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 셋이 얽힐 때 발생하는 일 - 해변의 여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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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감독은 늘 같은 말만 되풀이한다, 라고 흔히들 이야기한다. 그럴 수도 있다.
그와 흔히 비교되는 프랑스 거장 에릭 로메르의 영화들이 그렇듯, 그의 영화들은 연작으로 볼 때 좀더 잘 이해된다. 신작 ‘해변의 여인’(31일 개봉)에서도 여전히 그는 술과 침대, 남자와 여자를 엮어 ‘4원소론’을 설파한다. 이 영화 속에 “자연은 왜 수컷과 암컷으로 나눠가지고. 지겨워, 진짜” 라는 대사를 넣어가면서도, 다시금 탁월한 관찰력과 표현력으로 남자라는 ‘수컷’과 여자라는 ‘암컷’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다룬다. 그리고 작품 속 공간들은 각운처럼 반복·변주되며 의미를 생성한다.
그러나 ‘해변의 여인’은 같은 자리를 맴도는 것 같은 그가 한걸음씩 어느새 얼마나 많이 걸아왔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같은 말이라도 화술과 태도가 달라지면 새로운 언술이 될 수 있다. 이 신작을 초기작 ‘돼지가 우물에서 빠진 날’이나 ‘강원도의 힘’ 같은 영화와 비교하면, 주제를 제외한 거의 모든 것이 바뀌었음을 새삼 느낄 수 있다.
이전의 그 어느 작품들보다 온도가 높고 (그래봤자 상온 이하라서 여전히 쌀쌀하지만), 유머의 당도(糖度)가 높아진 (여전히 씁쓸한 뒷맛이 남지만) ‘해변의 여인’에는 심지어 동성간의 우정에 대한 묘사와 슬랩스틱까지 들어 있다. 초기작들에선 꿈쩍 않던 카메라가 이젠 시침 뚝 떼고 줌인(초점거리를 변화시켜 피사체에 접근하기)과 줌아웃까지 넘나든다. ‘치정살인극’으로 데뷔했던 감독은 이제 쉴새없이 낄낄대게 만드는 ‘섹스코미디’를 만들며 자기모멸에서 자기연민으로 무게중심을 슬며시 옮겼다.
영화감독인 중래(김승우)는 시나리오 작업에 난항을 겪다 미술감독 창욱(김태우)에게 여행을 제안한다. 창욱이 함께 데려온 애인 문숙(고현정)에게 관심을 갖게 된 중래는 바닷가 숙소에서 결국 그녀와 하룻밤 인연을 맺는다. 일행이 서울로 돌아온 이틀 뒤 혼자 바닷가에 내려간 중래는 우연히 만난 유부녀 선희(송선미)와 술을 마시다가 숙소로 함께 간다. 그런데 그 광경을 문숙이 몰래 지켜보고 있었다.
‘해변의 여인’의 형식적 핵심은 삼각구도에 있다. 남자 둘과 여자 하나, 혹은 여자 둘과 남자 하나가 얽힐 때 발생하는 성적 긴장감과 그 모든 소동을 통해 감독은 기이하게 얽힌 욕망의 트라이앵글을 그린다. 셋이 함께 있는 장면에서 무심히 지켜보던 카메라는 그 중 둘이 본격적으로 대화할 때 두 사람에게로 줌인해 들어가면서 삼각구도를 깨뜨리고 영화적 긴장을 응집한다.
사실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선 배우가 구사할 수 있는 폭이 그리 넓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해변의 여인’의 연기 비중이 그 어떤 전작보다 커지게 된 데는 고현정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그는 ‘홍상수스러움’에 잘 녹아 있으면서도 뛰어난 대사 처리 능력과 생생한 연기 디테일로 앙큼한 듯 맹한 듯 푼수인 듯 엉뚱한 듯 입체적인 여성 캐릭터를 훌륭히 살려냈다. ‘해변의 여인’은 홍상수 영화 중 여성들이 ‘주체’로 중심을 이룬 최초의 작품이다.
김승우는 ‘수컷’의 맹목성을 잘 그려냈고, 김태우는 홍상수의 작품세계를 가장 잘 이해하는 배우의 면모를 보인다. 송선미에게선 홍상수식 연기연출에 흥미를 느끼고 빠져들기 시작한 배우의 흥분이 느껴진다.
극의 마지막 장면에서 바닷가를 달리던 문숙의 차가 모래밭에 빠지자 두 남자가 밀어서 꺼내준다. 최후로 빚어진 이 삼각구도는, 그러나 아무런 해프닝을 빚지 않은 채 문숙의 차가 서서히 멀어지는 것으로 소멸된다. 비루하고 생생하게 폐곡선을 만들며 같은 자리를 맴돌았던 욕망의 관성은 새로운 전기를 맞을 수 있는 걸까. 익숙한 것과 새로운 것 사이에서, 홍상수는 여전히 흥미진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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