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전혀 의도되지 않은 변화와 파격이 갑작스런 희열을 가져오기도 한다. 그 희열은 전염성이 강하다. 우중산행을 각오하고 나선 길에서 예기치 않은 기쁨과 아름다움을 만난다. 지 지난주 장대한 비를 지리산에서 만났고 지난주에는 계룡의 주 능선에서 비대신 이슬과 나뭇잎에 고인 빗물에 흠뻑 젖었다. 안개가 오락가락하는 인적이 없는 능선을 거친 호흡으로 흐르다 황적능선의 아래 계곡에서 비에 불어나 차가운 물에 몸을 내 맡기고 나서 뼈에 사무치는 차가운 물이 시간이 흐르수록 따뜻하게 느껴짐이 놀라웠다. 나혼자 남겨진 계곡에서 육체의 땀을 씻어 내면서 정신까지 맑게 정화되는 느낌은 참으로 황홀한 경험이었다. 마르기가 무섭게 비에 젖는 등산화를 보며 마눌은 중독이라 했고 나는 살아가는 날의 새로운 변화와 기쁨이라고 했다.
산행지 : 학현리-신선봉-금수산-망덕봉-소용아릉-능강교 산행일 : 2006년 7월 9일 날 씨 : 흐리고 비 후 갬 동 행 : 새여울 산악회 26명
산행소요시간 : 7시간 40분
학현리 : 10:50 말바위 : 11:14 물개바위 : 11:19 못난이바위 : 11:25 신선봉/미인봉 갈림길 : 11:45 식사 : 12:00~12:20 절벽지대 : 12:35 신선봉 : 13:21 살바위고개 : 14:27 금수산 0.3km 상학리 2km 금수산 : 14:42 망덕봉 : 15:40 능강교하산 : 18:30
태풍이 온다고 했다. 고원의 능선에서 진군하는 기병대처럼 달려와 얼굴을 때리던 차가운 비의 희열 을 느껴본 사람은 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 비가 지나고 고원을 스쳐오는 진한 수림의 향기 그 바람을 목에 걸고 새롭게 열리던 푸른 하늘과 맑은 풍경을 내려다 본 사람 은 젖는 걸 두려워 하지 않는다. 비가 와도 좋고 안 와도 좋다. 새로운 세상을 만날 수 있는 기쁨이 콘크리트 둥지에 칩거하는 즐거움을 넘어 선다면….
내가 가지 않은 나라에서 구름이 흘러가는 길에 서 있는 기암과 청솔을 만나고 싶었다. 우리국토 허리의 강건한 암릉미야 백두대간을 주유 후에 가슴에 사무치도록 각인 되었고 길을 잃어 신의 나라를 방황하던 몽롱함으로 충북알프스 능선을 흐르던 낭만과 몽환의 안개를 어깨에 걸고 황정산과 수리봉 암릉 성곽 위에서 춤추던 푸르렀던 청솔의 감동은 늘 비 개인 맑은 하늘의 탄성을 남겼다. 오늘도 내가 태풍의 눈 한 가운데서 서 있을지 모른다. 그 아름다운 시간은 먹장구름과 비 사이로 잠깐 머물다 사라질지 모를 일이었다.
비가 내리지 않는 하늘은 조용히 가라앉아 있다. 그렇게 빨리 하늘로 비상하는 가파른 산세도 드물었다. 비보다 먼저 쏟아지는 굵은 땀방울은 신선의 나라 입국 비자였다. 고원 망루를 치고 오르는 비상하는 독수리의 눈으로 바라보는 산릉은 점입가경이다. 예사롭지 않은 산세에 가슴은 속절없이 또 부풀어 오른다. 오대산에서 발원하여 정선 영월을 거쳐 단양 제천을 가로지르는 남한강물은 충주 에서 고여서 거대한 호수로 차고 오른다.. 그 물길과 산이 어울려 만드는 풍경은 높이 오를수록 더 수려해진다.
내 사는 세상의 감동은 어디 까지 인가? 첩첩산하의 구비구비 마다 숨겨진 세상의 아름다움을 난 얼마나 찾아낼 수 있을까? 아니 가지 않은 길 뿐 아니라 지나간 추억을 따라 가는 순례의 여행 길에서도 낯선 기쁨과 설레임은 그렇게 쉽게 따라 나선다 해마다 한번씩 떠나는 지리산,소백산, 덕유산 종주길에서도 난 여전히 새로운 아름다움과 가슴 벅찬 감동을 만나고 있질 않은가? 그래서 살아간다는 건 존재한다는 단순한 의미를 넘어서서 아름다움을 찾아가는 여행길이다. 가는 길 비도 오고 바람도 불지만 세상을 담을 수 있는 가슴의 크기 만큼 세상의 아름다움을 바라볼 수 있다.
