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간: 제15구간(도래기재-선달산-고치령)
도상거리: 30
km
일
자: 2002년 12월 21일(토) ~2002년 12월 22일(일)
날 씨: 맑음
22일03:00
:
출발
04:00 :
옥돌봉(1262)
-> 박달령 성황당
3.1km
05:00:
박달령(1069)
오전리 2km
춘양면 11.4km
06:30: 선달산(1236)
여명
07:20:
늦은목이
-> 선달산
1.9km
<- 비로봉 28km
<- 마구령 5.9km
08:00:
생목마을 회귀
08:15: 아침
식사
08:35: 출발
09:10:
갈곶산 966봉 (봉황산 갈림길)
09:50
반대편 종주객 만남(06:30분 고치령 출발)
10:10:
마구령(810)
-> 비로봉
22km
-> 고치령
8km
<- 선달산 7.8km
10:50: 1096봉 사진촬영
12:50: 고치령 760m
-> 비로봉
14.1km
-> 국망봉 11.1km
<- 마구령 8km
<- 늦은 목이 13.9km
하늘엔 별이 총총하고 둥그런 달이 훤하다.
버스에서 내려서 다시 밟는 도래기재의 겨울은 포근하고 바람은 약하다
.
스팻치와 아이젠 그리고 등산파카는 버스에 남겨두고 겨울등산셔츠 위에 등산조끼만
걸쳤다.
그래도 옥돌봉 가는 직벽을 감도는 바람은 차가움으로 피부속을 파고든다.
눈은 많지 않은데 물기를 머금은 땅이 간밤에 얼어 붙어 눈이 없는 곳이 오히려 더 미끄럽
다.
둥근 달은 그래도 낯이 익은 이방인들이 반가운지 휘영청 밝은 달 빛을 한껏 쏟아내고
길섶의 나무들은 긴 달 그림자를 만들고 있다.
한시간에 걸쳐 옥돌봉에 오르니 바다쪽으로는 봉화읍 인 듯 넓은 지역에 걸쳐 주황색
불
빛이
점점이 흩어져 있고 서쪽엔 빈 산의 어둠
위로 달빛 만 가득하다
.
백두대간 마루에서 총총한 별 빛과 환한 달 빛을 마주하면서 다시 대간의 하루를 시작한다.
내 삶의 나이테에 찰라의 흔적으로 남겨질 시간들 이지만 휘영청 밝은 달로 시작해서
눈부시게 깨어나는 아침으로 함께 가고 다시 떠오르는 달과 함께 귀향하게 될 오늘은 삶의
기쁨과
의미를 엮는 소중한 날이 될 것이다.
조 부장 결행으로 일찌감치 선두로 나서다 보니 따라오는 불 빛이 모두 끊어지고 내 앞에서 1개의 불 빛만 열심히
움직이고 있다.
앞 사람은 뒤에서 불 빛이 잘 따라오고 있으니 평소 페이스로 내달리는 모양이다.
박달령
1시간 여 달빛 드리운 어둠을 헤치고 도착한 박달령에는 창백하고 고독한 모습으로 어둠의
한 켠에 산신각이 서 있고 싸늘한 바람을 맞으며 서있는 표지판이 반갑게 종주객을
마중한다.
2km 쯤 오전약수가 표시되어 있다.
조선 8대 성종 때 (1470~1487) 발견되었다는 이 약수는 이듬해
전국에서 물맛이 가장 좋은 최고의 약수로 뽑혔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위장병과 피부병에 효험이 있다고 한다.
거세지는 바람이 차갑게 목을 휘감고 희끄무레한 어둠이 지나는 하늘엔 더 많은 구름이 흐르고 있다
먼저 도착한 친구와 이런 저런 얘기하면서 후미를 기다리자니 벌써 한기가 올라온다.
여전히 달 빛이 교교한데 깊은 산중을 내달아 반가운 차 길로 내려서자 모두들 기분이 좋
아
지는지 소리치며 떠드는 자 많다 .
대간로로 올라서자 헬기장이 나오는데 1인용 텐트 한 동이 랜턴을 걸고 누워
있다.
혼자 대간을 종주하는 사람인 모양인데 이 추위에 야영까지 하는 걸 보니 참으로 대단한
열정을 간직한 사람이다.
