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락산을 처음만난 건 51세 되던 해 2009년 마눌과 백대명산 39산 여행길이었다 ㆍ
허리를 다친 후 2년 4개월 정도 지난 시점이었다 ㆍ
16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별루 기억에 남아 있는게 없다ㆍ
소나무와 암릉의 풍경이 조화로웠던 어렴풋한 인상이 남아 있을 뿐이다ㆍ
삶은 그렇게 신기루 같다.ㆍ
간직하고 싶은 추억의 시간들은 무수한 오늘에 떠밀려 과거의 강으로 흘러가고
내가 밟고 지나간 기쁨과 감동은 그 흔적이 희미해 진다.
하지만 세월은 나의 모난 모서리를 둥글게 벼리고 내가 누린 아름다운 세상의 잔상과 여운은
내 가슴 한 구석에 쌓여가 좀 더 너그럽고 따뜻한 나를 만든다.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면 그날의 작은 기쁨의 실마리 조차 들춰낼 수 없을 것이다ㆍ
내 블로그가 내 삶의 역사서이고 타임캡슐이다ㆍ
청솔들은 척박한 바위에서 고고한 자태를 잃지 않고 살아가는 데 자신에게 닥친 삶의 무게와
시련을 견디지 못하고 극단의 선택을 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아쉬움과 연민을 토로 했었다.
삶의 아이러니 였다.
만인지상 한 나라의 대통령 까지 되신 분이 일개 범부 보다도 더 불행한 삶을 살다 가셨다는
안타까움 이었다.
도락이란 이름처럼
도를 깨우치는 기쁨
길위에서 누리는 즐거움에 관한 이야기가 있고
산이 별거 아니고 오름길이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가 도락산 신령님께 눈에 불이 번쩍나게
얻어 맞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걸 보면 산세를 깔보다가 혼 줄 난 듯 하다.
하지만 마눌이 힘들어 했다는 얘기는 어디에도 없다ㆍ
거친 산이었지만 마눌은 무리 없이 잘 댕겨왔다는 얘기
지난달 우천으로 건너뛴 터라 산행 후 술 한잔 치기로한 조사장 일정을 감안해서 시간소요가
많지 않은 만만한 산을 잡은 게 바로 이 도락산 이었다.
16년 전 이후에 거의 잊혀졌던 산이었다.
내 블로그는 확인하지도 않고 4시간 30분 정도 걸린다는 어느 산님의 산행기만 읽고 별
준비없이 출발했다ㆍ
내 산행기에는 우리가 돌았던 역방향 산길이 더 수월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지만 난 단지
도락산의 인상이 기억에 별로 남아 있지 않다는 이유로 사전정보도 확인하지 않았고 힌참
기세등등한 폭염에다 이동거리가 두시간이나 되어 완전 땡빛 산행을 해야함에도 별로 개의
할 바 없는 만만한 산길로 단정지었던 것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타임테이블을 조사장에게 보냈다ㆍ
아침 6시에 조사장 집에서 출발!
8시 상선암 주차장 도착 산행시작
1시 하산
4시 까지 신탄진 도착
약 1시간 30분 사우나
5시 30분 뒤풀이 & 저녁식사 ㆍ
금요일 저녁 원주 터미날에서 마땅히 식사할 만한 데가 없어서 식사를 하지 못했다.
저녁 8시 30분 집에 도착했는데 배가 많이 고파 저녁을 먹으렸더니 먹을 밥이 없어서
그 늦은 시간에 컵라면 두개와 계란 후라이 두개를 먹고 몽숼통통 2개 칙촉쿠키 3개나 먹었다ㆍ
“미친 거 아이가?
할배가 이렇게 무대포 무개념으로 건강관리 해도 되나 ?”
마눌한테 새벽밥과 미역국을 준비하라 해놓고 부른 배로 11시에 잠들고 새벽 4시에 일어
났다.
