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간: 제 19구간 (개터- 작점고개)
도상거리: 18.5km
일 자: 2003년 2월 23일(일)
날 씨: 눈
기 온: 2c ~7c
10 : 17 효곡리출발
10 : 15 개터재
11 : 30 희룡재
11 : 50 큰재 (중식)
12 : 30 출발
13 : 30 국수봉(763M)
14 : 32 용문산(710M)
15 : 30 갈현
15 : 55 작점고개
태백산을 심야에 스쳐지나고
큰 눈과 바람이 어둠 속에 날리는 겨울의 한가운데
지척에 쌓인 가득한 눈으로도 천지 눈 벌판의 장대한 설원의 장관을 가늠할 수 없어
스멀거리는 미련을 걸고 떠난 덕유의 여행 길
그리고 백두대간 출정 을 뒤로한 베트남 출장
그 해갈의 기쁨 뒤로 난 3주를 산에서 멀어 있어야 했다.
물에 빠진 고기(肉)와
물에 빠진 고기 (魚)
그리고
물빠진 고기(魚)
그 엄청난 차이
산에서 멀어 있으니 물 빠진 고기처럼 활력이 없다
귀국하자마자 가족들을 데리고 천안으로 다시 올라갔다.
그래도 어머님 생신행사를 천안 동생집에서 치를 때만 해도 장거리 여행에도 불구하고 컨디
션이 그만 그만 했는데.
그날 민속놀이(gostop)를 형제들과 새벽 3시 30분 까지 하느라 불완전하게 유지되던 생체
리듬이 팍싹 깨져 버렸다.
베트남 시간으로 5시 30분 다시 날을 꼬박 세운 셈이다.
아침 7시 30분 기상
동생들을 뚜드려 깨워 억지로 사우나에 끌고 가고
아침 먹은 다음 전원부부동반에 어머님 모시고 11명의 Do Family대군단 천안시내 진출
전날 민속놀이 고리로 적립한 10만원으로 영화 한편 때리다.
“아이 스파이”
차리리 그 시간에 잠이나 잘 걸하는 후회가 가득한 영화.
그 쉴새 없이 주절거리는 흑인놈의 별볼일 없는 액션을 보느라 고통스런 두시간
어쩔 수 없이 두 주의 토요일과 일요일은 산과는 무관하게 그렇게 흘러갔다
그 고행의 시간이 지나 귀가한 일요일 밤 이후에 나의 리듬은 완죤히 깨어져 버렸으며
수요일 단 하루를 걸어서 출근 했을 뿐 매일 아침 7시가 가까워서야 기상해서 간신히
차를 몰고 회사에 가기 바빴고 저녁에는 11시를 넘기지 못하고 잠들기 일쑤였다.
베트남에서 모기약을 매일 뿌리고 잤는데 쩨쩨파리(수면모기)에 물렸는지 모를 일이다
다시 마주하는 일요일은
백두대간의 출정이 있는 날인데
컴퓨터 사용자협회 회장단 모임이 경주에서 있는 날이다
토요일 오후부터 일요일 12시 30분 까지 공식 일정인데 명색이 충남 대표라 안갈 수도 없고
….
연속해서 사건이 발생하는 휴일 속에 훌훌 털고 산으로 돌아 갈 자유가 그립다.
토요일 아침에 차를 몰고 가서 회의에 참석하고 저녁에는 모처럼 만난 같은 밥그릇을 차고
있는 사람들과 그간을 회포를 풀고 일요일 새벽에 바람같이 내달아 백두대간을 출정하려
했는데
아뿔사 금요일 저녁에사 친구아버님의 부고가 날아든다.
고달픈 내인생 …
상가집에서 친구를 위로하고 대전에 귀가하는 시간이 새벽 두시쯤 될 것 같아 차를 몰고
회의에 참석할 계획을 취소하고 왕복 열차표를 예매했다.
상가집에서 돌아온 시간은 두시가 훌쩍 넘어 버렸다.
