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그런 줄 알았더니 양반곰도 그랬다.
10년 전에 걸었던 포암산 백두대간 길이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그래도 몇 개가 기억난다.
벌재와 치마바위를 지나고 소나무 사이로 마주했던 백두대간 해돋이
포암산 표석
그리고 황장산 대미산 포암산의 뜨겁고 긴 여정을 마무리하고 내려선 하늘샘의 달디단 해갈
내가 그 때 까지 마신 물 중에서 가장 시원하고 맛있는 물이라고 했다.
하늘빛 그 물을 얼마나 마셨던지 그 때 걸음 걸을 때 마다 뱃속에서 꿀럭이는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는 그 길에 대한 다른 것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하늘재도 생소했고 그 때 내려왔던 비탈길도 기억나지 않는다.
벌건 대낮에 이동했던 포암산 능선길도
겨우 10년 인데
이제는 세월이 무언가를 자꾸 내게서 비워내는 모양이다.
조금씩 더 가벼워 지라고
그래서 나중엔 훨훨 날아 가라고…
어쩌면 예전의 길 위에서 망각의 호기심으로 또 다른 새로운 기쁨을 만나라고
허기사 복잡한 세상에 잡다한 일들을 하나도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한다면 얼마나 힘들까 ?
복장터져서 아마도 팔십 전에 죽을껄…
그래서 망각이란 몸의 안전장치이고 인간에게 부여된 가장 값진 신의 선물인지 모른다.
근데 통계학상으로 사람들은 좋은 일은 금방 잊고 나쁜 일은 오래 기억한다고 한다.
즐거움은 빨리 지나고 고통은 오래 기억되고
고마움은 빨리 잊고 서운함은 오래 남겨두게 된다.
그 반대가 되어서 나쁜 기억은 훨훨 날리고 좋은 기억만 남기면 인생이 더 즐거울 텐데..
불행히도 신은 그 일을 인간의 영역에 귀속시켰다.
그래서 슬픔은 더 작게 만들어 훌훌 털어버리고 기쁨은 더 키워서 오래 누리는 건 우리 삶에서
행복을 위해 스스로 쌓아가야 할 내공으로 남았다.
요즘 시간이 어려워서 산에 잘 안 나오는 큰놈이 어느 날 멋진 말을 카톡질했다.
친구의 잘못은 모래 위에 적는 거래요~
왜냐면 밀물에 지워지라고요
친구의 마음은 바위 위에 적는 거래요
왜냐면 비바람에 견디면서 영원히 기억하라고요~.
정말 망각에 대한 너무 좋은 말이야
하여간 아둥바둥 할 거 없다.
물 흐르는 대로 마음가는 대로 사는 거다.
백년을 산다해도 우리 삶은 한 줄기 스쳐지나는 실바람인데
사랑하면서 살기에도 부족한 시간이고
기쁨과 행복으로 채우기에도 아까운 시간이라
뻔질나게 돌아 다녀도 대한민국 산 반도 못 돌아 댕기고
틈만 있으면 물 건너 댕겨도 넓은 세상의 아름다움 풍경과 무한한 감동을 채 가슴에 담지 못하고 죄
놓고 떠나야 한다.
영원히 살 것처럼 나대지 말아라
백날 목에 힘주고 큰소리 뻥뻥 쳐봐라 세월이 너만 봐주나?
안 되는 일 잡고 애간장 끓지 말고
모자라면 모자라는 대로
적당히 봐주고 적당히 잊어버리면서
그냥 나쁜 기억은 산바람에 훌훌 털어 죄 날려버려라.
좋은 기억은 자꾸자꾸 쌓아서 날라가는 것보다 남아 있는 것이 더 많게 살아야 삶이 조금 더 가벼워
지지 않을까?.
박경리처럼 편안한 생각으로 나이들면 어떨까?
“다시 젊어지고 싶지 않다.
모진 세월 가고 아아 ~~~ 편안하다.
늙어서 이렇게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홀가분하다.”
