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이 대세다.
힐링은 무엇이고 어떻게 힐링을 하여야 할까?
혹시 의욕을 잃어본 적이 없는가?
열정은? 웃음은?
세상에서 잃어 버리는 것들에 관하여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세상의 화기와 독소가 모르는 사이에 당신의 소중한 것들을 훔쳐가고 있다.
본디 사람의 마음은 맑고 평온한 것인데 세상이 세뇌하는 그릇된 가치관이 당신의 뇌를 지배하고
세상에 대한 쓸데 없는 불안감을 증폭하고 있다.
당신이 중요하다고 굳게 믿는 것들이 정말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당신 스스로 세상에서 소중하다고 여기는 가치들 때문에 인생에서 정말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당신은 점점 외로워지고 황폐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힐링은 삶을 되돌아 보는 것이다.
힐링은 몸과 마음을 원래의 평온한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다.
힐링은 자신에게 좀더 가까이 다가가 조곤조곤 이야기 하는 것이다.
.
힐링의 출발은 삶의 소중한 가치들에 대한 깨달음에서 출발한다.
먼저 자연으로 돌아가라 !
세상의 독소로부터 병들어 가는 육신이 스스로 자정작용을 할 수 있는 곳으로
당신의 길들여진 야성은 먼 산이 보이는 도시의 회색창가에서 졸고
당신 안의 독수리는 더아상 힘차게 하늘로 솟구쳐서 더 넓은 세상을 바라보려 하지 않는다.
일주일 내내 기를 빼앗아 가는 회색 도시에 무슨 미련이 있어서 오늘도 떠나지 않는가?
아직 빛나는 당신의 날개는 언제 펼치려는가?
머지 않아 당신의 털은 윤기를 잃어가고 당신의 날개의 용골돌기는 세차게 비상해서 기류를 타는
방법을 잃어버릴 것이다.
당신은 도시에 가까운 텃밭에 앉아서 넓은 세상으로 힘차게 날갯짓하는 친구의 비상을 바라만
보아야 한다.
“늙어 저렇게 나대다가 다치지”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벌써 오래 전에 늙어 버렸다.
어쩌면 당신의 전성기는 영원히 다시 돌아 오지 않을 지도 모른다..
병이 들면 병원으로 찾아 가듯이 우린 자연으로 돌아간다.
오래 전에 잃어 버린 것
떠나가 버린 것
사라져 가는 것들
별과 눈물과, 감동 그리고 한 편의 시
그곳 어딘가에서 다시 찾을 수 있다.
우린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
영혼의 평화를 위해
광휘가 사라진 당신의 인생을 다시 기쁨으로 밝히기 위해…
자연 속에서 무엇을 하는가?
그냥 말없이 걸어라
아름다운 풍경들을 바라보면서 무슨 생각이든 자유롭게 떠오르게 그대로 두어라
무수하게 뒤얽힌 생각들은 산 모퉁이를 돌기 전에 조용히 정리될 것이다.
목적지와 시간을 의식하지 말고 천천히 걸어라
바람이 찾아오고 꽃과 나무가 말을 걸어 올 것이다.
당신의 가슴에서 무언가 비워질 것이다.
물 때 같이 끼어 있는 삶의 찌꺼기들…..걱정, 미움, 좌절 ,분노,두려움 욕심
가슴에 무언가 채워 질 것이다.
살아가는 날의 기쁨과 감동, 사랑
당신이 만나는 산과 숲과 강 그리고 선한 웃음으로 손을 내미는 당신의 친구가
힐링을 가져다 줄 것이다.
잊고 지냈던 당신의 아름다움 모습을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그것이 힐링이다.
귀연(歸然)이 대세다
넘쳐나는 산악회와 무수히 산으로 몰려 다니는 사람들
도시로 내려 온 등산 패션
사람들은 고향을 찾아가는 것처럼 다시 자연으로 돌아 오고 있다.
(歸然)은 이제 나이든 청춘들을 위한 트랜드와 대세로 굳어졌다.
나보다 뒤 늦게 산에 다니기 시작한 봉규는 백두대간을 3번 완주하고 9정맥 까지 마무리 했다.