간밤의 무분별한 폭식과 루틴을 벗어난 일상으로 바이오리듬이 깨어졌으니 컨디션이 좋
을 리 없다.
소화도 덜 된 상태에서 아침을 먹으려니 밥이 넘어가는가 ?
바나나와 방울토마토 떡.계란.감자등 간편식만 챙겨서 새벽 5시에 출발하다
그리고 조사장과 그동안 밀린 얘기를 나누며 도락산으로 기는 중에 차안에서 준비한 아침
식사를 했다.
내가 아침에 식사하는 시간에 맞춰서….
차 한잔을 마시기위해 단양 8경휴게소에 들러 마차와 커피를 주문힐 것 까지는 좋았는데
조사장 생리 신호가 먼저 오더니 뒤이어 이미 아침에 볼일을 마친 내배도 다시 꾸물떡거려
애슬픔을 터뜨리고 다시 길을 잡느라 시간이 지체 되었다ㆍ
어제 늦은 불량 저녁식사가 오늘 간편식 아침식사에 까지 영향을 끼치는 모양새다ㆍ
덕분에 30분의 계획차질이 생겼다ㆍ
상선암 주차장에 도착하여 8시 30분부터 산행을 시작했다ㆍ
산길을 오르는데 가슴이 답답한 체증까지 느껴져 컨디션은 계속 저조한 상태….
늘 그렇듯이 해결사는 산이다.
도락산신령님이 낫게 해주시 것지 ㆍㆍ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도는 오른쪽 채운봉 오름길을 선택했다ㆍ
대행히 날은 흐리고 바람은 시원했다ㆍ
"도락 산신령님이 환영해주시네ㆍㆍ"
풍류와 도가 함께 머무는 곳이 산인데 이름마저 도락산이라!ㆍ
길을 걷는 즐거움과 도를 깨우치는 즐거움이 각별한 산이란 의미가 아닌가 ?
조사장이 먼저가고 나는 사진을 찍어가며 천천히 올랐다ㆍ
1/3 도 채 오르지 못한 곳에서 구미에서 온 청년을 만났다ㆍ
다섯시부터 제비봉쪽으로 올라 우리 역방향으로 도는 중이라 하산을 얼마 남겨두지
않았다ㆍ
새벽 3시에 집에서 출발했다는 씩씩한 젊은이ㆍ
산에 홀린 내 젊은 날의 모습이었다ㆍ
우린 덕담을 나누며 헤어졌다ㆍ
출중하고 후련한 풍경이 드러난 큰 바위 위에서 조사장은 서울에서 온 두명의 사림과 휴식
하고 있었다ㆍ
구름 밖으로 들락날락 하던 태양은 조금씩 뜨거워 졌지만 자주 불어주는 바람에는 서늘
하고 시원한 냉기가 남아 있어서 가만히 앉아 있으면 금새 몸의 열기가 가라 앉는다.ㆍ
날씨가 많이 도와주는 날이다ㆍ
잠시 휴식하다가 다시 산을 오르는데 풍경은 점점 수려해쳤다ㆍ
고사목이 눈에 뛰게 많아지고 척박한 바위에 자리잡은 청솔들은 무언가 불편한 기색으로
수심에 쌓여 있다..
솔빛이 청청하지 않은 어두운 표정이다.
마른 갈색의 솔방울이 않이 매달려 있거나 새로운 솔방울을 맺은 나무들이 많다.
나무는 생육 환경이 나빠져 자신이 삶이 위태로워지면 자손을 퍼뜨릴 준비를 한다고 했다.
예전보다 두드러지게 생육환경이 악화되고 있다는 반증이다.ㆍ
요 몇 년 새 계속 무더워지는 여름 탓에 바위 암릉이 많은 이곳에서 자생하는 많은 소나무
들이 수난을 당하고 있는 듯 보였다.
옛 산행기에서 흙이라고는 별로 없는 바위에서 푸름과 기품을 잃지 않는 청솔들의 강인하고
고한고한 생명력에 찬사를 보낸 것에 비추어 보면 16년이 흐른 지금엔 대한민국이 사람이나
나무가 살기 더 어려운 나라가 되고 있는 것 같다.