“나이가 드니 마음 놓고 고무줄 바지 입을 수 있는 것처럼 나 편한대로 헐렁하게 살 수 있어서 좋고,
하고 싶은 것을 안 할 수 있어서 좋다.
박완서도 똑 같네.
다시 젊어지고 싶지 않다.
하고 싶지 않은 것을 안 할 수 있는 자유가 얼마나 좋은데 젊음과 바꾸겠는가?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다.
살아 오면서 볼꼴 못볼꼴 충분히 봤다.
한번 본거 두번 보고 싶지 않다.
한겹 두겹 책임을 벗고 가벼워 지는 느낌을 음미하면서 살아가고 싶다”.
바둑이님처럼 살아라
사는 동안 즐겁고 건강하게 !
버스가 오르는 하늘재를 거쳐 갔음에도 미륵사지는 처음 본다.
미륵사지 옆 태항산 자락에 미륵대원터가 있다
미륵사지나 미륵불은 그 규모의 웅장함이 국보급에 견줄만한데 그냥 보물이란다.
중원미륵리사지는 고려전기 마의태자가 지금의 미륵리에 석불을 세우고 창건한 석굴사원
으로 사적 317호에 속한다.
어쨌든 옛 절터에는 많은 보물들이 있다.
사적 제317호 중원 미륵리사지 내 문화재
보물 96호 미륵리 석불입상
보물 95호 미륵리 오층석탑
충북 유형문화재 제315호 미륵리사지 사각연화석등
충북 유형문화재 제19호 미륵리 팔각석등
미륵리사지 귀부
미륵리 당간지주
공기돌바위
망국의 아픔을 안고 도성을 떠나던 마의태자가 덕주공주와 함께 금강산으로 가던 중 부처님의
계시를 받아 중원 미륵리에 석불입상을 조성하였고 덕주공주는 월악산에 마애불을 조성하였다
전해진다.
미륵리의 석불입상은 마의태자가 자신의 모습을 새긴 거라 했는데 시린 세월, 풍진 세상을 묵묵히
견뎌며 달관의 도를 깨우친 현자의 편안한 얼굴이다.
국내 유일의 북향석불이라고 했다.
그 이유는 고려에 의해 망한 신라의 뼈아픈 수모와 슬픔을 부둥켜 안고 절치부심하던 마의태자가
빼앗긴 국가를 회복하겠다는 각오와 염원을 담아 조성했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풍진세상에 고립무원으로 남겨진 누이를 걱정하는 애틋한 오라비의 마음으로 월악산 마애불을
지켜보기 위함이라고도 한다.
나는 후자가 맞을 것 같다.
부처의 본심은 자비이어늘
덧없는 세상의 아픔을 내리고 자신의 모습을 미륵으로 세우고 마의를 입은 채 절에 들어간 태자가
사바 세상에 무슨 미련이 있어서 부처님의 공력을 빌어 고토회복을 꿈꾸었으랴 ?
부질없는 세상의 불가에 귀의 하기 전 속세에 남겨둔 누이가 애처롭게 눈에 밟히지 않았을까?
하늘재는 충주와 문경의 경계라 한 때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선이 지나던 유서 깊은 고개로 경북 문경
관음리와 충북 충주 미륵리를 연결한다.
지금은 차가 올라오지만 원래는 포암산과 탄항산 사이의 좁은 협곡 길이었다 한다.
계립령, 마목현,마골산,지릅재, 대원령, 한훤령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려왔고 신라 아달라왕 3년 AD156에
처음 길을 열어 남북이 교역했다..
훗날 신라는 이 길을 통하여 한강으로 나가는 통로를 열어 훗날 삼국통일의 발판을 마련하는 초석이 된
길이라 할 수 있다.
하늘 빛 맑은 샘물이 흐르는 하늘재는 패장의 좌절된 꿈과 무너진 왕국의 아픔이 눈물로 흐르던 슬픈
고갯길이다.
하늘재를 되찾기 위해 진격하던 온달장군은 아차성 전투에서 신라군의 화살을 맞고 전사했고 신라의
마지막 왕자 마의태자는 천년사직을 뒤로하고 통한의 눈물을 뿌리며 이 고갯길을 넘어 갔다..