지금은 무수한 지맥을 빠대고 다니는 중이다.
외국에서 살다가 돌아 온 태연은 마치 40대 초반의 나처럼 뒤늦게 산에 푹 빠졌다.
교수라는 비교적 자유로운 신분 덕에 좀더 여유롭기는 하지만 혼자 설악산과 지리산을 헤집고 다니고
지리산 화대종주까지 하고 나더니 급기야 친구와 백두대간을 시작했다.
오랫동안 서로의 안부를 궁금해 하다가 몇 달 전 구글을 통해 나를 찾아내서 30년 만에 먼저 연락을
해 온 군동기 종상은 나보다 이른 날에 백두대간 종주를 마무리 했다.
지금은 주말이면 시골에 내려가 노후를 위한 농장 관리에 몰두하고 있다.
젊은 시절 축구에 미쳐 있었던 노직은 몇 년 전부터 산에 다니기 시작하더니 거의 따라 갈 수 없는
스피드 워킹으로 회자되더니 아얘 대전 유명산악회 산악대장으로 등극했다.
성환이는 몇 년 전부터 매주 신앙처럼 거르지 않고 계룡산을 찾는데 가야 할 곳이 너무 많은 나는
자주 그와 시간을 함께하지 못한다.
함께 백두대간을 종주한 친구들은 나이 고하를 떠나 10년 지기가되었고 오늘도 변함없이 자연으로
돌아간다.
신기한 일이다
나와 잘 통했던 친구들이 모두 산과 자연에 홀려 있었던 것은…
그리고 이번 둘레길 6구간 때 고교 동창 하윤이가 연락을 취해왔다.
졸업하고 35년쯤 되었겠다.
갑자기 연락을 하고 귀연 둘레길 트레킹에 참석해서 함께 산행을 했다.
1년 2개월이 되었는데 매주 거르지 않고 산을 찾고 그 짧은 기간에 해외 산행 까지 몇 번 다녀 올
정도로 뒤늦게 산에 푹 빠졌다니 이래저래 놀라운 일이다..
그 장구한 세월 동안 무엇이 나와 친구들을 산으로 이끌었고 이제 산과 멀어 있는 친구들까지 산으로
불러 내는 것일까?
시간이 되면 “산이 사람의 영혼과 인생에 미치는 영향” 이란 제목으로 논문이라도 한 편 써 볼까?
오랜 세월을 지나고 보니 들개처럼 산야를 헤집고 방황한 날이 너무도 집요하고 일관적이어서 단순한
취미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본디 사람은 자연으로부터 태어나 자연으로 돌아간다.
유전자에 각인된 그 갈망은 연어의 회귀본능처럼 보다 근원적이고 원초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산과 자연은 나의 영혼을 춤추게 한다.
내게 산이란 스승이고 친구고 연인 이었다.
살아가면서 감동과 그리움을 잃지 않게 한 것 만으로 나의 인생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 주었다.
이제 천명을 알만한 나이가 되어서야 세월에 잃어버렸던 무수한 친구들을 산에서 다시 만난다.
나는 오랫동안 산을 지켜왔고 이제 친구들이 산으로 돌아 오고 있다.
산과 자연이 동구 밖 느티나무처럼 우리의 삶을 지켜왔고 이젠 그 산에서 영혼을 되찾은 사람들이
우리의 산을 지켜줄 차례다.
지리산 둘레길 6구간
너무 빨리 달구어진 한반도 땜시 설왕설래 했다.
“이 뜨거운 염천시하에 그늘도 없는 그 길을 꼭 가야혀 ?”
“그래 6월은 그렇다 치고 삼복더위가 구리 빛 스킨을 뱀껍데기 허물처럼 벗겨낼 7,8월 말이여? “
혹자들은 논리는 바람 살살 불고 맴이 싱숭생숭 해지는 날에 가야 지리산 길에 낭만이란 넘이 펄펄
날린다는 거다.
일리 있는 의견이기는 한데 겨우 한 달에 한번 출정하는데 2번 씩 건너 뛰면 도대체 둘레길은 언제
끝나나?
