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문화 UP 베스트10] 내생애 꼭 봐야 할 저평가된 걸작영화
흔히 ‘저주받은 걸작’이라고 불리는 영화들이 있다.
언론과 평단에서 극찬을 받고도 관객에겐 철저하게 외면받은
작품들이다. 대중의 사랑을 받은 흥행 영화와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영화 평론가 20명에게 ‘2000년 이후 한국 영화 중 대중에게 외면받았지만 꼭 볼 만한 작품’ 10편씩의 추천을 부탁했다(표 참조).
2000년 이후 최고의 흥행 영화들과 비교해 보니 뜻밖에도 흥행 감독이 저주받기도 하고, 저주받은 배우가 흥행 배우이기도 했다.
내용을 들여다보니, 새로운 것에 높은 점수를 주는 평론가들과
익숙하고 공감 가는 것을 좋아하는 대중의 취향이 영화의 운명을
흥행과 저주로 갈라놓았다.
○ SF 영화가 양쪽에서 1위
평론가 20명이 추천한 영화는 총 90편. 이 가운데 10표씩을 얻어
공동 1위를 차지한 세 작품은 장준환 감독의 초절정 엽기 SF 잔혹극 ‘지구를 지켜라’, 정지우 감독의 멜로 드라마 ‘사랑니’, 정재은 감독이 만든 다섯 소녀의 성장 드라마 ‘고양이를 부탁해’.
이 중 ‘지구를 지켜라’는 외계인이 지구를 지배한다는 설정을
감안하면 SF로 분류할 수 있는데, 흥행 1위인 ‘괴물’도 존재하지 않는 생물체가 독극물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설정 때문에 SF 성향을 갖고 있다. 결론적으로 저주받은 걸작과 흥행 1위가 모두 한국에서 안 된다는 장르인 SF영화인 셈.
흥행 톱 10에는 남북관계, 전쟁과 관련 있는 드라마가 많다.
‘태극기 휘날리며’ ‘실미도’ ‘웰컴투 동막골’ ‘공동경비구역 JSA’ 등
네 편. 한국에서 최강의 흥행 키워드는 ‘북한’과 ‘전쟁’ ‘액션’
‘조폭’이다. 반면 저주받은 영화에는 전쟁이나 액션이 없는
그냥 드라마가 많았고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를 뽑기 힘들 정도로
소재도 다양했다.
코미디 장르의 경우 흥행 영화 안에는 조폭 코미디만 두 편이
포함됐다. 저주받은 걸작에는 ‘플란다스의 개’ ‘귀여워’가 있고,
엽기 유머 코드가 있는 ‘지구를 지켜라’를 코미디로 볼 경우
세 편으로 편수가 비슷했다.
○ 데뷔작은 저주받는다?
흥행 톱 10 영화에 당당하게 이름을 올린 봉준호 박찬욱 감독은 저주받은 감독이기도 했다.
봉 감독이 2000년에 아파트 단지의 강아지 실종 사건을 다룬 ‘플란다스의 개’는 서울에서 5만7000명이 봤다.
또 ‘공동경비구역 JSA’로 이미 흥행 감독이 된 박 감독이 2002년에 만든 복수 3부작 중 첫 번째,
‘복수는 나의 것’은 서울 관객 16만 명에 그쳤지만 그의 최고 걸작으로 이 영화를 꼽는 사람이 많다.
흥행 감독으로만 이름을 올린 사람은 강우석 강제규 최동훈 감독 등. 강우석 강제규 감독은 2000년 이후 직접 감독한 영화 중에 흥행 실패작이 하나도 없었다. 최동훈 감독은 올해 ‘타짜’가 682만 명을 기록했고
2004년 데뷔작 ‘범죄의 재구성’도 흥행에 성공했다(전국 212만 명).
가장 운 없는 감독은 김기덕 감독이 꼽힌다. 평론가들의 추천작 90편 중 6편이 그의 영화였다.
평론가 황영미 씨는 “그의 영화는 사회 통념을 공격해 대중과 소통이 어렵지만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독창성이라 볼 때 그의 작품은 ‘걸작’”이라고 평했다.
정재은 감독(‘고양이…’ ‘태풍 태양’)과 윤종찬 감독(‘소름’ ‘청연’)은 지금까지 연출한 장편 영화 두 편 모두
저주받은 걸작 전체 추천작에 포함됐다.
또 흥행 톱 10에는 여성 감독의 작품이 하나도 없었지만 저주받은 걸작에는 3편
(‘고양이…’ ‘질투는 나의 힘’ ‘와이키키 브라더스’)이나 포함됐다.
흥행작 중에는 데뷔작이 ‘웰컴투 동막골’과 ‘투사부일체’ 두 편뿐이지만 저주받은 걸작 중엔
데뷔작이 절반인 다섯 편이었다.
○ 흥행 영화=남자배우, 저주받은 걸작=여배우?
저주받은 걸작 톱 10에서 최다 출연 여배우는 배두나. ‘플란다스의 개’와 ‘복수는 나의 것’ ‘고양이를 부탁해’에 출연했다. 전체 추천작 안에 그가 주연한 ‘굳세어라 금순아’까지 들어 있다. 그러나 배두나는 흥행 1위인 ‘괴물’에도 출연했다.
