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은 고립감이라고 했던가?
나에 대한 남들의 무관심을 의식하는데서 생겨나는?
하지만 남들과 전혀 상관 없이 스스로의 자의식에서 배태되는 고독도 있다.
봄 빛을 따라 오르는 맹아가 무서리를 만나고
경칩에 튀어나온 개구리가 순식간에 표변한 날씨에 황당해하는 그런 참담한 고독
3월 1일은 봄볕도 좋았다.
마치 남도의 들녘을 순회해도 봄의 정취를 물씬 느낄 것 같은 그렇게 호감이 가는 날이다.
눈부신 날의 유혹은 도서관으로 향하는 묵묵한 발걸음 대신 여유롭고 한가로운 산책길로 경쾌한 발걸음을 이끌었다.
사월엔 금강 물길도 따라 내려가고 싶고 멈추었던 호남정맥 유랑길을 다시 열고 싶다.
그래서 몸 상태도 체크해보면서 서서히 준비운동을 해야 한다는 생각 이었다.
나아 가는 듯 하는 상태에서 명절에 형제들과 어울리느라 무리를 하고 나서 허리에 부담을 느끼고 마눌과 보문산 산행에서도 뒷맛이 영 개운치 않았다.
그래서 오늘 작심하고 한 번 테스트해 볼 요량이었다.
휴일 날 다른 식구들의 휴일 일상에 맞추어 느긋하게 밥을 먹고 식장산으로 갔다.
항상 먼 산길을 헤집느라 이 산은 참 오랜만이다.
고산사 올라가는 입구에 차를 파킹하고 좌측능선으로 오른다.
인적은 없어 산길은 한적한데 시끄러운 차소리가 계속 따라 온다
산길이 가파라 지니 보호대가 너무 답답하다.
따라오는 차소리가 거슬리고 신경은 자꾸 허리로 간다.
정상에 올라 서서 휴식을 하면서 확연히 달라진 허리를 느껴야 했다.
“아직 내 허리의 봄은 멀구나!”
조금 슬퍼졌다.
첩첩의 산릉은 연하를 머금고 어디론가 조용히 흘러 가는데
거친 산야를 종횡하던 발길은 고작 식장산 길에서 망연자실하고 있다.
마눌과 내기를 했다.
지난 가을에 억새와 함께 핀 철쭉을 보았던 터라 성급하게 꽃망울을 터뜨린 진달래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내 기분을 들키지 않으려고 넌스레를 떨었는데 아직 꽃 몽우리를 만들고 있는 진달래는 어느 곳에도 없다.
가장 편안하고 호젓한 길이라고 말하는 정상에서 세천유원지로 연결되는 능선길은 아직 갈색인 채로 겨울잠에서 깨어나지 않는데 가득한 햇살은 벌써 봄의 희망과 기쁨을 실어 나르고 있다.
가만히 보면 갈색의 가랑잎 아래서 봄이 말없이 초록의 잎으로 피어나고 있다.
봄은 아직 숨어 있지만 이젠 겨울은 가버렸다고 단정했다.
주위에 펼쳐진 풍광보다 허리의 통증에 민감해하며 익숙한 길을 걸어가는 이상한 산행길이다.
벚 꽃놀이 갔다가 꽃을 느끼지도 못한 채 소음과 사람에 지치다 돌아오는 날처럼
살아가다 보면 이런 날도 있다.
전망소나무에서 계곡을 따라 내려가는 길은 편안한 길이었다.
힘들 것도 없고 졸졸 소리 내며 흐르는 싱그러운 계곡물 소리를 들으며 마눌과 두런두런 세상 살아 가는 이야기를 풀어내며 계곡의 아침향기를 맡으면 되는 시간 이다.
산 속에서 보냈던 숱한 날들 같지 않게 자연 속에서 나는 가슴도 비워내지 못하고 기꺼이 자연과 교감하지도 못한 채 움츠리고 답답해 했다.
그 익숙한 길조차 내려가다 잘못 들었다.
한참 이야기하며 가는데 난데 없이 포장도로를 만났다.
식장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군용도로였다.
계곡에서 그 길을 찾아 가래도 힘들 판에 뜬금없이 산 속에서 아스팔트 길을 만나니 요즘은 세상일이 죄 꼬이기만 하는 것 같아 허탈해진다.
되돌아 가야 했는데 얼마 남지 않았을 것 같아 도로를 따라 가기로 했다.
도로를 오가는 차들 때문에 조용히 유지되던 마음의 평화는 여지 없이 깨어져 버리고 산 속을 관통하는 도로가 지겨워 지기 시작했다.
가도가도 돌아가야 할 모퉁이만 나오고 그 모퉁이를 지나면 마지막 일 거란 기대는 번번히 무산되었다.
산속에 난 이상한 도로를 견디지 못해 다시 산속으로 들어갔다.
길도 희미한 능선 길을 따라 가다 보니 내려가야 할 길이 다시 위로 올라 간다.
걱정하는 마눌을 데리고 내가 환자라는 사실도 잊고 이유 없는 분노로 씩씩거리며 마치 막혀버린 정맥길 한풀이라도 하 듯 거침없이 속도를 높여갔다.
