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상처의 후유증은 3.7kg의 체중증가와 이완된 일상이었다.
몇 달은 산을 쳐다보지도 않다가 찾아온 봄과 함께 조금씩 산으로 다가갔다.
조급함이 통하지 않다는 걸 알고 느리게 움직이다 보니 생체리듬은 거친 산길의 기억을 잃어
버리고 조금씩 퇴화되고 있었다.
조금 나아진 듯 싶더니 지난 주 마눌과 주왕산을 다녀와서 다시 무리가 느껴진다.
오월이면 다시 정맥길을 열겠노라던 스스로의 약속을 위해 귀연의 꼬리를 잡아놓긴 했는데 점점
갈등이 생긴다.
“비까지 온다는 데 너무 무리가 아닐까?”
마눌의 말에도 흔들렸다.
“10년도 더 타야 할 산인데 경거망동해서 나아가는 상처를 덧내지 말고 좀더 기다리삼 ”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5월의 눈부신 정맥길도 멋진 자연풍광도 모두 소용없을 것이다.
출정하면 누구의 도움을 받을 수 없고 하루 종일 오롯히 혼자만의 고통으로 삭혀야 할 것이다..
사실 체력과 속도산행이 함께 요구되는 호남 길을 아직 불완전한 몸으로 감당하기엔 당연히 무리
가 따를 것이다.
하지만 원래 산이란 그런 거다.
심산의 가슴으로 가던 거친 여행길의 흥분은 이미 뇌세포에 각인되어 있고 산 속의 추억을 불러내는 계절의 교태는 떨칠 수 없는 유혹으로 다가오고야 만다.
남들은 그걸 중독이라고 하지…
“휴식만이 회복을 보장할거란 확신도 없는데 이제 한번 테스트 받아 봐야 하는 거 아녀?”
그리고 알량한 자존심이 이미 ‘GO’를 불렀다.
잘나가다 삼천포로 빠진다고 했던가 ?
그 겨울에 결국 고비산을 넘지 못하고 주저 앉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4개월의 공백 동안에 귀연은 5구간 밖에 진군하지 못했다.
지난 호남길을 추억을 들춰 보았다.
천운산 낡은 의자에 앉아서 조용히 내리는 어둠을 바라보면서 느낀 감흥을 이렇게 적었었다.
“아직 돌아볼 것이 너무 많은데 세월은 속절없이 빠르네”
태악산을 지나 노인봉에서 그랬다
“내 육신은 병들지 않았고
내 마음은 아직 늙지 않았고
소박한 풍경에도 흔들릴 수 있는 가슴으로
시린 계절의 향기에 젖을 수 있으니
더 큰 바람은 욕심일 뿐…
구름은 그저 바람을 따라 무심히 흘러 간다.”
지난 추억을 반추하며 씁쓸한 감회가 어린다.
인생은 그런 거다.
난 병들고 늙지 않고도 아까운 세월을 흘러 보내야 했다.
낙남과 호남길에서 기쁨을 찾고자 했던 소박한 바램도 이루지 못하고
그저 바람을 따라 가는 구름을 무심히 바라 보았다.
긴장이 되긴 되는 모양이다.
12시 좀 못되어 잠자리에 들고도 뒤척이다 깨어보니 자명종이 울리기 전 20분이다.
미눌이 챙겨주는 도시락을 건네 받고 그 옛날 익숙했던 어둠 속으로 떠난다.
