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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

천년학

출처 : 조선블로그 서일호의 문화사랑

 

 

감독 임권택ㅣ출연 조재현, 오정해, 임진택ㅣ제작 KINO2ㅣ배급 프라임엔터테인먼트ㅣ장르 드라마, 멜로ㅣ등급 12세 관람가ㅣ시간 106분

 

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영화 [천년학]이 개봉됐다. ‘100번째 영화’라면, 26세에 감독으로 데뷔한 이래 일 년에 두 편 꼴로 영화를 만들어낸 셈이다. 해외 각종 영화제의 수상 내역은 일일이 언급하기에 입이 아플 정도. 다작을 일궈낸 임권택 감독의 왕성한 창작욕과 매 작품마다 보여준 성찰력은 놀랍기만 하다.

소리꾼 양아버지 유봉(임진택)에 의해 송화(오정해)와 동호(조재현)는 오누이로 길러진다. 유봉은 아이들에게 밤낮없이 소리 연습을 시키고, 송화와 동호는 서로의 소리와 북장단을 맞춰가며 애틋한 정을 키운다. 하지만 동호는 송화와 오누이로 지내야하는 현실이 힘들기만 하다. 결국 동호는 가난을 핑계로 집을 떠나고, 8년여 만에 고향을 다시 찾는다. 그동안 유봉은 세상을 떠났고, 눈이 멀었다는 송화는 행방이 묘연하다. 동호는 송화가 어디에서든 소리를 하고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그녀를 찾기 위해 악단에 들어간다. 우연히 고향의 주막집을 찾아간 동호는, 그곳의 주인으로부터 송화가 살아온 이야기를 듣게 된다.

소설가 이청준에 대한 임권택 감독의 질긴 사랑은, 100번째 작품까지 이어진다. 전작 [서편제]와 [축제]는 모두 이청준의 원작을 바탕으로 했으며, [천년학] 역시 그의 소설 ‘선학동 나그네’를 모티프로 그려냈다. 특히 ‘선학동 나그네’는 고등학교 국어책에 수록된 탓에, 관객들에게는 더없이 친근한 소설이기도 하다. 영화화를 통해 비중이 늘어난 주막집 주인 용택(류승룡)과 새롭게 더해진 캐릭터 단심(오승은)은, [천년학]이 단순한 애정 도식의 영화가 아님을 보여준다. 일평생 송화만을 바라보는 용택과 동호에 대한 외사랑으로 가슴앓이하는 단심에게서 전해지는 애틋함은, 동호와 송화의 사랑만큼이나 안타깝다.

세월은 흘렀건만, ‘한국적인 정서’에 대한 임감독의 애정도 여전하다. [천년학]은 [서편제]의 후속작으로 불린 만큼, 판소리에 대한 밀도높은 성찰이 돋보인다. 동호가 돈을 벌기위해 외국으로 떠나면서, 두 사람은 또 다시 이별하게 된다. 이때 송화의 애절한 마음을 담은 ‘춘향가’의 한 대목은, 백 마디의 대사보다도 호소력이 짙다.

'갈까부다 갈까부네 님을 따라서 갈까부다 / 천리라도 따라가고 만리라도 따라 나는 가지 (중략) 하날의 직녀성은 은하수가 막혔어도 일년일도 보건마는 / 우리 님 계신 곳은 무산 물이 맥혔기로 이다지도 못 오신가' (춘향가中)

이러한 한국적인 정서는 ‘판소리’뿐 아니라, ‘절제의 미학’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송화와 동호 사이에 직접적인 사랑 고백이나 애절한 눈물은 없지만, 그 이상 두터운 감정의 겹은 가늠해 볼 수 있다. 동호는 송화를 찾기 위해 그렇게도 싫어하던 북채를 다시 잡으며, 단심과 살면서도 내내 송화를 그리워한다. 송화도 동호가 탄피로 만들어준 반지를 평생동안 소중히 여긴다. 이처럼 영화는 인물의 조용한 몸짓이나 눈빛에다 판소리의 구성진 가락을 더해, 애끓는 감정을 차분히 녹여낸다. 요즈음처럼 급히 끓어오르고 식어버리는 만남을 즐기는 세대들에게는 다소 고루해 보일지도 모르는 이야기다. 하지만 허허실실 코미디와 가벼운 눈물 바람이 난무하는 극장가에서, 오랜만에 마주하는 진득함은 반갑기만 하다.

형식상으로 [천년학]은 동호가 송화의 여정을 추적하는 로드무비에 가깝다. 여정을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아름다운 풍광은, 필연 로드무비의 서비스일 터. 송화를 찾아나서는 동호의 발걸음을 따라 경남 하동, 광양 매화마을, 제주도 등 국내의 명소들을 눈으로 쫓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처럼 아름다운 자연경관은, 한국적인 정서에 애잔한 흥취를 더한다. 다작을 연출한 이력도 경이롭지만, 줄곧 한국적인 정서를 고집해온 감독의 열정에는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다.

 

서일호 주간조선 기자, 이혜미 시네티즌 기자(www.cinetize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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