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일요일 따뜻한 침대에서 자고 나니 일어 나는 게 너무 편안해졌다.
어제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급반전이다.
역시 내 몸은 아직 짱짱하다는 은근한 자부심까지 살아나고 목요일로 예정된 신년 직원들 회식도 전혀 무리가 없을 것 같았다.
수요일은 이진선이사가 식사일정 한번 잡자고 아침에 전화 주었는데 퇴근 때 쯤에는 저녁 같이하자는 나이사님의 전화가 있었다.
목요일은 부서회식이고 토요일은 대학 동창회이다 보니 수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음주는 문제가 될 것 같아 이진선 이사와는 다음으로 일정을 미뤘다.
수요일은 보호대를 차고 나이사님과 식사를 하느라 몹시 힘들었던 터라 목요일은 아얘 보호대를 풀고 위에 입었던 목이 파인 스웨터 까지 벗어 던지고 모처럼 만에 양껏 술과 음식을 즐겼다.
집에 사탕과 초컬릿을 사가지고 가서 아이들과 함께 먹고 마눌과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나누다 잠잔 것 까지는 좋았다.
아침에 일어나니 머리가 몹시 아프고 온몸이 으실거리고 추우면서 허리뿐만 아니라 온 몸이 쑤신다.
어허 얼마나 얕잡아 봤으면 감기몸살이란 놈 마저 나를 무시한다.
몇 년 동안 종무소식이던 놈이 몸이 안 좋은 상태를 노려 기습공격을 감행 했던 것이다.
아마도 따뜻한 사무실에서는 보호대에 스웨터를 잔뜩 껴입고 있다가 정작 나갈 때 훌렁 벗어 버렸으니 차가운 바깥 공기가 몸살을 몰고 온 모양이다.
소고기 먹은 것도 좋지 않았는지 소화도 잘 되지 않고 배고픈 것도 느끼지 못하겠다.
회식 때 술과 고기를 먹어 밥은 안 먹으려 했는데 직원들이 소면을 시켜 너무 과식했던 것 같다.
김이사도 속이 안 좋았던 걸로 보면 나이가 들면 식사량과 술을 좀 조절하긴 해야 하는 모양이다.
죽처럼 끓인 아침밥도 먹는 둥 마는 둥하고 허리뿐만 아니라 온몸에 이상징후가 나타나 넝마가 된 것 같은 몸을 끌고 회사에 출근했다.
온몸이 쑤시고 추운 건 그렇다 치고 점심 때도 속이 더부룩하고 허기가 느껴지지 않는 걸 보면 속도 단단히 고장 난 모양이다.
일기예보에서 많은 눈이 내릴 거라 했는데
오후가 되니 눈이 펑펑 내린다.
견디기 힘들어 3시 30분 쯤 조퇴했다.
오후에 예정된 회의도 미루고 할 일들을 정리해 놓은 채….
집 근처 가정외과는 가는 날이 장날 이라고 오늘 따라 문을 닫았다.
약국에서 대충 두통약과 해열제 그리고 드링크제를 하나 사서 집으로 들어갔다.
허리 아픈 놈이 감기몸살 까지 몰고 다니니 참으로 한심할 따름이다.
조금 나은 것 같다고 방만해져서 성한 놈 행세를 했으니 당해도 싼 셈 되었다.
그냥 들어가자마자 침대를 뜨겁게 해서 몸져누웠다.
한 잠자고 6시쯤 마눌이 들어 왔길래 순전히 약을 먹기 위해 저녁을 챙겨먹었다.
회복기에 안도하던 마눌도 근본적인 몸상태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
토요일 동창회
일찍 잠을 청하고 별 탈 없이 깊은 잠을 자고 일어났더니 몸살기운이 사라졌다.
불행 중 다행이긴 한데 의욕도 없고 영 맥아리가 없다.
TV보고 하릴없이 빈둥빈둥 하다 보니 12시
벌서 마티고개를 넘어오고 있다고 동윤이 전화가 온다.
지난해 모임에서 만나고 동윤이 아버님 돌아가셨을 때 상가집에서 만났으니 양표나 동윤이 얼굴은 1년에 두번 쯤 보는 셈이다.
세월이 참 빠르다.
