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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

한반도 (이동진 영화평)

패널 잘못고른 TV토론같은 '한반도'
  2006/07/16 12:46
이동진      조회 7239  추천 22

남과 북이 경의선 철도 개통식을 열려던 날,

일본은 1907년 대한제국과의 조약 내용을 내세워

이에 대한 모든 권한이 일본에 있다고 주장한다.

거액의 차관과 핵심기술 이전 사업의 철회를 무기로

일본이 대한민국 압박해오자,

사학계의 이단아인 최민재 박사(조재현)는

고종(김상중)이 숨겨둔 진짜 국새를 찾아

조약 문서에 찍힌 국새 도장이 가짜임을 밝히면

일본의 도발을 격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무력시위까지 벌이는 일본에

강력하게 맞서던 대통령(안성기)이

최박사로 하여금 국새를 찾도록 지원하는 사이,

대일유화책을 주장하는 국무총리(문성근)는

국정원 서기관 이상현(차인표)를 시켜

국새 찾기 작업을 방해할 것을 명한다.

 

강우석 감독의 한반도는 메시지에 올인한 영화다.

그리고 그 메시지가 위험하고 조악한 영화다.

1세기 전 우리를 짓밟은 일본 등의 외세를 배격하고

통일을 이뤄내야 한다고 시종일관

우렁우렁 열변을 토해내는 이 영화는

흡사 패널을 잘못 고른

TV 토론 프로그램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안긴다.

자기확신이 지나친데다

말이 많고 다혈질이라서

종종 얼굴 붉힌 채 화까지 내며

장광설을 늘어놓는 패널의 모습이 떠오르는 이 영화 어조는

돈 내고 극장에 들어가서 2시간 넘게

역사 강의를 들어야 하는 관객에게

불편함을 안긴다.

 

일본인 등장인물들이

자신들끼리도 한국어로 대화하게 하고,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와 대통령이 카메라를 노려본 채

정면 클로즈업으로 비장하게 대사를 읊도록 하는 연출은

최소한의 필터도 없이 관객에게 감정적으로

직접 호소하길 원하는 이 영화의 직설적 화법을

그대로 드러낸다.

 

1세기 전의 비극과 오늘의 상황을 누차 교차편집해

기어이 관객에게 정답을 쥐어주고야 마는

편집의 조급함도 마찬가지다.

초강력 대응으로 일본에 맞서

나라를 구하는 선의 축

대통령-국정원장-국방부장관이라는 설정에서

이 영화가 부르짖는 민족주의가

어떤 색깔인지 극명하게 드러난다.

 

투캅스 공공의 적 실미도

숱한 흥행작을 내놓은 강우석 감독의 재능은

매력적인 캐릭터를 만들어내고

감칠맛나는 영화적 살을 붙여내는 데 있다.

그러나 캐릭터의 생생함을 포기하고

뼈 뿐인 사건 만으로 이어붙인 한반도를 보다보면

왜 그가 이런 선택을 했는지 못내 아쉬워진다.

 

애국자와 매국노 밖에 없는

이 영화의 종잇장 같은 캐릭터들을 연기하며

배우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치켜 뜬 눈에 핏발을 세우고

시사 다큐 프로그램의 MC처럼

한 단어씩 힘주어 씹어 뱉듯 대사를 처리한다.

 

가장 중요한 캐릭터인 최박사는

극 초반 주부 대상 교양강좌에서

(명성황후 시해일인) 11월17일이 무슨 날인지 아느냐고

질문을 던진 후 답을 얻지 못하자

초컬릿 주는 날은 기억하면서

국모가 시해된 날은 모르냐

마구 반말로 호통친다.

 

주부를 연예인 타령이나 하고

역사의식 없는 속물로 그려낸

이 장면의 여성 비하적 시선은 잠시 접어두더라도,

11월17일이 무슨 날인지 알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이 글을 쓴 사람을 포함해

아마도 그걸 모르고 있을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게)

내려다보며 꾸중할 수 있다는 도덕적 우월감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길이란 오직 하나 밖에 없고,

내가 그 길을 먼저 가고 있으니

무조건 따라와야 한다고 강변하는

이 영화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의 반대란 이 아니라

독선임을 새삼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어쩌면 이 영화의 진짜 문제는

메시지의 내용과 말하는 방식이 아닐 수도 있다.

정치와 달리 최대한의 상상력을

허용해야 하는 창작의 영역에선

맹목적 반일이든 위험한 민족주의든

하고 싶은 말을 맘껏 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면

결국 떠오르는 것은 보들레르의 말이다.

누구에게도 자신을 말할 권리가 있다.

단, 남을 지루하게 하지 않는 한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