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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내그림

 

 

 

 

오랜 옛날 신이 한 장의 도화지를 주셨지.

난 열심히 그림을 그렸어.

이것도 그려 넣고 저것도 그려 넣고

빈 여백이 아까워서 자꾸 더 많은 것을 그려 넣었지.

 

무엇을 그리고 싶은 지도 모른 채

내가 그려가는 그림의 의미조차 잘 모른 채

생각나는 대로 먼저 그려 대다가 모양을 바꾸기도 하고

마음에 안 들어 뜯어 고치고 자꾸 개칠을 하고

잘 그리려 애는 썼지만 잘 그려지지 않았어.

 

어느 날은 남들이 그린 그림을 보구 괜히 속상해지고

또 어 떤 날은 남의 말을 듣고 색깔을 바꾸기도 했지  

그리다 물감이 엎지러 지기도 하고 .

바람에 캔버스가 날라 가기도 하고….

 

오호라

사슴을 그린다는 풍신이 승냥이를 그려 놓고

나는 호랑이를 그렸는데 아뿔싸 그건 고양이 얼굴 이었어.

 

땡땡땡 !  시간은 왜 그리 빨리 흘러 버린 거야

아직 그림을 다 그리지 못했는데…..

근데 이게 풍경화여 추상화여?

내가 그린 그림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해거름에 주섬주섬 그림도구를 챙겨 돌아서는 데

바람길 모퉁이 돌아가며 왜 자꾸 울컥 울컥 목이 메이는지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렸어야 하는데

다른 사람을 의식한 그림만 그리고 있었던 거야

이젠 진짜 내가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려는데

시간이 다 되었으니 이제 그만 붓을 내리라 하네

 

 

또 한 장의 도화지를 받았네

그 동안 내 그림에는 내가 없었지

이젠 정말 멋진 그림을 그려야지

붓을 들었어

근데 이젠 손이 떨리네

이젠 메마른 가슴이 울지 않네….

 

난 알았네

내가 이미 그린 한 장의 도화지에 나를 더 많이 그렸어야 한다는 걸

내가 좋아하는 그림을 그려 넣고 내가 좋아하는 색깔을 칠 했어야 한다는 걸

 

또 알았네

시간은 너무 빠르고 세상의 풍경은 너무도 변화무쌍해서 무시로 바뀌고

세상을 그리는 그림은 마음먹은 대로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는 걸

내 그림에 대한 사랑보다 그리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더 컸던 거란 걸

설령 더 마음에 드는 또 다른 그림을 그렸어도

세상의 바람은 계속 내 마음을 흔들었을 거란 걸

 

도화지는 생각보다 넓은데 생각이 너무 작았던 거야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시간은 우리 생각보다 더 짧았고….

 

많은 시간이 흘러 갔어

붉은 황혼을 바라보며 다시 멋진 일출을 그릴 수는 없겠지

세월이 말했어

이젠 다시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그림에 대한 생각을 바꾸는 것이 더 현명하다고

어떤 그림을 그리던 그것은 내 그림이고

내 그림은 그 어떤 그림보다 내게 소중한 것이라고….

무엇을 그리던 도화지에 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있으면 그게 행복이라고

 

비록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이 아니었더라도

내가 선택하고 사랑한 세상에 대한 그림이었고 내가 채색한 나의 세상 이었어

그래도 내가 그린 풍경은 세상의 많은 풍경보다 더 따뜻하고

인간적이기도 하다는 걸

나를 먼저 그리지 않은 내 그림으로 행복한 사람도 많았다는 걸

 

벌써 빛이 바래 가는 또 다른 한 장의 도화지를 앞에 놓고

다시 붓을 들었어.

손이 떨리고 마음이 먼저 울지 않아도 이젠 정말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려 야지

내가 많이 들어간 그림

또 그림이 달라질지 모르지만 이젠 내가 좋아하는 색으로 색칠을 해야지

너무 많은 것들을 그리려 하지 않고

빈 여백을 많이 남겨 두겠어

때론 도화지에 구체화된 아름다운 그림보다 머릿속에서 그리려는 생각들이

더 아름다울 수 있는 법이니까

어느 날 잠결에 다다를 수 없는 별의 꿈을 만나는 날

내 가슴이 다시 울리고 난 비로소 그 여백을 채울 수 있을지 아직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