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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가는 대로

눈오는 날의 주말 스케치

금요일 밤에  눈이 내린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대전에서 펑펑 내리는 함박눈이 맞기 어려워 졌다.
눈이 연결하는 기억은  온통 즐거움 아니면 그리움이니….
모처럼 내리는 함박눈이 발정기 숫캐처럼 마음이 달뜨게 한다.



창밖에 장하게 내리는 눈을 보고 마누라에게 프로포즈 했는데
마누라가 튕긴다.
저렇게 내리는 눈에는 머리가 젖는 데나 어쩐 데나….
내리던 함박눈이 그치면 소복히 쌓인 눈을 즈려밟고 산보를  가잔다.
“오호 통재라” 하나 밖에 없는 마누라 필이 통하지 않는다.

사실 오늘 같은 날 
마누라는
붉게 난로가 타고 있는 따뜻한 까페의 창가를 생각하고 있다.
전람회의 그림같이 표구되어 있는 그 시절처럼
눈은 회색하늘을 타고 명멸하는 네온 사이에서 춤추다
잿빛 아스발트에 쌓이고.
창가에는 서로에게 기울어 있는 연인들이 창밖을 바라보며 속삭인다.
아련한 그 시절은 지나갔다.
동심과 순수가 떠나간 아쉬움의 궤적을 따라…..

세월이 흘러
눈이 오면 무턱대고 걷는 걸 좋아하는 하이에나 습성을 알아차린 마누라는
저리 심한 눈을 맞으며  눈밭을 헤메고 따라다니 자니 엄두가 나지 않을 터이다.
혹세무민에 휘말리기에는 영악해 버린  불혹의 나이에….
꿩 대신 메추리 ?
오늘 함박눈의 유혹에는  막내가  적격이다.
아직 소주 맛은 모르지만
내 아이  때 기억처럼 함박눈이 떨어지는 눈밭을 하염없이 뛰어다니고 싶은 동심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맛 보게 될 닭발 연탄구이 까지…



잿빛 둥지에 내리는 눈은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고 부자연스럽다.
산이 맞닿아 있는 하늘에 가장 가까이 갈 수 있는 곳은 월평공원이다
내리는 눈을 맞으며 내원사 가는 길
가로수에 쌓인 눈을 폭포수처럼 털어내는 아해의 즐거움
나는 내 아들과 똑 같이
비탈에서 미끄럼을 타는 어린시절로 돌아가고 있다.

가로등 불 빛에 춤추며 내리는 눈
도심의 산사로 이어지는 한적한 길엔
붉은 수은등이 떠 있고
흰 눈은 하늘 가득 춤추며 내려 온다
어디에도 눈은 소복히 쌓인다..
오솔길 위에도
나무 위에도
내 어깨며 머리 위에도 ….
잠시 도시의 불 빛에서 떠밀려
회색 콘크리트 더미가 보이지 않는 곳
온통 흰 나무에 둘러 쌓여
인적이 없는 적막함 속에
이렇게 쉽게 장한 눈을 맞고 있다...


인적이 없는 산길을 따라오는 발자국 두 길
가로등은 내원사를 지나 산으로 이어지고 눈은 발목까지 쌓이는데
갑자기 무서워진다..
인적이 없는 경내를 지나 산 언덕을 오르는데 머리털이 쭈빗 선다.
우째 이런 일이?
그 야심한 밤에 달 빛과 반디처럼 작은 머리불 빛으로 백두대간을 주름잡았는데
도심의 한 가운데에 느닷없는  공포라니….
지천으로 쌓인 흰 눈 위로 띠엄 띠엄 이어진 창백한 가로등 불 빛
우리 앞에도 우리 뒤에도 사람은 흔적도 없고 바람만 가지 끝에서 운다.
그리고 우리 둘밖에 없다는 사실을 완벽하게 증명하는 온 천지에 가득한 백색이 
알 수 없는 공포를 가져온다.
아이는 똥강아지처럼  저리 즐거워 하는데……


내원사 회군
가로등을 따라 산을 올라  목운주택 쪽으로 내려설 계획은 수포로 돌아 갔다.
묘하게 머리털이 곤두서는 서늘한 공포를  애써 태연한 채 하며
벌써 가냐는 아들 손을 잡고….
오늘 이렇게 멋진 눈이 내렸으니
내일 오전 스케줄은 만패불청이다.
흰 눈을 가득 머리에 이고 있을 계룡산

토요일 아침
오늘은 부모님 모시고 서울 동생 집 가는 날
오후 2시에 출발하려면 빨리 산을 타고 내려와야 한다.
5시 30분에 자명종을 맞추었는데
눈발을 받아  마누라와 늦게 잠이 든 통에 자명종을 무시하고 좀더 자다 일어나니
6시 30분 
주섬주섬 배낭을 꾸리고  계룡산으로 간다
아직 싱싱한 눈들이 나무 위에 가득할 계룡산

길이 장난이 아니다.
차가 미끄러지고 헛바퀴 돌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 만수무강에 좋을 듯하다.
해장국 집에 들려 아침 뼈다귀 탕을 한 그릇 비우고 버스를 타고 박정자에 도착하니 벌써
아침 8시가 넘었다.
어쨌든 지각은 했지만 출근해서 커피 한잔할 시간에 나는 둑방길을 따라 병사골 매표소로
간다.

