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2월 7일 백두대간 종주 당시 룡산에서 친구 조병택과
2002년 12월 7일 백두대간 종주중 곰넘이재에서 찍은 사진
도래기재 - 화방재
내겐 오랜 친구 하나가 있다.
모진 세월에도 변함없는 친구
말 없이 가슴으로 통하는 친구
우린 수 많은 계절과 세월을 함께 보내고
바람과 구름처럼 세상을 떠돌았다.
세월은 그리 쉽게 흘러 갔다.
난 세월에 조금씩 시들어 갔지만
그는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나날이 새로워 졌다.
나는 그의 명상과 철학과 부러워하고
그는 조금씩 낡아가고 빛이 바래 가는 나의 모습도 사랑해 주었다.
그는 변함없는 모습으로 한결같이 그 자리를 지키고
나는 바람에 자주 흔들리고 가끔은 길을 잃기도 하지만
우리 우정은 박달령 아름드리 소나무처럼 변함없이 푸르러 갔다.
친구는 늘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가끔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어떤 때는 조용히 내 등과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나는 친구에게서 배웠다.
인생은 눈부신 들판을 날아오르는 나비처럼 가볍고 경쾌해야 한다는 걸
따뜻한 햇살과 시원한 바람 그리고 아름다운 풍경은 마음껏 누려야 한다는 걸
가슴에 채워야 할 건 욕심이 아니라 사랑과 기쁨이란 걸
짧고도 먼 인생길에서
늘 기쁨과 행복을 떠오르게 하는 친구가 있어서 좋았다.
내 가슴에 그리움을 남기는 그런 친구가 있어서 너무 좋았다.
나는 조금씩 친구를 닮아 갔다
그와 함께 보낸 많은 시간은 내 삶을 한 뼘 깊게 했고
두려움 없이 내 길과 내 삶을 사랑하게 되었다.
모두가 친구 덕분 이었다.
내가 좀더 세상에 둥글어지고 가벼워 진 건.
세상을 바라보는 더 따뜻한 눈을 갖게 된 건
그래도 행복의 문을 열 수 있는 작은 열쇠 하나쯤은 손에 넣게 된 건.
난 오늘도 친구가 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태양이 떠오르는 찬란한 새벽을 만나기 위해서는 어둠의 밤을 지나야 하고
험하고 궂은 날씨도 생각하기에 따라 낭만적일 수 있는 것을
인생의 수 많은 기쁨과 행복들은 다 내 가슴에서 피어난 한 송이 꽃이었음을….
언제나 변함없는 내 친구 - 산
산 행 일 : 2015년 9월 13일 일요일
산 행 지 : 아들과부르는 노래 24- 백두대간 29구간
코 스 : 도래기재-구룡산-신선봉-태백산-화방재)
날 씨 : 아침엔 싸늘하고 차가운 날씨 , 오후에는 시원하고 따뜻
거 리 :
소요시간 : 약 10시간 30분 ( 식사 20분, 수면:50분)
시간 |
경유지 |
비 고 |
06:20 |
도래기재 출발 |
구룡산 5.54km, 옥돌봉 2.68km |
06:50 |
제1 임도 |
구룡산3.92km, 도래기재 1.62km |
07:41 |
제2임도 |
구룡산1.56km, 도애기재 3.95km |
08:28 |
구룡산 |
태백산14.2km, 도래기재 5.54km |
08:37 |
구룡산 출발 |
|
08:46 |
부쇠-구룡 5-28쉼터 |
50분 수면 |
09:30 |
5-28 쉼터 출발 |
|
09:42 |
고직령 |
곰넘이재3.65km, 향이동 2km |
09:53 |
경석봉(1,231m) |
|
10:13 |
곰넘이재 |
|
10;16 |
신선봉 1,280m |
|
11:49 |
차돌배기 |
참새골입구 6km(1시간 40분) |
12;11 |
차돌배기 식사후 출발 |
식사 약 20분 |
12:16 |
각호지맥 분기점 |
|
13:17 |
전망없는 전망대 |
|
13;26 |
깃대배기봉 |
부쇠봉 3.26km, 차돌배기 3.5km, 두리봉 3.5km |
13;35 |
제2깃대배기봉 |
|
14:22 |
부쇠봉 삼거리 |
태백산 1.3km, 부쇠봉 400m, 백천계곡 5km |
14;38 |
문수봉 갈림길 |
천제단 0.8km, 문수봉 2.2km |
14:51 |
태백산천제단(하단) |
|
14:59 |
태백산천제단(상단) |
|
14:42 |
국방봉 (1429m) |
늦은맥이재2.1km, 비로봉3.1km |
15;19 |
태백산천제단 |
|
15:31 |
만경사 가는 길 |
유일사매표소 3.3km, 천제단 0.7km, 망경대 0.6km |
15:51 |
유링사 쉼터 |
천제단1.7km, 사길령 매표소 2.4km |
16:04 |
이정표 |
사길령매표소 1.9km , 유일사 매표소 0.5km |
16:32 |
신령각 |
사길령매표소 0.5km, 천제단 3.6km, 유일사 쉼터 1.9km |
16:42 |
사길령 매표소 |
|
16:50 |
화방재 |
|
새벽 1시 20분에 어김없이 알람이 울었다.
직원들과 완도, 청산도에 다녀와서 피곤한 탓에 10시에 침대에 들었으니 3사간 잔셈이다.
늘 늦게 잠드는 아들녀석을 차마 깨우기가 안스럽지만 또 어쩌랴!
마눌까지 뒤따라 일어나서 도시락을 싸고 오뎅국을 끓인다.
