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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기

2006지리산종주-그 행복한 실패

2006년 6월 25일  지리산

 

 

지리산이란 그저 알 수 없는 그리움이다.

지리산 종주란 산꾼들에겐 귀향 같은 것이다.

연어의 회귀본능과

미리 프로그램된 철새의 유전자처럼

세월에 표류하던 어느날

그것은 다시 도지는 역병처럼 가슴을 짓누르고 만다.

 

울먹이며 혼자 지리산으로 달려갈 준비를 했다.

산장을 예약하고

구례행 야간열차를 예약하고

 

 

 

지리산으로 가는 차편이 있다고 했다.

오랫동안 같은 가슴앓이를 하며 산을 닮아가는 사람들

그들이 지리산 종주길을 떠난 다기에

올해는 쓸쓸한 야간열차를 타지 않기로 했다.

깨워줄 사람이 없어 잠들 수 없는 여행길 대신

가고 오는 길 내내 지리산의 꿈을 꿀 수 있는

그들과의 동행을 선택했다.

 

장마비가 올라온다고 한다.

택일을 잘못해서 우린 떠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떠나도 가슴에 쌓인 것들을 모두 비워내고

투명한 바람과 숲의 향기로 가슴을 채울 수 없을지 모른다.

넘실거리는 초록의 바다에서 부풀고 오르고

천왕봉 표석 앞에서 칼바람 속에서도 뜨겁게 달아오를 가슴대신

흐르는 차가운 빗물에 작아진 가슴의 희미한 박동과

등산화 속에서 꺽꺽이는 개구리 울음소리를 들을지도 모른다.

 

 

 

 

아쉬움과 걱정 끝에서 소백산 종주길이 생각났다.

소백산 종주만 떠나면 비오는 날이 더 많았다.

비오는 날 소백산에서는 더 장엄하고 신비스런 소백의 얼굴을 보았다.

비 내리는 공룡능선을 떠돌던 몽환의 운무처럼

백두대간의 능선길에서 

먹장구름과 비바람이 만들어 낸 대자연의 두려움과 경외처럼 

비오는 지리산을 보는 것도 괜찮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떠나는 날 다시 설레임과 기대속에 잠들지 못하는 나를 보았다.

 

 

 

노고단

 

노고단에 오른다.

희미하게 여명이 뜨는 길을

무거운 배낭을 지고 혼자 오르는 여인이 있다.

공주에서 온 대책 없는 아줌마

혼자 지리산 종주 중이다.

가는데 까지 가서 산장에서 하룻밤 자고 대원사로 흘러내린다고 한다.

그녀가 앓고 있는 지리산병은 더 심해 보인다

푸른 새벽이 어둠의의 베일을 들추고 달려오는 길에

노고단에는

시원한 바람이 불고 신비한 운무가 반야봉으로 흘러내리고 있다.

지리산 열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은

노고단에서 그렇게 새벽바람을 맞고 있다.

 

 

 

능선의 아침

 

촉촉히 젖은 눈으로 바라보는 지리산의 맑고 우수에 찬 얼굴을 본다.

드러내지 않는 속 깊은 반가움을 조용히 열어 보이는

어머니

마음 한구석은 항상 비워 놓고도 

살아가는 날이 바뻐

마치 잊은 것처럼 잊을 수 없는 시간을 살아온 회환이 허물어 진다.

조용히 새벽 능선을 넘어온 고요한 아침을 만난다.

첩첩이 포개진 산릉은

슬픈 하늘을 따라 푸른 빛으로 말 없이 흘러간다. 

금새 검은 휘장을 드리우고 안개 속에 사라 져 갈 것 같아

두려워지는  

너무도 조용한 고원의 불완전한 평화.

 

지리산 종주길에서는

언제나 고요함과 평화로움을 만났다.

내가 한 일이란

정리되지 않은 혼돈과 복잡한 머리로 깨어나서

능선을 달려오는 푸른 새벽을 만나고

그저 하루종일 능선 길을 걸어 간 것 뿐이었다.

만난 것이라고는 숲의 향기, 고원을 불어가는 바람 ,이름 모를 새소리

그리고 출렁이던 초록바다 뿐

그 단순한 순례는 내 가슴을 흔들고 다시 사무치는 그리움을 만들었다.

천왕봉에서 떠오르던 태양은 무수한 날을 내 가슴속에서 다시 떠 올랐다.

 

 

 

임걸령 물맛은 변하지 않았다.

안개 흐르는 능선 길을 지나며 지나간 날의 감회에 젖는다.

아득해 보였던 수 많은 시간들은 서둘러 과거의 강으로 흘러 갔다.

살아간다는 건

목적지가 수시로 바뀌는 변덕스런 항해

세월의 강을 따라 배를 저어가는 길에서 만나는 수 많은 풍경들이다.

어떤 날은 눈부신 햇빛아래 웃고 있는 수많은 야생화를 만나고

어떤 날은 숲도 먼산도 보이지 않는 폭우속의 지리산을 만나야 한다.

 

 

 

인생은 아무 것도 아닌 거야

부는 바람처럼 흐르는 구름처럼 그저 그렇게 흐르는 거야

항상 그렇게 말해 주었던 지리산

수 많은 인생의 변곡점에서 묵묵히 한 인간의 역사를 지켜온 지리산은

오늘도 말 없이 내 가슴을 적시고 있다.

 

 

 

노루목을 지나면서 은은한 아침능선의 푸른 빛이 점점 사라진다.

지난번 너무도 맑은 하늘을 열어 가슴속에 출렁이던 바다를 있게 했던

삼도봉에는 자욱한 안개만 흐른다.

말없는 지리산의 위안과 교훈은 그렇게 안개에 가리워 갔다.

