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참으로 이기적입니다.
특히 가을엔 더 그러합니다.
세상의 최고선은 나의 기쁨이고 내가 즐거우면 주변이 밝아지고 세상이 행복해진다고 논리가
공존과 책임보다 더 강해집니다.
가을의 향기는 차가운 이성을 마비시키고 도시에 지쳐 오랜 잠에 빠져 있는 감성을 흔들어 깨웁
니다.
바쁜 일상에 잊은 듯 살아도 사소한 가을의 징후에도 가슴이 먼저 공명합니다.
목에 감기는 싸늘한 아침공기
더 높아진 하늘
음유가수 최헌이 가을비 우산속으로 떠나고 우연히 마주친 신계행의 가을사랑이란 노래가 가슴을
흔들고 나서 산과 가을의 추억들이 가득한 그리움을 몰고 왔습니다.
가을은 병입니다.
이맘때면 다시 도지는 병
방황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가슴의 울림과 구름처럼 일어나는 수 많은 상념들
솜처럼 지칠 때 까지 가을 숲을 배회하고 나서야 초췌한 얼굴로 이별을 고할 수 있는
가을은 해묵은 지병 입니다.
설악으로 떠났습니다.
설악의 어느 길을 걸을지는 이미 정해져 있으면서 천연덕스럽게 일정과 루트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오늘의 산행대장을 자처했으면서도 챙겨 주어야 할 동료들을 뒤로한 채 홀로 어둠 속으로 떠
났습니다.
속으로 그렇게 위안합니다.
“어짜피 가을 설악은 사람에 치이고 시간에 치이는 거 동행과 안내란 무의미 하지
복잡한 길이 아니고 이정표가 잘 설치된 국립공원이라 길 잃을 염려는 없이 모두 흐름을 타고
잘 내려 올거야”
원래 이기적인 사람이 가을 병까지 얻었습니다.
처음엔 하늘 위에 별들이 반짝였습니다.
혹시 엄청난 단풍객들로 일출시간에 늦어질세라 무수한 인파를 헤치고 초반에 한껏 속도를
내었습니다.
설악의 이슬인지 별의 눈물인지 어둠 속에서 빗방울이 떨어지는가 싶더니 어느 결엔 별도 사
라져 버렸습니다.
어슴프레한 가을하늘에 검은 구름이 넘실거립니다.
“설악 신령님 어두워서 우리가 온 걸 못 알아 보시나베…”
조금씩 아쉬워 집니다.
“지난해에도 일출을 만나지 못했는데 ….”.
정상에 다가가면서 너무 이른 것 같아 진행 시간을 조금씩 늦추고 자주 휴식하며 대청봉에
도착하니 6시쯤 되었습니다.
너무 일찍 도착했지만 일출을 볼 수 없으니 상관없습니다.
지난주가 추석이었음을 감안하면 훨씬 많은 단풍객으로 북새통일 줄 알았는데 여느 해보다
사람은 더 적었던 셈입니다.
바람이 차가워지고 안개가 자욱해 집니다.
먼 능선 길을 달려오던 새벽은 대청봉 오름 길에 지치고 안개에 길을 잃었습니다.
대청봉엔 찬바람과 산 안개 그리고 무수한 인파만 넘실거렸습니다.
묵상하듯 이슬과 안개에 씻기운 고운 능선길을 걸었습니다.
엉겁결에 동행이 생겼고 가을의 병을 얻은 4명의 산객은 가을이 농익어 가는 조용한 치유의 숲
길을 말없이 걸었습니다.
몽환적인 풍경이었습니다.
산자락을 스치는 차가운 바람과 나뭇잎에 맺힌 이슬
초 절정기의 단풍 숲을 오락가락하는 운무들
축축한 가을 낙엽 냄새
그 모든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통절하게 오감을 자극해 왔습니다.
가지 않은 길
“억” 소리가 절로나는 풍경
무수한 날은 설악으로 떠났으면서 이직 이런 미답의 절경이 남아 있음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
습니다.
그 길을 걸으며 아이처럼 들뜨고 즐거웠습니다.
계절의 향기에 취하고 붉은 단풍에 취하고
필설과 어휘의 한계로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 앞에서
흘러나오는 건 숱한 신음과 탄성 그리고 한숨 뿐이었습니다.
이름처럼 아름다운 그 길을 걸으며 한 해 동안 도심에서 잃어버렸던 무수한 느낌표와 감탄사를
다시 되찾았습니다.
메말라 가던 가슴엔 다시 감상의 단비가 촉촉히 내렸습니다.
2007년 산림청 공식통계에 따른 4400개의 한국 산
그 산을 몇 개나 올라보고 떠날 지 모르지만 오늘 만난 가을 설악 길도 죽기 전에 꼭 걸어 보아
야 할 명품 길의 목록에 넣었습니다..
새로운 절경의 길을 걸을 때마다 늘 최고의 풍경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공룡과 용아를 처음 만난 날도 그랬고
중국 장가계에서도 황산과 무이산에서도 그랬습니다.
오늘이 내 생애의 가장 소중한 날이듯 오늘 사정없이 내 가슴을 흔드는 설악의 가을이 내 생애
최고의 풍경입니다.
오래 걸었던 신들의 땅에서 우리 넷 외에 아무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능선의 높은 봉우리들만 제외하고 아랫 쪽 운무가 걷히고 난 후 금단의 능선에서 바라본 설악의
의 풍광에 눈이 시렸습니다.
산이 더 아름다워지는 계절
흔들리는 차 속에서 혼곤히 불면의 밤을 보내고 오랜 시간 어둠을 걸어야 비로서 바라볼 수 있는
가슴 떨리는 그런 풍경 앞에 제가 서 있었습니다.
구름과 단풍이 어울려 어깨춤을 추는 설악의 은밀한 비단길을 꿈꾸듯 걸어 더없이 행복했습니다
인적 없는 신선의 땅을 배회한 날
역병처럼 도지는 가을 병은 조용히 치유되었습니다.
전율처럼 온몸을 타고 흐르는 감동이 막힌 혈을 뚫어내고 가슴을 텅 비웠습니다.
그 곳이 무릉도원이고
그 곳에서는 내가 구름이고 바람이고 신선이었습니다.
수많은 사진을 찍은 건 부질 없는 욕심일지 모릅니다.
바람과 냄새 , 안개와 이슬 낙엽 밟는 소리마저 사라진 정지된 그림이 그 감동의 시간을 어떻게
증거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흘러가는 시간만큼 안타까운 것이 쉽게 사라져가는 유한한 우리의 기억이라면 카메라의
눈으로 표구한 찰라의 영상이 훗날 감동의 실마리를 들추어 줄지 모릅니다.
오늘 내가 보내는 이 가을은 아직 젊은 날의 가을 입니다.
아주 먼 훗날 그 거친 길을 다시 걸을 수 없는 날
몇 장의 사진이 지난 아름다운 시간을 추억케하고 그 지나간 감동과 기쁨의 미소를 되돌려 줄
수도 있을 거란 기대가 아직 살아 있는 가슴 시린 가을날 입니다.,
.
세월은 덧없이 빠르고 가을은 짧아서 해마다 병세가 깊어져 더 이기적이 되고 역마살은 더 심해
질 것 입니다.
그래도 할 수 없습니다.
제가 서 있는 이곳이 우주의 중심이고 내 삶의 궁극적 의미는 나의 행복입니다.
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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