신선의 나라로 가는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읽었던 한 귀절이 고원의 산상에서 다시 나의 가슴을 흔든다. “비극은 인생이 짧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너무 늦게서야 깨닫는 것이다” “삶은 하나의 기회이며 아름다움이고 놀이이다. 그것을 붙잡고 감상하고 , 누리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 달린 일이다. 세상이 보여주는 최상의 것을 배우는 일은 우리 자신의 몫이다. 별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은 불행이 아니다. 불행한 것은 이를 수 없는 별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가슴을 흔드는 건 절륜한 어휘와 표현이 아니다. 나의 영원한 스승 대자연 속에서 내가 숱한 날 받았던 영감과 교훈이 가슴에 와 닿는 언어로 묘사되어 내 가슴을 관통하고 있음에 전율을 느꼈다.
누구에게나 기쁨과 희망을 불러내는 자기만의 주술이 있다. 가슴이 울리는 대로 살아간다는 것 가장 단순한 그 삶의 방식이 행복을 찾아가는 가장 쉬운 길이고 뜬구름 같은 세상사에 좀더 너그러워 질 수 있게 한다. 들개처럼 산야를 떠돌고 자연으로 돌아 가는 숱한 길 위에서 많은 것들이 돌아와 있었다. 동심 ,열정, 그리움, 설레임
사진:황태자
직벽을 올라서자 차가운 바람이 몰아친다. 바람에 이끼냄새 축축한 나뭇잎 냄새 그리고 비릿한 흙냄새가 실려온다 숲이 들썩이고 내 피부와 대기가 팽팽하게 긴장한다. 오감은 말하고 있다. “비가 들이치고 있다” 올 것이 왔다. 그래도 후회는 없다. 신선골의 멋진 풍경을 눈과 가슴에 미련 없이 담았다. 수채화처럼 조용히 가라 앉아 있는 낭만적인 하늘 빛 마저도
서둘러 능선의 평반에 자리를 잡아 점심부터 해결한다. 신선봉 전방 1.2km 지점이다. 식사 중에 한두 방울 빗방울이 떨어진다. 다시 먼 길을 떠날 여장을 수습하고 배낭에 방수포를 씌우고 출발을 하자 마자 날씨가 어두컴컴 해지더니 굵은 빗방울이 얼굴을 때린다. 예상했던 비 바람이 차지 않아 편안하게 몸으로 빗물을 긋기로 했다.
신선봉에는 신선의 그림자도 없고 쓸쓸한 돌무덤과 표석만 비에 젖고 있다. 빗물에 번쩍거리는 나뭇잎이 무성한 길을 헤치며 금수산으로 간다. 금새 축축히 젖어간다. 빗길을 혼자 거닐면 청승이겠지만 깊은 산중에서 만난 사람들이야 신선이 아니면 나와 동색인 사람들일 터 드러내놓고 온몸으로 받아내는 차가운 비에 야릇한 쾌감마저 인다. 30분 진행하여 898본 갈림길을 만나고 오른쪽 금수산 방향으로 진행한다. 왼쪽 길은 갑오고개로 떨어진다.
아무런 풍경이 없는 긴 길을 흠뻑 젖으며 걸었다. 자욱한 산 안개에 가리워져 어둑해진 산길은 인적마저 드물어 혹시 길을 잘못 잡은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자아낸다.. 가끔 금수봉 쪽에서 넘어오는 일단의 무리들을 만난다. 누군가 물었다 “사팔이세요?” “아닌데요…내 눈은 멀쩡한데요.” 비오는 날 내가 만든 썰렁한 죠크에 웃는다. 신선봉으로 회군하는 사파리 산악회 사람들이 참 많이도 왔다. 망덕봉에서 얼음계곡으로 하산하거나 금수봉 안부에서 상학리로 하산하는 것이 훨씬 빠를텐데 굳이 지나왔던 먼길을 따라 신선봉으로 되돌아 가니 이 비속의 그들이 걱정스럽다. 아까 절벽 난간에서 힘이 빠져서 오도가도 못하던 사파리 아가씨는 괜찮을까? 대한민국 비경 탐험을 위해서는 21세기 교각 같은 다리와 지칠 줄 모르는 체력 그리고 위대한 먹성은 필수과목인데…
금수산을 300m 남겨둔 살바위 고개는 상학마을 2km라는 이정표를 걸고 비에 젖어 있다 다시 되돌아 와서 암릉을 올라서야 망덕봉 방향이지만 악천우라 해도 여기 까지 와서 금수산을 지나칠 수는 없어서 다시 안개 속으로 혼자 길을 잡는다. 질척이는 등로를 따라 두 번의 계단을 지나고 나니 더 오를 곳이 없다 퇴계 이황이 그 절경에 감탄해 마지 않아 이름마저 바꿔버린 금수산은 비단 같은 풍경대신 자욱한 안개만 풀어 놓았다.. 봉우리에서 식단을 펼쳐놓은 일단의 사람들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소용아릉을 가고 싶은데 자욱한 비안개와 추실거리는 비로 전의 상실이다. 위험한 길을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다녀만 왔다는 건 무의미 할 것 같아 계곡하산을 생각했는데 운명의 수레바퀴가 준비된 시간을 위하여 내 발길을 되돌려 놓는다.