어쨌든 눈을 붙이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첫차로 토요일 회장단 회의에 참석을해서 충남의
현황 발표는 그럭저럭 마무리하고 일요일 토의 안건은 회장에게 구두와 서면으로 제출하고
다시 마지막 열차에 올랐다.
새벽 1시 36분 다시 대전역 도착
2시반 쯤 잠들어 완전한 숙면을 취하고 아침 6시에 자명종과 마누라 도움 없이 기상
마누라가 준비해 둔 식수와 빵 , 찹쌀모찌, 과자 , 포도쥬스 ,과일쥬스 ,사탕 ,오렌지 3개
그리고 즉석김밥으로 배낭을 꾸리고 보무도 당당하게 대간 출정.
대전에서 이동거리가 짧은 구간이다
황간 나들목을 나와 구간 등정 기점 개터재에 섰다.
비가 추실거리긴 해도 3주만에 다시 잔설이 남아 있는 산의 모습을 대하니 뿌듯하다 .
오늘 7시간 30분 예정 산행인데
그동안 적조했던 신체가 컨디션을 가다듬을 수 있을까?
내리는 비에 길이 많이 질척거린다.
청명한 대간의 공기에 쌓인 피로마저 훌쩍 달아난다
능선 길을 올라서자 남아 있는 눈들이 녹아 내리면서 길이 몹시 미끄럽다.
대간이 잠시 쉬어가는 신곡리 마을에서 식사를 하기로 해서 배낭을 차에 두고
비무장 산행을 하는 터라 몸도 마음도 가볍다.
비가 어느덧 눈발로 바뀌어 내린다
올려다보는 고지의 능선에는 벌써 하얀 눈꽃이 피었다.
막바지 겨울이 가는 길목에서 다시 장하게 내리는 흰 눈을 보지 못할 줄 알았는데
그 백설의 순수함으로 다시 덮혀가는 대간의 모습에
또 아이들처럼 가슴이 설레이고 들떠온다.
강원도의 웅장함에는 미치지 못하더라도
영동과 추풍령 인근을 가로지르는 대간의 산세도 예사롭지 않다.
인공이 범접하지 않은 대자연의 모습이 더 가슴 뭉클한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
회령재에서 눈은 하늘 가득 춤추며 내려오고 길이며 밭이며 금새 하얗게 덮여버린다.
그저 흘러보내기 아쉬운 시간
이 시간대 아니면 마주할 수 없는 아름다움 속에 내가 서 있다.
흡사 야생의 노루처럼 들떠 있는 모습으로 모두들 눈속에 히히덕 거리며 함께 모여 사진을
찍는다.
비무장이니 엄청난 속도로 진행하는 산행이다
야산 같은 능선 길을 따라 내리다 보니 어느덧 해발 제로
민가와 축산 농가 몇 채가 서 있고, 농로 길을 따라 과수원이 보인다..
이윽고 폐교된 옥산 초등학교 인성분교와 민가가 보인다.
학교 옆 농로 길을 따라 교정 옆을 통과하여 큰재에 당도하는데 친근감 있는 폐교와 교정의
오래된 나무들이 인상적이다
두시간 30분이 걸린다 던 신곡리에는 11시 55분에 내려섰다
1시간 40분이 걸렸는데 개발에 땀나도록 걸은 셈이다.
별로 피로감은 없는데 허기가 동한다.
같이 내려섰던 많은 사람들은 일부는 버스에서 배낭만 챙겨 가지고 다시 길을 재촉한다 .
낮아진 해발로 눈이 다시 비로 바뀌어 내리고 있다.
바람도 이젠 제법 불고 기온도 싸늘해져서 야외에서 식사를 하려면 만만치 않을 텐데….
하여간 난 준비해간 짐밥 두줄을 깨끗이 비워내고 오렌지 후식까지 해치운 다음 느긋하게
다시 대간에 오른다.
국수봉으로 연결되는 능선은 가파르게 해발이 높아 간다.
