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한 해 최고의 한국영화들을 뽑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한 해 100편이 넘는 한국영화가 개봉했습니다.
1996년 영화 분야를 처음 취재하게 된 이래
가장 많은 편수의 영화가 개봉한 셈이지요.
예전엔 개봉하는 한국영화라면 거의 다 보았지만,
올해는 워낙 편수가 많았던 터라 그렇지 못했습니다.
더군다나 ‘세계영화기행’ 시리즈를 연재하느라고
올 한 해 4개월 가까이 외국에 나가 있었기 때문에
놓친 영화가 더 많았지요.
나중에라도 챙겨보려고 노력했지만,
여전히 못 본 영화들이 있네요.
중요 영화는 거의 다 봤다고 판단하지만,
‘사이에서’ ‘방문자’ ‘신성일의 행방불명’ ‘길’을 놓친 것이
특히 마음에 걸립니다.
이 영화들은 나중에라도 꼭 챙겨봐야겠어요.
아래 리스트는
작년 12월1일부터 올 11월30일까지
(영화제 상영을 제외하고)
정식으로 개봉한 한국영화 중
제가 가장 뛰어나다고 판단하는
12편의 영화 목록입니다.
개봉영화 목록을 보면서
한 편 한 편 고르다보니,
지난 한 해 충무로는 격변 속에서도
참 좋은 영화들을 많이 내놓았다는 판단이 듭니다.
매년 10편씩 고르다보면
중하위권으로 갈수록
‘이걸 넣어야 하나’ 고민할 때도 없지 않았는데,
올해는 리스트에 넣을 영화들이 넘치더군요.
그게 올해 ‘베스트 10’이 아니라
‘베스트 12’가 된 이유이기도 하구요.^^
물론 순전히 주관적인 판단 기준에 의한 것이니
그냥 재미 삼아 보세요.
여러분 각자의 리스트와도 비교해보시구요.^^
1위. 가족의 탄생
제가 본 올 최고의 한국영화는
‘가족의 탄생’입니다.
시사회에서 영화를 보고 난 직후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뭔가 뜨겁게
솟구쳤던 순간을 잊을 수가 없네요.
기본적으로 이야기가 흥미진진한 데다
꽤 많은 인물들이 하나같이 생생하기 이를 데 없었지요.
예상을 벗어난 결말을 볼 때는
흡사 눈의 비늘이 벗겨지는 느낌이었구요.
생활의 편린을 무심하게 스케치하는 듯
그 속에 삶 전체의 딜레마를 실어내는 연출력은
정말 탄복할만한 수준이었습니다.
연기 역시 하나같이 최고 수준이었지요.
특히 3부로 꾸며진 이 영화 속
2부에 해당하는 가운데 토막의 모녀로 나온
공효진과 김혜옥의 연기는
잊지 못할 정도로 훌륭했습니다.
좋은 이야기와 좋은 연기와 좋은 연출,
거기에 장면장면에 고스란히 담긴
만든 이의 따스한 마음.
(실제 김태용 감독을 만나고서
‘아, 이런 사람이 이런 영화를 만드는구나’
싶었을 때 참 흐뭇하더군요^^)
이 영화가 올해의 베스트가 아니라면
대체 어떤 영화가 최고란 말입니까.
2위. 해변의 여인
이 영화는 걸작입니다.
그리고 하나 더.
이 영화는 홍상수 감독만이
만들 수 있는 작품입니다.
저는 홍상수 감독을 예술가로서
존경해왔습니다.
‘강원도의 힘’처럼
악 소리나게 좋았던 작품도 있었고,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처럼
상대적으로 실망스런 작품도 있었지만,
그의 모든 작품은
충분히 주목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해왔습니다.
술과 침대와 남자와 여자라는
홍상수 특유의 ‘욕망의 4원소론’은
‘해변의 여인’에서 그 특유의 날카로운 관찰력과
스스로를 모멸할 줄 아는 용기를 잃지 않으면서도
새롭게 연민과 우정이라는 감정까지
탁월하게 흡입해내며
미학적으로 진화했습니다.
감독의 의도를 충분히 살려내면서도
배우의 존재감을 강력히 발산했던
고현정의 얄미울 정도로 지적인 연기도
지적해둘 만 하겠죠.
‘극장전’에서 ‘해변의 여인’으로 이어지는 최근의 홍상수는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서
‘강원도의 힘’과 ‘오! 수정’으로 이어졌던
초기의 홍상수만큼이나 뛰어납니다.