우야튼 귀연의 결론은 ? ”쓸데 없는 소리 말어 ! 쌀밥만 먹구 사냐 ? 가끔 옆구리 터진 김밥도 먹는
거지 “
길은 지난 5구간 때 6구간 까지 침범해서 진도가 나갔으니 이번에는 7구간 운리마을 까지 가는
여정이다.
원래 구간구획이 무슨 의미 있으랴 우리가 6구간으로 자르면 그게 6구간이 되는 거지
지난 번 5구간 수철마을에서 6구간 한밭내리마을 까지 콘크리트 땡빛 길의 뜨거운 추억 때문에
단단히 각오를 하고 나왔는데 근데 날씨가 우짜 이리 좋으냐?
햇님은 센스 있게 구름 뒤에 숨었고 지리산 등걸에서 바람은 솔솔 불어온다.
경호강을 따라 잠시 길을 걷다가 다리를 건너 농원 방향으로 길을 잡는데 질펀한 밤 꽃향이 천지
사방에 펄펄 날리고 길 가의 뽕나무에는 검게 익은 오디가 주렁주렁 달렸다.
아이고 주인 할배가 보면 우짤라고 그랴?
참새가 방앗간을 보고 못지나 가는 건 이해 하는데 갈길 먼 산님들은 왜 벌떼처럼 달려드는겨?
배가 고파서가 아니다.
세월의 허기
물기 없이 메마른 회색도시에서 잃어버렸던 낭만과 감상에 대한 목마름 이랄까?
그들이 따는 건 한갓 익어가는 오디 열매 몇 개가 아니다.
그들이 따 먹는 것은 잃어버린 어린시절의 추억이고 잃어버린 시골의 풋풋하고 달콤한
낭만일 게다..
도시에 지천이 맛있는 과일 없을 겨? 돈이 없을겨?
할배도 그 맴 이해하시 것제
근데 죽순 같은 것은 함부로 따면 안될 것 같아여.
그 수많은 사람들이 둘레길 하면서 하나씩 가져가면 마을사람들 뭐 먹고 살아요?
바람재를 넘어 새터마을을 지나고 성프란체스코 형제회사가 운영하는 풍헌마을 성심원을 지났다
(어천 2km 전방)
풍헌마을을 지나 좌측 다리옆에 이정표가 선다.
어천마을 입구에서 어천마을을 한바퀴 돌아 아침재로 가는 3.5km길이 둘레길 구간에 포함이 되어
있다. 그냥 직진해서 올라 가면 아침재 까지는 0.9km 이다.
“울랄라 !” 한 번 돌아보고 가도 괜찮을 듯 한데 모두들 그냥 가는 분위기다.
“이건 순전히 산꼭대기 산행대장 카리스마 때문이여 !…”
사실 어천입구에서 아침재 까지 가는 울창하고 시원한 숲길이 더 좋단다.
아침재에서 멀리 웅석봉이 올려다 보인다.
오늘의 목적지 운리마을은 임도를 따라 웅석봉 좌측 산허리를 넘어 가야 한다.
웅석봉은 홀로 태극종주를 하면서 내 생애 단 한 번 올랐는데 잊지 못할 추억이 남아 있다.
어느 산 꾼의 고독한 싸움과 길동무의 구성진 노랫가락 위로 웅석봉 가는 길엔 달이 휘영청 밝고
별이 총총했다.
벌써 7년이 되었나?
2006년 가을에 홀로 지리산 태극종주 길에 올라 3구간으로 나누어 태극그리기를 완성 했다.
10월 3일 마지막 지리산 동부능선 종주 날 독바위에서 산악회 “태극을 닮은 사람들” 의 그리운산님을
만났다.
함께 동행 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리운산님은 한국 최초로 무박 태극왕복종주의 기록을 남기신 분으로
그날 진주 남강 까지 확장시킨 200km 신태극 구간의 무박왕복종주 중이었다.
그의 새로운 도전은 오마이 뉴스에도 실렸다.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그를 지켜보고 후원했다.
태달사 여러 회원들이 중간 중간에 응원나와 많은 식수와 음식을 지원했고 나는 그리운 산님과의
우연한 동행 덕분에 그들의 융슝한 환대와 풍요로운 산길의 호사를 누렸다.