괜히 우리 일행들이 소란스럽게 떠들어 잠이나 깨워 놓지 않았는지 걱정스럽다
6시 30분쯤 신선이 노닌다는 선달산에
도달했다.
태산준령을 조망하는 백두대간 제 38경인 선달산에서 떠오르는 붉은 태양을
맞기를 바랬지만 시간이 너무 이르다.
어둠 속에서 붉은 여명을 머금고 있는 동쪽 하늘을 바라보며 사진을 한 컷 담고 아쉬운
발길을 옮긴다.
선달산은 강원도 영월군과 경북봉화군 영주시에 걸쳐 있는 산으로 태백산맥의 끝이자 소백산맥이 시작되는
곳이다.
오호 통재라
미묘하고 아름다운 계곡을 품고 있으며 각종 나무가 줄지어 있어 산세가 우아하다는데 어둠은 언제나 대간의 숱한 비경을
보듬고 보여주려 하지 않는다
오늘은 어느 이름 없는 봉우리에서 눈부신 일출을 만나는 걸로 만족해야 할 듯 싶다
선달산을 내려오는 길은 깊어 지는데 동편 하늘은 점차 붉어오는 통에 마음이 바빠진다.
또 바다가 보이지 않는 계곡에서 태양을 맞아야 할지
모른다.
7시가 넘어서서 시나브로 날이 새고 있었고 한참을 내려서서 늦은 목이에
도착했다.
이제 바야흐로 소백산권의 시작이다.
늦은목이에서의 안타까운 헛발질
일행들과 한참을 떨어져서 두 사람만 선두에서 움직이다 보니 순간적인 판단미스를
했다.
소백산 비로봉 방향이 백두대간 능선 인데 이정표에 표시된 방향으로 통제구역표시가
되어있고 들어가지 못하도록 밧줄이 쳐져 있다.
그런데 좌측 갈림길에는 리본이 잔뜩 매달려 있어 마치 우회로처럼 보였는데 좀더 인하지
않고 그저 그 길로 들어선 것이 화근이었다.
가져온 지도만 확인했어도 삼천포로 빠지지 않았을 텐데…
훤하게 새는 날이 오히려 자만을 불렀다.
하여간 우리는 리본을 확인하면서 청명하게 깨어나는 대간의 신선한 새벽 공기를 가슴 가득 들이 마시며 즐겁게 나아 갔던 것이다.
계곡의 수려한 풍광과 얇게 운무인 듯 흐르는 산 안개 그리고 구르는 듯 청아한 계곡의
물
소리 까지 그저 대자연의 온갖 물상과 전원교향곡이 시리도록
아름다웠다.
계속 달려 있는 리본을 확인하고 옳은 길임을 서로 확신하면서도 한편으로 계속되는 내리막이 이상해서 “이라다 백두대간에서 완죤히 내려서는 것
아닌가” 하는 이야기도 둘이 나누기도 했다.
한참을 내려가는데 웬 할머니가 저쪽 능선에서 고래고래 소리지른다
처음에는 우릴 보고 그러는 줄 알았지만 개간한 밭둑 위로 집이 한 채 있고 아마도 집안에
있는 누구한테 그러는 모양이다.
그 때까지도 우리가 거의 산자락으로 내려섰음을 의식하지 못했다.
그저 백두대간 산속 깊숙이 까지 들어와 사람이 산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옛날이면 저 할머니가 우릴 간첩으로 신고했을 거라는 이야기도 하면서 웃었다.
잠시 후 생목마을 표지판이 나오고 길이 나오는데 좁은 도로가 나오는데 하얀 차 한대가
지난다
동행하는 친구는 아직 사태파악이 되지 않는 모양인데 나는 무언가로 한대를 얻어 맞은 듯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
“이게 아닌데”…..
지도를 꺼내 보니 생목마을은 백두대간을 완전히 내려선 산허리에 덩그러니 앉아 있다
내려오면서 확인했던 리본들은 생목마을에서 백두대간으로 올라서기 위한 역 안내 리본이
었다
그래도 평생 다시 오지 못할 오지의 이름 모를
계곡에서
그
눈부시게 깨어나는 새 아침의 풍광을 마주할 수 있었으니 나름대로 좋은 시간
아닌가?