아침에 나누어 주는 차가운 김밥을 뜨거운 국물과 함께 먹으라고…
나야 제 좋아서 하는 일이니 날밤을 꼬박세워도 무슨 문제 있으랴만 이젠 이동 거리가 멀어진 백두대간이
사람 여럿 잡는다.
뒤풀이 술잔을 마다하지 않는다는 걸 아는 마눌은 갈마역까지 우리를 태워주었다.
싸늘한 바람이 불어가는 갈마역에 내리자마자 이동베이스캠프는 득달같이 달려왔고 우리는 인사를 나눌
겨를도 없이 버스에 올랐다..
“자자!”
어짜피 설잠에 피곤한 상황이라 짧게 아들한테 한마디 던지고 취침모두 돌입하여 비몽사몽을 헤메기 시작했다.
옛 리듬이 살아 온다.
버스는 흔들리는 요람이고 차량의 낮은 배기음은 부드러운 자장가였다.
ZZZ~~
가끔 불편해서 몸을 여러 번 뒤척이긴 했지만 도착할 때 까지 거의 혼수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갑자기 불이 켜지고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커진다.
아직 사태파악이 안된 몽롱한 상태로 애써 정신을 수습하니 벌써 도래기제에 도착한 거란다.
“흐미 30분도 채 못 잔 것 같은데 벌써 도착이여…?”
밤에도 채 잠들지 못하고 끌려나 온 아들에게 잠 좀 잤느냐 물어보니
“한 잠도 못잤어요.” 한다.
이 녀석 내 아들 맞어?
좁은 차 안에서 나눠준 김밥에 오뎅국을 힘겹게 먹는데 순식간에 김밥 한 줄을 끝낸 대원들 모두들
하차하는 통에 아직 남은 음식을 구겨 넣느라 혼비백산 했다.
청룡산 가는 길
도래기재에는 안개가 깔리고 차가운 바람이 불어간다.~~~
“여긴 완전 늦가을 분위기여 !”
간신히 단체촬영하고 나서 겨우 등산화 끈 묶고, 스틱정비하고 주변 사진 몇 컷 찍는데 벌써 대원들은
모두 사라졌다.
제법 가파른 비탈길을 오르는 데도 아침의 차가운 냉기가 몸 안에 스민다.
그래도 얇은 긴팔 옷을 입었으니 다행이다.
아들녀석은 바람막이 까지 입었는데도 춥다고 몸을 잔뜩 웅크리고 걷는다.
코를 통해 들어오는 강원의 청정한 공기와 목을 휘감는 싸늘한 바람의 감촉이 너무 좋다.
햇빛이 나면 양상이 달라지겠지만 여기가 1000고지 이상임을 감안하면 23km 먼 거리라도 오늘 산행은
다소 수월할 듯 하다.
6시 45분 숲 사이로 해가 떠오른다.
출발한지 25분 만이다.
한참을 가다가 오르막 길에서 더워질 것 같아 아들녀석에게 바람막이 자켓을 벗으라 했는데 얼마 가지
않아 춥다고 다시 입는다.
가는 길 아름드리 금강송들이 도열해서 자꾸 카메라에 손이 가게 한다.
상금정마을과 서벽리를 연결하는 첫번째 임도를 지나고 오름길을 올라 신갈나무 숲을 지나다보니 벤취도
잘 만들어져 있고 군데 군데 나무에 관해 설명하는 표지판도 눈에 뛴다.
좀더 진행하여 전자와 구룡산에 관한 해설 표지판이 있는 두번 째 임도를 만난다.
그곳에서 구룡산 까지는 1.56km로 제법 가파른 비탈을 치고 올라야 한다.
구룡산
헬기장 위에 그 때 그 표석이 덩그라니 서 있다.
그 때도 묘가 있었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대원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아서 둘이 서로 인증샷을 찍어주고 잠시 다리쉼을 하는데 녀석은 슬며시
헬기장 양지바른 곳을 찾아 웅크린다.
많이 졸린 모양이다.
구룡산은 강원 영월군 상동읍(寧月郡 上東邑)과 경북 봉화군 춘양면(奉化郡 春陽面)사이에 위치한
산으로 태백산과 옥돌봉사이 백두대간 마루금에 솟아, 낙동강과 한강의 분수계를 이룬다.
승천하는 9마리 용을 보고 아낙이 “뱀이다!” 라고 소리를 질렀다.
아낙의 말에 부정을 탔는지 용들이 자존심이 상해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9마리 용은 승천하지 못하고
떨어져 그렇게 구룡산이 되었다 한다.
곰넘이재 가는 길
참나무와 관목들로 이루어진 고산 수림길은 더 없이 부드럽고 편안해졌다.
다소 쌀쌀한 바람이 불어가고 가끔 수림사이로 눈부신 햇살이 스며들어 걷기에 최적의 날이다.
난 한적한 고원의 숲길에 기분이 점점 좋아지고 컨디션이 최상인데 녀석은 졸려서 도통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비틀거리고 발길은 갈팡거리고…
28번 구조목이 있는 벤치가 나타났지만 햇빛이 들지 않아 잠시 눈을 붙이기에 다소 추울 것 같아서
좀더 진행하려 했는데 녀석은 도저히 참지 못하겠는지 그냥 누워 버린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가는 산 길에서 혼자 서성인다.
바람이 차니 몇 분 지나면 곧 일어나리라고 생각했는데 20분이 지나도 녀석은 일어날 기미가 없다.
그렇다고 이렇게 곤히 자는 녀석을 깨우기도 난처하다.
