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어제 비가 내렸습니다.
기온이 뚝 떨어졌습니다.
가을도 이젠 얼마 남지 않았는데
멀리 떠나지 못했습니다.
가을은 늘 바쁜 법이라
회색도시에서 정신 없이 쫓기다 보면
벌써 찬 바람이 불고
떨어진 낙엽이 쓸쓸히 거리에 흩어집니다.
문득 가을이 속절없이 깊어지는 게 아쉬워 집니다.
단풍을 보러 떠나기로 했다가
슬그머니 배낭을 내렸습니다.
딱히 누군가와 만날 약속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괜히 비에 젖는 단풍을 바라보면
또 애꿎은 가슴이 먼저 젖을까 겁이 납니다.
속으로는 가을비 속을 거닐고 싶어도
홀로 비를 긋는 모습이 청승으로 비쳐질 거라고
구태여 알지도 못하는 그 누군가의 눈을 의식합니다.
친구를 만났습니다.
어이 없이 허물어지는 가을 날의 하루
그 아픔을 혼자 견딜 수 없어서…
깊어가는 가을과 우리 인생의 가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우린 창 밖으로 축축히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술을 마셨습니다.
마치 떠나지 못한 아쉬움을 견디기 위해 술이 필요한 것처럼
모처럼 한가한 어느 비 오는 가을 날이
애써 감추어 놓은 서러움을 들쳐내기라도 한 것처럼
우린 한 잔의 술을 앞에 놓고 제멋대로 돌아가는 세상과
빨리 사라지고 서둘러 떠나가는 것들에 분노를 쏟아냈습니다.
인생이 그러합니다.
몇 번 가을을 잃어버리고 않았는데도 너무 쉽게 인생의 가을이 찾아 왔습니다..
저무는 길 모퉁이 한 사람 서 있습니다.
눈가엔 잔주름이 가득하고
어느새 히끗한 머리카락은 많이도 세월의 바람에 날려갔습니다.
인생의 여름날을 어이 없이 흘러 보내고
인생의 가을에도 방황하는 바보 같은 사람
노을진 바람 길에 한 사람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오늘
비 온 다음날 상쾌한 들판을 걸어 갑니다.
가을이 여기저기 온 산을 들쑤시며 배회하고
구절초와 억새가 들길에서 맑은 가을 바람에 손을 흔듭니다.
지친 나무들이 어제 비에 붉은 잎새를 털고 나서도
무수한 단풍들이 반가운 아침 인사를 합니다.
티없이 하늘은 맑고 하얀 뭉게구름 피어나는 눈부신 가을날 입니다.
가을은 나뭇가지와 사람의 마음을 여지없이 흔들고
아무렇지도 않게 떠나 갑니다.
방황하지 않고 보낼 수 없었던 그리움도
떠나지 못한 가을의 서러움도
나 없이 불타고 스러질 단풍 숲의 아쉬움도 눈부신 가을 빛에 사라졌습니다.
어제 서글프고 쓸쓸한 감상은
억새의 흰 갈기와 함께 바람길에 훨훨 날아갔습니다.
늘 푸른 소나무들 사이 단풍나무 한 그루 서 있습니다.
세월의 모진 바람과 무서리가 피워낸 붉디붉은 단풍
눈부신 햇살에 반짝이는 고운 단풍이 하나 둘 바람에 날리어 갑니다.
꽃도 아름답지만 고운 단풍도 꽃처럼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가진 것을 스스로 털어내는 나무도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여행길의 끝에서 바다를 만났었습니다.
늘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았지만
지는 태양이 그리 붉고 노을이 그렇게 아름다운 줄 예전엔 미처 몰랐습니다.
기쁘고 즐거운 추억이 하루하루 쌓여 행복을 만들어 갑니다.
고뇌와 아픔이 삶을 더 성숙하게 하고 일상의 행복을 더 소중하게 만들어 줍니다.