나무들도 금수저가 있고 흑수저가 있겠지
어느 날 바람에 날려 떨어진 곳이 이 도락산 바위 틈새였다.
한 때는 풍류 객과 더불어 음풍농월 하며 살았지만 이젠 그럴 여유는 고사하고 치열한 생존
전쟁에 내몰리고 있는 것이다.
김홍신 작가이자 전 의원이 말했다.
*태도가 곧 행복이다.
같은 곳에 있어도 행복한 사람이 있고 불행한 사람이 있다.
같은 일을 해도 즐거운 사람이 있고 불행한 사람이 있다.
같은 음식을 먹지만 기분이 좋은 사람과 기분 나쁜 사람이 있다.
좋은 물건, 좋은 음식, 좋은 장소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들을 대하는 태도이다.
무엇이든 즐기는 사람에겐 행복이 되지만 거부하는 사람에겐 불행이 된다.
정말 행복한 사람은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이 아니라 지금 하는 일을 즐거워하는 사람,
자신이 가진 것을 만족해하는 사람, 하고 싶은 일이 있는 사람, 갈 곳이 있는 사람, 갖고
싶은 것이 있는 사람이다.
- 김홍신 –
산이 내게 들려준 이야기 중의 하나이고 전적으로 공감하는 말이다,
권력과 재물을 가지고도 욕심을 내리지 못해 불행한 사람이 있고
부족함 속에서도 마음 하나로 이승의 천국을 누리는 사람이 있다.
저 나무들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같은 바위 위에서 멋드러진 자태로 푸른 삶을 노래하는 청솔이 있고
오래전에 고목이 되어 비바람에 씻겨 한 줌 흙으로 돌아가는 나무도 있다.
하지만 세상을 덮친 거대한 변화의 물결이 모든걸 바꾸어 놓았다.
모두가 열심히 살고자 하지 않았을까?
예전에는 충분히 감당할 만한 시련 이었지만 점점 뜨거워지는 지구에서 물을 머금기 어려운
척박한 바위 위의 삶은 자신의 의지와 강인한 생명력으로도 해갈할 수 없는 목마름 아니었
을까?
삶의 자세와 태도가 행불행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인이지만 모든 생명에게는 받아들일 수
있는 한계가 있다.
그리고 저마다의 그릇이 있다.
한계를 넘어서는 시련은 삶에 대한 희망과 의욕을 송두리째 흔들고 자신의 그릇을 넘어서는
욕심은 감당하지 못할 화를 부른다..
그래서 우리는 극복할 수 없는 시련이 닥치지 않도록 복을 지으며 살아야 한다,
유유상종이라고 했다.
내 스스로가 밝고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생활해야 내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모이고 그
에너지파에 공명하는 세상의 좋은 기운이 나를 호위하여 불운과 악귀의 범접을 막아 줄
것이다.....
우린 잠시 아름다운 지구별을 스쳐 지나는 여행자 이다.
짧은 시간의 개념으로 볼 때 궁극의 나의 것이란 내가 가진 것이 아니라 누리는 것이다.
더 말리 갈 수 있는 시간은 생각보다 짧다.
지구별을 여행하는 동안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만족하면서 스스로 욕심을 내리고 아름
다운 세상을 마음껏 누릴 일이다,
길 위에는 인적이 없다.
나는 수려한 대자연을 날아 오르는 한 마리 매가 되었다.
먹이 보다 풍경에 넋이 나간 무릉 매
조망이 터지는 바위봉은 빼 놓지 않고 올라 가경에 취하며 사진을 찍기에 여념이 없다.
아뿔사 알바여 !
열심히 길을 가는 데 마지막 바위봉을 넘어서는 등로가 계속 내려 간다.
아무리 앞은 내다 보아도 능선의 낙차가 너무 크고 앞길에는 다시 솟구쳐 오르는 봉우리가
보이지 않는다.
