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길 위에서 우린 무얼 만나는가?
스스로 벼랑 앞에 서는 자신을 만난다.
가득한 스릴과 서스펜스
그리고 그 벼랑 앞에서 적나라한 자신의 민낯을 본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삶을 즐기는 사람들을 만난다.
같은 버스를 타고 어둠의 터널을 가로질러 왔지만
다 같이 산을 사랑하고 아름다운 자연에 경배하지만
거친 자연을 누리는 방식은 천차만별이다.
누군가는 다른 사람을 위해 로프를 걸고 또 동행을 불러 세워 사진을 찍어 주고
누군가는 거친 그 길도 모자라 지능선 아래 바위까지 올랐다가 되돌아 온다.
누군가는 웃으며 그 길을 걷고 누군가는 비경을 압도하는 거친 절벽의 카리스마에 혼비백산하여
그 아름다움 보다 더 깊은 두려움을 맛 본다
그리고 절경을 바라보던 탄성은 자신의 한계를 절감한 탄식으로 바뀌고 거친 순례의 타당성을 고뇌
하기에 이른다.
나의 삶에서 좀처럼 드러나지 않았던 무수한 비경을 만난다.
사람들은 비경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고 탄성을 올린다.
그건 아침햇살과 능선의 바람에 서둘러 사라져갈 이슬들이 불멸의 자연에 게 보이는 경의와 찬사
하지만 그 아름다움을 만나기 위해서 사람들은 흔들리는 차 안에서 잠을 설치고, 거미처럼 네발로 가파른
절벽을 기어오르고, 긴장과 두려움 그리고 거친 숨과 땀의 혹독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세상의 수 많은 길을 걸었지만 우리가 걸음으로서 길이 되는 그런 길도 있다.
거기 그렇게 거칠고 위험하고 아름다운 세상이 있다.
간이 벌렁벌렁하다가 급기야 부어 버려야 비로소 내려갈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고
몇 군데는 찔리고 찢어져야 만날 수 있는 그런 풍경들…
그리고 많은 생각들을 만난다.
설악의 가슴은 우리 생각보다 더 넓고
그 가슴에 품은 생각은 더 깊다,
설악의 깊은 곳에서 인간은 웅혼한 대자연의 잔등을 타고 기어가는 한 마리 벌레
태고의 장엄함 속을 잠시 스쳐 지나다 찬바람과 함께 사라져 갈 한 마리 나비 일 뿐
하지만 그 심대한 세상의 고요와 침묵이 깊기에 그 작은 발걸음의 의미와 울림도 깊다.
눈부신 세상을 누리는 짧은 날개짓이기에 그 노래는 아프고도 아름답다.
그리고 거기 그 자리에서 가부좌한 채 오랜 세월 침식과 풍화를 묵묵히 견딘 영겁의 깨우침 !
침묵으로 설파하는 대자연의 교훈과 삶의 진리는 세사의 시름과 욕심을 비워 낸 빈가슴에 공명한다.
나는 젊은 날에 이런 풍경을 남겨두고 어느 구석을 떠돌다가 삐걱거리는 노구를 이끌고 여기에 왔는가?
형제봉 가는 길
어둠 속에서 잠시 기다리며 휴식을 취하다가 좌측의 절벽을 타기 시작했다.
헐~
이거 사람들이 올라가는 길 맞어?
길의 평균 기울기는 80도가 넘는다.
절벽 아래서 누가 소리쳤다.
“비가 온다.”
아 이젠 정말 설악에서 득도하고 해탈까지 해야 할 모양이다.
고난의 순례 길에서 비까지 맞아야 한다면….
물을 꺼낼 여유가 없어 절벽에서 떨어지는 물을 받아 먹고
돌을 굴릴세라, 뒤로 홀랑 뒤집어 질세라 노심초사 하면서 앞사람 엉덩이만 보고 올라 가는 길...
다행히 신들이 땅을 배회하는 동안 비도 벼락도 내리지 않고 흐린 날에 시원한 바람만 불어 주었다.
그래도 초반에 나름 발은 가벼웠고 어제 비 온 후의 차가운 새벽 공기가 열어주는 설악의 아침은
청명하고 상쾌했다.
고사목 나무를 잡고 바위에 오르다 나무가 뿌러지는 바람에 잘벽으로 떨어질 뻔 하다가 간신히
맞은 편 나무를 잡고 중심을 잡았다.
