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양산
살아 있으면서 엔간히 산을 좋아하는 사람조차 한 번 가보기 힘든 곳
한반도의 중추인 백두대간에서도 허리에 해당하는 희양산은 뼈대 있는 가문에 걸맞는 장대한 기골과
탄탄하고 늠름한 골격을 자랑한다.
나 무릉객은 이번 봄 산행 까지 4 번 희양산에 올랐다.
2002년 7월 13일 백두대간 종주 때 http://blog.daum.net/goslow/1667282
2016년 2월 28일 아들과 백두대간 종주 때 http://blog.daum.net/goslow/17940334
그리고 이번 2019년 5월
나 홀로 2번
마눌과 1번, 아들과 1번
계절로 따지면 가을이 빠졌으니 2프로 부족하지만 맑은 가을날 길일을 택해 희양산과 구왕봉을 한 번
더 연결하면 명실공히 그랜드 슬램 달성이 아니겠는가??
부처님 오신 날을 기리는 의미 있는 하루를 위한 고심의 결론은 희양산 추억산행과 봉암사 순례였다.
몇 번을 올랐어도 아직 가보지 못한 미답의 절…
지름티채를 지키는 악명 높은 땡초들….
아머 이 땅의 골수 백두대간객이라면 히양산 어귀에서 그들과 서로 언성을 높이고 눈을 부라렸던 열정의
추억(?)을 한 번쯤 간직하고 있을 법하다.
백두대간에서 희양산이 차지하는 의미처럼 내 산행 인생에서 희양산이 차지하는 비중과 의의 또한
상당하다 아니할 수 없다.
난 지금도 잊지 못 할 희양산의 추억이 세 개나 된다.
16년 전 여름 백두대간 산행 때 새벽 2시부터 16시간 산행 중 낮 12시가 다 되어서야 비로소 비가
멈추었다.
하루 종일 비를 맞고 불에 빠진 생쥐 몰골로 파김치가 다 되어 능선 길을 우회하여 희양산 자락에
올랐을 때 비로소 비가 멈추었다.
선게에 발을 들여 놓은 듯 몽환의 운무가 발 밑을 오락가락 하는데 어디선가 휘몰아쳐 온 광품이
창졸 간에 맑은 하늘과 장엄한 조망을 열어 주었다.
한 대 얻어 맞아 정신이 번쩍 나는 것처럼 한숨과 탄성이 절로 나던 이 땅의 아름다운 풍경
무릉 입적
그 날 무릉객은 초췌한 몰골 속에서도 빛나는 눈빛과 낡은 얼굴을 한 선사의 모습으로 선계에 발을
들여 놓았던 것이다..
그 날은 삶에서 비에 젖는 두려움을 벗어 던진 날이었다.
그리고 무릉객은 깊어 졌다.
쏟아지는 장대비가 후련하고 궂은 날 빗 속에서도 낭만을 느낄 수 았다면 …
비에 축축히 젖어 가면서 비갠 후의 맑고 깨끗한 하늘을 떠올릴 수 있다면
인생은 게임 끝 아닌가?
하늘이 맑고 화창하면 마음이 들뜨고 가벼워서 좋고
흐린 하늘은 분위기 있는 까페의 우수에 찬 음악처럼 센티멘탈하고
비가 오면 가슴도 촉촉히 젖어 들어 낭만을 노래하니 좋다.
물든 낙엽이 바람에 날리면 아름다운 사람들과 즐거운 사람들이 떠올라서 좋고
폭풍우가 몰아치면 가슴이 후련해지고 눈이 오면 아해의 마음으로 돌아가 똥강아지처럼 길길이
날뛸 수 있어서 좋다.
어찌 살더라도 사는 게 다 신나고
어느 길을 걷더라도 걷는 게 참 좋으면 그게 도인이여 ?
신선이여?
그러면 도대체 살면서 안 좋은 날이 언제고
살아가는데 문제될 게 대체 무에야?
어둠과 빛의 경계가 어디이고 슬픔과 기쁨의 근원은 어디인가?
살면서 봄날에 황사 먼지처럼 귀찮게 따라 붙는 고민이 왜 없겠어?