산으로님 일행과 합류하여 망덕봉 가는 길에 거짓말처럼 비가 그쳤다. 하루종일 내릴 것 같은 그 비가 멎고 순식간에 산안개가 허공으로 흩어져 간다. 무성한 수림사이로 금수산이 드러나 보인다. 참으로 변화무쌍한 대자연의 조화이다. 간발의 차이로 파노라마처럼 물결쳐 갈 금수산에서 바라보는 웅장한 조망을 잃었다. 언뜻언뜻 보이는 너무도 파란 하늘과 하얗게 피어나는 구름이 만들어 내는 황홀한 풍경에 목이 메는데 일대에 걸출한 망덕봉에서도 빽빽한 나뭇잎들이 사계를 가리고 있다.
어쨌든 얼음골로 하산할 생각은 멀리 달아나 버렸다. 신들의 경고장을 받고 퇴각하려던 사람들은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신의정원 으로 잠입을 시도한다. 산으로님,황태자님, 그리고 두분의 여자 산님들 신선나라 유람단은 5명이다. 낙차 큰 능선과 절벽의 난 코스로 방어선이 구축되어 있는 신선의 나라는 큰 비가 지나고 난 맑고 푸른 하늘아래서 꿈길인 듯 아름다운 비경을 펼쳐 보인다. 정말 이름처럼 설악 용아장성의 위용을 닮았고 황산의 빼어난 산수와도 견줄만 했다. 산으로님이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골수 산꾼들에게만 알려진 절경의 능선 이라고 했다.
사진 :황태자
한숨이 절로 난다. 숱한 대자연의 경이로운 길을 걸어 왔는데 또 오늘 만나는 풍광이 눈에 시리다. 푸른 세상이 아름다운 빛깔로 동화되어 한 폭의 그림을 만들고 있다. 필설의 의미가 무색해지는 시간이다. 이 시원한 바람과 수려한 풍경이 던지는 그림 같은 평화가 세속과 신선의 경계를 허물어 버린다. 쉴새 없는 탄성을 올리며 경개에 취해 혼미해진 채 그 길을 걸어 내리며 행복했다.
수 많은 날을 산으로 가고 되돌아 오면서 오랜 세월 동안 처음 보는 오늘의 풍경처럼 하루하루 특별한 나의 날을 만들어 왔다. 맑은 구름이 일고 하늘 빛이 저리 푸른 이 능선에서는 한탄할 그 무엇도 없다.
내 청춘이 너무 빨리 지나가 버렸다고? 내 꿈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암릉과 절벽을 타고 먼 길을 돌아와 첩첩이 흐르는 능선 위에서 저 아름다운 풍경에 취할 수 있으니 젊음은 아직 내 곁에 있지 않은가? 아직 돌아볼 것이 남아 있고 꾸어야 할 꿈이 남아 있으니 내 남은 시간이 더 아름답지 않을까?
내가 산이고 내가 신선이다. 나는 높이 올라 하늘이 되고 바람이 되고 구름이 된다. 수행과 구도가 남기는 진리처럼 고요하고 평온한 기쁨이 가슴을 세차게 흔들었다. 소용아릉에서…
구름이 피어나고 스러지듯 비바람이 몰아치다 맑은 하늘에 고운 무지개 걸리 듯 산행 길은 인생길을 닮았고 인생은 그저 무심하게 흐르는 거다. 그 길 위에서 때론 슬픔에 잠기고 때론 기쁨에 들뜨고 가슴 끌어안고 등 두드리며 그렇게 흘러 가는 거다 인생길에서 만나는 것들은 우연이 아니고 찾아가는 것들이 스스로의 선택임을 산은 명징한 세상의 이치로 깨우치고 있었다.
신선의 나라를 돌아 내려 텅탕히 흐르는 계곡에 몸을 눕히고 하늘을 본다. 차가운 물이 따뜻해 진다. 세상사 슬픔과 기쁨은 다 내 가슴 안에 있다.
|
'산행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마가 휩쓸고간 공룡능선을 돌아보며 (마등령-공룡능선-천불동) (0) | 2006.08.04 |
---|---|
가령산-낙영산-도명산 종주 (0) | 2006.08.01 |
하늘이 맑고 바람이 좋은날 (설악산 대청봉-봉정암-수렴동계곡) (0) | 2006.07.07 |
2006지리산종주-그 행복한 실패 (0) | 2006.06.28 |
2005 지리산종주 (0) | 2006.06.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