내려올 때는 이런 저런 이야기하며 계곡의 풍광을 즐기며 내려오느라 시간을 별로 의식하지
못했는데 그 길을 다시 오르자니 경사도 생각보다 급하고 꽤 많은 거리를 흘러 내린
모양이다.
오르는 중에 태양이 떠 올랐는지 내려온 산 봉우리에 눈부신 황금 빛 이 걸린다.
안타깝게도 헛발질 때문에 오늘은 눈앞에서 일출의 장관을 놓치는 구나…
겨울 산행에서 다시 태양의 위력을 실감한다.
따사로운 황금 빛은 움츠러든 어깨를 펴게 하고 마음의 창을 활짝 열어 젖힌다.
대자연의 한가운데 감미로운 태양의 빛과 대간의 정기가 만나는 그곳에 가득한 운기가
가
슴 가득 올라온다.
무슨 보약이 필요 있으랴?
늦은목이에 회귀하는 데는 빠른 걸음으로 40분 정도
소요되었다.
늦은목이 위 언덕에서 아침식사를 했다.
40분을 지체했으니 2진은 아마 지났으리라
생각보다 많이 떨어지지 않았는지 식사를 마치고 거친 비탈을 올라 도착한 갈곶산에서
다시 2진을 따라
잡았다.
6~7 명이 방금 도착해서 산세를 조망
중이다.
갈곶산에서 동서남북이 훤히 트여 비로소 일망무제의 사계를 조망한다.
멀리 봉우리들의 이름은 잘 모르겠지만 힘있게 뻗어가는 장쾌한 설능의 흐름이 한눈에
들어 온다
지맥은 갈곶산에서 봉황산으로 흘러내려 부석사를 갈무리한다.
한국 최고의 목조건물
어느 해인가 여름휴가 가는 길에 들렀던 부석사에는 커다란 매미들이 똥궁뎅이를 치켜 뜨고
소란스럽게 울고 있었고 풍수지리의 무뢰한인 나로서도 범상치 낳은 지기를 느꼈던 곳이기도 했다.
훗날 알았지만 합천 해인사와 영주 부석사는 풍수지리학 상 최고의 길지에 속한다.
부석사는 동쪽으로는 문수산 남쪽으로는 학가산의 맥이 휘어들고 서쪽으로는 소백산이
둘러싸는
거대한 산 울타리의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는데 뭇 산의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봉황산을 향하여 읍하는 형상으로 그 지세가 범상치 않으며 그 경승의 가운데 서면 저절로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낄 수 있는 아늑한
곳이다.
부석사 입구에는 “太白山 浮石寺” 라고 써
있다
태백산이 의상의 스승인 지암선사가 살았던 중국의 동남산과 동격이라고 여겨 화엄사상의
본거지로 숭상한 것에서 비롯되어 봉황산 부석사에 느닷없이 태백산 이름이 붙었단다 .
저 아래 어딘가에 마대산이 있고 난고 김병연의 묘가 있다고 했다.
1807년 태어나 조부 김익순이 선천부사 당시 홍경래난에 연루 역적으로 몰려 페족되었다
고단한 삶 한가운데서도 뛰어난 글재주로 과거에 나가 시제에 걸린 김일순을 일필휘지의
명문으로 규탄하여 장원급제 하였건만 그 김일순이 조부일 줄이야……
그 가슴의 한으로 속세에 살 수 없어 평소 시와 술로 바람같이 산천을 떠 돌다가 저 아래
양지바른
“와석골 노루목”어딘가에 누워
있다
세사의 번뇌를 초극하여 허허롭게 자연과 바람과 함께한 그의 삶을 흠모하였건만 그가 남긴
시들을 읽어보면 가슴에 삭히지 못한 한과 회환이 묻어나니 안타깝기 그지
없다
자
탄
슬프다 세상의 사나이들아
내 평생 삶을 알 사람 그 누구랴
부평초 삼천리에 발자취 어지럽고
글 짓고 노래한 사십년이 허사로다
못 이룬 청운의 꿈 바라지 아니하고
때 되어 오는 백발 슬퍼하지 않는데
고향 가는 꿈에 놀라 깨어 앉으니
남쪽 가지에 밤 삼경 새가 운다
갈곶산에서 다시 선두로 나섰다.