산행지 : 호남정맥 제 18구간(오도치-방장산-주월산-존재산-주릿재)
일 자 : 2007년 5월 6일 (일요일)
날 씨 : 비가 조금씩 내리다가 멎고 4시30분경 약 40분간 폭우
산행거리 : 도상거리 약 16km
산행시간 : 약 8시간 (약 1시간 40 알바 &지체)
동 행: Khan,계백장군,청계,새벽안개,백제의미소,양반곰,허여사,백범,호나우드,금강초롱,산꼭대기외1 ,산에가자외3,유시은외1 (19명)
호남정맥 제18구간 경유지별 시간
오도재 : 09:42
비오는 측백나무 숲 : 08:15
파청재 : 10:27
방장산사거리 : 10:43 오도재 3.8km, 주월산:3km , 호동:1.3km
호동재 : 10:49
방장산 : 10:59
배거리재 : 11:43
주월산 : 11:51
식사후 출발 : 12:17
무남이재 : 12:52
광대코삼거리 : 13:19 초암산 3.5km, 선인:2.7km,주월산:2.9km
천치고개 : 14;18
존재산 : 14;53
알바후 주릿재 임도 : 16:10
백동마을 : 17:20
주릿재 : 17:35
모처럼 반가운 얼굴들을 대하니 시간의 공백이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지지난 주 호남 길 출정 후 다시 만난 것 같다.
옆자리에 산님과 이러저러 이야기를 나누다 덕유산 휴게소에서 아침식사를 했다.
지리산 인근을 지나면서 제법 굵은 빗줄기가 차창을 때린다.
어째 분위기가 음산하고 불안해진다.
비몽사몽을 헤메다 비가 떨어지는 득량만 휴게소에서 잠깐 휴식하고 오도재로 간다.
오도재 : 09 :42분 출발
날씬해진 회장님을 만났다.
더 탄탄해진 근육과 들어간 배가 골수 산꾼으로 진화를 거듭하고 있는데 난 5구간을 휴면하다가
이제 다시 비내리는 오돗재에 섰다.
만감이 교차하는 착잡함으로….
그래도 다행인가?
적자생존의 경쟁에서 완전히 도태되지 않았으니….
하지만 용불용설의 진화론이 허구가 아니라면 오늘 고생길은 이미 예약된 셈이다.
오도재는 645 지방도가 지난다.
득량면과 겸백면을 알리는 표지판이 서 있다.
우의를 꺼내 입고 단체사진을 한 장 찍고 오늘 장정의 첫발을 옮긴다.
파청재 : 10:27 (오도재에서 45분)
오도재에서 비탈 사면을 올라 30분쯤 가면 355.5봉이 서고 이곳에서 능선은 11시 방향으로
급하게 떨어진다.
편백나무 숲과 벌목지대를 지나 314봉을 넘어서서 완만한 능선을 따라 내려서면 임도 삼거리
파청재에 도착한다.
한무리의 산님들이 웅성이고 있다.
방장산 : 10:59 (파청재에서 32분)
넓은 수레길이 방장산 까지 연결된다.
넓고 편한 오름길이지만 비는 여전히 추실거리고 바람은 불지 않아 우의 아래로 땀이 배어난다.
벌써 고단하다.
숨이 차고 발이 무거워 지는 걸 보면 예상대로 몸은 그 동안 변화한 환경에 미련없이 적응하고
있었다.
허여사님과 양반곰님과 함께 오르다 임도 옆 무덤가에서 우의를 벗었다.
비에 젖으나 땀에 젖으나 젖는 건 매한가지 이지만 피부에 닿는 서늘한 공기가 몸의 열기를 거둬
가니 갑갑함이 한결 덜해진다.
허여사님과 양반곰님과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나누며 잘 정비된 산길을 오른다.
방장산 사거리에 도착하니 이정표에는 주월산 정상이 3km 남았다.
우리가 올라 온 길이 3.8km 밖에 되지 않는데 이렇게 힘이 들다니….
호동재 좌우로는 등산로가 잘 정비되어 있다.
우측으로 내림길이 쑤시냉기골이라 표기되어 있는데 참 독특한 지명이다..
이정표가 방장산이 600m남았고 300m지점에 약수터가 있다고 알린다..
방장산 오름길에 철쭉이 반긴다.
방장산에는 KBS중계탑이 있다.
구름이 오락가락 하는 득량만과 예당평야의 모습이 태어나서 처음 대하는 이향의 풍경이라
힘든 와중에도 호남길의 설레임과 기대가 살아 온다.
바다를 바라보며 시원한 바람을 맞으니 그래도 살만해진다.