밤머리재에서 기다리던 태달사 김정모 회장과 여러회원들의 열렬한 박수를 받았다.
기억난다 . 그들이 건네주던 그 차가운 맥주와 박카스 한 병 그리고 우루사 한 알
웅석봉 가는 길 내내 몇 일 잠을 못 잔 그리운 산님은 어둠 속에서 휘청거리고 자꾸 길을 벗어났다.
우린 어두운 길을 어렵게 걸어 7시 30분 어둠에 쌓인 웅석봉에 도착했었다.
달빛은 휘영청 밝았고 무수한 별들은 바로 머리 위에서 쏟아질 듯 맑게 빛나고 있었다.
난 그날 웅석봉의 감회를 이렇게 적었다.
산청과 어천마을의 불빛이 보입니다.
만세!
이곳이 꼭 한번 와보고 싶었던 지리산 동부능선의 끝자락 입니다.
어둠에 가려서 지나온 유장한 산릉이 보이지 않아 아쉽지만 16시간 만에 도착
한 머나먼 여정의 마지막 고봉 이었습니다.
처음 웅석봉에 발자국을 남긴 무릉객의 감동과 태극 종주 마지막 관문에 도착
한 그리운산님의 절절한 감회로 웅석봉은 그렇게 들떠 있었습니다.
백두님은 기다리는 일행들에게 그리운산님의 웅석봉 도착을 알리고 우리는 한
쪽의 사과를 나누고 기념촬영을 하면서 그렇게 웅석봉의 영광을 자축했습니다.
밤바람이 후련하게 불어 가는 웅석봉은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을 기억으로 남았
습니다.
자꾸 바위가 일어난다며 걸으면서 졸음에 괴로워하던 그리운 산님을 밤머리재에서 합류한 백두님과
밀착 경호하면서 어렵게 1001번 도로 까지 내려섰다.
1001번 도로에는 태달사 회원들이 감자탕을 끓여 마중 나왔고 그 때 한국의 산하에서 글을 통해 인사를
나누었던 유명한 요물님과 mt주왕님을 만났다.
그리고 유순이님.
그날 독바위 근처에서 만났던 부부 산님이었는데 내 산행기를 보고 연락을 해와서 한국의 산하 모임 때
만나서 같이 산행도 하고 좋은 인연을 이어가게 되었다..
필명만으로 생면부지의 서로를 알아 볼 수 있었으니 대단한 인터넷의 위력이었다.
나의 18시간 20분에 걸친 태극종주 3구간 대장정은 그 곳에서 마무리 되었다
그 야심한 밤에도 태달사 어총무께서는 나의 애마가 기다리는 산청 터미날 까지 태워다 주었고 덕분에
나는 편안한 귀향 길에 올랐다.
그리운 산님은 악전고투 끝에 신태극 종주를 무사히 마무리 했다.
이듬해 나는 허리를 심하게 다쳐서 오랫동안 산을 탈 수가 없었는데 그 소식을 듣고 그리운산님은
지압기를 소포로 보내 주었다..
웅석봉을 떠올리면 내 젊은 날의 뜨거운 열정과 후회없는 방황이 떠오른다.
어느 나이든 젊은이의 외로운 투쟁과 산 친구들의 훈훈한 인정 그리고 맛있는 감자탕이 떠오른다.
그 옛날을 생각에 미소지으며 웅석봉 능선 을 넘어 가는 길을 따라 천천히 올라갔다.
웅석봉이 1099m 이니 우리가 넘어가는 임도도 800미터는 족히 되겠다.
몸이 이미 평지에 적응이 되어 아침재에서 지그재그로 오르는 길은 다소 힘이 들었는데 너무 가팔라
바람마저 힘에 부쳐 오르지 못한 탓에 땀깨나 흘려야 했다.
그래도 어제 마눌과 9시간 40분 점봉산 무박산행을 하고도 별다른 피로감 없이 걸을 수 있으니 체력이
7년전 18시간 산행 하던 때보다 딱히 못할 것도 없는 듯하다.