바람 부는 숲 속 한 켠에 누워 잠에 빠진 아들을 바라 보노라니 가슴이 아파왔다.
내 욕심으로 아들녀석을 너무 힘들게 몰아대는 것은 아닐까?
깊이 잠든 모습을 보고 길에서 벗어난 숲 언저리를 여기저기 헤집으며 가을로 가는 길목에 피어난
꽃들을 카메라에 담으며 오랫동안 숲길을 배회했다.
시간이 9시 30분을 가르키고 나서야 도저히 안될 것 같아 아들을 흔들어 깨웠다..
날씨 덕분에 예상시간은 충분히 단축할 수 있겠지만 후미 산우들이 1시간 이상 기다리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잠들고 나서 50분이 지났다.
녀석을깨우니 화들짝 놀라 일어나는데 5분정도 밖에 안 잔 것 같단다.
그래도 잠을 자고 나니 졸음이 가시고 원기가 회복되었다고 한다
다행이다.
떨어진 거리를 보충하기 위하여 조금 속도를 빨리 하여 가다 보니 부쇠봉-구룡산 5-27 표지목을
지나자 마자 벤치가 3개 있는 고직령을 만난다.
향이동 갈림길 표기가 되어 있는 곳으로 구조목 뒤 출입금지 안내판 뒤로 난 길은 공군사격장이 있는
영월 천평리로 내려가는 길이다.
고직령에서 10여분 진행하여 만나는 봉우리가 1231봉인데 어느 산악회에서 경석봉이란 표찰을
붙여 놓았다.
그 봉우리에서 평평하고 완만한 산길을 따라 20여분 더 진행하면 곰넘이재로 내려서게 된다.
곰넘이재
그 옛날 기념사진을 찍었던 그 고갯길이다.
신기하다
13전 친구 조병택과 산행하던 그 때 그 이정표는 아직 그대로 이다.
나나 이정표나 세월에 조금 낡았을 뿐 아직 그래도 자신의 역할을 꿋꿋이 수행하고 있다.
옛날 용현이란 이름으로 불리웠던 곰넘이재는 스님이 콩을 잃어버려서 실두재란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는 고갯길이다.
이곳은 경상도에서 강원도로 들어가는 길목으로 천제단에서 제를 올리려는 관리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던 곳이라 한다.
백두대간 종주를 소구간으로 할 경우 이곳에서 끊을 수 있는데 봉화 애당2리, 참새골(실두동,진조동)
까지 약 2km로 1시간정도면 하산할 수 있다.
컨디션이 안 좋을 경우 오늘 구간의 가장 합리적인 탈출로가 될 것이다..
신선봉 가는 길
예상치 못한 넓은 길이 나타난다..
흠사 트랙터라도 지나 간 듯 임도 길보다도 더 넓은 길이 완만한 오름 길을 따라 능선에 올라 신선봉을
향해 좌측으로 휘어져 구비친다.
숲은 울창하고 바람은 솔솔 부는데 푹신한 흙이 감촉으로 발까지 편안하니 콧노래가 절로 난다.
아들녀석도 계속 노래를 부르며 따라오는 걸 보니 완전 정상 컨디션을 회복한 모양이다.
가는 길에 아들에게 말했다.
“이젠 걸어가야 할 길 보다 걸어온 길이 더 많아졌다.
눈 깜짝할 사이 일년이 지나 간 것처럼 남은 1년 또한 그렇게 지나갈 것이다.
넌 한마디 불평도 하지 않았지만 혹여 네 가슴속에 아직도 불만과 의구심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디면
이젠 모두 털어버려라.
이렇게 불면의 밤을 깨워 동터오는 신 새벽을 만나고 이렇게 가지 않은 먼 길을 걸어가며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 이 시간들은 티끌만큼의 부정적인 생각을 끌어들이기에도 너무 아깝고 소중한 시간이다.
숱한 생명을 되살리는 맑은 공기를 마음껏 들이키고 몸 안의 모든 세포를 활짝 열어 대한민국
대표 명산의 진기를 가슴 가득 빨아 올려라.
마음의 부담과 짐을 모두 내리고 아름다운 대자연의 풍경을 바라보며 좋은 생각들로 네 머리와 가슴을
가득 채워라.
무릇 열정과 자신감을 잃지만 않는다면 네 앞에 놓인 어려움들도 능히 극복될 것이다.
백두대간을 걸으면서 만났고 또 앞으로 만나야 할 수 많은 어려움과 기쁨들이 너를 더 강하게 만들고
우리가 진정 뜨거운 가슴으로 연결된 아버지와 아들임을 느끼게 할 것이다.
정말 기억에 남을 아름다운 날들을 우리는 보내고 있다.
사랑과 즐거운 추억으로 채워갈 이 시간.
너와 나에게 남아 있는 수 많은 날을 통 털어서 다시 가질 수 없는 아쉬운 시간이다."
가는 길에 숲 사이로 청룡산이 바라다 보인다.
신선봉 아래 안부까지 이어지는 넓찍한 길은 산불 확산을 방지하기 위한 인공 방화선 길로 천평리
공군사격장이 만들어질 때 조성되었다고 한다.
신선봉 (1301m)
가파른 된비알 산죽 길을 몇 굽이 치고 오르면 홀연히 묘지 1기가 있는 신선봉이 나타난다.
여기 묻히신 경주손씨 처사님은 벌써 신선이 되셨겠다.
별다른 조망이 없음이 아쉬웠지만 우린 무덤 한 켠에 앉아서 다리쉼을 했다.