봄과 여름의 즐거운 추억이 있어서 더 빛나는 가을이고
모진 비바람과 뜨거운 태양을 견뎌냈기에 더 아름다운 가을날 입니다.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는 가을 날입니다.
건강한 몸으로 이렇게 가을을 노래할 수 있음이 살아가는 날의 축복입니다.
순환하는 자연과 다시 돌아 오는 계절이 아름답듯이
인생의 사계도 아름답습니다.
가을과 단풍이 아름답듯이 인생의 가을도 아름답습니다.
아름다운 가을날을 보내며 인생의 가을을 생각합니다.
지나간 봄과 여름보다 더 빨리 지나갈 소중한 시간 입니다.
더 아름다워야 하고
더 즐겁고 더 행복하게 보내야 할 내 인생의 가을날입니다.
후회 없는 아름다운 가을을 보내고 휴식 같은 겨울의 평화와 행복을 찾아서
기꺼이 다시 즐거운 여행을 떠나겠습니다.
일 자 : 2013년 11월 10일 (일요일)
장 소 : 지리산 둘레길 11구간
코 스 : 서당마을-우계저수지(0.6km)-괴목마을(1.2km)-신촌마을(1.6km)-신촌재(2.8km)
-먹점마을(1.7km)-먹점재(1.1km)-미점마을1.7km)-구재봉갈림길(0.9km)-대축마을(1.8km)
난이도 : 중
거 리 : 13.4 km
날 씨 : 다소 쌀쌀하고 쾌청
동 행 : 귀연 37명
소요시간 : 약 5시간
둘레길 11구간
둘레길 출정일 입니다.
어제 비가 내리고 날씨가 쌀쌀해졌습니다.
지난 지리산 출정 일에 내 발목을 잡은 건 사소한 티눈
“큭큭“ 웃음이 납니다.
시도 때도 없이 태클을 거는 가소로운 것들에….
비 온 후라 더 깨끗하고 맑은 날.
아직 쌀쌀한 날의 여운이 더 깊어가는 가을을 느끼게 합니다.
둘레길의 반가운 친구들에게 목소리 높여 인사합니다.
종달새처럼 경쾌한 하이톤으로 맑은 가을을 노래 합니다.
발걸음을 이렇게 가볍게 하고 마음을 들뜨게 하는 건
푸른 하늘과 맑은 바람 그리고 가을색으로 물들어 가는 숲과 들판
그저 회색 대문을 열고 나서면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우리의 시골 풍경입니다.
서당마을에서 괴목리를 지나 신촌마을 가는 길은 작은 우계저수지를 지나 갑니다.
집이 몇 채 안 되는 괴목리를 옆에 두고 산 기슭으로 이어지는 길입니다.
포장된 작은 소로는 산으로 곧장 가는 듯 하다 푸른 산아래 마을로 휘돌아 갑니다.
길가에는 아직 채 따지 않은 감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습니다.
신촌마을은 참 아늑한 마을 입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 쌓여 있지만 우리가 걸어온 서당골 쪽은 막힘 없이 트여 있습니다.
더 나이 들면 이런 양지바른 마을에 살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촌마을은 오랜 옛날부터 삶에 힘겨운 민초들의 피난처였다 합니다.
소작료를 내지 못한 소작농들이 들어와 화전을 일구며 숨어 살았고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군과 징용을
피하려는 많은 젊은이들이 은거한 곳이라 합니다.
6.25때도 많은 사람들이 피난해 왔던 곳이라는데 마을이 산중턱 높은 곳에 위치해서 서당리 쪽 산길을
올라 오는 사람들의 모습을 훤히 내려다 볼 수 있습니다.
사주경계가 정말 용이하고 산 너머 첩첩 산길로 쉽게 달아날 수 있는 산골 마을입니다.
마을 위 쪽으로 난 길은 신촌재로 이어집니다.