정말 내 자신에 화가 났다.
허리를 따라 오르는 통증과 보호대 아래로 흐르는 땀은 완전히 무시한 채로
바보 같은 사고를 당하고 두 달이 지나고도 다시 산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나에게 온통 화를 퍼부어 대고 있었다.
마눌을 희미한 산길에 남겨두어 길을 잃을 뻔했다.
상심한 가슴을 감추고 돌아 오는 길이 서글펐다.
식사를 하려는데
3시쯤 내려올 거란다
점심 먹을 시간도 없다.
마눌은 남편과 산행 나왔다가 쫄쫄 굶고 집으로 가고 나는 내쳐 차를 몰고 계룡산 온천 앞 산장가든으로 갔다.
그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설레고 두근거리고 또 젊음의 패기와 자신감이 넘치던 시절….
작년에 4개월 연수중인 신입사원들을 데리고 계룡산 산행을 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격렬한 산행을 하다 보니 고생스럽고 인상에 많이 남았나 보다.
엊그제 시장조사 결과를 발표하는 걸 지켜보니 모두들 한결 같이 똑똑하고 열정적인 친구들이다.
세상이 많은 젊은이들을 속이고 있었다.
불행히도 조국은 수 많은 고급 인력들에게 걸 맞는 일자리 창출에 실패한 채 헛된 희망과
기대를 불어 넣고 있다.
자신의 장래를 위해 첫발을 내딛여 보기도 전에 좌절해야 하는 수 많은 젊은이들과 또 처음의 성공으로 들떠 있다 상처받을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 우리는 조용히 비가를 합창해야 한다.
행사의 말미에 홍보부에서 비밀리에 준비한 부모님 편지는 눈시울이 뜨겁고 가슴이 뭉클했었다.
홍보부 직원들이 연수중인 신입생들의 집을 방문해 부모들과 인터뷰하고 부모가 자식들에게
보내는 영상편지를 녹화하여 방영한 것이었다.
보편적인 아이디어지만 시의 적절한 타이밍과 자발적인 실행이 많은 사람들에게 조용한 감동을 주었다.
이제 막 세상에 첫 발을 들여 놓는 친구들에게 난 두 가지 말만 해주었다.
그 첫 번째 가속도의 원리다.
학문적 성취건 돈을 버는 일이건 정신을 수양하는 일이건 세상의 모든 일은 가속도의 원리에 지배를 받는다.
처음의 조그만 차이는 갈수록 벌어지는 것이다.
꾸준히 그러나 쉬지 않고 자신의 목표를 향해 정진하는 것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 비해 엄청난 가속으로 차이를 만들어 간다.
두 번째는 옴파로스
세상의 중심에는 내가 있고 그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
나는 세상의 절대자이고 궁극의 최고선은 나의 행복이다.
후회 없이 노력하고 아낌 없이 인생을 즐겨라
젊은이들과의 어울림은 한편으로 우울하게 가라 앉은 기분을 풀어 주었고 한편으로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쉽게 좌절하고 쉽게 흔들리면서 입으로는 꿋꿋함과 긍적적인 사고의 힘을 이야기하는 위선과 가식이 부끄러워 졌다.
그래서 젊은이들의 순수한 기를 한잔의 술잔으로 받아버리다 보니 거나하게 취했다.
인생의 돛단배에는 너무 짐을 실어서는 안된다.
내 삶에서 산이란 의미와 기대가 너무 컸었다.
항상 담대한 듯 행동하면서도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감정은 언제나 이성과 논리를 따르지 않고 작은 바람에도 쉽게 흔들리고
그 동안 쌓아 왔다고 믿었던 내적인 성찰과 삶의 지혜는 공허한 한계와 깊이 없는 바닥을
드러냈다
난 그렇게 조급해하고 괴로워하고 너무 쉽게 스스로를 함몰시키고 있었다.
세명의 등산객이 여관에 묵었다.
어느날 한 여행객은 우산을 들고 다른 한 여행객은 지팡이를 들고 또 다른 여행 객은 아무 것도 들지 않은 채 여행 길을 나섰다.
그날 몇 시간 억수 같이 비가 퍼부었다.
그들이 다시 여관으로 돌아 왔을 때 우산 쓴 사람은 흠뻑 젖었고 지팡이를 가진 자는 온몸이 진흙과 상처투성이가 되었으며 아무 것도 갖지 않은 자는 멀쩡했다.
우산 쓴 사람은 자신의 우산을 믿고 억수처럼 쏟아지는 길을 걸었고 미끄러운 길에서는 지팡이가 없어서 조심했다.
지팡이를 가진 사람은 비가 많이 내릴 때는 비를 조심해서 피해 다녔고 진창길에서는 지팡이를 믿고 조심하지 않아 진창길에서 넘어지고 상처를 입었다.
아무것도 없는 사람을 비도 피해 갔고 진흙탕에서도 조심조심 걸었다.
브라질에서 전해오는 이야기이다.
인간만사 새옹지마다.