가끔은 나의 작은 고민에 흔들리느라 다른 사람들도 커다란 고뇌조차 까맣게 잊을 때도 있지
내 발 밑의 아픈 가시 ?
그냥 빼버리거나 무시하거나….
금방 빠지지도 않고 시간이 지나야 낫는 건
그건 그냥 세상사는 통행세야.
우린 이 멋진 세상을 살아 가면서 그 정도 세금은 내면서 살아가야 하는 거야
잊혀지지 않는 추억 둘
마눌과 백대명산 길은 은티마을에서 성터를 통해 희양정상에 오르고 직벽을 통해 지름티재로 내려서서
구왕봉을 찍고 은티마을로 하산했다.
백두대간 때도 땡초들 때문에 오르지 못했던 그 악명 높은 희양의 수직 절벽을 마눌을 대동하고
비로소 활공한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마눌이 어떻게 그 절벽을 내려 올 수 있었는지 잘 상상이 가지 않는다.
아마 그 때는 나나 마눌이나 정신이 반쯤 나간 혼비백산 상태라 아무 생각이 없었을 듯 싶다.
마눌은 한 가닥 로프에 매달린 채 생명의 공포를 느끼고 나는 절벽 아래에서 무모한 도전에 대한
후회와 만일의 불상사에 대한 두려움에 휩싸인 채 불안과 초조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마눌이 지름티재 에 두 발을 착지한 그 순간 온갖 번뇌와 망상을 벗어 던지고 무한의 기쁨과 해탈의
궁극을 경험했다.
그날은 마눌과 내가 희양산에 인생의 멋진 이정표를 세운 날이다.
그 때 정상에는 지금의 거대한 정상석이 없었고 떠드는 산객들이 수행을 방해 한다고 한 켠의 작은
표석마저 중들이 뽑아 버린 상태였다.
신록이 흐드러진 그 길을 다시 걸으니 만감이 교차한다.
그래 우린 아무리 날고 기어도 대자연의 한 점
한갓 미미한 피조물일 뿐
노년의 평화는 어쩌면 자연으로 돌아가는 발길에 달려있을지도 모른다.
희양산 추억 셋
아들과 같아 풍설이 난무하는 희양산을 올랐을 때는 먹구름처럼 하늘 가득 밀려오던 두려움을 떨칠
수 없었다.
그날 갑작스런 악천우로 무두들 회군 했다.
하지만 우린 기어코 희양산 정상을 찍고 성터 계곡으로 하산 했는데 아들은 거의 탈진할 정도로
지쳐서 내려왔다.
대자연의 비장미
그리고 막다른 골목에서 가슴을 울리던 진군의 북소리
눈보라 치던 그 날의 처연한 아름다음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차갑게 얼어 붙는 그날 아들과 말없는 표석을 부여잡고 가슴에서 뜨겁게 치밀어 오르던 격정과
감동은 오랜 세월에도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산 행 일 : 2019년 5월 12일 부처님 오신 날
산 행 지 : 희양산 봉암사.
산행코스 : 은티마을 – 성터- 희양산 정상-계곡길 – 봉암사
날 씨 : 맑고 화창함
동 행 : 금강 산님들과 나 홀로
경유지별 시간
09:25 : 출발 (등산 안내도)
09:46 : 입구 (백두대간 안내 표석)
10:35 : 성터 능선 – 희양산 갈림길 (시루봉 2.2km , 희양산 1.0km)
11:03 : 희양산 정상
12:13 : 계곡 입구 지킴터
12:31 : 봉암사 일주문
12:47 : 마애보살 좌상
13;17 : 봉암사 (식사 후 도착)
희양산에 처음 오른 날 이후 17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세월은 내게 많은 말을 들려 주었다
그리고 난 아직 그날의 함성을 기억 하고 있다.
희양산을 넘어 봉암사 불국으로 가는 오늘은 평화와 기쁨이 펄펄 날린다.
혼자 온 늘씬한 아줌마 (아가씨 인지도 모른다.)
입구에서 인증샷 하나 찍어 달라더니 바람보다 빠르게 희양산을 치고 올라 갔다.