“무릉객 운동신경 아즉 쌀아 있네.”
다시 잡은 고사목 가지에 걸려 옆구리에 상처가 났는데 그냥 보지 않고 덮어 두었다..
내가 먼저 쫄아버릴 까봐….
심산의 가슴으로 가는 길은 그렇게 거칠고 험난했다.
별유천지 비인간
어렵게 오른 봉우리마다 그 아래로 펼쳐지는 낯선 설악세상은 광활하고 또 신비로웠다.
“이런 곳이 있었어!”
장대한 대자연의 파노라마
기암과 암봉들의 거친 비장비가 흐르는 설악의 풍경들
기대와 긴장을 늦출 수 없는 그 길을 걸으며 가슴이 한껏 부풀어 올랐다.
일촉측발의 위기상황도 있었다.
우측절벽으로는 밧줄을 걸어 주는데 좌측 길로 올라 가다가 앞 사람에게 막혔다.
앞에 분이 건너가지 못하고 밧줄을 건네 받는 동안 그 바로 뒤에서 갑작스런 공포가 밀려 왔다.
내가 발을 딪고 있는 절벽난간이 너무도 불안정하고 내려다 본 절벽이 까마득하단 걸 의식하고
나서…....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에서 다리까지 왜 후들거리는 거여?”
공포는 자가증식을 한다.
한 번 기가 꺾이면 의지와 상관없이 그냥 꽁지가 내려가는 거다.
뒤이어 로프를 건네 받고 넘어가긴 했지만 갑작스럽게 엄습한 공포가 당혹스럽고 혼란스러운 순간
이었다.
큰 형제봉
천혜의 전망대
형제봉에서는 설악세상의 웅장한 파노라마에 한껏 들뜨고 고무되어 함께 온 사게절님과 큰 놈에게
큰소리를 뻥뻥 쳐댔다.
“난 앞으로 설악은 비등만 탈껴…”
그리고 깨깽 깨갱
큰형제봉을 내려가고 또 작은 형제봉에 올랐다가 내려가면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유구무언이다.
가슴 시린 풍경에도 ! 어안이 벙벙한 길의 모습에도.... 참을 수 없는 내 존재의 가벼움에도....
갑자기 어느 성현의 말씀이 생각났다.
말은 함부로 내 뱉는 것이 아니고 경거망동은 체신을 깎는다.
큰 형제봉 까지가 봄날 이었어
설악의 시원한 바람을 목에 걸고 고원의 아름다운 전원 레스또랑에서 투명창으로 그림 같은 풍경
을 바라보며 아침을 먹던 그 때
술도 한 잔 받아 마시고
떡두 먹구 김밥도 먹구 닭다리도 뜯고…
난 그렇게 한 잔 술에 , 한숨이 절로나는 풍경에 취했던 거지
그리고 봄날은 그렇게 짧게 지나 갔다..
하산 길…
이게 멧돼지 길이여 승냥이 길이여 …
큰 형제봉 하산 길
설악 비등로 !
거의 직벽에 가까운 암벽과 하산 길의 난이도는 큰 형제봉을 넘어서면서부터 나의 예상을 그렇게
훌쩍 뛰어 넘고 있었다.
길은 미끄럽고
지난밤, 비에 들떠 있는 돌과 토사는 누군가 건드려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위에서 누군가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줄지어 가파르게 하강하는 설악의 불청객들은 계곡 아래로
도미노처럼 연쇄 추락할 것이다.
제법 두꺼운 나무 뿌리를 잡았는데 그게 썪은 뿌리라 벌러덩 넘어져 엉덩이로 추락했다.
그래도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곧 다른 뿌리를 잡았고 또 내 엉덩이 쿠션과 탄력이 좋았기 망정이지
잘못하면 심각한 찰과상과 대퇴부 골절상을 입을 뻔 했다.
덕유산 1박 종주를 하면서 무거운 취사도구 때문에 내 무릎에 너무 무리를 가한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완전히 무자비한 테러였다.
그랴도 아직 싱싱한 내 도가니가 오늘 설악산에서 완죤 절딴 나는 거 아녀?
이제 산은 굵고 짧게 누려야 할 삶의 액스터시가 아니라 가늘고 길게라도 오래 누려야 할 인생의
소확행이 되어야 하는 마당에..