2명이 뒤를 따라오고 있다.
배부른 다음 가파를 경사를 치고 오르자니 부담스럽긴 한데 그런대로 견딜만하다
오히려 뒤따라 오는 친구들이 점점 멀어지는 걸 보니 3주의 공백이 크게 체력을 망가뜨리
진 않은 모양이다.
국수봉 가는 길은 아름다운 빙원이다
대자연이 빚어낸 불세출의 걸작
해빙과 눈꽃이 절묘한 온도와 기후의 타이밍으로 만나서 조각된 산하는
그저 환호와 탄성의 메아리에 쌓여
걸어가는 걸음마다 투명한 얼음 종소리를 만들어 낸다
이렇게 엄청난 상고대 숲이 생성되다니... 보기 드문 상고대 터널이 관목 지대에 형성되어
아름다운 설경을 빚어 놓고 있었다.
눈이 녹았다가 나무 가지에 얼어붙어 생긴 상고대!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휘어져 버린 소나무, 철쭉들…
지금까지 그 어떤 곳에서도 못 보았던 희한하고 기묘하며 아름답게 수놓아진 상고대와 설화
들이 지나는 걸음마다 가지를 털어 흰 눈가루를 흩날린다.
김 대장은 수십 년 산행에 처음 보는 멋진 눈꽃의 풍광이란다.
겨울이 가장 깊어 있는 숱한 시간대에서 수 없이 만났던 장엄한 눈꽃의 설경
저마다의 독특한 개성과 특성으로 오묘한 자연의 조화를 시새우 건만
설악,지리,덕유,게방,태백 그 어느 유명한 겨울산에서도 만나지 못했던 불후의 명작을 오늘
마주한다.
해빙과 함께 녹아 내리던 눈이 갑작스럽게 하강한 날씨에 결빙되어 나뭇가지마다 고드름이
매달리고 가지들은 흡사 보석처럼 투명한 얼음들이 둘러싸고 있다.
그 얼음위로 눈이 내려 일부는 흘러내리고 일부는 날을 세워 얼음에 칼날을 만들어 놓았다.
원래 사람의 왕래가 많지 않은 등산로에 나무들이 거칠 것 없이 가지들을 늘여 놓았는데
그 가지들이 투명한 얼음으로 둘러싸여 그 무게를 길 위로 드리우니 가파른 등산로를
헤쳐나가는 것은 그야말로 얼음 숲을 가로질러 가는 것이다.
음악소리처럼 경쾌하게 부딪히는 얼음 가지 소리를 들으며 동화와 같은 아름다운 눈꽃의
화원을 지나는 경이로움 그리고 그 가득한 신비감
항상 경탄해 마지 않는 아름다운 자연들이건만
언제나 이제는 또 다른 새로움으로 감탄할 일이 있을 리 없다고 기대를 접어둔 곳에서
다시 우연히 만나는 황홀한 아름다움들.
전율처럼 가슴이 저려오는 빛나는 삶의 기쁨과 축복들이다.
경주에서 그냥 하루를 유하고 천천히 올라왔으면 그저 내 삶에서 무심히 지나쳐 갔을
그래서 어쩌면 평생 만나지 못했을 눈부신 우리 산하의 아름다움이 아니었던가?
그래서 인생을 아직 많은 익살과 해학 가득한 모험과 기쁨이 기다리고 있다.
중간 능선에서 먼저 간 두명의 아줌씨와 한 친구를 만나고 작은 봉우리 분지에서 버너에
찌게를 끓이고 있는 두 친구와 여선생을 만났다.
40을 넘긴 나이에 작은 체구로 한번도 빠짐 없이 열정적으로 대간에 임하는 여선생의 모습
도 적지 않은 감동이다 .
허기사 산이 습관이되어 종교와 신앙처럼 되어버린 사람들이라면 이해하리라.