난 자율주행 모드
세월아 네월아~ 아름다운 추억을 더듬어 가면 혼자 호젓한 산행의 멋에 빠져드는데 모처럼 추억산행에
기분도 좋아져서 발걸음이 가볍기 짝이 없다.
중간에 가파른 계곡 길에서 대구에서 온 2개 산악회 사람들을 거의 따돌리고 성터 갈림길 능선에서는
앞에 간 일행들도 모두 추월했다.
여전사와 선두 몇 명을 빼고….
지름티재에서 연결되는 직벽로프를 타고 싶었지만 오늘 같은 날은 사람에 밀려서 심각한 정체가 빚어
진다는 말에 계곡을 따라 오르는 성터 우회 길을 택하기로 했다
능선까지 오름 길에는 무성해가는 초록의 신록 외에는 별로 볼 것이 없으니 빨리 오르는 게 상책이다.
오래 전 백두대간 때의 기억은 가물가물하고
재작년 폭설 때는 가득한 눈보라 속에 멋진 조망을 잃어버렸으니 온통 수림의 바다가 넘실거리는 오늘
이야 말로 희양의 진경을 오롯이 가슴에 담을 수 있는 최상의 날이다.
바람은 시원하고
엄룽과 수림은 조화로운데
신의 가경을 앞에 두고
내 마음 한가롭기 그지 없으니
오늘 무릉객이 어찌 희양의 신선이 아닐소냐?
그 날은 추억의 강으로 흘러 들고
희양은 이 봄에 더 아름다워 진 채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푸르게 물결치고 있다.
혼자 가는 게 이리 편한 걸
그래 부처님 오신 오늘 같은 날은 굳이 동행을 매달고 명상과 사색을 몰아 내고 스스로를 번잡함에
던져 버릴 일이 아니지
여기저기 조망처 바위란 바위는 모두 올라서 매의 눈으로 초록의 바다가 넘실대는 희안한 희양
세상을 바라 본다.
매의 눈으로 대자연의 황홀경을 표구하고 여전히 그 날의 벅찬 감동을 감동을 회상하면서 희양의
정상에 올랐다.
백두대간 종주 때 폭설 속에서 고압적이고 근엄한 표정으로 나와 아들을 바라보던 희양의 정상
표석은 반가운 얼굴로 날 맞아 주었다.
마치 “하이 무릉객 이번엔 빨리 왔네 그려!”라고 말하는 것처럼
기억하겠지
더 젊은 날 아들과 함께 흘린 땀과 우리가 밟고 지나간 삶의 의미와 살아가는 날의 기쁨들을….
바람처럼 올라 온 터라 아직 배가 출출하지 않아 봉암사에서 식사를 하기로 했다.
마침 식사를 막 끝낸 대구 산악회 선두그룹이 금지된 계곡으로 하산한다고 해서 함께 따라 붙었다.
마치 계곡 여기저기에 지뢰라도 매설되어 있다는 듯 희미한 등로 곳곳에는 살벌한 철조망과 출입금지
표지를 걸어 놓았다.
봉암사 까지 개방하는 마당에 설마 부처님 오신 오늘 까지 저 아래에서 지키고 있지는 않겠지…
모처럼의 속도 산행
중간에 내랴 가는 사람들을 모두 따돌리고 앞서 가는 선두 몇 명의 그룹에 붙었는데 그들의 발 재간이
장난이 아니다.
전성기 무릉객의 파워를 능가하는 빠른 속도의 하강이다.
그래도 혹시나 초행길에 홀로 고립되면 길을 잃고 헤멜 수도 있다.
앞 선 누군가를 시야에 두고 가면 금지구역에서 발생할 수 있는 만일의 사태에도 운신의 폭이 넓어지기에
선두를 일정 거리에 두고 따라가면서 모처럼 땀과 속도산행의 쾌감에 젖는다.
백두대간에서 벗어난 이 길은 처음 가보는 길이다.
중들의 등쌀 때문인지 계곡 등로의 흔적은 희미하기 짝이 없다.
계곡을 내려가면서 수량은 조금씩 불어 나고 나는 속도산행의 희열에 점점 빠져 들었다.
계곡 길은 상당히 길었다.
