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을 강요하는 사회
나이가 좀 들으니 만나는 사람들이 두 부류로 나뉘어 진다.
거긴 서로에게 전혀 새로운 세상들이다.
같은 퇴직한 친구들이라도 산친구들은 관심과 화제는 단연 산행과 여행이다.
“이 번엔 어느 나라로 갈까?”
“비박지는 어디가 좋은가?”
“자전거로 4대강 종주 할 사람은 없는가?”
그들은 대체로 건강이 좋고 술도 많이 마신다.
고기도 먹어 본 넘이 먹는다고
노는 게 몸에 배다 보니 틈만 있으면 놀 궁리만 하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 한다.
다른 모임들의 화제는 주로 돈 얘기와 건강 얘기다.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둥 어떤 음식이 건강에 좋다는 둥, 아무개가 암에 걸리고 어떤 선배가
세상을 떠났다는 둥
그리고 끊임 없이 일에 관하여 얘기하고 돈에 관하여 얘기한다.
일을 안 하는 내게 또 새로운 일을 시작한 친구는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
“넌 뭐 먹고 사니 ?”
인생2막 일자리도 때려 치고 연금도 나오려면 몇 년 더 남았는데 몽블랑이다 안나푸르나다
밖으로 싸돌아 다니는 나를 두고 하는 말이다.
당근 나도 밥도 먹고 고기도 먹으면서 산다.
단 술은 공술 일 때나 많이 먹고 내가 살 때는 싼 술을 산다.
우리 사회는 끊임없이 두려움을 조장하는 사회다.
매스컴도 왜곡된 가치와 사상의 전파에 앞장서고 동화되고 세뇌된 사람들은 목소리
드높여 외친다.
평균수명이 늘어나 살아가야 할 날이 많아지니 행복한 노후를 위해 더 많은 돈을 모아야
하고 벌 수 있을 때 돈을 열심히 벌어야 한다고…
.
맞는 말이고 다 좋은 야그다.
그런데 그 행복한 노후는 도대체 언제인가?
행복을 미루는데 익숙한 우리는 언제까지 그 행복을 미루어야 하는가?
세상이 정한 유효기간이 이미 지난 노구(?)로 값싼 노동의 대가에 만족하며 현재의 행복을
저당 잡히면 나의 미래는 밝아지고 더 큰 행복으로 보상해 줄 수 있을까?
.
더 현실적인 문제는 앞으로 얼마나 많은 돈을 더 벌 수 있느냐는 거.
스스로는 은퇴 전과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고 여전히 건강하고 짱짱하다고 얘기하지만
사람들이 그렇게 믿어줄까?
세상에는 널린 수 많은 늙은이들이 다 그런 말을 하고 댕긴다.
내용연수가 지난 기계의 가동율과 생산성은 떨어지는 법이다..
아니 떨어지지 않아도 세상은 떨어진다고 우기고 거기에 맞는 값만 쳐주는 것이다.
이마에는 오래 전에 유효기간 경과 딱지가 붙었고 세상에는 유효기간이 아직 경과하지 않은
많은 기계들도 핑핑 놀고 있다.
국가에서 60세로 정년을 연장해 주기 전 56세의 젊은 나이에 정년퇴직이란 걸 하고 막상
인생 2막을 일로 다시 열려 하니 그 짧은 기간의 나의 감가상각은 엄청났다.
일은 더 힘들어 지고 일하는 시간은 더 늘어나고 근로의 대가는 너무 쌌다.
시간이 흐르면서 당연한 고민이 따라 붙었다. .
그 돈은 아직 푸루댕댕한 내 젊은날 몽블랑과 안나푸르나를 계속 뒤로 미루어야 할 만큼
가치 있는 돈인가?
나는 일하면서 더 행복한 것인가>
어짜피 그런 정도 일자리라면 가고 싶은 곳의 여행이 끝나거나 내 마음에서 떠나고 싶은
열망이 사라지는 날 다시 구하면 되지 않을까?
그 땐 그런 일자리를 찾을 수 없다고?
“헐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내 인생의 남은 기간 언제까지 그런 일을 하면서 살 수 있을까?
우리에게 은퇴 후의 일이란 먹고 사는 문제보다도 내가 아직 이 세상에서 필요한 사람임을
확인하면서 활기차게 삶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그 무엇 이어야 하지 아닐까?