제법 추운 날씨이긴 한데 코를 뻥 뚫어주는시원한 공기와 목에 감기는 다소 싸늘한 바람이 오히려 걷는
길을 상쾌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소나무로 둘러 쌓인 작은 절 하나를 지나고 신촌재 정상에서 식사를 했습니다.
내려가서 뒷풀이 생태탕을 먹으려면 일찍 점심을 먹어야 합니다.
신촌재에서 내려와 길은 먹점마을 어귀를 휘돌아 먹점 농장 이정표 방향으로 다시 올라 갑니다.
흘러가는 가을 단풍 사이에 푸른 소나무 2그루가 서 있습니다.
물들어 가는 가을을 아랑곳하지 않는 반골입니다.
고도가 올라가면서 멀리 백운산 연봉들이 바라다 보입니다.
먹점재로 가는 길은 콘크리트 소로를 버리고 가지를 내린 나무들이 빽빽한 들어선 푹신한 숲 길을 따라
갑니다.
포장길이 사라지고 나서 낙엽 떨어진 길이 둘레길의 본래의 얼굴을 찾아 갑니다.
오랜만에 만나는 짧은 흙 길의 감촉이 참 좋았습니다.
아쉽게도 편리함과 더 넓은 훼손을 막기 위한 명분으로 길은 어디에서나 산속 깊숙히 까지 포장되었습니다.
먹점재에서 미동마을로 넘어 가면서 만난 섬진강은 한 폭의 그림입니다.
바둑판 같은 악양 무딤이들과 악양면을 옆에 두고 넓은 모래톱 사이를 구비구비 흘러갑니다.
봄이면 강둑에 매화와 벚꽃이 흐드러지는 아름다운 섬진강
전북 마이산 인근에서 발원한 섬진강은 임실,곡성,구례를 거쳐 유유히 악양벌로 흘러 내립니다.
섬진강은 무수한 시인과 묵객의 심금을 울리고 시심을 흔들었습니다.
섬진강에서
함동선
둥둥둥 북소리에 끌려왔더니
섬진강은 나무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종이처럼 얇고 깨끗하다 짐을 부리기 전인데
이미 강이 됐는가 했더니 너는 물이 되어 흐른다
여기 저기서 길이 한자 두치 둘레 여덟치 북소리에
평생을 갇혀 산 김명환의 북소리가 가슴을 두드린다
나중엔 핏속으로 흘러들어 온몸을 죄기 시작한다
작설차에 젖은 오후 역마의 슬픈 사랑을
기억하는 매화가피기 시작한다
굽이굽이 주막이 있고 색시가 있고
은어회 맛내는 육자배기 가락이 있어
산수유꽃도 개나리 꽃도 가만있질 않는다
지나간 시간들이 밀려가고 있는 이곳
내가 너를 기다리는 오래 전부터
네가 기다린 곳은 이런 데가 아니었는가
비어 있으면 채우기가 쉬운 법인데
너에게 가는 길은 멀기만 하다
하동 화개 쌍계사 구례 곡성 남원
그리고 지리산이 목판화 되어
둥둥둥 떠나간다 둥둥둥 떠나간다
섬진강(蟾津江)은 두꺼비 섬(蟾)자와 나루진(津)의 한자를 사용합니다.
원래 모래가 고운 모래가 많다고 해서 두치강( 豆恥江) 다사강( 多沙江)의 이름으로 불렸다 하는데 섬진강
이란 이름으로 바뀌게 된 건 전해 내려오는 호국 두꺼비들의 전설 때문입니다.
고려우왕 12년 왜구가 섬진강 하구에 침입했을 때 두꺼비들이 울부짖으며 강바닥을 뒤덮어 물밀듯이
밀려오는 왜구의 배를 막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지금은 그 아름다움을 가까이 에서 볼 수 있도록 화개장터에서 하동까지 강둑을 따라 산책용 데크가 설치
되어 있습니다.
김용택님 말대로 매화꽃 피는 3월엔 꼭 걸어보고 싶은 아름다운 강변 길입니다.