 

화개재를 넘어 비가 후두득 거린다.

올 것이 너무 일찍 왔다.

빗물을 몸으로 받아내다 너무 추워서

일회용 우비를 입는다.

빗줄기가 더 장해진 토끼봉을 그냥 지나간다.

 

 

 

노고단에서 나선생님이 준비하신 김밥을 먹고도

배가 너무 고팠다.

비 내리는 연하천에서

입추의 여지 없이 어수선한 연하천 취사장

마눌이 꼭꼭 챙겨준 병자의 식단을 열었다.

좋아하는 산엘 가서 좋아하는 음식을 먹으라고.

된장찌개에 열무김치

비닐에 싼 고추장은 욕심껏 넣은 무게에 눌려 터져 버렸다.

지리산에 올 적엔

마음도 비우고

빈 배낭에 마누라 정성만 담아오면 되는데.

쓸데없는 것으로 가득 차 있는 마음은

또 이것저것 끌어다 배낭의 무게를 늘린다.

김밥 한 줄 먹고 횡하니 백운봉님 떠나고

새벽안개님 로즈마리님은 추워서 세석까지 간단다.

지리산이 울고 있는 날

청산님은 아직 안 왔지만 오늘 우리는 내려가야 할 것 같아

세석말구 벽소령에서 기다리시라 했다.

산장 한 구석 그 어지러움 속에서 청승맞게

열무에 된장과 고추장을 넣고 밥을 비벼 먹는다.

비 내리는 연하천 산장에서  

 

 

 

무언가 서럽고 노여운 모양이다.

지리산이 통곡하고 있다.

목에서 컥컥대던 그리움을 삭히려고

살아가는 날의 서러움을 그 가슴에 묻고

실컷 울어 버릴려 했는데 

새벽이슬로 눈시울을 적시던 지리산이 먼저 울고 말았다.

 

지리산의 눈물에 흠뻑 젖는다.

차라리 후련하다.

채워지지 않은 그 무엇이 남아도

내 가슴은 다시 비워지고

축축히 젖어 가고 있다..

지리산에서

 

 

 

비에 젖은 채

얼굴을 가리고 그렇게 슬퍼하는 지리산 능선을 따라 벽소령 까지 갔다.

이렇게 흠뻑 젖어 본 날이 언제이던가?

백두대간 주유를 멈출 수 없어

사작부터 끝까지 뼈속까지 젖었던 무모했던 날의 후련한 역설

차가운 계곡물에 몸을 씻고 따뜻한 난방이 들어오던 차창에 기대어

비몽사몽의 눈으로 밀리던 풍경을 바라보던 뿌듯하고 따뜻했던 귀환  

하산을 생각하는 아쉬움을 알았음인지

한치 앞을 막아서던 두꺼운 산 안개가 홀연히 바람에 날리어 간다.

내리는 비와 흘러가는 운무 사이로 잠시 지리산의 슬픈 얼굴을 본다

 

 

 

 

벽소령에서 음정 하산 길은 초행길이다.

내가 그리워 하는 만큼 지리산도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게다

오늘은 빗속에 운무 흐르는 벽소령 계곡길 풍경을 돌아보고 

야생화 흐드러질 8월의 여름이나

붉은 단풍이 물들어갈 9월에 다시 돌아 오라는 지리산의 마음

 

 

 

내려서는 길에 탕탕히 흘러내리는 폭포를 만났고

허리에 구름을 걸고 있는 장엄한 지리 산릉을 바라 보았다.

비는 하염없이 내리고

일행들과 함께 임도를 따라 빗물처럼 흘러갔다.

음정길가엔 접시꽃이 흐드러지게 피었고

비오는 날의 수채화처럼 구름이 감싸 흐르는 산릉과 마을은 그렇게 맑고

깨끗해 보였다.

그것은 행복한 실패였고 아름다운 동행 그리고 즐거운 귀환 이었다.

 

 

 

 

(후기)

2006년 지리주능선 순례의 길은 중도에서 마무리되었다.

지리산의 세례를 받았고

열심히 살아갈 수 있는 많은 날들이 아직 남아 있으니 아쉬움도 미련도 없었다.

대진 고속도로로 지리산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은 더 짧아졌고

그 무수한 산들 중에서도 해마다 몇 번씩 찾아가는 지리산이고 보면

내가 지리산엘 갈 수 없는 그 날은

세월이 내 가슴의 열정을 거두어 지리산의 그리움이 사라지는 그 날 뿐

인생의 황혼조차 그 발길을 막을 수 있을까?

 

함께 했던 귀연산님들게 감사하단 말씀 전한다.

항상 뜨거운 열정으로 귀연을 끌어가시는 청산님

그 정성어린 종주증

그 종주증에는 나의 기록이 아직 빈칸으로 남아 있다.

시간이 적혀지지 않은 종주증이 우리의 즐거운 추억을 증거하고

삭히지 못한 그리움을 다시 기억하게 한다.

귀연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너무도 많은 분들

그리고 언제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노력하시는 많은 분들

그 분들 때문에 자연으로 돌아가는 길이 항상 즐겁고 동행이

자랑스럽다.

 

지리산 비에 흠뻑 젖은 날!

격렬한 운동후 뜨거운 사우나의 호사를 누리고

낯선 고장의 어느 길목에서 한잔의 술잔을 뜨겁게 부딪히며 산과 살아가는 날의

기쁨에 젖는다.

지리산 반주후의 반주가 너무 훌륭했던

비가 와서 더 즐거웠던 유월의 어느날

 

숲향기 풀풀 날리는 눈부신 날 

아니면 지리산 능선의 단풍 빛이 고은 날

어느 산 모퉁이에서 지리산의 빛나는 교훈과 가슴이 따뜻한 사람들을

다시 만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