가파른 내림길 철게단도 나타난다.
“이게 아닌데…”
그래도 외길이었는데 설마하는 마음으로 계속 내려 갔는데 아뿔싸 내가 열쓈히 올랐던
길을 다시 내려가고 있었다.
오름 길에 보았던 UFO 같이 돌출한 낯익은 바위를 보고서야 비로소 알아차린 것이다.
오잉 ? 이게 무신 조화여 ?
그 옛날 백두대간의 황당한 시츄에이션의 재연이다.
첫번 째 백두대간 종주 시절에는 늘 선두그룹에 섰다.
체력도 받쳐 주었지만 뒤쳐지는 것보다 앞에서 움직이는 것이 훨씬 힘이 덜 들었다.
선두그룹은 진서와 송장사와 다섯명 정도 였다.
송장사는 건설회사에 다녔는데 도무지 지칠줄 모르는 발군의 체력을 가지고 있었다.
백두대간의 체력을 유지하기 위해 평소 모래주머니른 양 발에 차고 다닌다는 말에
내가 송장사란 별명을 붙여 주었다.
사실 그가 선두그룹을 리딩했는데 출발부터 비가 오던 어느 날 선두그룹 친구들이 중간
에 점심시간에 술을 내놓고 마시면서 갈 생각을 안하길래 나 홀로 비안개 속으로 길을
나섰다.
산 안개와 비에 앞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길은 외길이었다.
1시간 이상 가도 인적이 나타나지 않아서 슬며시 걱정이 되던 차였는데 앞에서 우비를
입은 일단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반가운 마음에 “수고하십니다”라며 먼저 인사를 건넸는데 우린 서로를 보고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우리팀 후미 멤버들이었다.
선두로 치고 나갔던 내가 열쓈히 거꾸로 내려오고 있었으니….
내 기억으로 갈림길은 어디에도 없었다.
난 우중 산길 어디 쯤에선가 삼천포로 빠졌다가 선두그룹을 우회하고 다시 온길을 되돌아
후미그룹을 만난 것이다.
구룡령 여우에게 홀린 날이었다.
지금도 미스터리로 남은 미제 사건 이었다.
벌건 대낯에 딱 그 상황이 재현된 것이다.
유추해보건대 등로 옆 바위봉에 올랐다가 내려오면서 방향 감각이 틀어진 모양이다.
조사장에세 전화를 했더니 갈림길이 없었던 터라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는 날이
있다고 놀랍다는 반응을 보인다.
어안이 벙벙하고 어디서부터 단추가 잘못끼워졌는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조사장은 산봉우리를 하나 넘어 도락산 방향으로 오르는 중이라 했다.
산세가 깊은 곳에서 잘나가다가 한 명이 길을 잃고 삼천포로 빠지면 상황이 심각해진다.
서로의 위치를 확인하고 정확한 방향을 잡아야 하기에 조사장은 막 넘었던 봉우리를
되넘어와 소리를 질러 보겠다고 했다.
나는 그렇게 다시 간 길을 되짚어 봉우리를 오르고 조사장은 넘어섰던 봉우리를 되돌아 내
렸다.
멀리서 조사장 소리가 들렸다.
내가 봉우리에 올라서 내림길로 중턱으로 내려서자 멀리 우측 봉우리 바로 아래 붉은 옷을
입은 조사장이 보였다.
나는 전화를 걸어 위치를 확인했다고 하고 손을 흔들어 내 위치를 알려 주었다.
예기치 않았던 불상사는 조기에 수습이 되었다.
오르내림의 낙차는 컷지만 약 왕복 1km 남짓한 비교적 소형 알바였다.
되돌아 40여분 정도 지체 되었다.
