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이황선생은
1561년에 먼저 도산서당을 건립하셨다.
선생이 돌아가시자, 문인들의 발의에 의해 서당이 있던 자리 위쪽에
도산서원이 건립되었다.
퇴계선생의 휘(諱)는 황(滉)자요. 아호는 퇴계도산옹(退溪陶山翁), 퇴도(退陶), 혹은 도옹(陶翁)으로 불리었다. 시호는 문순공(文純公)이시다.
선생은
조선의 연산조(燕山祖)에 탄생하시어, 선조(宣祖) 임금 때에 沒하였으니
5대의 임금을 거치신 셈이다.
밤이면 석대에 관솔불을 밝히고 학문을 익혔으리...
12세에서 20세 이르는
약 8년 동안, 주역(周易) 삼천독(讀)을 했다하니, 일찌감치
공부의 완성단계에 이르렀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서원의 경우 대부분 단청을 하지 않지만,
도산서원만큼은 단청을 하였다.
이는 퇴계선생의 학문적 업적을
특별히 예우했음을 알 수 있다.
과거 급제 후, 안동부사 등의 지방관과 의정부(議政府)의 우찬성(右贊成)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 및 춘추관의 성균관사 등을 역임했다.
하지만, 선생은 뜻 없는 관직에서 72번이나 벼슬을 사양함으로써 출세에 연연하지 않았던 면모를
여실히 보여준다.
도산서원은 안동댐이 내려다보이는 경관 좋은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이처럼
권력을 탐하지 않음으로써
주자학을 발전시켜 독보적인 퇴계학을
정립할 수 있지 않았을까...
1970년에 신축된 옥진각은 퇴계선생의 유물전시관이다.
선생 몰하신지,
50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건만, 선생의 학문적인 업적은 면면이 흘러
지금도 우리들의 정신에 남아있다.
오늘날
한반도와 동양은 물론 아메리카며 독일 등,
서양에서조차도
그의 학문은 높이 평가되며,
연구활동이 활발하다고 한다.
퇴계선생이 이룬 금자탑인 성학십도.
그 중에 포함된 태극도를 참고한 삼태극은
도산서원의 상징처럼 되어있다.
특히 1989년에 중국의 북경에서, 1990년에는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퇴계학국제학술대회(退溪學國際學術會議)가
열린 바 있다.
제자들의 기숙사 격이었던 농운정사.
휴식을 위한 공간인 觀瀾軒 부분
이는
사회주의 사회에서 소홀히 했던
인본주의사상을 모색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하니, 선생에게 붙여진
海東의 朱子라는 호칭이
결코 넘치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도산서원으로 가는 길.
관리하기에는 아스팔트 포장이 용이하련만,
안동시는 선생이 밟고 다녔을 흙길을 그대로 남겨두었다.
가장 감명을 주는 대목은 마지막 순간까지
제자들과 학문 토의 중
앉은 채로 운명하셨다고 한다.
선생이야말로
이 시대가 본받아야 할
진정한 스승의 상이 아닐까...
퇴계선생의 생가로 가는 길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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