11시 5분에 정상을 출발하여 12시 11분쯤 계곡 입구 중들이 지키는 움막에 도착했고 이후 출입금지
테이프가 이곳 저곳에 얼기설기 엮인 길을 따라 12시 31분에 일주문 에 도착했다.
전력질주로 1시간 30분 가량 걸린 셈이나 하산거리가 5키로는 족히 넘어 보인다.
절 입구에도 스님들이 지키고 못 들어가게 한다.
헐~ 이게 또 무슨 일이래?
나오는 사람만 나오게 하고 들어가는 사람은 다리를 건너 절로 못 들어 가게 한다.
나중에 절 윗쪽에서 연결되기는 하는데 그 곳에 미륵암에 오르는 길이 분기되니 이왕 미륵암부터
돌아보는 게 낫겠다 싶은 생각이 먼저 들게 된다.
스님이 다리를 막아선 것도 그렇게 한쪽으로 몰리는 인파의 분산을 염두에 둔 것이었겠다.
사실 그 부분이 판단미스였다.
절로 가서 점심부터 먹고 찬천히 움직였어야 하는데 난 봉암사 절을 출입하는 무수한 인파를 보고 이
절에서는 점심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지레 결론을 내려 버렸다.
그래서 내친 김에 미륵암을 먼저 돌아 보고 식사를 한 다음 천천히 절의 풍경과 건축물을 감상해보자는
생각이었다.
미륵암의 규모도 크고 수량도 제법 풍부한 주변 계곡의 풍경도 볼 만 했다.
천천히 주변의 풍경을 둘러보고 절로 되돌아 내리는 길에 배가 많이 고파서 경개 좋은 물가에 나 홀로
식단을 펼쳤다.
늘 그렇듯이 진수성찬과 산해진미가 식욕을 자극하는 것이 아니다.
심신의 평화로움
그리고 거친 운동후의 시장함
굳이 한나 더 추가 하자면 좋은 벗 정도 되겠지만
세상의 어떤 맛 있는 음식도 이 두 가지를 빼고 맛을 논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 두 가지야 말로 소박한 식단의 비범한 맛과 황홀한 미각에 깊숙이 개입을 하는 것이다..
햇반 한 개에 볶은 김치
그리고 사과 한 개에, 빵 한 개, 호박즙 하나
부처님 오신 날 부처님 집 옆에서 절 밥 같은 단촐한 식사를 하면서 한 술 밥에도 행복할 수 있는
불국의 평화를 되새긴다.
근데 이 절 스님들은 절 안팎에 붉은 줄무늬 테이프를 여기 저기 둘러 놓았다.
여기도 통제구역!
조기도 통제구역
“관게자와 출입금지”
도대체 관게자는 몇 넘이나 되는겨?
.부처님을 안 그려셨을 것 같은데 도대체 먼 비밀이 그렇게 많고 무에 그렇게 값나가는 물건을 많이
쌓아둔 것이여?
미륵암에서도
법당에서도
대웅전에서도 부처님께 삼배를 드렸다.
(생각해보니 부처님한테 예부터 올리고 밥을 먹는 게 도리인데 이것도 잘 못 되었다.)
그냥 남은 인생 맘 편히 자유롭게 살게 해달라고….
가족들 모두 행복하게 해 달라고…
그려 이 만큼 잘 사는 것도 어머님 불공 덕이고 부처님 보살핌 덕이겟제….
일체유심조….
마음 하나에 온 세상이 다 들어 있으니
난 마음 하나만 맑고 고요하게 닦으면 되는 것이다..
오잉! 근데 그 많은 사람들한테 밥을 다 주네!
대웅전 아래로 내려가니 그늘막을 쳐 놓고 참배객 모두에게 점심을 준다.
때가 한 참 지났으니 줄은 많이 줄었는데 그 많은 사람들한테 비빔밥 한 그릇과 떡 하나씩을 모두
내어 주고 있다.
“희양산 전체가 다 자기 땅이라고 우기더니 이 절이 정말 부자 절인 모양이여…”
하여간 통 큰 절이다.
홀로 점심식사 하기 전에 한 그릇을 먹었으면 더 맛있게 먹었겠지만 그래도 내 배에는 아직 여지가
충분해서 바빔밥 한 그릇을 다 비우고 떡도 따끈한 맛에 반이나 떼어 먹었다.