다시 온 길을 돌아 가면서 도의 기쁨이 넘치는 도락산의 비교적 짧은 산행을 좀더 누리
라는 도락산신령님의 배려라고 생각했는데 더욱 깊어지는 산길을 걷다보니 도락산을
만만하게 보고 온 데 대한 빳데루가 아니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알바 시간을 상쇄하기 위해 조금 속도를 올린 탓에 채운봉을 넘어 신선봉과 도락산 정상
으로 이어지는 계속되는 오름 길에서 체력과 속도가 현저히 떨어졌다.
제봉삼거리에서 신선봉과 도락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의 풍광은 출중했다.
도락이란 말이 실감이 간다.
완전히 뜨거워진 태양이 본격적인 열기를 쏟아내고 있었지만 그래도 사방이 트인
능선이라 시원한 산바람이 불어주어 주변의 풍경을 즐길 여유를 허락해 주었다.
도락산에는 먼저 도착한 조사장과 두 명의 젊은이들이 있었다.
조망은 없는 숲 그늘에 반가운 표석 하나 덩그러니 서 있다.
표석과 정상의 풍경이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았다.
돌아와 마눌과의 산행기를 확인해보니 16년 전에는 검은 대리석의 작은 표석이 서
있었을 뿐이었다.
직장 초년병의 새내기 젊은이들 이었다.
그들에게 인증샷을 부탁하고 덕담을 하면서 우리 둘의 얘기를 하다 보니 손녀 손자가 있
다는 소리에 깜짝 놀란다.
40대 후반이나 50대 초반 정도로 생각했단다.
젋은 친구들이 립서비스도 할 줄 안다.
절은 시절의 친구와 산에 대해 일장 연설을 했다.
그들에게 힘들고 어려워도 초심을 잃지 말고 계속 산과 가까이 하면서 살아가면 인생이
더 풍요로워질 거란 얘기를 남기고 하산의 길을 잡았다.
우리는 제봉 가는 능선 어디쯤에선가 준비해간 간편식으로 점심식사를 했다.
일대를 굽어보는 멋진 풍경이 내려다 보이고 투명 창으로 시원한 바람까지 불어 오는
최상급 전원 레스또랑 이었다.
식사 후 등로는 급속히 고도르 낮추며 떨어졌다.
내림길이라 힘은 들지 않았지만 마사토 거친 산길이라 미끄럼을 조심해야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도락이란 지명은 우암 송시열 선생이 도를 깨닫고 즐길만한 곳이라 해서
도락산이라 명명했다고 한다.
글방에 들어 앉아 학문에 전념한 학자면서 세상에 나가 그 명성을 드높인 정치인이셨던
분이 화양동 외에도 단양의 출중한 산수 여기저기를 빠대고 다니면서 자신의 족적을
무수히 남겼다는 사실이 인상깊게 다가 온다.
자질과 그릇은 타고 나는 것이다.
하지만 소중하지 않은 인생이 어디 있으랴?
사람은 분수와 만족을 알며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해서 사는 것이다.
도락산은 6..2km 다소 짧은 거리이지만 난이도 중상에 속하는 깊은 낙차의 꽤 거친 산
길로 탁월한 운동량과 빼어난 풍광으로 산행의 뿌듯함을 선물하는 남다른 매력을 지닌
산이었다.
우린 기억에 남을 사건과 뻐근한 피로감을 동반한 만족함으로 다섯시간 만에 하산했다.
즐겁고홀가분한 마음으로 산행을 마무리하니 정말로 도를 깨우치기라도 한듯 마음이
맑고 가벼워졌다.
길의 즐거움과 자신의 도를 깨우치라고 더 오래 산에 머물러 있게 하신 산신령님의 속깊은
마음이 비로서 혜량되는 행복한 여정이었다.
알바를 감안하면 조사장의 속도로는 4시간 나는 4시간 30분 정도 걸리는 길이었다.
마눌과의 산행은 4시간 46분 걸렸는데 안전시설이 지금보다 미비했을 그 때를 생각하면
당시에는 마눌의 체력도 대단했다.
무정하고 아쉬운 세월이다.