방장산 가는 길
방장산 가는 길
방장산 조망
주월산 : 11:51 (방장산으로부터 52분)
방장산을 지나면 조성면으로 접어드는 것이다.
지도상으로 주월산 가는 길에 양쪽 마을로 내려설 수 있는 두개의 재가 있다.
이드리재와 배거리재
좌측 수남리와 우측 조성면 덕산리로 내려서는 이드리재는 자나쳐 버렸다.
방장산에서 이드리재는 약 30분 소요되고 이드리재에서 15분쯤 더 가면 배거리재에 도달한다.
배거리재에는 조성면 고당마을과 득량면 예당리를 표시한 작은 이정표가 하나 설치되어 있다.
겸백면 수인리와 조성면 조성리,우천리를 연결하는 통로라 한다.
임도를 따라 가는 길에 밀양송씨 묘소가 있다.
득량만이 바라보이는 멋진 조망처라 후손을 잘 둔 조상님들은 두고두고 행복하시겠다.
많이 뒤떨어진 줄 알았는데 B팀 간판들이 모두 그곳에서 휴식하고 있다.
함께 휴식하다 패러그라이딩 활공장을 지나 대머리 같은 주월산의 넉넉한 정상에 올랐다.
지나온 방장산이 2.95km이고 무남이재가 1.8km 남았다.
구름 걷힌 예당평야와 득량만이 선명한데 거칠 것 없는 봉우리에는 제법 차가운 바람이 조용한
빗방울을 어지럽게 한다.
12시가 다 되어 봉우리 한 켠에 식단을 풀었다.
그래도 식사를 방해하지 않는 비라 너무 다행스럽다.
등짐을 풀어내니 거친 여정에 잔뜩 동하는 식욕과 대자연의 풍미 까지 더해져 식단은 화려하고
진수성찬이 따로 없더라.
중간에 후미팀들도 속속 합류하여 돼지족발 까지 먹고 나서야 겨우 허기가 진정되었다.
주월산의 식사시간은 25분 소요 되었다.
배거리재 이정표
밀양 송씨 묘
주월산 정상
주월산에서 돌아본 능선
주월산 이정표
무남이재 :12:52 (주월산에서 35분)
주월산을 내려서면서 임도가 나타난다.
벤취가 있고 비닐하우스가 있는데 많은 산님들이 비와 바람을 피해 식사를 하고 있다.
우측으로 대곡저수지와 평화로운 대곡리의 풍경이 내려다 보인다.
첩첩 능선을 너머 멀리 존재산이 보인다.
무남이재로 가는 길에는 반대편에서 오는 많은 사람들과 교행했다.
무남이재에서 좌측은 겸백면 수남리로 연결되고 우측 임도를 따라 30분 정도 내려가면 포장
도로를 만나는 대곡리 중촌마을에 닿는다.
그곳에서 조성면 택시콜이 가능하다고 한다.
거기서 봇재 까지 35분 소요되고 요금은 3만 오천원 인데 흥정을 잘하면 3만원이면 된단다.
주월산에서 무남이재 가는 길
능선에서 바라본 대곡리 풍경
임도
대곡저수지
능선에서
가야할 능선
천치고개: 14;18 (광대코 삼거리로부터 1시간)
무남이재에서 거친 급경사길을 오르면 광대코재 삼거리에 도착한다. 좌측으로 초암산이 3.5km
이고 주월산을 뒤로 2.9km남겨두고 있다.
이정표 우측에 존재산은 표시되어 있지 않고 선암 2.7km라 표시되어 있다.
광대코재 삼거리에서 존재산 갈림 능선 까지는 희희낙락이다.
능선은 부드럽고 철쭉의 붉은빛과 푸른 신록의 조화는 싱그럽다.
바람에 흩날리는 운무는 시시각각 몽환적인 풍경을 만들어 마치 내가 선계라도 들어온 듯 장엄한
기분이다..
아직 회복기에 있는 몸이 근질거린 건 호남 신령님이 이 풍경을 보여 주시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호남길이 아름다운 때 무덥지 않은 이 길을 은은한 운무와 함께 지나가고 있다.
