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다.
해수욕장은 개장하고 워터파크는 손님을 유혹하기 시작했다.
한 여름밤의 꿈과 추억을 위해 주말의 일탈을 꿈꾼다.
지리산 옛길 걷기도 하고 싶고
삼척 무건리 이기골도 가고 싶고
동강 백운산도 가고 싶다.
하지만 꼭 행선지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언젠가는 가야 할 곳이고
어디를 가건 미지의 들판에 널린 기쁨을 욕심껏 배낭에 담을 수 있다는 걸…
금요일 지인들과 술 한잔 치는데 오늘의 일정이 걱정되어 술을 자제했다.
감사님 꽤부린다 할까봐 눈치껏….
백운산에 가기로 했다.
동강의 기억들은 늘 시원하다.
오래 전 동강 주변산과 강변 트래킹을 하면서 벌겋게 달아오를 몸을
동강에 던져 넣던 그 후련한 기쁨은 세월에 퇴색되지 않았고
잣봉 산행 후 래프팅하며 지르던 환호는 어느 여울목에 아직 떠돌고 있다
백운산은 늘 기다리기만 했다.
한국의 산하 랭킹 37위에 랭크되어 있지만
산림청 백대명산에 속하지도 않고 무릉객을 눈길도 주지 않았다.
(마음이야 국뚝 같았지만 늘 공사가 다망해서…)
어쨌든 공식적인 100대명산이 아니니 마눌을 끌고 나설 수도 없고….
흐린날씨가 동강에 도착하고 나서 밝아졌다.
화창한 날을 원했지만 그것이 현실이되고 나면 남은 건 더위와의 싸움이다.
고도를 유지한 강을 내려다 보면 그 물길에 시원해질까?
아님 뛰어들 수 없는 아쉬움에 더 답답해질까?
산행일 : 2009년 7월 4일 토요일
산행지 : 동강 백운산
날 씨 : 흐리다 맑고 등산 후 소나기
동 행 : 새여울 산님들
경유지별 시간
10 :30 : 점재나루 들머리
10 :52 : 0.6km 지점능선 정상 1.4km
11:32 : 정상 500m 전방
12:42 : 정상
13:00 : 식사 후 출발
14:27 : 정상에서 2.2km , 제장나루 1.2km 전방
15:03 : 제장마을
점재나루
예전엔 배로 건너야 했다는데 이젠 잠수교로 건넌다.
백운산 가는 길은 절벽길이다
그 옛날 걸출하게 융기하기 전
동강아래 잠겨있었는지 주상절리와 같은 단애로 이루어진 절벽 길이다.
고도를 높이면서 동강은 아주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 준다.
나무들은 등산로 옆에서 춤을 춘다.
비탈에 서서 한껏 신명난 추임새를 넣고 있다.
동강의 햇빛과 바람에 제멋대로 자란 팔을 높이 쳐들고
삶은 늘 즐겁기라도 한 듯 흥에겨운 어깨춤이다.
옛날 바람도 쉬어 넘는다는 고개를 몇 번 넘어야 닿을 수 있는
유배의 땅
이 외진 오지에 사람이 와주어 좋은 모양이다.
영월은 세상의 소외된 그늘이다.
숱한 사람들이 한 때의 부귀 영화를 뒤로한 채 무상한 인생을 한탄하며
쓸쓸히 세상에서 잊혀가던 버림받는 자들의 고향
적막과 외로움 속에 고립된 은둔의 땅이다.
땀이 많이 흐른다.
최악의 상황에 체력이 많이 고갈되었다.
요즘은 운동량이 거의 없었다.
술을 많이 마셨다.
어제도 술을 마신 것처럼.
등로는 수직으로 솟아 있고
태양은 뜨겁고 바람은 출장 중이다.
어제 내린 비에 길은 미끄럽다.
배낭은 무겁고 무거운 카메라는 이래저래 신경 쓰인다.
편무암 절리의 가파른 길에
황토 진흙은 길을 더욱 미끄럽게 한다.