군데 군데 눈이 쌓여 있긴 한데 기본적으로 적설이 적어 눈이 거의 녹아버렸는데 온화한
날씨에 발아래 걸리는 수북한 낙엽들이 흡사 늦가을의 정취를 자아낸다.
마구령 가는 길에 처음 고치령에서 오는 사람들을 만났다.
6시 30분에 고치령에서 출발했다고 하니 고치령 까지는 3시간 20분 정도 남은 셈이다
고치령에서 버스가 기다리는 좌석리 까지 길 따라 내려가는데 한 시간 그러면
2시경이나
되어야 도착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오늘도 11시간 정도 소요되는
산행거리다.
마구령은 영주시의 남대리와 인곡리를 이어주는 잘 다듬어진 비포장 길이다.
마구령이 깍아낸 능선의 가파른 경사면을 올라 몇 개의 봉우리와 능선을 가노라니 비로봉
인지 국망봉인지 하얀 눈을 이고 얇은 구름층으로 은은하게 둘러 쌓여 있는 봉우리가
눈에 들어온다
소백산권에 들어서서 부터는 0.5~1km 간격으로 이정표가 잘 정돈되어
있다.
사방에 시야가 터지는 1096봉 헬기장에서 사진을 한 장
찍었다
갈곳산에서 우리 뒤로 함께 했던 한 친구는 다시 보이지 않았다가 고치령 가는 능선
어디쯤에선가 앞선 친구가 힘이 부치던지 쉬자는 바람에 한 10분쯤 귤이며 계란을
먹으며 쉬고 있는 동안 따라 붙었다.
다시 행장을 수습하고 가는데 선두로 가던 친구가 컨디션이 좋지 않은지 땀을 몹시 흘리고
힘들어 한다.
상당히 빠른 속도로 선두에서 움직여 갔었는데 갑작스레 체력이 저하되는지 얼마 가지
않아 다시 쉬자고 하면서
앉자마자 잠에 빠져든다.
닭목령에서 내가 겪었던 것과 비슷한 현상이다.
그날은 배가 고파서 졸음과 탈진현상이 나타났었는데 그는 상당한 속도의 산행으로
체력소모가 많았던 모양이다.
아무래도 한 잠을 자야 풀릴 것 같고 대간의 길목이니 후미에 오는 우리팀이 깨워 줄거라고
생각해서
조금 눈을 붙이라고 하고 뒤에 오던 친구와 계속 길을
잡았다.
멀리 산으로 둘러 쌓인 곳에 평화로운 오지의 마을이 보인다.
헬기장을 올라서자 단양쪽 형제봉이 눈앞에 들어오고 소백산 봉우리가 더 가까워졌다.
추운날씨에 힘겨운 겨울 산행을 예상했는데 가득한 낙엽 위로 계절을 준비하는 나목들이
그렇게 쓸쓸해 보이지 않는 편안한 여정이다.
고치령에 내려서기 직전의 봉우리에서 선두의 친구가 따라 붙었다.
잠깐 잠이 쏟아졌는데 추워서 오래 자지 못하겠더란다.
그래도 겨울 날씨라 움직임이 정지되면 금새 한기가 올라오는
모양이다.
고치령은 한 켠에 이정표를 세우고 비교적 넓은 비포장 도로의 모습으로 홀연히 나타났다.
시간이 12시 50분에 닻을 내렸으니 반대편에서 종주하는 사람들을 만난 후
세시간 만에
고갯길에 내려선 셈이다.
고치령에서 보이는 숲과 나무의 모습들이 범상치 아니하다
길섶에서는 계곡의 물흐르는 소리가 나고 어딘가에서 새소리도 들린다.
이제 길 따라 물 따라 산보하듯 유유자적하게 흘러내리다 보면 목적지에 도착할
것이다.
좌석리 까지는 5km
계곡을 내려오면서 수량이 많아져 물소리가 커지고 길가의 소나무는 늘씬 늘씬한
미인송이다
.
