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체는 그 자체가 하나의 우주이다.
통증이란 그 우주를 유지하는 유기체들의 울음이다.
뼈가 부러지고 근육이 파열되었다는 것을 알리고 무리한 동작을 자제시키던 통증은 조용히 사라졌다.
이제 남은 거라고는
그날의 사고를 증거하는 내 허리에 남겨진 시커먼 멍
그리고 상처부위를 힘이 쏠릴 때 느껴지는 완화된 아픔과
뼈가 부러진 부위를 누를 때 올라오는 둔중한 통증의 서늘함
답답해서 보호대도 훌렁 벗어 던지고 싶다.
하지만 나중을 생각해야지…그리고 보호대 제작비도 35만원 씩이나 들었는데…
목요일 모처럼 어머니를 찾아 뵙고 식사를 함께했다.
평소와 다름 없이 활기찬 모습만으로도 안도의 한숨을 쉬신다.
“당신 아들은 아무 걱정 마세요…
어디서나 항상 잘해 나가고 늘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 가고 있어요”
이번 사고도 주위를 환기시키는 무슨 계시 같은 것이었다.
신들은 내 삶에 새로운 의미와 임무를 부여하였다.
육체를 말짱하게 돌려 주셨고 삶을 대하는 진지함과 경건함을 일깨워 주었다.
산에 들지 않고도 조용한 가운데 작은 깨달음들과 삶의 소소한 기쁨을 만나고 있다.
토요일
막내를 깨워 새벽을 몰고 유성온천에 갔다.
가까이 계룡산과 유성온천이 있어 항상 행복하다.
요즘은 온천 물에 몸을 오래 담그면 몸이 아주 좋아지는 느낌이 온다.
녀석은 요즘 키가 부쩍 커서 제 누나를 넘어섰고
불알 밑에는 제법 시커먼 털이 숭숭 났다.
새롭게 떠오르는 새해의 태양을 바라보며 한 해의 소망을 말한 것이 엊그제였는데
벌써 한 달이 훌쩍 지났다.
12분의 1이 지나간 셈인가?
아이들이 자라는 거나 한 주가 지나는 걸 보면 세월은 참으로 빠르다.
“걸어서 세계일주” 란 TV프로에서 인도네시아 발리를 소개하고 있다.
앙코르와트와 함께 후보지에 올렸던 곳인데 좀더 나이가 들어서도 갈 수 이는 휴양지 이기에 순위에서 밀렸다.
발리 사람들은 신에 대한 존경심으로 야자나무 높이 이상의 건물을 짓지 않는단다.
겸손하고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이다.
거리의 풍경은 베트남이나 캄보디아와 비슷하다.
나중에 가면 호텔과 항공기만 예약하고 혼자 돌아보고 싶어진다.
아직도 분화구에서 연기를 뿜으며 살아 있는 산이 있다.
신들에 대한 경배로 향을 피우는 그 신성한 산에도 오르고 싶고 사장을 마음대로 활보하며 뜨거운 태양아래 익어간 열대과일들을 마구 먹어보고 싶다.
언제이지 모르지만 입맛이 깔깔해진 어느 늙은 날에….
도서관으로 갔다.
벌써 많은 부지런한 사람들이 책상을 차지 하고 앉아 있다.
아이들과 함께 책을 보는 아빠 엄마의 모습이 정겹고 아름답다.
책을 보고 있는 머리가 희끗희끗하신 할아버지들의 모습도 보기 좋다.
보미 아빠는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서 놀러 오던 친구들이 떨어져 나갔다고
부인의 불평이 많다는데
책을 가까이하는 습관이나 산을 두루 다니는 취향은 모두 나이들수록 삶을 더 풍요롭게 하는 빛나는 취미들 아닌가?
서가를 기웃거린다.
한스 크루파의 마음의 여행자
좀더 내면의 성찰을 일깨워 주는 책들에 눈길이 간다.