학창시절 2년~3년을 함께한 인연으로 이렇게 세월 멀리까지 와서 만남을 유지하고 있지만 한번씩 만나면 이제 가는 세월을 친구들의 얼굴에서 느낀다.
허기사 양표는 나이보다 항상 늙어 보였고 동윤이는 동안인데다 6살이나 어린부인을 데리고 사니 다른 친구들 보다는 더 젊어 보인다.
얼굴은 직업 따라 가는지도 모른다.
전환이와 성환이는 교수라 이마가 벗겨져서 나이는 들어 보이지만 피부는 윤기가 있다.
제약회사 본부장인 지호는 원래도 말랐지만 나이 들어도 살이 찌지 않으니 나이가 들어 보인다.
자유시민연합을 이끌고 있는 남현이가 젤루 늙어 보인다.
항상 정치인이나 나이가 많은 단체장들과 어울려서일 게다.
한국통신 부장 항식이는 동안이라 나이가 잘 안 들어 보이는 축에 속하긴 하지만 대체적으로 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친구들이 기업체에 근무하는 친구들 보다 더 젊어 보인다.
하지만 모두 도토리 키 재기다.
그 시절로부터 부인할 수 없는 수 많은 세월이 흘러왔다.
무자비한 세월의 폭력에 제 나름대로 항거해 왔지만 이젠 모두 백기를 던지고 투항해 버렸다.
젊음이 지나간 걸 느끼고 나서야 우린 세월을 받아 들이고 그냥 모든 사물처럼 세월 속에 동화된다.
남자들도 수다를 떨 수 있다.
이종완의 “쉘부르”에 셋이 커피한잔을 시켜 놓고 앉아서 세시간을 떠들어댔다.
정치와 경제 교육 그리고 보건분야까지 아우르느라 한 순간 침묵의 어색함도 없이 우린 그렇게
약속한 시간까지 고층빌딩의 푹신한 쇼파에 앉아 어두워지는 하늘을 지켜 보았던 것이다.
전환이가 모임 책임을 맞은 자리인데 예년의 반 밖에 모이지 않았다.
선생들이 많다 보니 방학을 이용해 외유중인 사람이 많았고.
한해도 거르지 않았던 지호는 부모님 칠순 잔치가 겹쳤다.
항식이는 전날 새벽 세시까지 술 먹느라 무리한 상태에서 오늘 눈길에 어려워 못 왔고
대학교수 영상이는 몸은 못 오고 멀리서 20만원을 송금했다.
하여간 이러저러한 이유로 우린 20명의 예약석에 8명이 조촐한 만남을 가졌다.
보호대를 차고 나가서 저녁만 먹고 온다고 했는데 나쁜 넘들이 환자도 내버려 두질 않아
2차 까지 갔다가 양표와 동윤이는 여관을 잡아주고 12반이 넘어서야 겨우 집에 들어 왔다.
친구넘들 뼈하고 술하고는 아무 상관없대나 어쨌데나 …
거나하게 취해서 들어오니 마눌 그 때까지 안자고 기다리고 있다.
환자란 놈이 하루걸러 술을 퍼마시고 다닌다.
창졸간에 뼈를 부러뜨리고 들어와 사람을 놀래키지 않나 환자라는 사람이 술먹고 12시가
넘어서 들어오지 않나.
마눌 눈에는 내가 참 한심해 보이겠다.
“마눌한테 잘해야지 나중에 구박받지 않으려면…”
“그리구 한약까지 한재 지어 보내시며 걱정하시는 어머님을 생각해서라도….”
마눌과 아러저러한 이야기 하다 한시 반이 넘어 잠들고 아침에 깨어났다.
늘어지게 자고 일어난 양표와 동윤이에게 전화해서 해장국 한 그릇을 먹이고 한참 더 이야기를 나누다 떠나 보냈다.
“그래도 이놈들 호강하는 줄 알아라! 성님 몸 성했으면 산으로 갔고 그 많은 시간은 택도 없었다.”
친구와 이별은 늘 아쉽다.
함께 공부하고 여행하던 그 시절도 지났고
우린 각자의 길을 가면서 1년에 한 두 번 이렇게 만날 뿐이다.
훗날 세상의 짐을 훌훌 벗어 버리는 날
옛날처럼 오랜 시간 함께하며 어디론가 여행을 떠날 날이 있겠지….
