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마을 주막에 아이를 팔았다. 힘들고 슬프다”
둔황의 어느 동굴 한 구석 불국을 그리던 화공이 쓴 글귀다.
내세의 행복을 염원하며 부처님 세계의 장엄함과 보살의 수행을 그리는 화공이 뼈아픈 현세의 고통을
바위에 새기며 그 아픔을 달랬다.
오늘도 누군가는 하루를 행복으로 채우고 누군가는 희망 없는 힘겨운 하루를 살아가야 한다.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불평하는가?
스스로 불행 하다고 비관 하는가?
세상이 원래 불공평 한 곳이란 말은 맞다.
어떤 넘은 평생 탱자탱자하면서 놀면서 폼나게 살아가고 어떤 넘은 한평생 뼈 빠지게 일하면서도 노후를
걱정한다.
(가슴에 손을 언져라 . 정말 뼈빠지게 일하지는 않아서 그런 경우도 많다.)
하지만 적어도 당신이 가장 불행한 사람은 아니다.
어쩌면 당신은 스스로 비관을 키우고 불행에 더 민감한 촉수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세상에는 더 가지고도 불행한 사람들도 많고 더 적게 가지고도 행복한 사람들도 많다.
불후의 명작을 염원하던 신은 자신을 닮을 인간을 빚어내어 세상의 모든 선과 악을 뒤섞어 무작위로 배분하고
이성과 감정의 양 날 위에 창조의 지혜를 부여했다.
그리고 서로 다른 개성과 능력으로 태어난 인간들의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마지막 2개의 선물을 남겼다..
바로 마음과 죽음이 그것이다.
현명한 자는 슬픔에 휩싸여 정신을 잃지 않는다.
“ 이 또한 지나가리라 ..”
인생이란 슬픔과 기쁨의 씨실과 날실로 짜가는 나를 위한 나에 의한 옷이다.
기쁨의 실이 많이 들어간 옷이 더 아름다울까?
슬픔의 실이 많이 들어간 옷이 더 아름다울까?
그건 다른 사람들 눈에 비치는 나의 모습일 뿐이다.
내가 짜서 내가 입는 옷에 대한 평가는 내가 하는 것이다.
슬픔과 아픔의 실이 많아도, 또 화려하고 비싸지 않아도 내가 만들어 소중하고 내가 입었으니 그 누구의
옷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다.
신은 우리에게 서로 다른 삶과 서로 다른 꿈을 주고 미쳐 채워주지 못한 부족한 것들을 마음 하나에 담아
건네 주었다.
세상의 희로애락을 다 그곳에 담아서 원하는 것으로 필요한 때 꺼내 쓸 수 있도록 준비 하셨다.
마음을 바로 쓰라
맑게 닦지 않으면 더럽혀져서 다시 세속의 욕심에 물들 것이고 바로 세우지 못하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소중한 것들 대신 남들 접시에 놓인 떡과 남들이 입은 화려한 옷만 눈에 들어올 것이다.
자신의 슬픔엔 가슴 아프고 남들의 기쁨엔 배 아플 것이다.
어느 기쁨도 영원하지 않고 어느 슬픔도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누군가는 험하고 힘겨운 길에서 콧노래를 부르고 누군가는 작은 상처에도 목놓아 울 것이다.
누군가는 작은 기쁨을 모아 더 큰 행복을 만들고 누군가는 작은 슬픔을 눈덩이처럼 불려 세상에 가위
눌리며 살아갈 것이다.
다 마음이 하는 일이다.
신이 우리에게 준 소중한 선물.
우린 우리에게 주어진 다소 부족하다고 느끼는 삶을 그 마음 하나로 넉넉히 채워갈 수 있다.
마음 어딘가에 신이 감추어둔 기쁨들을 찾아내어 불공평한 삶을 스스로 공평하게 바로 잡을 수 있다.
혹여 네 마음에서 여전히 공평에 대한 불만이 남아 있어도 결코 실망하지 마라
신이 그대에게 가장 소중한 마지막 선물을 남겼으니 ….