이 비가 그치면 원색의 봄이 떠나갈 게다..
겨울의 끝에는 노란 꽃이 핀다.
노란 은행 잎이 바람에 날리어 가면 숲은 가지를 털고 무채색의 긴 겨울잠에 빠진다.
그 겨울 끝에서 산수유와 생강나무가 먼저 노란 꽃을 피우고 뒤이어 연분홍 진달래가
뒷동산에 수줍게 피어난다.
태양 잎이 좀 더 강렬해질 때쯤에야 철쭉은 붉은 색으로 파도치며 초록의 눈부신 능선을 달려
간다.
그리고 철쭉이 1000고지에 오르면 봄은 철쭉과 함께 떠난다.
프란시스 베이컨이 말했다.
“필요이상의 재물로는 필요 없는 것을 살 뿐이다.”
“영혼에 필요한 것을 사는 데는 돈이 필요치 않다.”
호남을 흘러가는 걸출한 산릉이 있고 그 길을 걸어가며 돌아볼 기쁨들이 내 가슴을 울렁이게
했다.
그것만으로도 기꺼이 불면의 밤을 보내고 거친 길 위에서 청승맞게 빗물을 그었다.
이 풍경은 덤이었다.
시시각각 변화무쌍한 살아 있는 자연 이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시공의 질서고 자연의 섭리였다.
가는 봄이 아쉬워 내내 눈물을 보이던 호남의 하늘은 철쭉의 화원에서 잠시 울음을 멈추었다.
평온한 푸르름을 안고 굽이치는 신록의 능선에서 운무와 바람 그리고 철쭉이 만들어내는 대자연
의 조화에 잠시 힘겨움을 내려 놓는다.
시간과 날씨의 절묘한 타이밍에 만날 수 있는 멋진 풍경 앞에서 세상의 시름은 부질 없는 미망이었다.
다행이다. 그래도 산에 들면 세상사 모두 꿈처럼 몽롱하고 바람처럼 허허로우니…
발길이 밀리고 언제부턴지 혼자 가고 있다.
꽃 길을 따라 걸어가다 보니 존재산 갈림길을 놓쳤다.
좌측에 우뚝 솟아 오른 채 존재를 당당히 드러내는 산을 두고도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앞으로만 갔다.
천치재 쪽 하산 분기 능선으로 되돌아 완만한 능선 길을 내려가면서 벌교읍 옥전리 방향이 조망된다.
부드러운 능선이라 속도를 내서 내려가니 거기 임도가 나타난다.
임도아래 소나무 옆길을 따라 가면 천치재이다.
좌측은 모암마을로 연결되고 우측 길은 벌교읍 옥전리로 간다.
광대코 삼거리
천치재
존재산 철조망문 : 14;53 (천치재에서 35분)
철쭉화원에서 지체한 터라 일행을 따라잡기 위해 휴식도 하지 않고 존재산을을 치고 오른다.
가파른 경사가 힘에 부치는데 양지 쪽이라 이미 꽃잎을 떨군 키 높이 철쭉들은 스크럼을 짜고
전진을 방해한다
“워쩌 안가믄 어쩌라고 왜 그리 잡아채는 겨 ”
물도 많이 먹히고 장딴지는 아플 정도로 뻐근하다.
존재산 중턱에서 겨우 일행을 따라 잡았다.
온 몸에 열이 팍팍 오르고 그만그만하던 허리 통증도 강도가 더해진다.
반대편 능선 길에서 호흡조절을 했는데도 힘에 부친다.
살벌한 지뢰 표지판이 있다.
아무런 정보가 없이 와서 군부대를 통과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운데 둘러봐도 초병은 없다.
경고판과 철조망이 지나는 삭막한 길에서도 철쭉은 속절없이 붉다.
철조망 문을 비집고 부대 안으로 들어 갔다.
지뢰까지 매설해야 했던 중요한 부대는 벌써 오래 전에 철수 했는지 군부대안에는 사람의 온기란
느낄 수 없고 황량한 막사만 우두커니 서 있다.