깃대배기봉 가는 길
신선봉이 워낙 고도가 높은 곳이라 차돌배기 아래 산허리 까지는 고만고만한 무명봉들을 오르내리며
완만하게 내려간다.
산허리 아래서 차돌배기 까지는 제법 경사진 산비탈을 치고 올라야 한다.
차돌배기는 고개가 아니라 석문동 방향으로 지능선이 분기하는 능선 마루로 예전에 차돌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하지만 주변에 차돌이란 흔적도 없고 오래된 낡은 이정표와 표지판 그리고 벤치만 덩그러니 찬 바람을
맞고 있다.
이정표에는 참새골까지 6km, 태백산 가지 10km, 석문동 까지 4km라고 표기되어 있다.
우린 그곳에서 점심 식사를 했다.
능선 날바람을 맞으니 금새 몸이 으실으실 추워왔다.
혼자 진행하는 한 산님을 만났다.
홀로 대간 종주를 한다는데 어제 피재에서 시작하여 여기 까지 왔단다.
배낭도 크지 않아서 어디서 잤냐고 물었더니 그냥 특별히 잠을 자는 건 아니고 졸리면 아무데나 기대어
쪽잠을 자면서 진행한다고 한다..
어디까지 가냐고 물었더니 죽령까지 간다고 했다.
세상에나!
한 번 출정하면 뛰다시피 하면서 90km 정도 강행한다고…
자신은 약 11번 정도에 백두대간을 끝낼 예정인데 j3에 소속된 친구들은 7번~8번 출정으로 백두대간을
마무리하기도 한단다.
이사람 동물이여? 짐승이여?
사람의 잠재력이란 무한하고 사람마다 취향은 천차만별이다..
사실 별로 부럽진 않다.
난 해내는 산행이 아니라 즐기는 산행을 한다.
오늘 내가 다시 이 길을 걷는 것은 내 젊은 날의 추억을 다시 돌아보고 어둠에 남겨 놓은 풍경들을
되찾기 위함이다.
세상에 하나 뿐인 내 아들과 멋진 추억을 만들기 위함이다.
비몽사몽 졸리는 눈이 아니라 두 눈 똑바로 뜨고 오감으로 백두대간과 자연의 변화를 즐긴다.
“아들아 저런 사람도 있으니 넌 오늘 같은 길을 룰루랄라 행복한 산행을 해야 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장고개재에서 깃대배기봉 오름길을 빼면 태백산까지 완만하다고 한다.
차돌배기에서 몇 분 걷지 않아 각화지맥 분기 삼거리를 만난다.
대충산사에서 나무등걸에 붉은 표지판을 걸어두어 쉽게 알아볼 수 있다..
각화지맥은 백두대간 차돌배기 북쪽 1215봉에서 분기되어 각화산, 왕두산, 화장산, 월암산을 거쳐
운곡천이 낙동에 합류하는 명호까지 이어지는 37.5Km의 산줄기를 말한다.
낮에는 길을 잘못들 리 없지만 혹여 밤에 가다가 20분을 넘게 걸어도 구조봉 부쇠봉-구룡산 5-13이
나타나지 않으면 각화지맥을 타며 알바하고 있는 거다.
구조목 5-13에서 대간길은 동북방향으로 휘어져 능선을 넘어 간다.
시계 반대 방향으로 휘어지는 산길을 따라 깃대배기봉으로 가다보니 나무 사이로 골짜기 저편에
신선봉이 바라 보인다.
5-12 구조목을 지나 10여분 1174봉을 우회하여 내리막길을 진행하면 장고개재가 선다.’
봉화방향 구마동계곡 시발점에 있는 장기바위에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고 하는 장고개재는 오른쪽
봉화 소천면 구마동계곡과 왼쪽 영월 상동읍 천평리 춘시리골을 잇는 고개인데 지금은 사람의 통행이
거의 없어 그 이름도 점점 잊혀지고 있다고 한다.
장고개재에서 왼쪽 영월 천평리 쪽으로 선명한 산길을 따라 5-60m만 내려가면 계곡수를 얻을 수 있다고
해서 기억에 담아 두었는데 오늘은 시원한 날씨라 2리터씩 가져온 물도 터무니 없이 남아 돈다.
장고개재에서 깃대배기봉까지 약2Km는 된비알 오름길이다.
구조목 5-13을 지나고 참호 같은 길을 따라 올라가다가 전망대 같은 나무데크가 나오는데 숲에 가려
아무런 조망이 없다.
화채능선이란 분이 여기가 힘든 곳임을 알고 “백두대간을 종주하시는 산님들 힘힘힘내세요”하는
팻말을 걸어두었다.
홀아비 사정은 과부가 안다고 어느 가슴 따뜻한 산님의 정겨운 응원에 힘이 솟는다.
깃대배기봉 (1,370m)
갑자기 하늘이 열리고 커다란 표석이 나타났다.
대간길은 왼쪽이고 오른쪽은 두리봉-청옥산으로 가는 산길이다..
청옥능선에 들어서면 국도 31호선 상의 넛재나, 능선 남쪽의 봉화군 소천면 고현리 또는 북쪽의
석포면 백천계곡 쪽으로 내려가야 하는데, 모두 5시간 가까이 소요되는 깊은 산길이다.
우린 이곳에서 잠시 다리쉼을 했다.
천령길
인상적인 길이다.
그 겨울 흰 눈에 덮히고 어둠에 혼곤히 묻어두어서 가늠할 수 없었던 그 길
심청의 목소리에 놀라 눈이 떠진 심봉사가 만난 세상은 어땠을까?