머지 않아 죽음이 어둠처럼 그대를 찾으리라
그리고 담담하게 그대의 얼굴에 편안한 안식의 수의를 덮으리라.
우린 고작 삼만 오천 밤을 채우지 못한 채 떠나야 한다.
왕이건 내시건 부자건 가난뱅이건…
한줄기 바람이 불어가 듯 푸른 하늘에 흰구름 흩어지 듯 어느 날 나의 존재는 홀연히 사라져버릴 것이다.
호수에 바람이 남긴 작은 파문처럼 내 삶의 흔적은 조용히 바람에 흩어지고 세상은 그 아득한 無를 수렴
하고도 아무렇지 않게 흘러 갈 것이다.
어딘가에 무엇으로 다시 돌아 올 수 있겠지만 다시 돌아왔노라고 이야기하는 자를 만나본 적이 없으니
설령 돌아오더라도 그건 지금과는 다른 또 다른 나로 돌아올 것이다.
저 계곡의 맑은 물처럼….
계곡의 맑은 물은 섬진강으로 흐르고 섬진강은 다시 바다로 흘러간다.
바다로 간 물은 고기의 피로 흐르기도 하고 하늘로 올라가 다시 어느 계곡에 비로 내려 초목과 생물의
생명으로 소생하기도 한다.
삶이란 궁극의 소멸을 향해 가는 짧은 여행길이다.
짧기에 더 아름답고 더 즐거워야 하는 아쉬운 여행길…
그래서 신은 모두가 다 알도록 공평하게 그 죽음을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다만 여행의 마지막 날은 당신만의 비밀로 한 채 ……
(그날 까지 알려주면 여행이 정말 재미 없어지잖어)
누군 더 오래 사니 공평한 게 아니라고.?
이 땅에 오래 머무는 사람이 고작 100년을 살기 어려운데 태어나면서 떠난다 해도 그 차이는 고작 100년을
넘지 않는다.
걱정하지 마라 할아버지도 돌아가셨고 아버님도 돌아 가셨고 오래지 않아 나도 반드시 돌아간다.
쓸데없이 불평하지 마라
기는 입으로 빠져 나가 입 싼 놈이 더 일찍 떠나야 한다.
오래 사는 건 다 입이 무거운 법이다.
태양,산 바다 바위 나무 거북이, 학 고향 동구밖 느티나무
오래 살다 보면 머리도 희끗해지고 눈도 침침해지고 이빨도 흔들릴 것이다.
그때도 그대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신이 경고를 보내고 있는 것이니 조금씩 준비해야 할 것이다.
신호가 오기 시작하면 세상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들은 점점 쓸모가 없어질 것이다.
아무 것도 가져 가지 못하는 것들에 목메고 욕심내지 마라.
그 때는 살아 가면서 세상에 잃어버린 소중한 것들을 하나씩 찾아야 할 때이다.
호기심과 동심, 그리고 살아가는 날의 기쁨과 감동
그 동안 열심히 꾸렸던 가방에서 불필요한 짐들을 하나씩 빼어내고 등에 진 등짐을 조금 씩 내려야 한다.
손에 가득 움켜쥐고 있는 것 놓고 가슴에 채웠던 쓸데 없는 욕심과 집착들은 조금씩 비워가야 한다.
내리고 놓고 비울 때임을 알리는데 자꾸 더 지려하고 잡으려하고 채우려하면 세상이 공평한 곳이 아니라는
생각을 한 번도 버리지 못한 채 떠나야 할 것이다.
삶은 공평하다.
삶은 바람이 훅 불어갈 순간에 無로 돌아간다.
열심히 살았다면 잠시 누군가의 그리움으로 머물 수는 있을 것이지만 신이 마지막에 창조한 최고의 걸작은
연기처럼 사라짐으로 그 아름다움을 완성한다.