헬기장에서 비로소 뜨거운 태양이 구름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오마이 태양! 그리고 완전 짱! 지리산 신령님
거친 오름 길을 다 오르고 나니 축하의 빛을 밝히시고 나무 그늘 아래 식단을 풀어 놓으니 소슬 바람을
보내 힘든 여정을 위로해 주신다.
단조롭지 않고 날씨와 풍경이 힘을 보태준 지리산 둘레길 6구간 이었다.
우린 내림 길만 남겨 놓은 채 여유롭고 편안한 산상 만찬을 즐겼다.
내려가는 길은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높은 고도에서 내려보는 후련한 세상의 기쁨을 누리며 구름처럼
가볍게 흘러갔다
햇님도 즐거운 지 구름사이로 오락가락 하고 바람은 사방이 트인 임도를 훨훨 날아 다녔다.
그래서 산길도 인생길처럼 미리 예단하고 노심초사할 필요가 없다.
그때 그때 주어지는 역경과 변화와 기쁨을 즐기면 된다.
삼복더위에도 부드러운 옥바람의 시원한 가을을 만날 수 있고 한 겨울에도 따뜻한 봄날을 느낄 수 있다.
다 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주시는 산신령님의 팬서비스이고 대자연 속에서 연마한 삶의 내공이다.
탑동마을과 점촌마을을 지나 운리마을의 단속사지와 단속사지 동,서 삼층석탑,그리고 정당매를 돌아 보고
베이스 캠프가 있는 운리 마을주차장에 합류했다.
한 여름날 구름과 바람이 산행 길을 더 여유롭고 낭만적이게 만들어 주었던 빛나는 여름날의 행복한 하루였다.
얘보래요!!!
도둑이야!
불이야!
귀연 이런데서 이라시면 안됩니다.
죽순은 그냥 멋진 대나무로 자라게 두시지요
어떤 전위미술
작품명 : 사신도
작 자 : 어느 난폭 운전자
재 료 : 뱀 한마리 & 광폭타이어
정당매
신라시대 창건된 사찰인 단속사지에 있는 매화나무이다. 고려말 이 고장 출신의 통정(通亭) 강회백(姜淮伯)이
심었다고 전해진다.
수령은 약 600년이며 높이는 8m, 둘레는 1.5m이다. 강회백이 벼슬길에 나가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랐는데
이 벼슬이름을 따서 정당매라고 부르게 되었다.
강회백이 고향에 들러 정당매를 보면서 지은 시가 전하고 있다.
遇然還訪古山來
滿院淸香一樹梅
物性也能知舊主
慇懃更向雪中開
20살 아래 사명당의 등에 업혀 나라를 걱정하던 남명(조식)선생이 사명당과의 이별을 슬퍼하며
읊은 시도 전한다..
"돌로 된 물 홈통 위에 꽃잎 떨어지고, (花落槽淵石)
옛 절 축대엔 봄이 깊었구나. (春深古寺臺)
이별할 때를 잘 기억해 두게나! (別詩勤記取)
정당매(政堂梅) 푸른 열매 맺었나니. (靑子政堂梅)"
단속사지
단속사(斷俗寺)가 창건된 시기에 대해서는 2가지 설이 전해진다. 하나는 748년(경덕왕 7년)에 이순(李純)이
창건하였다는 설과 다른 하나는 763년(경덕왕 22년) 신충(信忠)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이후 조선시대인 1568년(선조 1년)에 시련을 겪게 되는데 당시 유생(儒生)들이 사찰을 훼손하였다고 전해진다.
그후 정유재란 으로 화재로 소실되고 현재는 단속사지동삼층석탑(斷俗寺址東三層石塔)과 단속사지서삼층석탑
(斷俗寺址西三層石塔)이 남아있고, 그외 사찰의 흔적으로는 터만 남아있다.
'지리산둘레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리산 둘레길 8구간 (덕산 -위태) (0) | 2013.08.13 |
---|---|
지리산 둘레길 7구간 (운리 - 덕산) (0) | 2013.07.15 |
지리산 둘레길 5구간 (0) | 2013.05.20 |
지리산 둘레길 3-1구간 (0) | 2013.05.15 |
지리산 둘레길 4~5구간 (세동리-수철리) 2009년 (0) | 2013.05.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