아침을 일찍 먹은 터라 11시 20분경부터 배가 고파왔다.
웬만하면 식사하고 가려고 눈에 불을 켜고 식사할 만한 곳을 찾았지만
칼날 같은 능선 길은 편안하게 앉을 곳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 넓은 산길에 밥 먹을 만한 곳이 한 군데도 없다니… 정말 신기한 노릇이다.
아까 아래서 이창호님을 만났다.
다치기 몇 달 전 함께 영남알프스를 주유했던 산친구
먼저 인사하던 그를 알아 보지 못했다.
이창호라 했으면 단박에 알아봤을 텐데…
얼굴은 본듯한데 산날맹이란 생소한 닉네임을 이야기했으니 지난 시간의 기억이
가물거리기만 했다.
어쨌든 내 기억 속의 그의 모습은 좀더 젊은 얼굴로 기억되어 있었다.
내가 함께했던 동행의 이름을 줄줄이 되뇌이면서 이창호란 이름을 이야기하자
그 이창호가 바로 자기라 밝히면서 비로소 가물거리던 기억은 실마리를 찾았다.
내가 그를 어찌 잊을 수 있으랴 ?
18시간의 길고도 아름다웠던 명상과 순례의 길동무..
장엄한 영남알프스의 대 서사시를 함께 쓴 그 친구를…
막산에 막걸리르 지고 올라
나의 갈증을 풀어주던 그는
오늘도 차가운 막걸리를 내게 두 잔이나 따라 주었다.
영남알프스에서 막걸리로 맺어진 우리의 끈끈한 정은 백운산에서 다시 그,렇게
반가운 해후를 했다.
등로는 칼릉을 따라 백운산 정상으로 움직여 간다.
결국 12시가 한참 넘어서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는 백운산 고스락에 섰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나를 반겨주는 것은 백운산 표석과 누군가의 소망이 머무는 돌탑세개
백운산은 힘들게 한 발 한 발 어렵게 용골마루에 오른 보람을 일깨워 준다.
백운산의 고스락에서 바라 본 풍경이 전하는 말 .
“세월은 빨리 지나고 그대가 되돌아 본 세상은 창대했으나 아직 세상에 돌아 볼
아름다움은 많이 남아 있다네 “
“얼른 허리 나아 다시 훨훨 날아보시게나!”
막걸리 세 잔을 먹고 내려가는 가파르고 미끄러운 길은 죽음이었다.
집 나간 바람은 아직 돌아 올 생각이 없다.
다섯개의 봉우리를 넘어서야 내려서는 제장나루는 험한 길이었다.
가끔 깎아지른 절벽난간의 소나무 가지를 들어 까마득한 벼랑아래 동강을 내려다 볼 수
없으면 정말 힘들기만 하고 볼품 없는 등로이다.
유난히 미끄러운 바위와 돌길에 넘어질까 조심하느라 신경이 곤두섰다.
가파른 길에서 가는 로프에 체중을 싣다가 손바닥이 미끄러지면서 손에 불이 났다.
결국 내려오던 내내 화상의 통증을 붙이고 다녀야 했다.
어제 비가 왔다고는 하지만 동강의 물은 그 때의 푸른 물이 아니다.
조금 성급했다는 생각이 인다.
큰 비가 지나고 탕탕히 흐르는 동강을 보았으면 더 좋았을 텐데….
그 때처럼 동강에 몸을 던져 그 말고 푸른 물 길로 온몸을 정화해야 하는데..
그러면 한여름 잿빛도시에서 말라가던 내 영혼은 다시 삶의 근원적인 원기를 회복하고
다시 전투력이 충만해 질 것이다.
사실 백운산 정상 뒷부분이 넓긴해도 여러군데 나누어 식사할 형편은 못되는데
우린 함께 산행하는 사람들이고 새여울 유람단이란 이유만으로도 굳이 불편함을
구실로한 불면식의 핑계도 벌써 사라져 버린 셈이다.
이창호님 일행 세 분외에 새여울 산객 세분이 펼쳐 놓은 식단은 장관이다.