일 자 : 2014년 2월 9일 (일요일)
장 소 : 지리산 둘레길 15구간
코 스 : 송정 - 송정계곡(1.8km) - 원송계곡(1.5km) - 노인요양원(2.4km) - 오미(3.5km)
난이도 : 중
거 리 : 9.2 km
소요시간 : 약 4시간
지리산에 가기 위해서 몸이 아픈 건지.신체리듬이 깨어졌는지 지난 출정 때도 컨디션이 좋지 않더니
이번에도 감기가 삼하게 들어 몸이 좋지가 않다.
정말 오래 간만에 조사장이 시간이 된다고 술 한잔 치자고 전화가 왔는데도 응하지 못했다.
이런 상태로 대주가와 대작했다간 일요일도 못 일어 날 판이라…
거의 아픈 날이 없다 보니 어쩌다 한 번 아파도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기침이 나고 머리가 지끈거리고 속이 메스꺼운데 입맛은 살아 있으니 먹을 건 다 챙겨먹는다.
거기다 아픈데도 산에는 간다 하니 마눌이 보기에는 영락없는 꾀병수준이다.
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가 새벽에 일어 났는데 적어도 상태가 더 악화되지는 않았다.
그냥 따뜻한데 누워서 하루종일 쉬고 싶지만 저녁 때쯤 되면 또 땅거미처럼 후회가 밀려들리라
감기가 유행은 유행인 모양이다. 최선생님과 몇몇 산님도 심한 감기에 걸려 고생했다고 한다.
10리 벚꽃 길이 있는 가탄-송정 구간은 화사한 4월의 봄을 위해 유보되었다.
우린 그 다음구간 송정-오미 구간을 잇기로 했다.
이 구간은 전남 구례군 토지면의 송정리와 오미리를 연결하는 9.2km구간으로 시작 지점에서 곧바로
가파른 산길로 올려 붙어 의승재를 넘어 간다.
올라오면서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지난번 걸어 내렸던 지그재그 구불길 임도가 인상적이다.
산이 크고 계곡이 깊어 일반적인 기준에서 생각하는 둘레길 수준을 좀 넘어선 모습이다.
의승재에서 길은 내려가면서 다시 산을 휘돌아 가는데 산 비탈 곳곳에 조성된 편백나무 숲을 지나고
산불이 흽쓸고 지나간 황량한 숲을 지나간다.
순간의 부주의가 가져온 어처구니 없는 상실과 안타까움이 망령처럼 떠도는 회색지대를 지나면서
지리산의 기로 뚫렸던 혈이 다시 움츠러 든다.
오호통재라 !
아무런 잘 못도 없이 생각 없는 한 인간에 의해 그 푸른 삶이 마지막 불꽃과 연기로 사라져 갔으니…..
눕지도 못한 채 생을 마감한 슬픈 나무들의 산길을 지나면 싱그러운 초록의 건강미가 넘치는 소나무
숲이 나타난다.
그 숲 길 끝에서 쉼터 언덕이 서고 유유히 흐르는 섬진강이 멀리 내려다 보인다.
강 건너마을이 간전면이다.
길 주변에는 춘란이 많이 눈에 띤다.
오래 전 호남 길에는 춘란이 지천이었다.
누군가 꽃이 핀 춘란을 캐어내어 길섶에 놓아두었기에 가져다가 10여 년을 키웠는데 난은 그날 이후
한 해도 꽃을 피우지 못했다.
사람이나 식물이나 있어 할 곳이 다 따로 있는 모양이다.
가는 길 정자 하나를 지나고부터 여기저기 상처투성이 지리산 자락들이 눈에 거슬린다.
길을 따라 유독 개발이 많이 진행되고 산도 헐벗은 곳이 많아서 자연이 그린 평화로운 그림에 인간은
자꾸 얼룩으로 개칠을 해 간다.
이후의 길은 별다른 굴곡 없이 낮은 구릉과 평지로 이어지며 간간이 섬진강을 드러내기도 하면서 멀리
오산과 평사리 같은 넓은 들판과 마을이 보이는 곳으로 내려선다.
이곳에서 길은 섬진강을 닮아 스스로 유유자적 해진다..