쌓인 눈 위로 한 사람 발자국
아! 이 눈을 헤치고 먼저 올라선 사람이 있구나….
발자국 임자는 매표소 안에 있었고 장군봉 오르는 길 위엔 흰 눈만 가득하다.
예상했던 대로 장군봉 가는 길은 보기 드문  설화를 가득 피운 나무들이 바람에
눈발을 날리고 있다.
대전에서는 타이밍이 맞지 않으면 만날 수 없는 멋진 설경이다.
언제부턴가 겨울에 눈이 귀해진 대전
해마다  녹담만설에 대한 동경으로 떠나던 먼 겨울 산행 길.
덕유산 , 태백산 , 계방산 , 백운산에서 지천의 눈에 감동을 먹고 돌아서지 않으면 한 없이
답답하던 겨울이었다.
작년에는 백두대간에서 물릴 만큼 눈을 만나 시린 겨울풍경이 겨울다웠는데….
올핸 강원도 폭설 주의보를 기다려 마누라랑 선자령에 갔다가 운동화를 간지를 정도의 눈에
이만저만 실망한게 아니었다.
그나마 각호산-민주지산-석기봉-삼도봉을 아우르며 눈 밭을 헤메지 않았더라면  눈다운 눈
을  만나지도 못하고 보내버릴 1월 이었다..
대전근교 산에서 흰 눈을 머리에 가득 이고 선 나무를 만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토요일 쯤엔 눈이 잘 내리지도 않고 내려도 금방 녹기 일쑤니….

아직 동양화의 설경이 그대로 살아 있는 계룡산의 아침은 강원도의 산처럼 아름답다.
발자국이 남겨지지 않는 흰 길을 걸어 장군봉을 지나 파죽지세로 진군한다.
순백의 설원 위로 남기기 미안한 내 발자국만 조용히 따라온다

아무도 없는 길

작은 바람소리

눈이 사각거리는 소리

속세의 시끄러움이 없는 고요함 속에 나 홀로 가는 산길이 너무 좋다.

가득한 상념을 깨우는
핸드폰이 운다
산 속이라 받으면 끊어지는데 잘 모르는 번호다
“ ....”

아이젠을 했어도 러셀이 장난이 아니다.
칼 바람이 난무 했을 능선에는 바람이 제멋대로 끌어다 놓은 눈 더미로
적설의 깊이가 제 각각인데 어떤 곳에서는 무릎까지 빠지는 곳도 있다.
악전고투
겨울산행에 앞장서서 러셀하는 사람들의 힘겨움이 헤아려 진다
동네 산 가는 듯 나선 터라 스패치도 준비하지 않아서 눈덩이가 등산화로 들어온다.
그래도 온 산을 통째로 전세 내어 자연 한가운데 홀로 소요하는 이 기분

다시 전화가 온다 .
곽선배님이다.
귀연 일행들의 내일 만인산 번개산행 공지를 봤는데 고마운 동참 제안이다.
“저는 내일 못 타는 산 오늘 오르고 있습니다.”

관음봉을 거쳐 동학사 주차장에 1시 까지 내려서야 하는데
그 멋진 눈이 내 발목을 잡는다.
신선봉 가는 길엔  구름 밖으로 해가 나오고 멋진 푸른 하늘이다.
아직 흰 눈을 가득 이고 있는 푸른 소나무와 맑은 하늘 빛의 조화
오늘은 내가 계룡의 신선이다.

남매탑으로 연결되는 갈림길에서 비로소 사람들의 발자국을 만난다.
벌써 많은 사람이 지난 듯 눈길이 다져있다.
이제 길엔 제법 많은 사람들이 오간다..
나처럼 아침 일찍 계룡의 눈 밭을 욕심 낸 사람들
설화가 유명한 삼불봉은 태양 빛이 눈부셔 이제  눈물을 흘리는 나무들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다.
이렇게 도심 지척에 있는 명산 덕분에 산보가 듯 멋진 풍광을 만나는 호사를 누린다.

삼불봉 회군
눈 밭을 헤메는 게 역시 장난이 아니다.
시방 타임 12시
3시간 이면 충분한 박정자-삼불봉구간이  지연된 바람에
자연성능의 겨울 풍광을 마주할 여유를 잃어 버렸다.
아쉽지만 남매탑을 거쳐 동학사로 내려서고 말았다.
짧은 이동거리 짧은 산행으로 만났던 계룡의 눈부신 설경은
밀납의 이카루스처럼 겨울태양 빛에도 쉽게  녹아 내리고
시간은 그렇게 호젓하게 흘러갔다.

시내로 가는 좌석버스에서 바라보는 도심은 햇빛에 녹아버린 눈이
질척거리는 지저분한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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