돼지고기 볶음에 상추에 치커리, 오이, 치나물과 이름모를 여러 나물들
봄 산행길에 뜯어서 갈무리해 놓은 것이라 했다.
쌈장맛이 너무 좋아서 마눌이 싸준 열무김치를 썩썩 비벼 먹는 중에도
상추쌈을 싸 먹었다.
무더운 고원의 그늘에서 호사를 있는 대로 부리며 제대로 먹은 푸짐한 식사였다.
몇몇 사람은 너무 가파른 길을 땀을 쏟으며 오르니 어지럽고 밥맛이 통 없다고 했다.
내겐 훌륭하고 멋진 식사였다.
식사 중에 계룡건설 산악회가 올라왔다.
7~8명 정도인데 인원상 산행길을 새여울에 위탁한 모양이다.
그들이 배낭에서 쏟아낸 것들은 더 화려했다.
마치 사는 오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먹기 위한 곳인 것처럼…
냉막걸리에 시아시된 맥주에 간재미 회 까지…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전작에도 염치불구하고 한잔을 더 얻어 먹었다.
2일간 동강을 따라가는 트래킹은 은퇴하나 가능할까?
어쩌면 그 시간이 빨리 다가올지 모르겠다.
물막이 댐 공사 전에 풍경을 카메라와 내 기억에 담아두어야 한다.
다시 못 볼 그 모습을 내 사진과 글로 남기어야 할 것이다.
인간이 바꾸어버린 것들이 어디 한둘이랴?
아니 인간이 대책없이 들이대고 나서 바뀌지 않은 것들이 또 어디 있을까?
인간은 영악하고 사악한 예술가다
마치 창조주를 흉내내기라도 할 듯 자신의 얼굴을 바꾸고 자연의 얼굴을 바꾼다.
본성과 자연의 미는 사라지고 복제된 아름다움과 광기 그리고 긴 후유증이 남을 뿐이다.
제장나루를 얼마 남겨두지 않고 집 나간 바람이 돌아왔다.
길은 편해지고 마음도 편해졌다.
안스럽게 말라 있는 동강물길이 눈에 들어 온다.
5시간쯤 걸렸다.
팬티만 입고 동강물길에 뛰어들었다.
팬티만 입고 뛰어드니 사람들이 쳐다본다.
“뭐 볼게 있다고 쳐다 보시나…?”
둥근 돌에 물이끼가 남아 미끄럽고 적은 수량은 뜨거운 태양에 데워져 차갑지 않다.
물에서 나와 뒤돌아 서서 젖은 팬티를 갈아 입는데
건너편에서 엉덩이를 본 산님들이 환호한다.
엉덩이가 대수랴 !
뜨거운 내 몸은 지나간 시간 속에 잠긴 동강의 시원한 추억을 잊지 못하는데….
그 물길의 유혹을 기억하는데 ….
옷을 갈아 입고
언제 피곤함이 있었냐는 듯 몸도 마음도 가볍게 베이스캠프로 귀환했다.
막걸리가 기다리고 닭죽이 끓고 있었다.
막걸리 두 잔에 닭죽 한 그릇을 먹고 있으려니 미리 보낸 서늘한 바람을 타고
순식간에 소나기가 들이친다.
멋 산부터 달려 내려오는 소나기의 장관을 보면서 동강나루에서 닭죽을 먹는다.
이런 날도 있다.
불볕 속에 산행을 마치고 강물에 목욕재개하고
한잔의 막걸리와 맛있는 음식으로 신선의 지경을 오락가락 하는데
갑자기 서늘한 바람이 들이치고 바닥을 패며 장대비가 들이친다.
후미 여자 산님 두 분은 우비를 걸치고도 물에 빠진 생쥐처럼 흠뻑 젖었다.
빗 속을 더나 동강 휴게소에 왔을 때 비는 거짓말처럼 그치고 동강은 붉은
물을 흘려 보내고 있었다.
나는 충주에 도착할 때까지 비몽사몽과 인사불성의 지경을 오락가락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