승용차가 한대 지나는데 나중에 따라 붙었던 친구가 그예 세우고 만다
.
등산화가 온통 흙투성이고 장거리 산행에 행색이 남루하여 공비 같은데 그냥 천천히
내려가면 될 걸 민폐를 만든다..
아저씨는
영주에 사는데 정기적으로 고치령 샘물을 떠간다고 했다.
고치령 찬물샘은 물이 하도 좋아 영주에서 많이들 떠간다고 한다
.
" 사랑하나 풀어던진 샘물에는 바람에 일렁이는 그대 넋두리가 한가닥 그리움으로
솟아나
고….”
물맛 좋은 찬물샘에 적혀 있는 싯귀란다
.
큰 생수통이 2개가 물이 채워져 뒷좌석 발판에 놓여
있다.
평상시 아주 차를 깨끗하게 관리하는 듯 시트며 발판은 깨끗하게
청소되어있다.
발판의 생수통을 옆좌석 위로 올려 잡고 뒤에 두명이 타고 앞에는 차를 세운 친구가 탑승
했다.
아저씨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내 눈은 주변경관의 탐승 여념이 없다.
포장과 비포장이 반복되는 고치령 길은 아직 통행량이 적은 듯 지나는 차의 모습은 거의
없고 주변의 풍광이 아직 훼손되지 않은 오지의 원시림 인 듯 수려하고 그윽하다
마을 입구에 우리의 버스가 보이고 승용차를 내리는데 내가 뭉갠 발닿는 뒷자석이 온통
벌건 황토 흙 범벅이다.
생수통에서 언제 물이 샜는지 시트에 물이 흐른 흔적이 있고 내 옷의 허리춤은 온통
젖어 있다.
아저씨께 너무 미안 해서 죄송하다고 하니 상관 없다고 하신다.
몇 년 전인가 지리산 단독 종주 후에 천황봉으로 내려온 적이
있다.
백무동에서 반선 까지 버스를 타고와서 노고단 까지 올라 가고 있는 수 없는 차를
세웠
건만 40분만에야 겨우 대학생 연인이 탄 차를 얻어 탈 수 있었다
거기에 비하면 참으로 후한 인정이다.
기사 아저씨는 선두가 생각보다 많이 늦었다고 했다.
오래 전에 발길 닿는 민가에서 식사와 잠을 해결하면서 백두대간을 2번 종주 하신
분이니
머리 속에는 선두가 도착하는 시간이 이미 통계처리 되어 있다
늦은목이에서의 헛발질과 항상 선두를 잡았던 몇몇 친구들의 결행 때문인 모양이다.
오늘 따라 기사 아저씨가 가스버너를 챙기지 못해 할 수 없이 개울가에 돌무더기를 쌓고
나무장작을 때서 개울물로 돼지고기 김치찌개를 끓였다.
김치와 두부 돼지고기는 선두에 섰던 그 친구가 또 자비로 준비해 온 것들이다.
추운 날씨에 긴 여정을 마무리하고 그 청정한 개울물에 얼굴과 발을 씻고 옷까지 갈아
입은 다음 마주한 한잔의 막걸리와 뜨거운 돼지고기 찌게.
백두대간 14구간의 뿌듯하고 즐거운 마무리 의식이다
.
나는 밀려드는 허기와 찌개의 맛에 취해 배가 방실 해질 때 까지 막걸리 두잔에 찌개를
세 그릇이나 비웠다.
그래도 오늘은 뒤늦게 도착한 최선생님께 이야기해서 즉석에서 찌게 준비자금을 걷었는데
23만원이나 걷혔다.
최선생님은 50세 가까이 되신 고등학교 선생님으로 열정적으로 백두대간에
임하고 있고
빠지지 않고 산행기를 써서 산악히 게시판에 올리며 4차 종주대원의 리더
역할을 수행하고 계신 분이다.
우리는 돌아 오는 길에 풍기사과 한 상자를 사서 후식으로 맛있게 바숴 먹고 남은 돈은
다음 떨어질 때까지의 찌게 준비자금으로 건네 주었다
.
그리고 포만감, 격한 운동후의 나른함과 기분 좋은 뿌듯함을 속에 그렇게 잠들어 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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