저는 지금 그의 신작을 손꼽아 기다립니다.
3위. 괴물
한국 관객의 수준이 상당하다는 것은
‘괴물’과 ‘왕의 남자’가
역대 흥행순위 1-2위라는 사실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역대 최고의 흥행 성적을 거둔 영화를
비평적으로 극찬한다는 것은
사실 좀 재미없는 일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괴물’을 처음 봤을 때의
그 짜릿한 쾌감을 부정할 순 없습니다.
‘괴물’은 정말 잘 만든 오락영화지요.
그리고 산업적으로 볼 때
'쉬리' 이후 가장 중요한 한국영화일 겁니다.
‘살인의 추억’이 나왔을 때
“현재 충무로에서 대중영화를
가장 잘 만드는 사람은 봉준호 감독이다”라고 쓴 적이 있었는데,
‘괴물’은 그때 그 판단이 옳았고
여전히 유효하다는 확신을 준 작품입니다.
괴수영화라는 싼 티 폴폴 나는 장르 속으로 뛰어들어
가족에 대한 이야기에서
한국사회에 대한 정치적 코멘트까지
효율적으로 담아낸 이 작품은
정말 풍성하고도 재미가 넘치는 영화입니다.
장르의 관습을 채택하기도 하고 부정하기도 하면서
그 역설 속에서 넘치는 동력을 얻어내는 이 작품은
미학적 배짱이 두둑한 멋진 작품입니다.
송강호와 변희봉이
비오는 한강둔치에서 보여줬던 연기도
정말 빼어났지요.
이제껏 세 편의 영화를 통해
정말 많은 것을 얻어낸 봉준호 감독이지만,
앞으로 그의 가능성은
그 이상일 것이라고 믿습니다.
4위. 라디오 스타
저는 ‘라디오 스타’가
품성으로 만든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테크닉의 측면에서 이준익 감독만큼
영화를 만들 줄 아는 감독들은 있을지라도,
그와 같은 품성으로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감독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봅니다.
‘라디오 스타’는
안성기-박중훈-이준익이라는
세 사람의 이력과 품성과 됨됨이가
그대로 녹아 있는 작품입니다.
미학적인 분석을 넘어선
이 영화의 거대한 감동과 매력의 비밀은
아마도 거기에 있을 겁니다.
뻔할 수 있는 이야기,
대단하지 않게 느껴지는 이야기 속으로
관객을 조금씩 끌어들여
어느새 흠뻑 영화 속에 젖게 하는 이 휴먼 드라마는
충무로가 한국영화를 사랑해온 관객들을 위해
오래 전부터 정성스레 준비해온
선물 같은 영화지요.
‘라디오 스타’의 마지막 정지 화면은
올 최고의 라스트신이라고 할 만 하구요.
이준익 감독이 여지껏 만든 영화는 모두 4편.
저는 그의 영화가 점점 더 좋아집니다.
5위. 타짜
최동훈 감독의 재능은
정말 충무로에서 쉽게 발견하기 어려운 쪽의 재능입니다.
두 편의 영화를 통해서 그가 창조해낸 영화세계는
스릴러 장르에 대한 충무로의 오랜 콤플렉스를
일순 날려버리기에 충분한 것이니까요.
기술적으로 영화 매체에 정통하면서도
생생한 캐릭터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어가는 화술도 갖췄고,
거기에 소재를 치밀하게 사전 취재해
풍부한 현실감을 만들어내는 성실함까지 겸비했지요.
그의 작품을 볼 때면
이제 두 편을 만들었을 뿐인데도,
주저하거나 주눅든 기색이 전혀 없이
맘껏 미학적인 욕구를 발산하는 사람의
뛰어난 작업을 보는 쾌감이 있습니다.
이 영화 후반부에서
고니가 최후의 일전을 치르기 위해
배 안으로 걸어들어갈 때의 (그래봐야 기껏 도박장 입장인데도 불구하고)
그 무시무시한 분위기라니요!
딱 다섯 시퀀스에 나왔을 뿐인데도
김윤석은 엄청난 카리스마를 내뿜었습니다.
정확하고 성실한 연기를 보여준 조승우는
정말 신뢰할만한 배우란 확신을 주고요.
좀 익숙한 감이 없지 않지만
백윤식의 모습은 진짜 대체불가능한 배우란 느낌을 주고,
김혜수를 볼 때는
일생일대의 배역을 맡은 배우를 볼 때의 즐거움이 느껴지죠.
