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영화

'안성기'인터뷰 - 이동진 기자

50년.

한가지 일만 50년을 하고 살기란

정말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더구나 그 일이 대중의 관심과 사랑을 에너지 삼아서

끊임없이 자신을 표현해야 하는 연기라면?

 

안성기씨는 50년을 하루처럼 살아온 사람이다.

아역 시절을 포함,

모두 150여편의 영화를 찍으면서

한국영화의 대들보 역할을 하며

지난 30여년을 살아온 그는

이제 모든 영화인들이 그 그늘에서

의지해 쉴 수 있는 거목이 됐다.

 

제11회 부산국제영화제가 성황리에 막을 내리던 날,

축제의 도시 부산에서 그를 만났다.

 

-오래 전부터 인연을 맺어온 부산영화제에서

작년부터 부집행위원장으로 일하고 계신데요.

 

"9일간 정신없이 지냈지만,

올해도 잘 치러낸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해가 갈수록 점점 더 성장하는 것 같아서 뿌듯하지요."

 

-첫날 개막식 후 뒷풀이 때

이례적으로 술을 많이 드셨다면서요?

원래 술을 잘 안 드시잖아요.

 

"그날 배우의 밤 행사가 있었죠.

제가 주최측이다보니까

후배들을 일일이 챙겨야 하는데

오랜만에 후배들을 많이 만나 술을 마시니

기분이 좋아져서 저도 모르게 많이 마셨어요.

그런데 내가 그날 이광조의 노래 '오늘 같은 밤'을 불렀다는데,

이게 도통 기억이 안 나는 거 있죠?

필름이 끊어진 것은 처음이라서 당혹스러웠는데,

제가 망가지니까 다들 너무 좋아하시더라구요."(웃음)

 

-올해 유달리 바쁘셨던 것 같아요.

 

"이렇게 바쁜 적이 있었나 싶네요.

올 한 해 참여한 영화만 해도

'한반도' 라디오스타' '묵공' '화려한 휴가',

이렇게 4편이나 되는데다가

스크린쿼터 축소가 현실화되는 바람에

올 초부터 축소 반대 운동에도

전력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어요.

부산영화제도 해야 하고,

갈수록 부르는 곳도 많고.

이렇게 계속되면 정말 문제가 심각하겠다 싶어서

내년에는 충전 좀 하려고 합니다."

 

-'라디오스타'로 관객들의

커다란 사랑을 받게 되셔서 더 바쁘셨던 것 같습니다.

부산에 오기 직전에 찾아보니

이 영화가 현재 인터넷 포털 네이버의 관객 평점에셔

9.34로 역대 국내외 모든 영화를 통틀어

최고 점수를 기록하고 있더라고요.

 

"저도 영화 숱하게 해봤지만,

이런 반응은 처음이었어요.

'라디오 스타' 잘 봤다고 말씀을 전해오시는

관객들 얼굴 하나하나가

그렇게 밝고 행복하실 수 없더라고요.

사실 찍고나면 제 영화를 잘 안보는 편인데

이 영화는 정말 많이 봤죠."

 

-몇 번이나 보셨어요?

 

"무려 열다섯번을 봤죠.

내가 봐도 자꾸 눈물이 나.(웃음)

진정으로 깊고 따뜻한 영화라는 생각에 자랑스러워요.

박중훈씨와 저의 20년 이력이 녹아든 영화라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이준익 감독의 내공이 크다는 것을 새삼 느꼈어요."

 

-극중 버스 안에서 자신을 애타게 찾는

박중훈씨의 라디오 방송을 들으면서

울고 싶은 속마음을 숨기고

김밥을 우겨 넣는 장면이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그게 맨 마지막에 촬영한 장면이었어요.

그때 박중훈씨가 터뜨려 우는 연기를 해야 되는데

그 직후에 그에 대해 반응해야 되는 연기라서

나도 함께 막 울면 안된다고 판단했어요.

박중훈씨가 먼저 장면을 따로 찍고나서

내가 어떻게 할지 되게 궁금해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되는대로 했다고 했죠.