희양산의 암봉들이 마치 열두판 꽃잎처럼
펼쳐져있으며,그 중심에 봉암사(鳳巖寺)가 있다.
봉암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의 말사이고,879년(헌강왕5년)지증대사가 창건
한 절로 구산선문의 하나에 속한다.
경내에는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과 부도 등 5점의 보물과 지방무형문화재가 있다
봉암사는 후삼국의 전란과 조선시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폐허가 되었고 여러차례 중수를 거쳐
현재의 전각들은 대부분 근래에 지어진것이다.
1982년 조계종 특별수도원으로 지정되면서 일반인의 접근을 엄격하 금하고 있다.
조계종 특별수도원
중들이 공부하는 고시원 같은 곳이다.
그러다 보니 희양산 정상에서 백두대간 객들이 떠드는 소리 때문에 수양 정진에 방해가 되어 그렇게
기를 쓰고 막았던 모양이다.
근데 다를 알다시피 이쪽 산들은 금지구역으로 설정이 되어 있어 백두대간 객들은 야심한 밤이나
새벽에 도둑산행을 나서는데 누가 대놓고 산 위에서 그리 떠들까?
그리고 요즘엔 산에서 “야호!” 하고 소리치는 것도 산행예절에 어긋나는 것임을 모르는 산객이
어디 있으랴?
게다가 대간꾼들이나 골수 산꾼이 아닌 다음에야 이런 험한 산에 잘 들지도 않고 그런 산사람들이
몰상식하게 고성방가로 불자들의 심기를 어지럽힐 것 같지는 않은데….
우야튼 층간 소음 문제는 답이 없고 잘 해결되지 않는 것이니 더 이상 왈가왈부 않는 것이 좋겠다.
스님들은 더욱 용맹정진하여 사바세상에서 나는 소리에 초연할 수 있도록 공력을 더 쌓고 백두대간
산객들은 후세 불교계를 짊어질 조계종의 인재를 양성하는 도량임을 감안하여 조용조용 경건하게
다니시라
하여간 나훈아의 신비주의 콘서트의 폭발적인 인기처럼 신도증 할애비를 갖고 있어도 평상시에는
출입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절이다 보니 부처님 오신 날은 해마다 구름 같이 참배객이 늘어 난다.
원래 평상시 못 가게 하믄 더 가고 싶어 지는게 인지 상정이고 산속에서 출입금지 표지는 ”비경
지역”의 다른 말 이잖여.
어쨋든 봉암사는 제대로 먹혀들고 또 성공한 마케팅이다.…
스님들의 수행 도량인 이 곳은 돈 몇 푼 벌자는 그런 불순한 의도는 갖고 있지 않겠지만…
돈 잘버는 직지사의 말사인데다 대한민국 엄청난 재벌인 조계종이 뒤에 떡 버티고 있으니 돈 걱정
따위를 할 걱정이 있겠는가?
승려사관학교
권모술수와 비방이 난무하고 이단옆차기에 돌려차기까지 가세한 화려한 계파 분쟁이 치열한 곳이지만
권력의 차기와 차차기를 위해서라도 누군들 종단을 이끌어갈 후세의 지도자들을 소홀히 대할 수 있겠는가?
젊은 스님들이여 세속의 혼탁함에 물들지 말고 더욱 깊게 수행하시라.
이왕 세속의 욕심과 번뇌를 떨쳤으니 불심의 평화를 누리고 깨달음의 궁극에 다가가 자신만의 도를
완성하시라..
도가 어디 멀리 있으랴?
앉아서 수행하는 것만이 도에 가까이 가는 유일한 길이랴?
순리대로 살면서 세월을 보내고
대 자연 속으로 난 무수한 길을 걸어가는 것 만으로도 조금씩 넓어지고 깊어지면서 도에 가까이
다가 갈 수 있다..
부처님 오신 날의 산중소요와 산사 순례는 만물이 소생하는 봄의 기운과 도처에 흩날리는 부처님의
자비가 가슴으로 들어오게 해 주었다.
마음이 고요해지고 즐거워지는 참으로 즐겁고 행복한 여행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