.
눈물로 마의를 적시며 이 고갯길을 넘어가면서 마의태자는 망국의 한과 세상의 부질없는 미망을
하나씩 내렸으리라
왕자의 착잡하고 아픈 가슴을 다독여 준 것은 불심과 시린 자연이 이었을 것이다.
망국의 아픔과 삶의 고통을 불심으로 다스리기 위해 불가에 귀의한 마의태자나 덕주 공주는 왕국의
부귀와 영화는 잃어버렸겠지만 마음의 평화는 찾지 않았을까?
무수한 사람들이 그 하늘재를 넘어가며 거칠고 지난한 행로의 역설적 기쁨과 달디단 해갈의 기쁨을
누렸던 것처럼 …
하늘재와 묵묵한 포암산은 알고 있으리라..
한 때의 영광과 좌절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에 관하여 …
마의태자묘는 금강산에 있다.
어느 시인의 마이태자의 쓸쓸한 무덤을 보고 덧없는 인생의 무상함과 애통한 망자의 한을 진혼 했다.
심금을 울리는 그 싯귀지만 어쩌면 마의태자는 사바세상의 혼탁함에서 놓여나 고요하고 평화로운
미륵세상을 만났을지도 모른다.
삶이란 한줄기 바람이 일고 구름이 피어나 듯 자연스러운 것이라
세상의 희로애락과 생로병사가 모두 대자연의 조화로운 섭리 아닌가?
골짝을 에는
바람결처럼
세월은 덧없어
가신 지 이미 천 년.
한(恨)은 길건만
인생은 짧아
큰 슬픔도 지내나니
한 줌 흙이라뇨.
잎 지고
비 뿌리는 저녁
마음 없는 산새의
울음만 가슴 아파.
천고(千古)에 씻지 못할 한
어느 곳에 멈추신고.
나그네의 어지러운 발끝에
찬 이슬만 채어.
조각구름은
때 없이 오락가락하는데
옷소매를 스치는
한 떨기 바람.
가던 길
멈추고 서서
막대 짚고
고요히 머리 숙이다.
-김해강, 「가던 길 멈추고」
산 행 일 : 2013년 6월 23일
산 행 지 : 포암산
날 씨 : 흐리고 바람 너무 둏다.
거 리 : 13.5km
소요시간 : 약 6시간 30분
동 행 : 귀연 22명
시간 |
경유지 |
비 고 |
09:07 |
미륵사 주차장 |
기념촬영 |
09:17 |
미륵사지 |
미륵사지 견학 약 20분 소요 |
10:06 |
하늘샘 |
|
10:30 |
소나무 조망 바위 |
|
10:42 |
능선 |
|
10:53 |
이정표(포암산 500m전방) |
하늘재 1.1km, 만수봉5.5km |
11:05 |
포암산(962m) |
하늘재 1.6km, 만수봉 5km |
11:35 |
만수계곡 갈림길(중식) |
약 30분 휴식 |
12:36 |
마골치 |
만수봉 2.1km |
13:13 |
만수봉 맢 전망바위 |
만수봉 조망 |
13:34 |
만수봉 전 이정표 |
만수봉:0.6km, 포암산 4.4km |
13:49 |
만수봉(983m) |
|
14;13 |
바위 전망대 |
|
14:26 |
만수교 전 이정표 |
만수교:1.9km |
15:01 |
만수교 전 이정표 |
만수교 0.9km 바위 노송 전망대 |
15:25 |
공원 관리소 |
|
15:49 |
만수 휴게소 |
|
가파르게 치고 올랐다.
진한 땀이 몽실몽실 솟아 오른다.
혼탁한 세상에서 내 몸에 쌓였던 삶의 노폐물들이다.
어쩌면 내 땀구멍은 더 많은 노폐물을 비워내기 위해 점점 더 커지는지 모른다.
호흡이 점점 더 거칠어 진다.
그리고 가슴은 더 후련해 졌다..