잘 가라 친구들….
메아리 없는 외침을 계속하려면 힘이 빠지기도 하고 가끔 회의가 들기도 한다.
수년간 내가 해오던 일을 지난해부터 맡게 된 차박사에게 멜을 보냈다.
올해 따라 유난히 친구들의 호응이 적어 실망할지도 모를 일이라 …
TO 차박사
만남이란 항시 이유가 많지
살아가는 날이 팩팩하고 마음의 여유가 없다 하기고 하고
만남이 별 의미 없고 재미 없다 하기도 하고....
또 너무 바쁘다 하고
사람들 마음은 다 한마음 아닐세
그래도 한 번쯤은 생각나고
가끔은 보고 싶은 친구들 아닌가?
세월에 잊혀져 가더라도
우리가 지나간 먼 시절에 친구였다는 사실이
오래도록 남아 있는 몇 사람의 기억속에서
가끔 살아날 걸세
이젠 친구가 꿋꿋히 그 길목에서 기다려 주게
세월이 흐르다 보면
또 다른 친구가 찾아 온다네
산은 항상 거기 있고
찾아 오는 사람들이 바뀌는 것처럼
이젠 친구가 산이 되어야 하네
누군가는 언젠가 만나야 하고
그래서 또 누군가는 산이 되어야 하네
차박사 고생 많았네...
사실 훌쩍 등돌리기 미안하고 아쉬워
뼈 뿌러진 넘이 너무 무리하긴 했지만
또 긴 시간의 침묵과 휴식이
거친 야생의 길을 되돌려 주리라 믿는다네
모두들 기쁨과 행복 목에 걸고 살아 가겠지
친구의 노력 때문에
늙지 않은 얼굴로
언젠간 다시 만날 날이 있겠지...
모두들 고마워 할거네
그래서 이번 주말의 주제는 “나의 몸살과 친구들”이었고
부제는 “빈둥거리며 신문,잡지보기 그리고 .TV보기”였다.
이번 주말의 소득이라면 단연 “킹아더”이다.
마눌과 영화 한편 보려 했는데 TV영화 “킹아더”에 흠뻑 빠져 버렸다.
왕이 되기 전의 아더와 원탁의 기사들에 관한 전설적인 이야기들인데 너무 리얼한 전쟁씬과
비장미 넘치는 장면은 마치 글라디에이터를 보는 듯 하다.
오래 전 영화지만 감동적이다.
코끝이 찡했다.
나이가 들어 가면서 더 감상적이 되니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기네비어’로 나온 ‘키라 나이틀리’는 너무 매혹적이다.
저렇게 강인하고 야성적이고 들개처럼 거칠고 제멋대로인 여자
아무래도 좋다.
아더왕의 여인이며 원탁의 기사와의 슬픈 사랑의 주인공
청순가련한 비운의 여인 기네비어가 여전사로 돌변하였다 해도….
그녀가 너무 좋아졌다.
영화를 보고 나서 감동과 여운이 오랫동안 따라 다녔다.
오래 전 누군가 좋아하는 영화배우를 물어오면 난 대답을 하지 못했었다.
“구름위의 산책’이란 영화를 보고 나서 나도 좋아하는 영화배우가 생겼다.
“아이타나 산체스지온”처럼 오늘부터는 그녀도 좋아하기로 했다.
영화란 자극적이고 매력적이다.
소설과 역사의 상상력이 인물과 환경에 고착화되는 단점 이면에 가만히 앉아서 구체적으로 창조된 시대에 몰입하고 가 보지 못한 웅대한 대자연을 바라볼 수 있다.
거기에다 실제 인물들보다 더 실감나는 리얼한 액터들의 생생한 삶의 현장을 만날 수 있다.
단돈 6천원으로 인간의 능력과 기술이 무지하게 비싼 돈으로 만든 가상의 세계에 흠뻑 빠지는 즐거움.
그것이야말로 살아가는 날의 거부할 수 없는 또 하나의 흔쾌한 기쁨 아닐까?
초심으로 돌아가야겠다.
분위기 탓하기 전에 단호히 술을 좀더 절제하고
무리하지 않고 확실한 회복기간을 가질 것이며
그 기간은 무언가를 얻고 찾는 시간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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