살아가다 보면 정말 일들이 엉뚱한 방향으로 풀려가기도 하고 기쁨이 예기치 않은 불행한 일들을 몰고 오기도 한다.
거꾸로 불행한 일들이 다시 새로운 기쁨과 행복을 만들기도 하겠지….
3월 3일 토요일
어머님 생신 일이다.
대가족 도패밀리 총 25명 중 22명 참석이다.
모처럼 F1,F2,F3가 모두 모였다.
3년전만 해도 F1,F2,F3,F4 까지 모두 모였는데….
영수는 안전관리 시험이 월요일이라 제수씨와 희수만 보냈고
서울로 유학간 지현이와 해미만 내려오지 못했다.
어머님 생신행사는 6남매가 한 번씩 돌아가면서 하는데 오늘은 유사가 우리 집이다.
한 사이클 도는데 그 위로 6년이란 세월이 퇴적된다.
막내 둘이 먼저 왔다.
이러저런 얘기를 하다 간호사인 여동생에게 지난번 산에 다녀왔더니 허리에 무리가 가더라고 했더니 어이 없어 한다.
뼈가 부러지는 충격이었는데 그게 그렇게 쉽게 나을 수 있을 수 있겠냐는 거다.
몇 달이 될 줄 모르지만 의사의 말대로 최대한 안정과 휴식을 유지하는 것이 상책이란다.
지금 잘 못 요양하며 나중에 정말 큰 휴유증이 올 수도 있다고….
아파트 옆에 새로 생긴 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아이들은 아파트로 보내고 어른들은 노래방으로 갔다.
가족대항 노래자랑 상금은 6만원 이다.
부부점수 합산 인데 처음 형님이 99점으로 압도적인 우세를 보이더니 결국은 막판에 이서방이 100점을 받으면서 뒤집기에 성공했다.
뒤이어 집에서 벌어진 고스톱 판에서는 예상을 완전히 뒤엎고 막내가 선전 했다.
고스톱을 치면 항상 형님의 승률이 가장 높았다.
돈이 사람을 알아 보는지 항상 사업하며 돈을 가장 잘 버는 사람을 따라 다녔다.
나와 막내는 항상 잃는 편이었는데 요즘 막내녀석도 사업이 잘되니 판돈도 옮겨가고 있다.
돌아 가신 장모님이 나는 어디 가서 고스톱을 치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 말이 꼭 맞다.
형님 내외를 보내고 한바탕 놀았던 심야의 윷놀이에서는 윤서방과 이서방이 각각 4만원의 판돈을 거머 쥐었다.
황금돼지 해인데 올해는 정말 지독히도 운이 따라 주지 않는다.
어머님이 돼지띠는 삼재가 들었으니 올해는 매사에 조심하라시며 부적을 건네 주신다
행운이 충만하다는 황금돼지 해에 부자될 꿈을 꾸고 있었는데 돼지띠가 삼재라는 청천벽력이 웬 말인가?
새해 벽두에 벌써 물을 엎질러 버린 마당에 더 이상 조심할 게 또 무엇이랴?
1시 반쯤 되어 부모님과 윤서방 그리고 여동생들은 어머님 댁으로 가고 나머지는 우리 집에서 잠자리를 마련했다.
3월 5일
늦게 잠든 터라
빨리 아침을 먹고 사정공원으로 가자고 ….
좋은 휴일 날 수많은 사람들이 방구석에 쳐박혀 있으면 얼마나 답답할 것인가?
준비가 마무리된
우째 이런 일이….
방에서 할 일이 없으니 아이들은 컴퓨터게임과 카드놀이로 편을 갈랐고 어른들은 다시 윷놀이 판을 폈다.
도패밀리는 무엇을 해도 내기로 시작해서 내기로 끝난다.
내리 두판을 졌다.
이번에는 아들을 내대신 대타로 내세웠다.
이 녀석이 종횡무진 하더니 두 판을 내리 이겨 어제 잃었던 돈 까지 죄 복구해 놓았다.
그래 현역으로 안되면 감독하면 되지…
비가 그친 것 같아 11시쯤에 아이들을 태우고 사정공원으로 가서 풀어 놓고 막내와 이서방 그리고 마눌과 공원을 거닐었다.
잠시 멎었던 비가 다시 내리고 우리는 2사람당 하나씩 우산을 나눠 쓴 채 그렇게 비오는 공원에서 두어 시간 보내고 보리밥집에서 파전을 내고 보리밥을 썩썩 비벼 먹고 그렇게 헤어졌다.
수신제가후 치국평천하라 했던가?
천하란 당치도 않고 나라를 다스릴 재목도 되지 못하지만 항상 스스로를 갈고 닦아 평상심을 잃지 않고 또 따뜻한 휴식 같은 가정은 반드시 이루어내야 할 일일 터이다.
부모님 모시고 형제들 우애를 쌓아가고 사촌들간 정을 돈독히 해할 수 있는 유쾌한 도패밀리를 만들어 가는 것은 내 삶의 중요한 소명중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비오는 일요일 날에
독서 : 한국의 아름다운 수필 (이태동)
아름다운 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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