전작의 염정아에서도 그랬던 것을 보면,
최동훈 감독은 정말 배우(특히 여배우!^^)를 보는 눈이
남다른 것 같습니다.
6위. 삼거리 극장
미학적인 야심과 기발한 상상력과
장르적인 도전의식에서 볼 때,
‘삼거리 극장’은 ‘2006년의 지구를 지켜라’ 같은 작품입니다.
고만고만한 오락영화를 만들면서도
상업적 고려에 따라 수도 없이 멈칫거리는
충무로의 허다한 데뷔 감독 작품 속에서,
스릴러와 뮤지컬을 접목한
생경한 장르 영화를 만들면서도
브레이크를 밟지 않고 끝까지 밀어붙이는
전계수 감독의 미학적 고집은
실로 높이 평가할 만 합니다.
기술적으로 좀 버거워보이는 부분도 보이고
마름질이 덜 된 듯 거친 부분도 드러나지만,
이 영화의 에너지와 야심은 정말 대단하지요.
전반부는 좀 아슬아슬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후반부에서는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쭉쭉 뻗어나가면서
영화 안과 영화 밖,
판타지와 리얼리티,
매체 자체에 대한 고민과 삶 자체에 대한 고뇌를
넘나드는 모습을 보다보면
그 넘쳐나는 창작력에 박수라도 치고 싶어집니다.
이 신기하고 매력 넘치는 영화를
며칠 전 멀티플렉스 극장에서 혼자 봤습니다.
개봉 첫 주인데도 관객이라곤
저 외에 딱 두 사람 더 있더군요.
정말이지 안타깝기 그지 없는 일이었습니다.
7
위. 청연
이 영화 상영 때
꽤 긴 해외출장을 떠났던 까닭에
극장에서 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나서 디비디로 보면서
무릎을 치고 안타까워했습니다.
이걸 극장에서 봤더라면
얼마나 더 좋았을까, 하구요.
‘청연’은 정말 풍부하고 깊은 영화였습니다.
‘꿈을 가진 자가 필연적으로 마주칠 수 밖에 없는 고독의 심연’
을 다룬 작품으로 보든, 아니면
‘일제시대라는 역사적 질곡을 온 몸으로 헤쳐나오려 했던 그 시절 한국인의 고뇌’
를 다룬 작품으로 보든,
'청연'은 어느 쪽으로나 뛰어난 영화입니다.
여성영화의 시각으로 봐도 빼어난 작품이구요.
역사의 격랑과 개인의 삶을 얽어내는 방식에서
그 고민의 폭과 깊이를 드러내는 이 영화의
실존적인 인간 이해와 정직한 역사의식에 대해
일부에서 그랬듯
‘친일영화’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은
오독이면서 폭력이란 느낌마저 듭니다.
‘청연’은 기술적으로도 훌륭합니다.
비행기 엔진 소리에서 내리는 빗소리까지
훌륭하게 담아낸 사운드와
비행 장면을 최대한 인상적으로 찍어낸
역동적 촬영이 대단히 인상적이었지요.
석양을 가장 아름답게 찍어낸 작품이기도 할 거구요.
그리고 이 영화에서 장진영이 김주혁을 면회하는 장면은
‘너는 내 운명’에서 황정민이 전도연을 면회하는 그 유명한 장면보다
개인적으로 제게 더 큰 감동을 준 장면이기도 했습니다.
8위. 천하장사 마돈나
정말 따뜻한 영화지요.
보고 나면 괜히 본 것만으로도
스스로가 착해진 것처럼 여겨지는 영화들이 가끔 있는데,
바로 ‘천하장사 마돈나’가 그런 작품입니다.
‘트랜스젠더’와 ‘씨름’이라는
양극단의 모티브를 충돌시켜
코미디적인 재미까지 제대로 뽑아냈지요.
기발하면서 여유로운 이 영화의 유머가 지닌 리듬은
정말 사랑스럽고 유쾌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 영화는 모든 것을 이해하는 척
높은 자리에서 굽어보는 오만함이나,
소수에 고개를 돌리느라
다수를 위악적으로 몰아붙이는 단순함 대신,
인간에 대한 예의를 통해
쉽지 않은 문제를 훌륭하게 다뤄냈습니다.
기본적으로 우울할 수 있는 이야기에
건강한 활력과 생생한 디테일을 불어넣고 붙여가며
관객을 함께 고민에 동참시키는 화술도 뛰어났지요.
9위. 달콤, 살벌한 연인
‘달콤, 살벌한 연인’은
장르 영화에 취약한 충무로 전통에서 볼 때
무척이나 소중한 대중영화입니다.