이러 저런 우여곡절 끝에 바닥까지 내려와서 계곡을 만났다.
처음으로 겪어보는 혹독한 길이었다...
아니 길이 아니라 그냥 비탈의 좀 더 나은 쪽을 따라 내려왔을 뿐이었다.
몰골이 말이 아니다.
바짓단에는 흙이 잔뜩 묻어 있고, 혁띠는 반쯤 돌아가고 , 등산화 끈은 너덜거린다.
1리터 물통도 어둠에 잃어버려 작은 생수 하나로 버텨야 하기에 그냥 계곡수를 손으로 받아 목을 축인다.
완죤 일일 빨지산 체험….
잠시 숨을 돌리고 흐르는 계곡수에 세수를 하고 나니 그래도 원기가 살아 나는데…
사계절님과, 공달, 그리고 큰놈이 게곡을 따라 하산 한덴다.
짱짱한 건각들이 중도하차 한다는데 ‘그럼 난 워쩌?”
잠시 망설였지만 결론은 역시 “못먹어도 고!”
작은 형제봉에 오르지 않고 돌아가면 분명 후회할 것이다.
내 생에 다시 못 오를 봉우리와 가슴을 흔들 풍경이 거기 있는데…..
그리고 드는 또 한가지 생각! 설마 이런 깡패 같은 길이 또 있것어?
작은 형제봉
오르는 길이 길이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다.
사위가 막힘 없는 후련한 조망이 압권이다.
공룡능선이 한 눈에 올려다 보이고 깊은 계곡과 웅장한 설악이 용트림 한다.
“그래 오길 잘했어.”
지금 까지 만나지 못했던 풍경…
내 남은 인생 길에서 다시 돌아보지 못할 풍경
작은 형제봉 하산 길
들뜨고 즐거웠던 시간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고
설마는 보기 좋게 빗나갔다.
지금 까지의 길은 이빨도 나지 않았다.
작은 형제봉 하산 길은 아얘 날강도 같은 길이었다.
설악아 너는 왜 나만 가지고 그래?
알렉산더 포프가 그랬지
“알프스를 넘어 다시 알프스가 솟아 오른다.”
깎아지른 직벽을 내려서고 나면 이젠 괜찮은 길이 나오겠지 한 곳에서 여지없이 기대는 허물어
지고 번번히 더 고차원의 절벽 길이 막아섰다.
나는 조금씩 지쳐갔고 내 몸의 상처 보다 자존심에 더 심대한 상처를 입었다.
무릉객의 굴욕과 수모…
아득한 절벽 위에서 허리에 로프를 자진해서 감아달라고 하고 절벽 중간을 내려 서면서 발디딜
곳을 못 찾아 버둥거렸다.
잔뜩 긴장하다 보니 온 팔과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몸이 뻣뻣해진 탓이다.
나가 그랴도 이기자 부대 출신에 백두대간도 두 번 이나 종주 했는데….
계속되는 수직상승과 수직강하로 나의 발은 새로 산 등산화 안에서 가혹한 이지메를 당하고
하룻만에 나처럼 바짝 늙어 헌신짝이 되어 버렸다.
사실 설악의 거친 날등을 내려가면서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걸 많이 느꼈다.
여기저기 많이 부닺히고, 미끄러지고 접질리고 ....
이렇게 거친 길의 경험도 별로 없긴 하지만 위험한 상황에 대한 순발력과 판단력도 많이 떨어지고
특히 몸의 유연성이 눈에 뛰게 감퇴되어 생각을 따라잡지 못한다.
생각 따로 몸 따로...
“나이 탓일까? 아니면 이 길이 원래 그렇게 힘든 길인가?”
하지만 둘러 보아도 다 위대한 인간들이다.…
멧돼지도 다니지 못하는 길에서 그들은 사진을 찍으며 희희낙락하고 있다.
짐승의 자취는 어디에도 없고 바라다 보이는 능선 마다에서 꼼지락거리는 건 송충이가 아니라
죄 인간들이다.
"흐미 ! 국공들은 다 워디서 뭐한다냐?"
나도 왕년에 설악 비등을 좀 탔었는데
용아장성, 한계산성, 토왕성폭포-화채능선, 만경대 별길 등등…
지금은 이런 설악 길을 걸어도 힘에 부칠까?
세월이 많이 흘러 힘들었던 나의 기억이 훨훨 날아 간 것인가?