그 시간과 돈의 함수를 푸는 방법은 제각각 이다.
점점 줄어드는 젊은 날의 시간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하는 지…
기댈 대라고는 돈 밖에 없는 늙은 날에 더 가치를 부여할 것인지?
늙은 날에도 많은 돈을 벌면서 또 많은 자유를 누리면 좀 좋으랴.
하지만 물 좋고 정자 좋은 경치는 그리 흔한가?.
선택은 자기 몫이다.
하지만 어떤 선택이든 기준은 자신의 행복이어야 한다.
거기엔 자신에 대한 믿음과 용기가 필요하다.
요즘 세상에 굶어 죽는 사람 거의 없다.
그냥 세상이 늙으면 다 굶어 죽을 것 같이 떠들고, 가만히 있으면 자신이 굶어 죽을 것
같다고 생각할 뿐이다.
세상에는 젊음이 떠나고 나면 나중에 돈이 많아져도 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돈을 많이 벌어서 막상 하고 싶은 걸 하려고 하면 몸이 따라 주지 않고 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질 수도 있다.
젊을 때 미루어 둔 일이 무엇이 있는가?
늘 가슴을 흔드는 무엇이 아직 있다면 이젠 더 늦기 전에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난 충분히 잘 살고 있어! 걱정 하지마!.”
“난 오래 전부터 여기 오는 꿈을 꾸었어.”
오랫동안 기다려온 나의 영혼은 이제 이런 이야기를 듣고 싶은지 모른다.
위의 글은 퇴직을 하고 3년 후에 쓴 글이다 .
어렵게 얻은 직장을 과감하게 그만두고 몽블랑과 안나푸르나에 다녀와서 다시
백선으로 돌아간 상태에서 쓴 글이었다.
그로부터 어어 하다 보니 또 3년의 세월이 흘러 갔다.
흐미~~~
다시 돌아 보니 그 때 다 때려 치고 세상 구경 하고 돌아 온 게 얼마나 잘한 것인지...
그랴서 그 글에 내 댓글을 또 갖다 붙이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몽블랑을 주유했고 친구들과 의기투합하여 안나푸르나를 여행했다.
허여사의 도움으로 말도 안되는 저렴한 비용으로 한 달을 체류하며 한번의 네팔여행으로
라운딩과 베이스캠프 등정의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두번의 백두대간 종주에 비견할 만한 또 하나의 멋진 여행 이었다.
내 인생에서 또 하나의 과감한 베팅이었고 그 여행은 내 삶에 또다른 의미와 자신감을
불어 넣어 주었다.
지나고 나니 참으로 잘한 결정 이었다.
나는 인생 여행을 했다.
여행을 하면서 내내 마음이 편안했고 기쁨이 충만했다.
그리고 나는 일하는 것 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고 나와 나의 삶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조금씩 혼란과 혼돈에서 벗어나 마음의 평화를 되찾았다.
안나푸르나에서 돌아와 난 2개의 자격증을 취득했고 다시 일자리를 구해서 일을 하다가
지금은 옛 직장에 다시 출근하고 있다.
삶에 정답이 없다는 건 맞는 말이다.
하지만 오랜 세월을 보내고 나면 삶의 모든 해답은 내가 가지고 있다는 걸 비로소
깨닫게 된다.
나는 신뢰할 수 있고 내가 후회하지 않는 한 나의 판단은 모두가 옳은 것이었다..
그냥 마음이 동하는 대로 살아가서 잘 못된 것은 아무 것도 없었고 모든 건 귀결대로
흘러갔다.
내친 김에 해대는 지난 이야기
난 56세에 정년 퇴직했다.
많은 후배들의 축하를 받으면서..…
지금으로 따지면 4년을 앞당겨 명예퇴직을 한 것과 다름이 없다..
갑작스럽게 안부 인사가 넘쳐나고 술자리가 밀려 드는 시간이 지나고 나자 세상은 아주
고요해졌다.
목가적일거란 은퇴 후의 삶은 생각과는 많이 달랐다..
그 때까지의 세상과는 전혀 다른 생소하고도 낯선 세상이었다.
우리가 살아온 삶의 방식과 관성으로 인해 살아 갈 세상은 쉽게 조화될 수 없는 세상이었고
적막과 혼돈의 세상이었다.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모든 게 예상을 뛰어 넘었다.
세상은 어느 날 갑자기 날 본 척도 하지 않았다.