그 앞으로 운동장이 있고 간이 축구장이 만들어져 있다.
바깥쪽으로 공이 떨어지지 않게 얕은 담이 둘러져 있었는데 그 아래 산비탈이 제법 가파르다.
그 풍경이 눈에 선하다.
요즘도 보름달 카스테라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여기서 군인들의 보름달 내기 공차기가 있었을
거고 누군가 개발 고참이 공을 담 밖으로 날리면 졸병하나 눈썹을 휘날리며 산 아래로 내려가
공을 주워 왔으리라.
굽어 보는 풍경은 아름다운데 군대가 떠나고 난 막사는 을씨년스럽다.
그래서 일대에 걸출한 조화봉은 주변의 산수와 전혀 조화를 이루지 못한 채 흉물스런 몰골로
남아 있다.
아직도 허리춤 어딘가에 지뢰를 박고 철조망에 찔린 고통스런 표정으로…
경고문에는 지뢰는 제거하긴 했지만 혹시 남아있는 지뢰를 밟을지 모르니 불의의 사고에 조심
하란다.
마치 비무장 지대를 통과하는 것처럼 비장하다.
정문의 철제 문과 담장은 철문 사이를 벌려 통과하여야 한다.
새벽안개님과 호나우드님 날렵하게 통과하고 나도 별 무리없이 통과했다.
계백장군님과 양반곰님은 상당히 고전하지 않을까 했는데 호남길에서 갈고 닦은 내공 탓인지
생각보다 수월하게 통과했다.
“혹시 근육이 아니라 물살아녀?”
내가 지쳐서 물먹는 사이에 어이없이 통과해버려 문 사이에 끼어서 버둥거리는 작품사진 한 장 놓쳤다.
군부대 철망을 들어서며
아 삼팔선 (?)
군부대 안에서 바라 본 존재산 철쭉 능선
군용 도로를 따라 내려오며
한국통신 중계소
주릿재 17;30 (존재산 정상으로부터 3시간 27분- 알바 때문/실제 50분)
알바
도로를 따라 걸어가다 내려다보는 일대의 조망이 후련하다.
갈림길이 있다.
좌측으로 임도가 휘감아 내려가고 곧장 가면 한국통신 중계소가 있다.
부대안이라 표지기가 거의 없는데 우측 편 소나무 가지에 하나 달려 있다.
후미를 위해 중계소 쪽으로 방향을 표시하고 중계소 옆 임도길을 따라 가는데 길이 끊어졌다.
지도상 맞는 것 같은데 길이 없어 다시 회군한다.
되돌아 가면서 보니 호남 길 능선의 흐름이 갈림길과 중계소 사이의 봉우리를 따라 연결되는
것처럼 보인다.
마침 들머리 소나무에 표지기 까지 한 장 달려 있다.
언덕 같은 봉우리에 오르니 산불감시초소가 하나 있고 마루금을 따라 길이 나 있다.
길이 선명하지 않아 미심쩍긴 했는데 가는 길에 표지기가 두 장이나 걸려 있다.
오늘 호남길에서 많이 보았던 “비실이의 호남정맥” 표시기도 있다.
우리는 만장일치로 제대로 된 길이라 확신하고 좌측 임도를 따라 내려가는 사람들은 호남 길
알바로 간주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거치 없는 진군
정말 내려 온 길이 아깝고 다시 올라갈 일이 아득할 때 쯤 희미하게 연결되던 길이 사라졌다.
사방이 빽빽한 철쭉에 둘러 쌓여 빠져 나갈 구멍이 없다.
그 와중에서 다시 새벽안개님이 길을 찾고 게백장군님이 선두에 서서 몇 십미터 더 진군해갔지만
결국은 철쭉군단에 포위되어 고립되었다.
잠시 지형을 파악하여 탈출로를 모색하던 차 나뭇가지 사이로 산중턱 아래쯤에 전봇대가 보인다.
좌측으로 갈라지는 임도가 산허리를 감돌아 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다시 되돌아 가는 것은 이제 불가능해 졌다.