나는 어둠을 걷어 낸 밝은 날에 우리가 천령이라 이름 부르는 1000고지의 아름다운 고원의 그
길을 다시 만났다..
군데 군데 조성된 나무 테크 길을 지나 다시 깃대배기봉 하나를 더 만나고 편안한 마음으로 아들
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부드럽고 편안한 하늘 길을 걸었다.
부소봉 까지 3.3km의 부드러운 그 길에는 가을의 초입에서 아직 무수한 야생화가 꽃을 피우고 있었다.
애쓰지 않아도 우린 마치 축지법을 쓰듯 남은 거리를 힘들이지 않고 쉽게 줄여나갈 수 있는 비단길 이었다.
부소봉 삼거리
5-3 부쇠봉-구령산 구조목을 지나고 오름길을 4~5분 진행하면 부소봉 삼거리가 선다.
부소봉 400m 전방지점으로 이곳에서 태백산 우회로와 백천계곡 길이 분기한다.
백천계곡은 부쇠봉-문수봉 능선과 깃대배기봉에서 분기한 두리봉-청옥산 능선으로 들러쳐진 봉화
석포면의 깊은 계곡으로 희귀어종인 눈이 붉은 열목어가 서식한다.
아들녀석을 50분이나 길 위에서 재운 것은 이곳 우회로를 염두에 둔 것이기도 하다.
부쇠봉을 찍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평시에도 서너 시간은 족히 기다리는 A팀이 나로 인해
한 시간을 더 기다려야 한다면 미안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태백산까지 우회길이 1.3km 밖에 되지 않으니 우회하면 20여분은 단축할 수 있을 것이다.
부쇠봉(1,546m)
천제단이 있는 장군봉은 단군왕검을 상징하고 부쇠봉은 단군의 둘째아들인 부소를 상징하는 봉우리
이다.
봉우리 주변에 차돌이 많아 부싯돌(부쇳돌)을 만들던 곳이라 하여 부쇠봉으로 불리웠다고 한다.
태백산 가는 길
태백산 가는 우회길에서 비로소 답답한 하늘이 벗겨지고 그간 긴 숲을 걸으며 잊고 지냈던 조망이
조금씩 살아났다.
어느 길에도 햇살이 비치고 빗방울이 떨어지는 법이다.
바라보는 길 북쪽 풍경은 아름다웠고 길 가에서 홀로 익어가는 붉은 마가목 열매와 물든 잎새는 때
이른 가을의 정취를 물씬 느끼게 해 주었다.
멀리서 낯익은 태백의 풍경들이 손을 흔들었다.
우린 마가목 열매를 한웅쿰식 씹어 먹으며 태백산으로 올랐다.
태백산에 다가가면서 가면서 후련하고 멋진 산세상이 둥둥 떠오르고 가슴은 점점 부풀어 올랐다.
13년전 그날 깜깜한 밤에 부쇠봉 들머리를 찾지 못하고 문수봉 쪽으로 한참을 진행하다 되돌아 왔었다.
“이래서 그랬구나! “
이정표도 변변하지 않았을 그 때 왜 많은 산우들이 그 길을 스쳐 지나갔었는지 고개가 끄덕여 진다.
태백산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살아가는 날의 감동을 나누었었다.
하지만 그날의 바장함과 장엄한 태백산은 아직도 내 가슴에서 생생히 살아 있다.
어둠 속에서 승냥이 울음소리를 내며 눈은 못 뜨게 하던 칼바람
그리고 이마의 헤드렌턴 불빛에 어지럽게 춤추던 무수한 눈발
그 장쾌한 설원의 장엄한 풍경을 혼곤히 바라보지 못해 너무 아쉽고 안타까웠었다.
깨어나지 못하는 칠흑의 어둠이 원망스러웠던 그날의 기억이 절절히 살아오고 후회 없이 흘러 보낸
나의 아름다운 젊은 날의 추억들은 태백산 여기저기서 기쁘게 말을 걸어 왔다.
아무도 없는 태백산 표석에서 아들과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며 만세를 불렀다.
아무도 없었지만 내 젊은 날의 추억과 아들이 곁에 있어서 외롭지 않았다.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하나가 된다는 그 곳 !
민족의 영산 태백산 천제단에서 아들과 함께 감사의 절을 올렸다.
“오랫동안 산을 사랑할 수 있어서
건강하게 다시 이곳에 올 수 있게 하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늘 가득한 행복과 충만한 기쁨 속에 살아갈 수 있게 하소서! ”
태백산 정상부에는 총 3기의 천제단이 있다.
잘 알려진 ‘한배검’ 비석이 있는 천제단은 천왕단(중단)으로, 이를 중심으로 북쪽 300m 떨어진 장군봉에
있는 천제단을 장군단(또는 상단), 다시 천왕단 아래쪽으로 200m가량 내려간 곳에 있는 천제단을 구을단
(또는 하단)이라고 부른다.
나의 감회와 기쁨이 아들에게도 전염되었는지 녀석도 신명이 났다.
우린 뒤늦게 올라온 알지 못하는 산님들에게 기념촬영을 부탁하고 유일사쪽으로 하산길을 잡았다.
화방재 가는 길
유일사 매표소 입구는 1.7km로 생각보다 빨리 나타났지만 그 곳에서 화방재 가는 길은 그리 녹록하지
않고 제법 길었다.
완만한 하산 길이었지만 이제까지의 육산과 달리 발바닥이 불편했고 유일사 갈림길에서 사길령매표소
가는 2.4km 길 중간에에 우리는 봉우리를 두 개나 더 넘어야 했다.
산신각을 거쳐 사길령 매표소에 도착했다.