섬진강 매화꽃을 보셨는지요
김용택
매화꽃 꽃 이파리들이
하얀 눈송이처럼
푸른 강물에 날리는
섬진강을 보셨는지요..
푸른 강물 하얀 모래밭
날선 푸른 댓잎이 사운대는
섬진강가에 서럽게 서보셨는지요..
해 저문 섬진강가에 서서
지는 꽃 피는 꽃을 다 보셨는지요..
산에 피어 산이 환하고
강물에 져서 강물이 서러운
섬진강 매화꽃을 보셨는지요..
사랑도 그렇게 와서 그렇게 지는지
출렁이는 섬진강가에 서서
당신도 매화꽃 꽃잎처럼
물 깊이 울어는 보았는지요..
푸른 댓잎에 베인
당신의 사랑을 가져가는 흐르는
섬진강 물에 서럽게 울어는 보았는지요 ...
멀리 지리산 왕시루봉이 조망되는 고갯마루에서 말없이 흘러가는 섬진강을 바라 보았습니다.
강은 슬퍼할 겨를이 없습니다.
멈추어 있는 듯한 저 강물은 어제의 강물이 아닙니다.
어제의 강물에 우리가 다시 발을 담글 수 없듯이 속절없이 흐르는 세월 따라 강물도 그저 묵묵히
흘러 갑니다.
봄이면 변함없이 강둑에 벚꽃을 피우고 가을이면 낙엽을 날리며 그렇게 바다로 흘러가는섬진강
입니다.
숲을 벗어나 멀리서 보이던 형제봉과 신선봉을 코앞에 바라보며 드넓은 악양벌로 내려섭니다.
제 작년 봄에 마눌과 들렀던 평사리가 멀리 건너다 보이는 풍요로운 들판의 풍경은 너무도 인상적
입니다.
오늘은 반대편 산길에서 후련해진 가슴으로 서희의 그 비옥한 토지로 내려섰습니다.
역사의 향기가 바람에 펄펄 날리는 악양들
수천년 섬진강이 빚어낸 비옥한 토양이고 최참판 댁과 30여개 마을들이 기대어 살아가는 유서 깊은
들판 입니다.
내려가는 길에 소박한 구절초 꽃무리가 인사를 하고 계곡을 가득 메운 감나무들은 풍요로운 가을의
결실을 가지에 매단 채 잎새를 붉게 물들여 갑니다.
하동은 강의 동쪽이란 의미인데 섬진강을 따라 참게와 재첩이 유명하고 하동에는 배와 감과 매실이
많이 난다더니 어디에나 붉은 감이 지천 입니다.
바라보는 것 만으로 배가 불러오고 가슴은 넉넉해집니다.
그 길을 걷는 것 만으로 마음은 여유롭고 평화로워 집니다.
문암송 – 천연기념물 491호
축지리에서 오랜 소나무를 만났습니다.
“허걱”
600년을 살아온 소나무 입니다..
온갖 세월의 풍상을 견디며 600년을 살아오고도 푸르름을 잃지 않았습니다.
감동입니다.
흙이라고는 없는 바위 사이에 거대한 뿌리를 내리고도 그렇게 크고 무성하게 가지를 뻗었습니다.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찬바람에 사라져갈 한철 매미가 잠시 천년 고목에 붙어서 짧은 노래를 불렀습니다.
“언젠간 가겠지 푸르른 내 청춘 지고 또 피는 꽃 잎처럼 ….”
그냥 빙그레 웃었을 겁니다.
온통 감을 수확하느라 정신 없는 대축마을로 내려섰습니다.
걸으면 걸을수록 즐거워 지고 가슴엔 행복이 넘쳐나는 길이었습니다.
찬바람 길에서 뜨거운 생태탕과 한잔의 맥주로 아름다운 가을여정을 축하하고 더 넉넉하고 따뜻해진
마음으로 돌아왔습니다.
야누스의 두 얼굴을 가진 요물
엉덩이와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 가을은 아름다운 마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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