능선 위에서 포함산 가는 길
이 길이 이랬었구나
능선에서는 푸른 잎을 흔드는 바람이 쉴새 없이 불어 주었다.
여기는 불국이다..
희로애락과 오욕칠정에서 벗어난 고요와 평화가 깃든 곳
사바세상에서 멀리 떨어져 불국 가까이에 있는 관음과 미륵의 평화로운 세상은 현세를 초극하고
내세의 복락을 염원하는 곳이다.,
하늘재는 관음세상과 미륵세상을 이어주고 궁극에는 불국으로 연결된다.
부처님의 모습으로 두 세상을 내려다 보는 포암산은 불국의 중심에 있는 수미산이다..
8개의 산이 수미산을 둘러싼다고 했다.
걸출한 웅자의 영봉들이 불국의 관문을 지키는 수문장인 듯 포함산을 바라보며 파노라마 친다.
만수계곡은 불국정토의 도솔천이다.
수미산 꼭대기에서 달구지로 한나절 거리에 있는 오욕에서 벗어나 지족과 복락을 누릴 수 있는 곳.
부처의 나라 수미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시원하다.
너무 부드럽고 마음이 고요해지는 그런 바람이다.
옥바람이라 부를까?
맑고 깨끗한데 그 결이 차가우면도 청량하다.
땀을 흘리고 그 바람을 맞으니 몸과 마음이 가벼워 진다.
이것이 혹여 큰 산이 우리에게 주는 위로와 깨우침이 아닐까?
포함산 표석은 그대로 이다.
내 땀의 의미가 그대로 남아 있는 곳
저수재에서 불면과 어둠의 먼 길을 걸어 도착한 길이었다.
벌재를 지나 어두운 치마바위에서 청산님과 사진 한 장을 찍고 새벽을 열며 황장산에 도착했다.
그리고 이글거리는 태양의 길을 따라 대미산과 무수한 봉우리를 넘어 도착한 마지막 봉우리가 바로
이 포암산이었다.
지난번에 마눌과 100대 명산 황장산을 다녀왔으니 저수령 – 포암산 구간의 걸출한 산을 다시 만나보는
연이은 추억산행인 셈이다.
만수산 가는 길은 푸른 녹음에 바람이 들락날락 하는 육산의 편안한 길이었다.
중간에 만수계곡 갈림길에서 식사를 했는데 움직임이 멎자 부는 바람에 으실거리며 한기마저 느껴진다.
여름날에 흡사 가을 산행의 정취가 느껴진다.
마골치에서 계속 능선을 따라 오르면 가면 백두대간으로 흘러가고 좌측 능선길을 따르면 만수산으로
간다.
동행들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가다 만수봉이 코 앞에 바라다 보이는 거대한 바위가 있는 곳에서
잠시 등짐을 내렸다.
배낭을 내리면 어김없이 시원한 바람이 찾아와 흘린 땀을 모두 걷어 간다.
만수봉 까지는 가파른 오름길인데 어디서 왔는지 정상 표석에는 무수한 산객들로 북새통이다.
조망하는 월악산 영봉의 자태가 자못 웅장하다.
만수교로 내려가는 길은 아름드리 금강송과 바위들이 압권 이었다.
계속 내림길일 것 같았던 하산 길은 한참을 내려가다가 다시 거칠게 솟구치고 그 거친 호흡 끝에서 산은
다시 불국의 아름다운 풍경을 열어 보인다..
풍경 좋고 바람 좋은 곳에서는 사진도 찍고 다리쉼도 하면서 천천히 내려갔다.
그리고 수미산을 감돌아 흐르는 도솔천에서 땀으로 뱉어낸 세속의 찌꺼기들을 모두 씻어 내렸다.
나는 인간의 신분으로 몇 시간 불국을 배회하며 관음과 미륵의 마음으로 돌아갔다.
속세로 다시 돌아 오고 나서도 빛 바랜 추억이 불러낸 기쁨과 신비스런 세상의 고요가
내 마음에 불국의 향을 피워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