사길령은 태백과 영월군 천평리를 잇는 고개로 예전에는 강원도에서 경상도 춘양지역으로 가는 중요한
교통로였다고 한다.
신라시대 때 주로 이용되었던 천령길이 너무 높고 험준해 고려시대 때 새로 열었다 하여 새길령이라
부르던 것이 음이 변해 사길령이 되었다 한다.
그래도 오늘은 또 하나의 멋진 날이었다.
부드러운 가을바람이 불어주고
낭만적인 숲길과 천령을 걸어 물드는 가을 태백을 만나고
가슴에 남아 있던 아련한 추억을 만났다.
지나간 세월의 아련한 상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구름처럼 피어나던 아름다운 대간 길이었다.
2002년 12월 7일 백두대간 종주 당시 깃대배기봉 있던 등산로 표지판
2002년 12월 7일 새벽 백두대간 종주중 찍은 천제단 사진
2002년 12월 7일 백두대간 종주중 천제단에서 찍은 사진
2002년 12월 7일 백두대간 종주중 찍은 태백산 설화
동행사진첩
■ 신라 때부터 산천제 행한 나라의 큰 산
태백산은 높이가 높고(1567m) 규모가 크지만 명산 이력도 자못 대단하다.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기에 이미 신라시대부터 오악의 하나인 북악으로 지정되어 국가적인 산천제가 행해졌다. 조선시대에는 인근 강원도 삼척과 경상도 봉화의 지방 명산이기도 했다. 조선후기 지식인들도 태백산을 주목했다. 이중환은 국토 등줄기에 있는 ‘나라의 큰 명산’ 중 하나라고 했다. 신경준의 12명산에도 속했고, 성해응의 <동국명산기>에도 수록되었다. 무엇보다 민간의 도참비결서에 태백산이 한반도에서 으뜸가는 산으로 소개되는 것도 흥미롭다. ‘옥룡자청학동결’에 “태백산과 소백산이 첫째이고 지리산은 다음”이라고 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태백산 남사면의 봉화 춘양에는 <정감록> 십승지의 하나가 들어서기도 했다. 십승지는 피난보신의 땅의 대명사인데 태백산사고지도 인근에 있으니 이 어찌 우연일 것인가?
환웅이 무리 삼천명을 이끌고 신시(神市)를 열었다는 태백산이 이 태백산일까? <삼국유사>에서 일연은 묘향산이라는 주석을 달았고 옛 글에 백두산이란 설도 만만치 않다. 평양의 단군릉이 있는 대박산이라는 설도 있다. 지금의 태백산일 가능성도 있음은 물론이다. 여기에는 지명으로 당골이 있고 소도동이 있다. 부쇠봉도 단군의 아들 부소와 관련될 수 있다. 지명 경관으로 남아있는 화석인 것이다.
■ 태백산과 마니산, 공통의 자취 ‘단군’
강화의 마니산에도 부소, 부우, 부여 등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삼랑성 전설이 있다. 마니산은 높이 472m의 나지막한 산이지만 산이름의 격은 매우 높다. 마리산, 두악산으로도 불렀는데 우리말로 머리산이라는 뜻으로 보인다. 일찍이 <고려사> 지리지는 다음과 같이 단군의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산마루에 참성단이 있는데 단군이 하늘에 제사 지내던 단이라고 한다. 전등산, 삼랑성이라고도 하는데 단군이 그의 세 아들을 시켜서 이 성을 쌓게 하였다고 한다.” 조선후기에 이형상이 편찬한 강화읍지인 <강도지>(1696)도 당시까지 지속된 하늘 제사의 정황을 소개하고 있다. “조선도 옛날 고려가 하던 대로 이곳에서 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제사 의식은 도가들의 의식에 가깝다.”
두 산에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사람으로는 단군이다. 단군의 아버지 환웅이 신시를 연 곳이 태백산이고,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지낸 곳이 마니산이다. 장소로는 산꼭대기에 하늘에 제사 지낸 단이 있다. 태백산의 천제단과 마니산의 참성단이다. 두 산은 단군의 자취가 서려 있는 고유 신앙의 메카인 것이다. 이렇듯 태백산과 마니산은 한국에서 매우 독특한 사상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산이다. 그것을 산의 인문학에서는 신산(神山) 혹은 선산(仙山) 코드라 한다.
■ 한국의 산에 퇴적된 지식고고학적 지층
우리 산은 한국 사상과 문화가 오롯이 퇴적되어 있는 지식고고학적 지층이다. 그 텍스트를 발굴해 보면 겉으로는 조선시대의 유교문화가 나타나고 속으로는 고려 및 신라시대의 불교문화 층서가 드러나지만, 가장 깊숙한 곳에서는 고신도 혹은 선도 문화의 원형질이 처녀지를 드러낸다. 그 지층이 바로 신산 및 선산이다. 태백산과 마니산은 한국 산악문화의 가장 뿌리에 있는 원형적인 산의 유형을 대표한다.
하늘의 신이 태백산에 내려와 신시를 베풀고 다시 산으로 깃들어 삶터의 수호신이 되니, 그 산은 신산이고 그 사람은 산신이다. 신산은 우리 산의 문화사에서 어떤 인문학적인 의미가 있을까? 하늘은 너무도 광대하고 막막한 존재이다. 신이란 것은 하늘의 신묘한 작용을 말한다. 하늘을 인간화한 개념인 것이다. 하늘이 신산 혹은 산신이 되는 것은 이미 사람 가까이 다가온 것이다. 더욱이 우리의 토속적인 신은 삼신이다. 인격화해 삼신할머니라고도 했다. 세상에 할머니같이 편안하고 부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 할머니산은 또 얼마나 친근한 산인가? 한국의 산에 할머니 산신이 많은 이유는 전래의 삼신산 사상 때문이기도 하다. 중국 도교의 삼신산(봉래·영주·풍악)과는 다른 고유 신앙의 삼신산이다. 태백산과 마니산은 토종 신산의 으뜸이기도 하다.
