길이 있다.
나의 별장이 있고 거칠고 아름다운 정원이 있다.
나는 그 곳에서 단조로운 일상에서 20% 부족한 삶의 모험과 스릴을 느끼고 혼자만의
자유와 황홀한 고독을 누린다.
9시 57분 쌀개봉 도착 !
내 스스로가 대견히지는 곳이다.
능선은 저 아래에서 용트림하며 기운차게 파도쳐 오른다.
쌀개봉에서는 작은 성취감에 젖어도 좋다..
저 유장하게 파도치는 능선을 무릉 할배가 네 발로 걸어 올라 마침내 정점에 도달한 것이다.’
여기까지가 거친 호흡과 장딴지 팽팽한 긴장을 통행세로 내고 4시간 걸려 도달한 곳이다.
대한민국 내노라하는 산들도 예사롭지 않는 낙차와 지속적인 오름길로 4시간 걸려야
정상에 설 수 있는 산길은 그리 많지 않다.
여기에 오면 그래서 마음이 편해진다.
절벽 난 코스가 서너 곳은 더 남아 있지만 내림길이고 오래지 않아 정규코스에 합류할 것이다..
이후 산길은 50여분 바위능선의 절벽의 난코스를 휘돌아 관음봉 삼거리로 떨어진다.
그 곳에서는 일반 산행객들을 만나고 안전시설이 잘 보강된 계룡의 정규등산로에 편입된다.
야생의 위험하고 거친 산길은 익숙한 안정감을 동반한 평화의 길로 뒤바뀐다.
그렇게 야생의 길에서 문명의 길로 내려섰는데 관음봉 삼거리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없다.
'"어라 ! 이게 아닌데.."
하산로 입구에 난데없는 통행금지 프랑카드가 붙어 있다.
낙석 붕괴로 인한 등산로 폐쇄 !
관음봉 찍고 돌아와 하산 하렸더니 생각지도 않은 길이 막혀 버렸다.
“알탕은 물 건너 간 건가?”
컨디션은 아직 괜찮으니 자연성릉과 삼불봉 까지 아우르고 천정골로 하산하는 것도 크게
문제될 게 없다.
등산 시간은 1시간 30분 가량 더 늘어 났다.
자연성릉을 따라 1.5 km 바위능선을 주유하며 삼불봉 찍고 남매탑으로 내려서서 그 곳에서
큰배재 거쳐 천정골로 3km는 더 걸어 내려야 한다.
그 옛날 자연 그대로의 자연성를 풍광은 늘 계룡의 백미였다.
그다지 위험하지도 않았다.
데크는 그렇다 쳐도 굳이 쇠파이프를 박을 일이 아니었다.
내가 힘들게 걸어 올라왔던 황적능선을 우측으로 바라보며 이젠 제대로 뜨거워진 대기를
호흡으로 느끼면서 그렇게 자연성릉을 걸어 내렸다.
또 하나의 무릉쉼터 .
삼불봉 삼거리 나무 아래 쉽터에서 반쯤 비스듬히 누워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휴식하다가
삼불봉에 오르고 다시 익숙한 길을 따라 큰배재로 넘어 갔다.
내려가면 점심식사를 하고 사우나를 가기에는 아무래도 시간이 맞지 않는다.
시간이 없으니 알탕을 해야하는 데 천정골은 계곡이 작아 수량이 많지 않고 등로에서
계곡이 휜히 내려다 보여 할 만한 곳이 있을지 모르겠다.
기우였다.
어젯밤에 꽤 큰비가 있어서 등산로는 아얘 작은 개울로 변해 있었다.
사방에서 물이 계곡으로 흘러 들어 물이 흘러가는 소리는 우렁차기 짝이 없다.
궁하면 통한다고 하산 1.5 km 정도를 남겨둔 곳에서 길에서 보이지 않는 계곡소를 찾아
냈는데 이건 숫제 독탕이 아닌 대중탕 크기이다.
여름 계룡 천정골의 재발견 !
신천지가 눈 앞에 펼쳐진 것이다.
이쯤 되면 갈수기에도 이용가능한 무릉 전용탕이다.
길에서도 완전히 은폐 엄폐가 되어 나는 마치 지리산 계곡인 것처럼 마음 놓고 알탕을 즐기고
옷까지 짜 입었다.
제대로된 영혼의 카타르시스 까지 맛보고 하산하는 길의 뿌듯함 !
내 집 가까이에서 이렇게 내 영혼의 콧노래를 들을 수 있는 무릉계가 있으니 그 아니 좋은가?
식당가로 내려서니 오후 1시 30분
출발한지 7시간 25분 만이었다.
그 곳에서 차 있는 곳 까지는 30분을 더 걸어서 차량을 회수했다.
팬션에 도착하니 그 많던 차는 모두 빠졌고 내 차만 덩그라니 마당에 있었는데 다행히 주인장은
만나지 않아서 별다른 실갱이 없이 차를 회수하였고 현충원 방일 해장국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안전하게 귀가하다.
성공적인 마무리였지만 체력소모가 상당했다.
젊은 날의 거친 비등 완전 종주에서 3,5km 남겨 놓은 하산이었지만 이젠 체력적으로 무리가
가는 산행임에는 틀림이 없다.
다음부터 관음봉으로 올라 역방향 종주를 하면 체력소모도 적고 여유롭게 해도 6시간 안에
충분히 마무리 될 것이니 그 정도면 큰 부담이 없을 듯하다..
예비 로프를 가지고 가겠지만 설령 로프가 없다 해도 없어도 충분히 가능할 수 있어서 역방향
종주가 더 나은 대안이다.
역시 계룡산이다.!
감사합니다. 계룡 산신령님 !
폭주기관차의 허리춤을 붙잡아 휴식할 시간을 주신 계룡 산신령님 이시고 산에 들 때마
다 후련한 가슴과 고요와 내면의 평화를 누리게 하셨으니 앞으로도 10년은 더 발길을
허락하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2025년 6월 22일 일요일 나홀로 황적 능선 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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