그냥 막무가내로 그물망처럼 촘촘한 철쭉 가지들의 빈틈을 비집고 아래로 내려간다.
잡목과 가지들은 얼굴을 후려치고 배낭을 잡아채고 옷을 붙들고 늘어진다.
전쟁이다.
마치 생사의 기로에 선 특수부대가 적진을 돌파하는 것처럼 처절하다.
어쩌다 보니 제일 앞에 나서긴 했는데 혹시 지뢰를 밟지나 않을까 걱정되고 빨리 빠져나가야
된다는 생각에 허리 아픈 것도 잊어 버렸다.
4개월 공백 후 첫 출정에 가차 없는 호된 신고식이다.
하여간 짐승처럼 아니 북한 특수팔군단처럼 그렇게 아수라를 뚫고 임도에 내려섰다.
몰골이 장난이 아니다.
길가에 퍼져 앉아 사정없이 물을 들이키다가 우리 표지기를 따라 올 후미팀이 걱정되어 핸드폰을
때린다.
아직 들어서지 않은 후미팀에는 연락이 되었는데 중간팀은 핸드폰마저 불통되는 거로 보아
이미 되돌아 갈 수 없는 길을 들어선 모양이다.
제일 앞서간 “산에가자” 님께 전화하니 주릿재에 이미 도착해서 더 이상 진행하지 않고
있
다.
선견지명이 있어 석거리재는 벌써 무리일 걸로 알고 멈추어 선 것이다.
산행대장이 주릿재 종료를 알리면서 갑작스레 찾아 온 파장분위기는 아득하고 고단한 느낌을
순식간에 반전시켰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불감청 이언정 고소원”은 이럴 때 쓰는 말일 게다.
사실 존재산을 올라 오면서 너무 힘들고 허리에 무리가 느껴져 개인적으론 갈등이 많았다.
주릿재에서 포기할 것이냐 아니면 석거리재 까지 갈 것인가?
그러다 존재산에 올라 시원한 바람을 맞고는 끝까지 함 해보자는 걸로 결론을 냈었다.
“오늘 힘들고 허리에 무리를 느끼기는 마찬가지인데 두 시간 반정도 더한다고 상처가
덧나지는 않겠지”
어짜피 호남 길을 완주해야 한다면 작은 펑크를 떼우러 먼 길을 달려 올 수는 없는 일
아닌가?
한참 후에 철쭉그물에 걸린 중간 팀의 외침이 들린다.
ㅋㅋㅋ 무슨 심리현상인지 모르지만 알바란 내가 하면 힘들지만 다른 사람들이 하면 재미있다...
어쨌든 백범 대장이 제2 특수부대를 몰고 무사히 도착했다.
짐승들이 지나간 흔적을 따라…
그라고 연락을 받아 임도를 유유자적하게 휘돌아 내려온 후미팀도 질투나게 아주 말짱한 모습
으로 도착했다.
근데 아직 마지막 악절이 남아 있었다.
함께 내려가는 길에 분위가가 더 스산해진다.
서늘하고 축축한 기운이 엄습해오고 먼산은 뿌옇게 흐려져 있다.
오랫동안 거친 산야를 종횡하며 체득한 감각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다.
한줄기 서늘한 바람이 불어가고
비릿한 흙냄새가 공기를 긴장시키더니 이내 빗방울이 후드득 거린다.
그냥 맞을 비가 아니란 걸 본능적으로 느낄 수 밖에 없는 비
모두 서둘러 우의를 입었다.
그리고 내려가는 길은 간간이 심벌즈의 굉음이 끊어 대는 광포한 전원 오케스트라의 살벌한
연주장 이었다.
“흐미 이게 봄이여 여름이여?”
“이게 호남정맥길이여 한여름 태극종주 길이여?”
순식간에 젖어 들어 더 이상 물을 빨아들이지 못하는 숲길 위로 빗물은 고랑을 이룬다..
계백장군님과 금강초롱님 중간에 샛길로 내려가기에 아는 길인가 싶어 따라 붙었다.