태백산과 마니산은 또한 선도의 산, 선산으로도 분류된다. 단군이 선도의 원류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중기에 조여적이 쓴 <청학집>에 한국의 선파는 중국의 도맥과는 별도로 환인, 환웅, 단군 계통의 독자적인 도맥을 이어왔다고 했다. 신채호도 ‘동국 고대 선교 고’(1910)라는 글에서 우리나라에서 신선사상이 출발했다고 했다. 김정설(1898~1966)도 이를 이어받아 선(仙)을 사람 인(人) 변에 뫼 산(山) 자로, 산에 사는 사람이란 뜻의 회의문자로 풀었다. 우리나라에는 산에 신선대, 신선바위 등이 도처에 있는데 그 산을 신산이라 했으며 산에서 수행하는 ‘샤먼’이 곧 선이며 신선이었다는 것이다.
선산은 신산보다 한발 더 가까이 인간화된 개념이다. 산은 하늘의 신이 머무는 신성한 곳에서 이제 신선이란 사람이 머무는 장소가 되었다. 누구나 보고 싶은 선경이 펼쳐지고 무릉도원이나 청학동의 이상향이 선산 속 어딘가에 있다. 모든 사람이 동경하는 가장 살기 좋은 곳으로 이미지화된 것이다. 지리산 청학동도, 속리산 우복동도, 가야산 만수동도 그런 곳이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태백산 바로 아래, 소백산과 연결되는 선달산(仙達山)이라고 있다. 그런데 선달이란 이름이 재미있다. 선도의 무리라는 뜻이다. 배달겨레의 그 배달이 선달이다. 선달산은 선산 코드를 분명히 보여주는 이름이다. 선달산 남쪽에 부석사가 있다. 부석사 창건 설화에서는 선달과 관련된 일화가 전해진다. 의상이 부석사 터를 정하고자 했는데 사교의 무리 500여명이 방해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다름 아닌 선도의 집단이다. 선산이라는 것을 분명히 드러낸다.
경향신문 - 우리산천 인문학 6 발췌
“천제단 3기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하단은 3개의 단 중에서도 가장 역사적 시기가 올라갑니다. 하단을 ‘구을단(하단)’이라고 합니다. ≪단군세기≫에서는 ‘구을’을 5대 단군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구을단(하단) 주변에 있는 봉우리 이름이 ‘부소봉’(또는 ‘부쇠봉’이라고도 한다)입니다. ‘부소’는 1대 단군인 왕검의 둘째 아들이라고 ≪규원사화≫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BC.24세기의 1대 단군의 아들과 관련된 봉우리, 5대 단군의 이름이 들어간 천제단. 이런 것만 보아도 구을단(하단)은 단군조선 초기, 개국 시기까지 그 연원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 태백산 등산지도. 천제단 옆에 부쇠봉을 확인 할 수 있다(출처 : 태백산도립공원 사이트http://tbmt.taebaek.go.kr/)
정경희 교수가 말을 이었다.
“그 다음 ‘남태백’이 기록에 나온 것은 ‘부도지(符都誌)’, 그 중에서도 ‘소부도지(小符都誌)’입니다. 단군조선이 북부여로 이름을 바꾸고 나라를 이어갔으나 점점 세력이 기울자 ‘파소신녀’를 중심으로 한 최고위층 신녀세력이 경주지역으로 이주 후 단군조선과 북부여의 전통을 이어받아 신라를 건국하고 큰 천제단을 만들었습니다."
한국 선도의 존재론과 역사인식을 담고 있는 유일한 기록인 '부도지(符都誌)'는 4세기 후반, 박혁거세의 후손이자 신라 귀족이었던 박제상이 한국 선도의 제 분야를 망라하여 지은 ≪징심록≫ 15지 중 1지에 해당한다. '부도지'는 천부경의 핵심 사상을 마고 신화의 형식으로 풀어내어 우주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기술한 것이 특징. 여신으로 의인화된 ‘마고’는 천부경의 ‘일(一)’, ‘기(氣)’를 말하는 것으로 우주의 중심에너지, 천부(天符)를 뜻한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마고’ 사상은 북부여에서 신라로 전승된, 고구려나 백제와는 다른 신라 고유 사상이라는 것이다. 태백산 천제단은 ‘마고단’이라고도 지금도 부르는데, 이는 태백산 제천단이 신라 계통의 천제단임을 알려준다.
▲ 부도지에 나타난 천부사상 도식화. 우주의 중심 에너지인 천부를 중심으로 물질세계를 이루는 기,화,수,토 4원소가 배치되어 있다.(출처 : 정경희, 「홍산문화 옥기에 나타난 ‘조천’사상(1)」 『선도문화』 11권
신라의 지배층은 건국의 주체세력인 파소신녀 집단이 단군조선에서 이주하면서 함께 가져온 단군조선의 사상(천부사상 또는 천부경사상)으로 국가를 경영하고자 하였다. 천제단 역시 그 사상을 반영하여 중앙에 천부단을 만들고 바깥에 기, 화, 수, 토를 상징하는 4개의 보단을 세웠다. 이런 에너지 원리에 근거해서 세계를 다스리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고, 역사적인 의미와 신령스러움을 주는 땅을 찾아 선택한 것이 태백산이다.