꽃이 그리 빨리 지는 줄 내 알지만 한 사람의 인생이 이리도 빨리 시든다는 건 이순을
넘기기 전에는 쉽사리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문경읍에서 사우나를 하고 예상했던 시간에 대전으로 나와서 5시 30분쯤 신탄진
생물식당에서 간자미 회무침과 붕장어 탕으로 거하게 뒤풀이를 했던 것이다.
원래는 한여름 스태미너 보신으로 장어요리를 먹으려 했는데 신탄진에서 가장 유명한
장어전문점이 자리가 매진되고 차선으로 찾은 곳이 재료가 떨어져 문을 닫았다.
하여간 무더위 기력약화를 보신해야 한다는 심리 때문인지 신탄진 장어집들 문전성시였다.
내가 조사장에게 미리 예약좀 하지 그랬냐고 하니 이럴줄은 정말 몰랐단다.
장어 구이는 아니라도 붕장어 탕이 있으니 생물요리 식당으로 바꾸었다.
사장에게 우리가 항상 먹던 대로 간자미 회무침과 붕장어 탕을 주문했는데 새삼스럽게 너무
양이 많아서 다 못 먹는 다고 한가지만 하라고 제안 한다.
"괜찮아유 !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두개다 주세요 .
간자미 회무침은 안주로 하고 붕장어 탕으로 저녁 먹을 겁니다.
양이 많을 것 같으면 사장님이 좀 줄여 주시고 그 만큼 D/C 해주세요."
내가 나서서 도맡아 주문을 정리하는 통에 그 사장님 이번에는 내가 돈 낼 줄 알았을 거다.
우리는 소주 2병에 맥주 4병을 마셨다.
원래 조사장은 소주 3병에 맥주 1병을 제안했고
나는 좋은 안주빨에 각자 두 병씩은 마셔야 한다고 했다.
조사장의 꼼수 였다.
요즘 술자리가 많았를 터라 약한 소맥으로 계속 달리다 보니 소주는 정작 두 병이다.
사실 이건 너무 했다.
산 같은 회무침에 어마무시한 붕장어 탕
윤석렬 애주법에 따른 지속적인 쏘맥잔 순배와 더불어 그 많은 양을 음식을 소화 했다는 건 …
거의 실신 수준의 식신들이다.
붕장어 탕도 밥 반공기 말아 국물만 어느정도 남기고 다 먹었다.
양을 줄이라 했더니 왜 그대로 주었냐고 쥔장에게 물으니 줄인다고 줄인건데 원래 자신의
손이 그렇게 크다고 했다.
배가 불러 움직이기 불편하다.
이러니 조사장과 산행 후 술자리 뒤풀이 하면 몸이 축날 일이 없다.
아니 아무리 거친 운동을 해도 그 다음날엔 체중이 는다.
쥔장이 얼마나 D/C를 해줬는 지도 잘 모르겠다.’
조사장과 댕겨온 집은 메뉴별 밥값도 잘 모른다.
조사장은 또 다음달 일정을 채근 했는데 폭염의 8월은 근교 산에서 아침 일찍 시작하고 계곡
알탕을 하자고 제안 했다.
꽤 거친 천등산 !
대둔산의 그늘에 가려 늘 2인자의 설움을 받고 있지만 6시간 가까이 걸리는 거친 산세를
자랑한다.
그렇게 도락산의 도를 깨우치는 즐거움은 식도락 까지 이어져서 조사장과의 7월 산행은
풀코스로 성대히 마무리 되었다.
2025년 7월 5일 토요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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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눌과 추는 춤 - 도락산 (100대 명산 제 39산)
옛터 휴게소 조형물 에궁 남사시러라.. 유람선 선착장에서 본 풍경 휴게소에서 기르고 있던 토끼 애완용 토끼를 넓은 마당에 담을 둘러치고 키우는데 토끼들이 땅속에 굴을 파고 살아감 월악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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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5년 마눌과 도락산 (100대 명산 순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