빗줄기는 한여름 소나기처럼 우비 위를 소리 나게 때리고 가파른 계곡 길로 붉은 토사가 하염
없이 휩쓸려 간다.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우비를 입고도 흠뻑 젖었다.
한참을 내려서자 물을 논 길이 나오고 마을이 보인다.
개구리들은 흠씬 내리는 비에 좋아라 노래하고 내 등산화도 따라서 개구리 울음소리를 낸다.
그래도 좋았다.
처음 기를 쓰고 비를 피할 때는 모르겠는데 대 놓고 비를 맞으면 오히려 야릇한 쾌감이 인다.
마치 세속의 진폐가 모두 씻겨 내려가는 듯한 후련함이다.
백림농장인가는 어디가고 백동마을이 나타난다.
“여긴 또 어디여?”
오늘 알바의 현장에는 어김 없이 무릉객이 있었다.
존재산 군부대를 나와서 정확한 정맥 마루금은 KT통신탑을 옆 임도를 따라 내려가는 것이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군부대 때문에 갈림길에서 좌측 임도로 내려갔기 때문에 등로가 거의
만들어져 있지만 그 길을 따라 가는 게 정확하고 빠른 종주 길이다.
혹시 한여름 잡목이 우거져서 통과가 어려우면 우리처럼 잘못된 표지기를 따라 엉뚱한 길로
접어들지 말고 좌측 임도를 따라 내려갈 일이다.
경노당에 들어가 잠시 비를 그으며 베이스캠프에 전화를 거는데 안테나가 서지 않는다.
“오호라! 그 옛날 전기 안 들어가는 마을처럼 아직 핸드폰이 안 터지는 마을이 있네 그랴.”
그리곤 아무 말이 없었다.
우리는 다시 비 내리는 도로를 터벅터벅 걸어서 일행들이 기다리고 있는 주릿재로 올라갔던
것이다.
내가 멋진 철쭉의 화원을 본 것도
또 대찬 비를 맞으며 알바를 해서 백동마을 경로당을 엿보게 된 것도 모두 호남신령님의
익살이었던 모양이다.
단순한 삶이 무슨 재미가 있나?
예상을 뒤엎고 봄에 물에 빠진 생쥐처럼 흠뻑 젖어보고
또 처음 발길이 머물렀던 산간 오지마을 경로당에 모여 산친구들과 무용담을 이야기하며
오리고기 구어 먹는 것도 다 살아가는 재미 아닌가?
하여간 뻐근한 하루를 마친 후 경로당의 뜨거운 물로 샤워하고 마시는 한 잔의 소주가
하루의 피로를 말끔이 걷어가 버렸다.
작년 지리산 종주 때 폭우를 만나고 사우나에 들렀 다가 인월 흑돼지 먹던 날처럼 그렇게
유쾌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장님 제대로 접대하신 청계님 수고 많으셨다.
나선생님 복분자 굿이었고
허여사님 이태리 소렌토산 레몬주 짱이었다.
특히 한 사람의 정성과 수고로 수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었던 “산에가자”님 덕분에
만들어진 신나는 하루였다.
귀연 모두의 이름으로 감사 드린다.
지난번에도 계속 뒤풀이를 도맡으셔서 모두들 미안해 하던데 너무 혼자만 무거운 짐을 지려하지
마시라….
하지만 비오는 날 오리고기 정말 맛있었다.
빈대떡 보다 훨씬 더…
마지막 깔끔한 뒷수습 까지 귀연의 품의를 잃지 않았던 모든 게 다 좋은 하루였다.
멋진 날 하루를 함께한 산친구들 모두에게 감사의 말씀 전한다.
PS)
하루 자고 일어나니 등은 물론이고 온몸이 안 쑤시는 데가 없다.
마치 초보처럼….
마눌 앞에서는 아픈 내색도 못한다.
하지만 이제 호남 신령님의 기를 다시 받았으니 옛날의 컨디션을 되찾아 전성기의 무릉객으로
되돌아 갈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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