아님 나만 세월의 비바람에 광속으로 마모되고 부식되었는가?
그랴도 그 때는 콧노래를 부르며 그 길을 걸었는데...
같은 비등이지만 이 길은 아무래도 차원이 좀 다른 것 가터….
그 옛날 형미누나가 그랬어!
“자신을 벼랑 끝에 세워라! “
벼랑 끝에 선 자신을 만나고 싶은 사람은 조용히 설악으로 가라!
삶이 무료하거나 사는 게 시들해 질 때
단조로운 일상에 흐느적거리는 스스로에게 날선 경고와 밧떼루를 주고 싶을 때
그 때는 설악 깊을 곳으로 떠나라.
거기 정신이 번쩍 날 스릴과 서스펜스 그리고 모험 가득한 여정이 기다리고 그 어딘가에서
입술에 맹독을 바른 채 조용히 미소짓는 치명적인 팜프파탈의 여인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아름답지만 거칠고 위험한 여인 …….
하지만 노약자는 절대 따라 가지 마라!
그 한 번 의 뜨거움으로 삶이 고통스러워 질 수도 있으니…
설령 살아돌아 온다 하더라도 그 트라우마와 스스로 측정한 한계로 인해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아름다운 여인조차 두려워 할 수 있으니…..
평평한 땅이 그렇게 고맙고 반가운 것인지 에전엔 미처 몰랐다.
천신만고 끝에 천불동 계곡 아래 데크로 다시 내려섰다.
우리는 되찾은 균형감과 안정감으로 바람 같이 밝은 그 길을 걸어 어둠에 두고 갔던 천불동 계곡
과 물소리 장대했던 비선대 계곡을 되짚어 설악동으로 돌아왔다. .
12시간의 긴박하고도 다이나믹 했던 여행은 그렇게 끝이 났다.
험난한 인고의 여정 끝에서 산우들과 함께 나누는 동해의 펄펄 뒤는 회와 한잔의 술은 입에 쩍쩍
달라 붙었다.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것이다.
멍들고 깨어 졌지만 살아 돌아와서 그렇게 더 애틋한 미각의 즐거움 까지 누렸으니 오늘 하루도
뿌듯하고 행복한 날이 아닌가?
에필로그
휴유증은 꽤나 거세게 휘몰아쳤다.
3일 동안 온몸의 쓰지 않았던 근육들이 쿡쿡 쑤셔 댔고 이틀째 까지 일어나면서 “아구구구” 소리
를 연발했다.
난 얼마간 설악의 기억을 떠올리지 않았다.
그리고 아마 당분간 설악 비등 소리를 들으면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것이다.
몇 일이 지나 비로소 안정을 되찾고 찍었던 사진을 찬찬히 되돌아 보니 내가 신선의 땅을 걸었음이
분명했다..
정말 힘들었고 꽤 많은 시간 그 기억이 남아 있겠지만
설악은 지독한 중독이라 그 고통은 가을 바람에 머리를 풀고 훨훨 날아가고 그 감동과 기쁨의 앙금
만이 가슴 한구석에 대견하고도 멋진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머지 않은 날 또다시 흔들리는 버스의 진동을 자장가 삼아 비몽사몽을 헤메며 설악으로 떠날 것이다...
작은 형제봉 하산길에서 카메라가 고장이 나고 또 가파른 절벽 길에서 사진을 꺼내 들 엄두가
나지 않아 절경의 잔상을 간직하지 못해 아쉬움이 남긴 하지만 함께한 산우들의 더 멋진 사진으로
그 추억을 더듬을 수 있으니 그리 애석할 것도 없다.
내가 오르 내린 곳이 신선봉이고 신선골이었다.
무릉객 그래도 멋진 눈호강과 더불어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그 길을 허락하신 설악 산신령님.
비록 기스는 좀 났지만 원품을 훼손하지 않고 돌려 보내주셔서 감사드린다.
내년에도 잊지 않고 시산제에는 꼭 참석 할 것이다.
그 멋진 곳을 안내하고 로프를 걸어준 산친구들 그리고 음식을 나누고 사진을 찍어준 따뜻한 산우들과
함께한 동행들에게 고맙다는 말 전한다.
설악은 과연 설악이고
힘들었지만 앞으로는 다시 누리지 못할 값진 경험이었다.
동행 사진 첩.
와일드로버님, 백두님,불로초님,은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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