정말 되는대로 했거든요.(웃음)

그냥 김밥에 목이 메는 느낌을

표정 변화 없이 표현하자고 생각했는데,

정말 연기하면서 마음이

미어지는 느낌이 되더라구요."

 

-지금은 광주민주화항쟁을 다룬

'화려한 휴가'를 찍고 계시죠?

절반쯤 찍으셨나요?

 

"60%를 넘겨 찍었어요.

공수특전단 출신 예비역 대령 역입니다.

시민군을 체계적으로 정비하고 이끄는 역할인데

제가 봐도 꽤 매력적인 배역이예요.

당시를 충실히 재현하되,

역사적 비극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영화적으로도 재미있는 작품이 될 것 같습니다."

 

-연기 생활이 벌써 50년 째라는 것을 생각하면

어떤 기분이 드십니까?

 

"실감도 안 나고

전혀 감흥이 없어요.

제 나이가 쉰넷이라고 이야기할 때처럼

그냥 숫자의 의미 밖에 없어요.

평생 연기를 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왔는데

50년이 됐다고 뭐 그리 새삼스럽겠어요.

연기는 제 삶 자체였거든요."

 

-그래도 같은 일을 50년 했다는 게

좀 징글징글하게 느껴지지 않으세요?(웃음)

 

"보시는 분들은 그러실 것 같아요.

저 사람, 아직도 하네, 싶으시겠죠.(웃음)

1980년 쯤 태어난 젊은 관객이라면

정말 아주 어려서부터 봐왔는데 여전히 하니까

그렇게 말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사실 배우는 자신만 흔들리지 않고 성실히 살면

꽤 오래할 수 있는 직업입니다.

나이에 맞게 역할이 있기 마련이니까요.

그래도 배우로서 가치를 잃으면

살아남기 어렵긴 하죠."

 

-다섯살 때 찍은 데뷔작

'황혼열차' 촬영현장 기억이 나세요?

 

"거의 안 나는데,

철로 위를 걷다가 기차가 다가오면

2-3미터 아래로 뛰어내리는 연기를 했던 것은

선명히 기억납니다.

진짜 기차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가

펼쳐진 담요 위로 뛰어내리는 연기였는데

어린 나이에 정말 무서웠거든요."

 

-예전에는 참 영화를 위험하게들 찍으셨던 것 같아요.

전쟁 장면을 찍을 때는 실탄 사격도 했었다면서요.

 

"예, 그런 적도 있었다고들 하더라구요.

참 위험하게들 찍었죠."

 

-'바람불어 좋은 날'처럼

20대 때 찍은 영화들을 보게 되면

어떤 생각이 드세요?

얼마전에 티비에서 그 영화를 다시 하던데요.

 

"나도 그거 봤어요.

다들 내가 주름이 많다고 해서

난 원래 그런 줄 알았는데,.."

 

-왜, '그 주름에서 헤엄치고 싶다'는 찬사까지 있었잖아요.(웃음)

 

"맞아 맞아.(웃음)

그런데 티비에서 보니 그때는 정말 팽팽했더라구요."(웃음)

헌데, 물론 그때는 어려서 그랬겠지만,

참 배우로서 분위기가 없구나 싶더라구요.

연기도 깊이가 별로 없구요."

 

-영화계 취재를 10년 넘게 해왔지만,

안성기씨를 나쁘게 말하는 사람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기껏해야 술을 잘 안산다는 것 정도였죠.(웃음)

 

"거, 누가 그런 바른 말을 해요?"(웃음)

 

-그런데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좋은 이야기만 들을 수 있죠?(웃음)

 

"글쎄요.(웃음)

전 정말 그냥 제 스타일대로 해온 것 밖에 없어요.

남들한테 피해주지 않으면서,

오직 배우로서 장수하고 싶었던 것 뿐입니다.

그러다보니 뜻하지 않게

모범생이 되어버린 거죠.

사실 제가 성인 연기자로 영화계에 다시 뛰어들게 된

70년대말은 한국영화의 위상이

바닥이었던 암흑기이죠.

당시 배우들이 사회적으로 대접을 못 받는 것에 대해

좋은 의미의 반발심이 있었어요.