칼바람 능선의 그 거센 바람을 맞으며 거친 호흡을 기꺼이 쏟아내는 사람들
얼어가는 손으로 고통 속에 이어가던 싸늘한 식사를 번번히 잊지 못해 하는 사람들이 기꺼
이 함께하는 그 산의 의미를 …..
하지만 부득불 산에서 찌게를 끓이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다.
그것도 무수한 산들의 조화 같은 개성의 영역이련가?
얼음 숲을 헤치면서 하염 없이 계속되는 가파른 오르막 길의 피로를 의식하지 못한 것은 만
산 백설과 가득한 빙설화의 경이로움 때문이었다
국수봉은 작은 표석과 제법 넓은 공간 그리고 흐드러지게 핀 눈꽃의 화원으로 홀연히 나타
났다.
산 안개가 조용히 흐르는 눈봉우리는 사계에 신비의 빗장을 걸고 바람마저 잠재우고 있다.
먼저 도착한 1진 2명은 식사 중
선두 한명은 파죽지세로 목적지를 향해 진군중이다
오늘 같은 날 카메라를 잊고 왔으니 먼저 출발할 수도 없고 최선생의 식사가 끝나 길 기다
려 사진을 부탁했다.
독사진도 찍고 단체사진도 찍고 뒤이어 합류한 동지들과도 닥치는 대로 찍었다.
카메라를 가져온 날보다 더 많이 찍은 셈이다.
사진에 대한 집착과 미련은 순전히 환상적인 날씨 탓이다.
용문산을 거쳐 하산하는 길 내내 눈발이 흩날린다.
산행 공백을 우려했지만 용문산을 하산하는 때 까지 선두그룹에서 이탈하지 않았고 그다
지 힘겨움을 느끼지도 않았던 멋진 산행이었다
7시간 30분이 소요되리라 던 산행구간을 6시간 만에 마무리했다.
여전히 눈발이 날리는 고갯마루에는 언제나처럼 시장기 동하게 하는 김치찌게가 끓고 있다.
김치찌개와 막걸리가 기다리고 있어 더 즐거운 산행이었는데 이 겨울이 가면 내리는 눈 속에서 쪼그리고 않아 혓바닥을 깨물며 먹던 김치찌개가 그리워질 게다.
안타깝게도 이젠 17명으로 줄어든 대간 종주객들이 더 이상 줄지 않고 모두 이렇게 즐거운
마음으로 대간 종주를 마무리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내 남은 삶의 파이가 점점 줄어가듯
열정과 의욕 속에 남겨질 수 있는 나의 소중한 시간들도 지나가고 있다.
남은 시간의 여백들은 정말로 하고 싶은 일들과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아름다운 것 들로
채우고 싶다
이젠 내가 좋아하는 그림들만 그리고 싶다.
언젠가 몇 년쯤 뒤엔가 다시 이 글을 읽는다면 흐믓한 미소로 기억할 수 있는 그런 시간
들…
몽환의 안개가 흐르는 얼음성을 지나 아직 저무는 날을 보지 못한 시간에 흔들리는 버스
한 가운데 심산주유의 깨달음이 온다.
살아 간다는 것이 그렇게 대단할 것도 없는데….
인생이 그렇게 무상할 것도 없는데…..
인생은 물이 흘러가듯 꽃피고 낙엽 지듯 아무렇지도 않게 순환하는 것인데…
끊임없는 욕심과 집착을 이제 털어야 할 때가 아닌가?
자연은 있는 그대로 저렇게 아름답거늘…….
“새벽에 홀로 깨어 앉아 자신의 존재를 비껴 지나가는 그 바람소리를
귀 기울여 듣는다.
임종의 자리에서 꽃의 세례를 받을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살아 있는 동안에 세계와 만나고 자기 자신과 뜨겁게 해후한 자는 누구인가?
어디에도 머물지 않고 끝 없이 걸어 자기의 집에 이르는 자는 행복 하리라”
나와 닮은 꼴의 인간 류시화가 “지구별여행자”란 인도 여행기에서 뱉어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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