평론가 김지미 씨는 “배두나는 흥행 가능성을 떠나 자신의 개성이 드러나는 역할을 잘 선택하는,
시나리오 보는 눈이 있는 배우”라고 평가했다.
남자 배우는 신하균이 저주받은 걸작 중 ‘복수는 나의 것’과 ‘지구를 지켜라’에 출연해 최다였지만
흥행작 ‘공동경비구역 JSA’와 ‘웰컴투 동막골’ 등에도 나왔다.
송강호와 박해일 정재영 백윤식도 양쪽 리스트에 모두 이름을 올렸다.
저주받은 걸작 전체 리스트로 보면 남자 배우 중 한석규가 출연한 영화가 ‘구타유발자들’ ‘주홍글씨’ ‘그때 그 사람들’ 등
3편으로 최다였다. 1990년대 후반 최고의 흥행 배우였던 한석규의 최근 행보를 보여 준다.
한편 장동건은 ‘태극기 휘날리며’와 ‘친구’ 두 편의 흥행 영화에 나왔다.
흥행 영화는 대부분 ‘남성 영화’로 여배우가 제일 중요한 주연인 경우는 하나도 없었지만 저주받은 걸작 중엔
‘청연’처럼 여배우가 원톱 주연인 영화도 있고 여배우 이름이 제일 먼저 나오는 경우가 다섯 편에 이르렀다.
채지영 기자 yourcat@donga.com
저주받은 걸작 톱 10과 흥행 톱 10 |
순위 |
저주받은 걸작 |
흥행작 |
순위 |
1 |
지구를 지켜라 |
괴물 |
1 |
사랑니 |
왕의 남자 |
2 |
고양이를 부탁해 |
태극기 휘날리며 |
3 |
4 |
와이키키 브라더스 |
실미도 |
4 |
5 |
가족의 탄생 |
친구 |
5 |
6 |
질투는 나의 힘 |
웰컴 투 동막골 |
6 |
플란다스의 개 |
타짜 |
7 |
8 |
복수는 나의 것 |
투사부일체 |
8 |
빈집 |
공동경비구역 JSA |
9 |
10 |
청연 |
가문의 위기 |
10 |
귀여워 |
2000년 이후 개봉한 한국 영화를 대상으로 |
■ 왜 실패했을까?
흥행 영화가 대부분 전개가 빠르고 볼거리가 많은 반면 저주받은 걸작들은 주인공들의 내면 심리를 파고드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좀 늘어지는 감이 있거나 기발함이 지나쳐 대중과 소통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랑니’는 ‘다층적인 구조에 과거의 사랑이 환상이나 눈물 질질 짜는 신파로 넘어가지 않는’(평론가 남다은) 장점이 있지만 로맨틱 코미디의 여왕인 김정은의 변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 등장인물들 간의 관계에 관객들은 당황스러워했다. 주변부 인생의 현실을 다룬 ‘고양이를 부탁해’와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애초부터 흥행 코드와는 거리가 멀다. ‘조폭은 선망 집단이 돼도 상고 출신 소녀들이나 나이트 클럽 밴드는 안 되는’(곽영진) 것이란 풀이도 나온다. ‘청연’은 장진영이 연기한 실존인물인 ‘박경원’의 친일 논란이 번지면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지구를 지켜라’는 B급 컬트의 감수성에 키치적인 영상의 희한한 영화이고 박수무당 아버지와 배다른 삼형제가 한 여자를 놓고 연적이 되는 콩가루 집안 이야기 ‘귀여워’는 ‘가족에 대한 가장 극단의 상상’(이상용)이다. 일반 관객에겐 불쾌할 수 있는 내용이 가득하다. 둘 다 너무 기발했다.
‘복수는 나의 것’은 유괴에 장기 밀매, 전기 고문 등 ‘소재가 너무 파격적이어서 동료 감독들도 학을 뗄 정도’(김시무)였고 올해의 발견으로 꼽히는 ‘가족의 탄생’은 지루한 ‘예술 영화’ 같은 느낌에다 화제작인 외화 ‘다빈치 코드’와 같은 날 개봉하는 불운까지 겹쳤다.
그 외 ‘4인용 식탁’(전지현이 ‘소모’되지 않은 유일한 출연작·전찬일) ‘소름’(욕지기 나는 공포, 캐비닛 속에 갇힌 한국 사회의 지형도·심영섭) ‘후아유’(상업적 실패가 믿기지 않는, 감각적이고 세련된 멜로·허문영) ‘구타유발자들’(한석규의 최고 작품, 섬뜩한 풍자 드라마·강한섭) ‘국경의 남쪽’(멜로로 연주하는 탈북자의 성장 영화·염찬희) 등도 아까운 작품으로 추천됐다.
▽설문에 응해주신 분들=강유정 강한섭 곽영진 김시무 김지미 김영진 남다은 문학산 심영섭 양윤모 염찬희 오동진 유지나 이상용 전찬일 정지욱 조희문 허문영 황영미 황진미
채지영 기자 yourca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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