어렵게 부여 받은 한가로운 시간들이라 그 의미가 더 소중해 지고.
나를 바로 보고 마음과 정신을 돌아보는 시간으로 남기고 싶다.
에피소드 형식의 짧은 이야기들에 남겨지는 의미 심장한 여운이 마치 낙엽을 밟으며 잔잔한 호숫가를 산책하는 편안함을 느끼게 한다.
우리 존재의 작은 의미를 서정적이고 명상적인 언어로 깨우치고 있다..
세상의 아름답고 소중한 것들에 대한 담담한 성찰이 조용히 가슴을 울린다.
책을 다 읽고 법정의 대표산문집을 읽어 내려 가다 자료실 문을 닫을 시간이라 돌아왔다.
마눌이 강추한 BBC에서 제작한 “강”에 대한 자연다큐멘타리를 보았다.
강과 폭포 그리고 그곳에서 삶을 영위하는 생명체들을 너무 생생하고 멋진 화면으로 담았다.
방랑벽이 달떠오고 몸이 근질근질 해진다.
저 폭포와 강을 언제 돌아볼 수 있을까?
일요일
새벽 5시 30분
또 아침에 혼자 깨어 조용한 시간을 흔들어 놓는다.
어디론가 떠나고 있을 시간이다.
밥 먹고 세수하고
마눌과 함께 CGV영화관으로 간다.
9시 30분 영화 “아포칼립토”.
“리쎌웨폰”의 스타였고 브레이브하트의 감동을 가져다 준 제작자 멜깁슨이 만든 영화라 보고 싶었다.
미국에서는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다는데 우리나라는 개봉관도 적고 실적이 영 신통치 않다.
마눌의 취향은 아닌데 그래도 내가 가자면 별 의의를 제기 않고 따라 온다.
하도 몰아대니 화장도 제대로 않고 막내 놈 빵모자를 덮어쓰고….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로 잔혹성이 도마에 오른 멜깁슨이 여전히 강렬한 도발을 보여주는 영화다.
마늘은 내가 졸지 않고 관람한 영화는 다 좋은 영화라고 한다는데
가상의 세상에 흔쾌히 빠져들게 하고 때로는 긴장을 유발하기도 하고 슬픔이던 기쁨이던 진한 감동으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할 수 있는 영화라면 다 좋은 영화 아닌가?
요즘은 영화를 보는 층이 점점 젊어지고 우리 또래에서 나처럼 괜찮은 개봉영화를 챙겨보는 사람이 드문 것 같다.
나의 주관적인 눈으로는 산을 외면하고 영화를 외면하는 사람들은 삶의 두 가지 기쁨을 포기하고 살아 가는 것이다.
혹독한 시련과 운명에 직면한 원시 부족의 외로운 전사 이야기다.
모험영화 이지만 가슴 찡한 가족애를 보여준다.
너무 잔인하다는데
실감나게 드러낼 수 있는 야만성과 폭력성은 영화의 특권 아닌가?
사실 원시시대의 종족간의 투쟁은 더 처절했을 것이다.
권력과 영토확장을 위해 수백만명이 흘린 피와 땀의 역사를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승리한 자에 의해 미화되고 우상화되어도 그 역사에 이면에는 뼈아픈 슬픔과 숱한 죽음들이
조용히 묻혀 있고 또 아무렇지 않게 잊혀져 간다..
오랫동안 영화의 역동성과 긴박감에 사로 잡혀야 했다.
마야를 고증했느니 보편적 야만을 경고하고 서구문명의 우월성을 드러낸 영화라느니 말도 많지만 그냥 오래된 비문명시대의 생존의 방식과 여전히 그 시대를 밝히고 있는 따뜻한 사랑 이야기 정도로 이해해도 족하지 않을까?.
죽어가면서 아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는 아버지의 마지막 말이 가슴을 흔들었다.
하루아침에 유린된 평화와 해체된 가족의 의미도 모른 채 아이들은 끌려가는 부모의 뒤를 하염없이 따라가다 거센 강물에 가로 막혀 어찌할 바를 모른다.
