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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을 맞는 인간의 위엄 - 플라이트93 (이동진 영화평)

마지막을 맞는 인간의 위엄-플라이트93
  2006/09/08 12:28
이동진      조회 4895  추천 11

 

 

‘플라이트 93’(United 93)은 제목이 뜨고 난 뒤부터

후일담을 담은 엔딩 자막이 흐르기 직전까지

상영 시간 내내 가속도가 붙는다.

비행기가 떠나기 전 공항 풍경을

시속 4㎞의 걷는 속도로 한가롭게 묘사하던 영화는

마지막 장면에서 시속 800㎞로 직하강한다.

 

영화가 시작되고 1시간까지는

세밀하기 이를 데 없는 디테일에

지루함을 느낄 수도 있지만,

긴장을 놓지 않고 보면

마지막 5분엔 아찔할 정도의

심리적·물리적 속도감을 체험할 수 있다.

이 영화는 9·11 테러 당시 공중 납치당한 세 대의 여객기가

월드트레이드센터와 펜타곤에 충돌한 후,

피츠버그 동남쪽에 추락한

네 번째 여객기 안에서 일어난 일을 다뤘다.

감독 폴 그린그래스는

1972년 북아일랜드의 시위현장에서 발생한 유혈사태를

극사실주의적으로 다룬 ‘블러디 선데이’로

크게 주목받은 바 있다.

 

그는 ‘블러디 선데이’에서와 유사한 형식으로

거대한 비극의 한복판에 다시 카메라를 들이댔다.

들고 찍는 카메라는 시종 흔들리고

장면 연출은 흡사 다큐멘터리 같다.

개별 캐릭터에 명확한 성격을 부여하기보다는

인물군상의 다양한 스케치를 통해

‘그때 그 자리’의 공기 자체를 살려내려 한다.

관객들에게 얼굴이 익은 배우가 거의 없는 이 영화는

한쪽을 단죄하며 사건을 극화하는 대신,

참극의 순간을 두 눈 부릅뜨고 냉철히 응시한다.

그런데 월드트레이드센터를 강타하며

21세기 초반의 이미지를 결정지은 두 비행기 대신,

감독은 왜 하필 테러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벌판에 추락해버린 ‘유나이티드 93’ 비행기를 선택했을까.

그것은 그 비행기 안에서

‘드라마’가 있었기 때문이다.

 

앞선 세 비행기의 자살테러 소식을

테러범과 승객들이 모두 알게 된 후

‘유나이티드 93’에선 갖가지 드라마가 펼쳐진다.

죽음을 예감한 사람들은

가족에게 전화를 걸어서

하나같이 “사랑한다”는

마지막 말을 남긴다.

테러범들의 리더 역시 비행기에 오르기 전,

가족과 최후의 통화를 하며

“사랑한다”는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거대한 혼돈과 공포 속에서,

어떤 이들은 흐느끼고

어떤 이들은 기도를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칼과 폭탄을 가진 범인들에게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돌진한다.

정치적인 독법을 떠나서도

이 영화가 흥미로운 까닭은 여기 있다.

‘플라이트93’은 마지막을 맞는

인간의 위엄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