길은 한동안 후련하게 트인 시야와 목가적인 섬진강을 옆에 두고 여유롭게 흘러가고 그 길은 걸어가는
사람들의 가슴은 시야만큼 점점 넓어져 간다.
마을을 코 앞에 둔 곳에서 길은 우측으로 방향을 바꾸면서 구례군 노인요양원을 만난다.
둘레길은 그 병원 뒤로 이어지는데 가파르게 산허리를 관통할 때만 길은 잠시 빨딱 일어나 앉고는 다시
여유와 낭만은 되찾아 솔까끔 마을과 은수 저수지를 지나 오미마을로 편안하게 내려선다.
처음 의승재 까지 산길 오름을 빼고 나면 그리 힘든 구간은 없다.
오미에 닿으면 조선중기의 고택 운조루를 만난다.
원래 55칸의 목조 기와집이었다는데 조선 중기인 영조 52년(1776년)에 삼수부사를 지낸 유이주가
'금환락지(金擐落地)'라 하는 명당자리에 지은 한옥이다.
우리가 그 길을 걸어오면서 보았듯이 운조루가 자리한 오미리는 지리산의 남쪽 능선을 배경으로 하고 마을
앞에는 너른 들이 있고 섬진강이 휘돌아 흐르고 있어서 그 풍경을 보며 걷는 것 만으로 마음이 편안해 진다.
운조루(雲鳥樓)는 원래 큰 사랑채의 이름으로 '구름속에 새처럼 숨어사는 집'이란 뜻이 으로 조선 3대 길지에
속한다고 하는데 그 이름은 도연명의 시 '귀거래사' 칠언율시의 첫 글자에서 유래된 것이라 한다.
"운무심이출수(雲無心以出岫)/ 鳥倦飛而知還(鳥倦飛而知還)
"구름(雲)은 무심히 산골짜기에 피어오르고
새(鳥)들은 날다 지치면 둥지로 돌아올 줄을 아네"
운조루에 가면 꼭 쌀뒤주를 보고와야 한다는데 사전 공부를 하고 떠난 길이 아니어서 그것이 어디에 놓여
있는지 알지도 못했다.
괜히 뒤풀이 주 한잔하고 차 안에서 여유를 부리다가 일행들이 떠나려하는 즈음에 부랴부랴 운조루에 들어가
구경하느라 시간에 쫒기다 보니 명당을 돌아보며 제대로 기를 받지 못해 뒤늦게아쉬웠다.
뒤주 아랫부분에는 한자로 '타인능해'라고 적혀 있다고 한다..
‘뉘라도 이 쌀 뒤주를 열 수 있다'라는 의미인데 늘 세 가마니의 쌀을 이 뒤주에 넣어두어 마을 사람 중 누구라도
굶주린 사람들은 이 뒤주의 쌀을 퍼갈 수 있도록 배려했다 한다.
가히 사랑 가득한 뒤주라 할만하다..
경주 최부자댁처럼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자애와 박애가 넘쳐나는 아름다운 마음의 집주인은 능히 명당의 복을
누릴만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명상의 숲 그리고 치유의 산
지리산은 변함없이 그 곳에서 세상의 노여움과 화기를 진정시켜 주었고 다친 몸과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다.
항상 그렇듯이 떠나서 마음상하고 답답했던 날은 단 하루도 없다.
적어도 내겐 무수한 날 자연으로 돌아간 길이 기쁨과 행복으로 난 길이었고 그 길이 나의 건강과 마음의 평화를
지켜주었다.
내 사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언제나 따뜻하게 나를 보듬어 줄 어머니의 가슴이 있다.
그 사랑이 내 가슴 속에 향기와 추억을 남기고 나는 오늘도 설레임 속에 가득한 그리움을 찾아 떠난다.