강물은 마치 그들의 험난한 삶을 암시라도 하는 듯하다.
그 때 한 아이가 울음을 참으며 외친다.
“아이들은 내가 잘 돌볼 테니 아무 적정 마세요”
그 마지막 외침이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그리고 다시 찾은 가족의 마지막 피날네는 감동적이었다.
그 울림은 오래도록 가슴에 남았다.
“아포칼립토” 그리이스말로 새로운 시작이라 한다.
그 새로운 시작의 의미는 무너진 부족을 되살리고 가족의 사랑을 회복시켜야 하는 외로운 전사의 새로운 시작일 수도 있고 마지막 여운을 남긴 스페인 함대의 출현처럼 새로운 시련의 시작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냥 그것으로 좋다.
메말랐던 눈시울이 촉촉해졌고 생사의 고비를 넘어 화합한 가족의 사랑에 기쁨을 느꼈다..
다 보고 나서 마눌의 평가
“너무 잔인하고 폭력적이긴 한데 “괴물”보다 더 재미 있는 것 같애.
하여간 차가 막히지 않는 조용한 휴일 아침 시내를 가로질러 영화관을 가는 재미도 좋았고
사람 별로 없는 널널한 영화관도 좋았고 조조 할인까지 받은데다 영화의 감동도 느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집에 가서 아이들 데리고 모처럼 얼큰한 공주칼국수 외식하고 또 도서관으로 간다.
산에 가는 거나 영화관에 가는 거나 도서간에 가는 거나 내겐 다 즐거운 일이니 모두가 좋은 일이다.
모두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들이니 그 속에는 모두 살아가는 날의 작은 기쁨들이 숨어있다.
허기사 그 동안 너무 산행과 여행에 집착했으니 좀더 정적인 시간을 갖는 것도 정서적인 측면에서 별로 나쁜 것은 아닐 거라고 생각해 본다.
법정의 산문집
짧은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들이 제 각각이다.
언젠가 마음에 혼 불이 일어나고 무슨 계시 비슷한 느낌이 그를 출가의 길로 인도했을 터이다.
수도자의 편안함과
아직 떨치지 못한 미망처럼 그에게서 떨어나가지 못하는 속세의 끈과 그로 인해 흔들리는 마음을 본다.
청정하고 맑은 기운이 전해 온다.
고요하고 깨끗하다.
아직 속세를 완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지만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감사하며 회의와 흔들림 없이 수행의 길을 걷고 있다.
그의 책을 읽으며 내가 정화되고 그의 오두막의 정결한 바람이 내 마음속을 불어 가는 것 같다.
좋은 설법을 들으며 하루를 보내고 또 나를 돌아 볼 수 있는 시간이 되어 감사하는 마음이다.
오랫동안 수행한 스님조차 절대평온의 세계에 이르지 못하고 세상의 한탄과 시름을 가슴에 담는 걸 보면 역시 득도의 길은 나 같은 속세 인에게 너무 멀리 있음이다.
내가 출가했으면 그가 이룩한 경지나마 넘볼 수 있을 것인가?
“잘한 것이여 송충이는 솔 잎을 먹어야 제”
속세에서 노스님이 수행으로 도달한 경지를 욕심 내는 것은 무리일까?
노스님의 마음의 평화와 적막한 세상이 부러워 진다.
내가 나무 같다.
목이 멘 기다림이 아니라
조용히 세월과 시간을 보내는 나무
시린 바람을 불평하지 않고
새들이 찾지 않는 겨울을 불평하지 않는 나무처럼
다가올 봄을 준비하며
조용히 세월을 바라보고 있다.
2월이다.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없는 황량함이라도 돌아보고
빈 가지에서 서글피 우는 바람의 소리라도 듣고 싶다.
조금만 더 괜찮아지면
텅 빈 공허함이라도
그 무엇이라도 만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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