배우들도 감정이나 행동 모두

절제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전 어차피 평생 해야 할 것이니까

잘 해야 한다고 결심한 게

오늘까지 이어지게 된 거지요."

 

-화를 내시는 걸 본 사람이 거의 없던데요?

 

"제가 좀 반응이 늦어요.

남이 제게 불같이 화를 내도

가만히 그 사람 입장을 곱씹어보면

이해가 되는 것이,

화를 낼 수가 없는 거죠.

김지훈 감독은 그러더라구요.

따귀를 때리는 장면을 찍을 때

세게 한 번 때리면 그걸로 끝나는데,

제가 마음이 모질지 못해서

때리는 게 미안해지는 바람에

그냥 비비듯이 때려서

결국 엔지 때문에 너댓번은 더 때린다는 거죠.

그러면 맞는 사람 입장에선

그게 더 아프다는 거예요."(웃음)

 

-국민배우라는 조금은 이상한 호칭으로

오래 전부터 불리셨잖아요.

 

"그게 참 희한한 호칭이죠.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 같고.

국민배우라는 말에 맞게

모범을 보이고 싶다는 생각도 없지 않지만,

그것보다는, 내가 이렇게까지 거론되니

'내가 다른 사람 정도만 실수해도

그걸로 끝이겠구나' 하는 생각은 들죠."(웃음)

 

-오래 전부터 베드신을 안 하는 걸로 알려져 있잖습니까.

잔혹한 악역도 맡지 않으시는 것 같구요.

 

"이젠 나이가 들어서

베드신 제의도 끊어졌어요.(웃음)

한 10년전에 말총 머리를 하고서

가위춤을 췄던 영화가 있었어요."

 

-아, '헤어 드레서'요?

 

"맞아요. 그 영화를 찍고나니 

사람들이 굉장히 싫어하더라구요.

관객과의 대화에서 한 관객이

'다시는 이런 영화 찍지 마세요'라고

굳어진 표정으로 충고하기까지 했으니까요.

사실 모든 배우에겐 결국 고유한 이미지가 있기 마련인데,

굳이 제가 관객의 기대를 넘어서는 배역을 자청해서

혼란을 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제가 비교적 좋은 성격의 캐릭터를 많이 연기했는데,

그게 배우로서 한계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이 분야만도 끝이 없을 정도로 넓으니까요.

80년대에 강한 배역을 많이 했을 때는

제가 잭 니콜슨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지금 돌아보니 전 천상 해리슨 포드인 것 같아요.

친근한 이미지로 대중에게 사랑받는

그런 종류의 연기자라고 할까요."

 

-왠지 이미지로는

혹시 부인께서 늦잠 주무시면,

토스트 굽고 커피 끓여서

침대로 직접 가져다 주실 것 같습니다.(웃음)

가정에선 어떠세요?

 

"설마 그럴 수 있겠어요.(웃음)

솔직히 가사 노동은 거의 참여 안 해요.

단, 결혼 생활 21년째인데.

대화는 어느 부부보다 많이 한다고 자부하죠."

 

-지금 배우로서 경력을 마친 뒤

묘비를 세운다고 가정하시고,

그 묘비에 출연했던 작품을

딱 세 작품만 새겨야 한다면

어떤 작품을 선택하시겠어요?

 

"3편이 아니라 20-30편은 새겨야죠."

 

-근데 불행히도,

그 묘비가 이름 빼면

딱 영화제목 3편 밖에

못들어갈 정도로 작거든요.(웃음)

 

"그러면 차라리 묘비를 세우지 말라고 하겠어요."(웃음)

 

-함께 했던 수많은 감독님들께 미안해서 그러시죠?(웃음)

 

"아니, 정말 한 편 한 편이 다 내게 소중해서 그래요."

 

(그러면서 그는 '바람불어 좋은 날'과 '만다라'부터 '라디오스타'까지,

수많은 출연작을 일일이 열거해가며

제각각 왜 중요한지를 말하기 시작했다.

손가락을 꼽아가며 설명하는

그의 표정을 지켜보는 사람의 입가에도

자연히 미소가 떠올랐다.

행복에 얼굴이 있다면,

바로 이런 모습이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