그런 면에서 ‘달콤, 살벌한 연인’은
‘삼거리 극장’과 함께 올해 충무로가 감행한
가장 멋진 도전으로 기록될 만 합니다.
사실 기술적으로 이 영화는 빈약한 부분이 적지 않지요.
그렇지만 올해 나온 다른 한국영화
어디에도 없는 종류의 재미와 매력이 여기에 있지요.
‘조용한 가족’이 나오던 무렵을 떠올리게 하는
이 코믹 스릴러에는
자신의 장점을 정확히 알고 있는
손재곤 감독의 장기가 잘 살아 있습니다.
그것은 흥미로운 소재, 생생한 캐릭터, 맛깔난 대사로
요약할 수 있겠지요.
특히 그의 대사 쓰는 능력은
정말 감탄할 만 하지요.
장진 감독이 그런 능력에서
몇 년간 상당한 성과를 보여준 게 사실이지만,
현재 이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은
‘거룩한 계보’의 장진이 아니라
‘달콤, 살벌한 연인’의 손재곤입니다.
다른 한국영화들이 어떤 소재를 어떻게 만들든
전혀 상관없다는 듯한 태도로,
손재곤 감독은 올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영화 한 편을 내놓았습니다.
박용우도 영화에 참 잘 어울렸죠.
10위. 왕의 남자
위에 ‘라디오 스타’에 대한 이야기를 쓰면서
이준익 감독에 대해 적었으니 여기선 간단히 쓸게요.
‘왕의 남자’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매혹되는 이유는 뭘까요.
그것은 아마도 ‘왕의 남자’가
영화의 서사적 능력을 극대화한 작품이기 때문일 겁니다.
아무리 영화가 공감각적인 종합예술이라도
현재의 대중이 영화라는 매체에서 기대하는 것은
결국 이야기라는 것,
그것을 가장 잘 해낸 작품이
바로 ‘왕의 남자’라는 것이지요.
이준익 감독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가장 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가장 설득력 있게 할 줄 아는
이야기꾼입니다.
11위. 짝패
류승완 감독의 ‘짝패’는 참으로 순수한 영화입니다.
‘한국적 액션영화’라는 말에서 상상할 수 있는 것에
모든 연출력을 쏟아부은 작품이란 의미지요.
이 영화의 개봉 무렵 제가 쓴 적이 있듯,
크게 숨을 들이켠 뒤 단 한 번 내뱉으며
직선주로를 질주하는 듯한 느낌이랄까요.
몸을 쓰는 활극의 쾌감을
시종일관 만끽하게 해주는 작품입니다.
두뇌가 아니라 육체에서 에너지를 얻어낸 이 영화엔
정말 하고 싶고 할 수 밖에 없는 것을 하는 사람의
순수한 열정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관객으로서 그런 모습을 발견하는 것은
즐겁고 고맙기 짝이 없는 일이지요.
12위. 폭력 써클
많은 사람들이 ‘조폭 영화’라는
한국적 장르를 떠올릴 때
선입견을 가집니다.
그러나 저는 ‘조폭 영화’에서
한국영화 특유의 개성을 느낍니다.
이 분야에서 주목할 만한 작품들을
여럿 내놓은 올 한 해는 특히 그랬지요.
‘조폭 영화’라고 무조건 무시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폭력 써클’ 같은 작품이 있기 때문입니다.
시장에서 처절할 정도로 비참하게 버림받은 이 작품은
참 아까운 영화지요.
비평적으로도 거의 주목받지 못했구요.
‘비열한 거리’ ‘열혈남아’ ‘뚝방전설’ 등도
조폭영화로 모두 올 한 해 일정한 성과를 거둔 작품들이지만
2006년 이 분야에서 단 한 작품을 꼽으라면
저는 ‘폭력 서클’을 고를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감상에 젖지 않은 채
발생에서 종말까지 부릅뜬 두 눈으로
‘폭력’을 생생히 담아냈습니다.
폭력의 폐해를 말하는 영화라고 하더라도
한국 남성 특유의 향수 어린 시선이
중반엔 담기기 마련인데,
박기형 감독은 그런 유혹에서 단호히 벗어난 채
‘폭력의 연대기’라고 부를 수 있을 영화를 만들었지요.
마지막 당구장에서의
그 처참한 지옥도를 그려낼 수 있는
감독의 배짱이라니요!
흥행적 실패를 딛고 박기형 감독이
다음 작품을 빨리 만들 수 있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