운조루(雲鳥樓)의 뒤주
글/이정하
뒤로는 지리산을, 앞으로는 선짐강을 끼고 있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지형으로 남한 3대 명당중의 하나라는 운조루(雲鳥樓)는 "구름 속을 나르는 새가 사는 집"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한다. 이는 도연명이 지은 <귀거래사>중 "운무심이출수(雲無心以出岫)/ 鳥倦飛而知還(鳥倦飛而知還).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에 피어오르고/새들은 날다 지치면 둥지로 돌아올 줄 아네" 의 첫머리에서 따온 말이다. 이 집은 현재 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미동에 위치하고 있는데, 축성에 남다른 조예가 깊어, 말년에 수원 유수(留守)를 지내며 수원 화성을 축조한 공로로 정2품 자헌대부까지 특진했다는 유이주(柳爾胄,1726~1797))라는 분이 1776년에 지은 아흔 아홉간의 전통 양반가옥이다. 현재 중요민속자료8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이 집에 있는 뒤주 한 개가 운조루를 빛내주고 있는 것이다. 유이주의 8세손이며 조부의 피를 이어받았는지 건축공학자가 된 전북대 유응교 교수가 지은 <他人能解>라는 시를 통해서 "운조루의 뒤주" 속으로 들어가 보기로 한다.
조선조/ 아흔 아홉간 옛 주인은/ 백미 두 가마니 닷 되가 들어가는/ 나무쌀통에 쌀을 담아놓고/ 끼니를 끓일 수 없는/ 가난한 이웃에게/ 쌀을 빼 갈 수 있도록/ 쌀독 아래에 구멍을 낸 뒤에/ 그 마개에/ 他人能解라고 써 놓고/ 타인이라도 누구나 마개를 쉽게 풀 수 있다 하였으니/ 그 음덕 입지 않은 이 없었네/… 중략…/운조루 중문간 헛청에/ 석양빛만 가득 보듬고/ 외로이 서 있네/ 11대 200여년을 그대로 지키는 종부를 맞이하면서…(시 <他人能解> 중)
유이주는 한 달에 한 번씩 뒤주가 비워지면 쌀을 다시 채우라 했고 그의 농지에서 수확되는 이백여 석의 소출 중 매년 삼십여 가마가 주변의 끼닛거리가 없는 사람을 위한 식량으로 나갔다고 한다. 또 이 뒤주를 주인이 안 보이는 헛청(헛간)에 놓도록 하여 얻으러 오는 사람을 배려했던 것이다. 당시는 조선 후기 영·정조 시대로 노론· 소론 등의 당쟁이 극심하여 임금이 탕평책을 쓰고 심지어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이십 팔 세의 아까운 나이에 어처구니없는 죽임을 당했을 정도로 나라가 어지러웠던 때였다. 기록에 나와있는 것은 없지만 유이주는 모든 공직을 사임하고 지리산 밑에서 여생을 보내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운조루라는 이름에서도 그런 추정이 가능해 진다. 그리고 사도세자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사람으로 뒤주에 대한 통한(痛恨)을 구멍을 뚫어 숨통을 트이게 하고 빈민에 대한 구제를 통하여 조금이라도 풀어보고자 했던 의도는 없었을까. 운조루는 만석꾼이었던 그의 사돈 되는 사람의 후원으로 건축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유이주의 음덕이었는지 이 집은 그 동안 "동학"이나 여·순 반란사건, 그리고 6,25전쟁 등의 회오리바람에서도 작은 피해 하나 없이 건재했다고 하니 이웃 사랑의 정신을 실천했던 그분의 아름다운 뜻이 더욱 빛이 나는 것 같다.
고위직에 있을 때 더 많은 부를 축적해서 자손만대까지 영화를 누리겠다고 혈안이 되어 동분서주하는 일부 부패 공직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운조루의 뒤주다. 현대사회에서도 가장 필요한 윤리적인 가치가 바로 이러한 선비정신이요, 노블레스 오블리쥬 (nebelesse oblige:높은 신분에 따르는 도의상 의무)가 아닐까. 운조루를 지은 지 23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집은 쇠락 하여졌지만 타인능해의 정신만은 천왕봉보다도 높고, 도도하게 흐르는 섬진강의 물빛보다도 더 찬연히 빛나게 오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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