“단군조선은 요동지역에서 이미 큰 나라를 경영하고 있는 대국이었습니다. 나라의 중심이 만주 쪽 이다 보니 아무래도 한반도는 나라의 변방이었습니다. 강화도 마니산의 참성단은 초대 단군왕검이 한반도를 경영하기 위하여 세운 천제단이라는 의미가 있지만, 태백산은 변두리였기에 단군조선의 입장에서는 의미부여가 좀 떨어졌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신라는 달랐습니다. 신라 왕실은 단군조선의 선도사상을 잇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천제단을 세웠고, 기록에 따르면 신라의 파사왕, 일성왕 등 박씨 성을 가진 왕들이 여기까지 직접 올라와 제천을 하였습니다. 왕이 직접 제천을 할 정도면 규모도 크고 넓어야 하는데 조건에 맞는 곳은 이곳, 중단입니다. 아마 신라의 천제단은 이곳이었을 것입니다.”
단군조선의 선도사상을 국가경영의 원칙으로 삼은 신라는 김씨족(族)이 왕을 독점하기 시작하면서 그 원칙이 흐려지기 시작하였다. 신라는 유교를 통치수단으로 본격 도입 하면서 중국의 삼산오악(三山五嶽) 제도를 본 따 3개의 가장 중요한 의미의 산(삼산,三山)과 그보다 한 단계 낮은 등급의 5개의 산(오악,五嶽)을 지정하면서 ‘산(山)’도 등급을 매겼다. 태백산은 신라 초기 왕들이 직접 정상까지 올라가 천제를 올리던 신성한 지역이었으나, 오악 중 하나로 지정되면서 그 상징성이 약해지고 격이 낮아졌다.
그나마 선도 전통이 남아있는 고려 시대까지는 국가에서 제관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는, 중요성을 인정받는 산이었다. 그러나 유교 국가인 조선 시대에 들어서면서 제천을 준비하는 신사가 부수어지고, 불에 타는 등 수난과 고초를 겪다가 결국 시간이 흐를수록 의미가 잊혀가고 제사의 규모도 영세해졌으며, 무속으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민족정신을 잃어버리자 외래 사상과 종교가 판을 치며 정작 주인을 뒷방늙은이 취급을 한 꼴이니 씁쓸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무속으로 전락하여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였던 태백산 천제단은 대일항쟁기를 거치며 그나마도 허물어져 돌무더기만 쌓여 있었다. 광복 후 대종교 종단이 나서서 마니산 천제단의 형태를 본떠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천제단은 천·지·인(天·地·人)을 뜻하는 원방각(圓方角) 형태로, 원(圓)은 하늘, 방(方)은 땅, 각(角)은 사람을 상징한다. 자연의 모습을 본떠 만들었다면 하늘을 뜻하는 원(圓)이 위로 올라가고 땅을 뜻하는 방(方)이 아래로 내려와야 하는데 천제단의 모습은 반대로 되어 있었다. 단순히 실수라고 하기에는 미심쩍은 부분이다. 정경희 교수의 설명이 궁금했다.
▲ 천왕단 내부. 위는 땅을 뜻하는 방(方)형, 아래는 하늘을 뜻하는 원(圓)형으로 되어 있다.
“에너지의 순환을 의미합니다. 하늘의 에너지는 땅으로 내려오고, 땅의 에너지는 하늘로 올라는데 우리 조상들은 천제단에서 하늘을 상징하는 ‘원’을 밑으로 깔아서 하늘의 에너지가 땅까지 깊이깊이 뿌리를 내려 땅 위의 모든 에너지가 하늘의 밝은 에너지를 받을 수 있도록 기원하였습니다.”
갑자기 누군가 손을 번쩍 들고 질문을 하였다.
“원방각 형태라고 하셨는데, 원(圓)하고 방(方)만 있는데요, ‘각’은 어디에 있나요?”
“천제단은 하늘의 기(氣)에너지를 받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지만 그 자체만으로는 의미가 없습니다. ‘각’은 사람, 사람이 저 자리에 섰을 때 천지인이 하나로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곳에서 하늘에 제(祭)를 올리고 그 기운을 받아 땅으로 내리는 역할을 할 때, 하늘의 기에너지가 세상에 펼쳐질 수 있다는 의미를 담은 것입니다. 마음을 열고 사람이 저 자리에 섰을 때 하늘의 기운과 사람의 기운이 하나로 통하는 것이고, 그것이 신인합일, 천인합일입니다.”
인간성 상실의 시대, 인성 회복이 교육을 비롯한 각 분야의 중요한 이슈인 요즘, 인간의 존재 이유와 역할에 대한 통찰이 이보다 더 깊을 수 있을까. ‘천제단’을 통하여 수천 년 전의 깨달은 우리 조상들의 메시지가 들려오는 것 같다. 인간의 역할은 하늘의 기운으로 세상을 조화롭게 만들고 생명력을 나눠 세상을 살리고 펼치는 것이라고. 그렇기에 인간이 지구 위의 다른 종(種)들보다 더 위대하다는 상대적인 평가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그저 지구에 살아가는 수많은 생명체 중 ‘인간’이라는 종(種)에게 주어진 ‘역할’이며, 그 ‘역할’을 잘 해내었을 때 전 지구 공동체가 조화롭게, 그리고 그 구성원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오늘도 태백산의 천제단은 그 자리에서 한결같이 말하고 있다.
브레인 미디어 (천손문화연구회 선도문화 탐방기 – 태백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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