세상에서 나의 은퇴란 깊어가는 가을날 참나무에서 도토리 한 알 떨어지는 자연스런 현상일
뿐이었다.
세상은 나를 빼고도 아주 잘 돌아 가고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하나씩 나의 존재를
잊어 갔다.
새로운 인생의 바다에서 나는 이방인이고 투명인간이었다.
내가 펄떡거리거나, 허우적 거리거나 사람들은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
고립은 현실적이고 구체적이었다.
갑자기 갈 데가 사라지고 그래도 살기에 충분했던 수입은 하루아침에 끊어 졌다.
조금 더 멀리 있을 것으로 예상했던 소득 절벽을 코앞에 마주하고 나니 정신이 멍해지고
살아야 할 세월은 너무 아득했다.
하지만 완전히 낯선 세상에서 스스로 위축되고 주눅이 들어버린 나의 불쌍한 영혼을 위해
나는 그 어느 것도 할 수가 없었다.
막판에 무산된 촉탁근무 영향이 컸다.
근무를 더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로 인해 모든 구체적인 준비가 미흡했다.
일하는 것도, 노는 것도….
은퇴후의 내 궁극의 목표가 세계일주였지만 생활비도 한 푼 못 갖다 주면서 드넓은 세상을
철환하며 나 홀로 삶의 기쁨을 노래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 재주와 여유가 있다면 절벽 앞에서 좌절할 이유도 따로 도를 깨우칠 필요도 없을
것이었다. .
긴축한다고 해도 아무런 벌이 없이 벌어 놓은 것을 조금씩 써야하는 현실에 대한 심리적인
충격은 생각보다 컸다.
단지 마음의 평화를 찾고 보자는 생각에서 다시 직장을 갖기로 했다.
적어도 생활비는 벌어다 주지 못해도 내 지출비용이나, 내 영혼의 유흥비정도는 내가 벌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모든 게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나의 오랜 직장 경력과 낡은 연식은 전혀 쓸모가 없었다
웬만한 회사들은 나와 같은 사람들을 덜어내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고 나처럼 펜대만 굴리던
어정쩡한 구직자들은 세상에 넘쳐났다.
구청에서 시니어 취업박람회라는 걸 연다고 해서 나가보니 정말 쓴 웃음이 났다.
어떻게 된 게 죄 청소직과 경비직 밖에 없었다.
전시 행정으로 추진되는 다분히 보여 주기식 행사였다.
보좌관의 요청으로 마침 TV 기자들에 둘러 싸여 프랫쉬 세례를 받고 있는 시장과 인터뷰를
했다.
완곡한 표현이었지만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추임새가 아니어서 모두들 내심 당황한 듯 했고
분위기 파악 못한 나도 좀 뻘쭘 했다. (미리 야그 좀 하시지)
취업상담관과 상담을 했다.
보통의 젊은 노인들의 구직활동과 가용한 업무 영역에 관해 상담했고 요즘 은퇴자들의
고용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어떻게 구청에서 주관하는 일자리 행사가 청소,이사 경비직 같은 용역업체 일자리 밖에
없고 그런 곳에 취업박람회라는 간판을 내걸 수 있느냐고 물었다.
담당관은 중소 기업에 많은 홍보를 하고 참여 독려를 하고 있지만 본래 취지대로 진행하는
데는 어려움이 많음을 토로 했다.
그리고 그게 현실이라고 그랬다.
웬만한 중소기업들은 인원을 많이 채용하지 않고 나이든 사람을 원치 않아서 이런 박람회에
참여를 하지 않는다고 .…
중소업체나 자영업체 사장들이 나이든 사람을 꺼리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생산성이 떨어지고
순발력이 떨어져 안전사고 위험이 높다는 것이다.
게다가 젊은 직원들이 싫어 한단다.
가장 말단인데 이것저것 허드렛일을 시키기도 어렵고 나이든 사람들과 같이 근무하는 것 자체에
대해 부담을 느낀다는 거다.
자격증에 대해 상담을 했다.
선배들의 한결 같은 이야기와 똑 같았다.
사회복지 계통의 자격증이 유망하다지만 따기도 힘들고 상대적인 젊은 사람들도 많이
가지고 있어서 딴다고 취업이 보장되지 않는다고 ….
기술관련 자격증은 자격증 없이도 실무경험이 상당한 사람들이 꽤 많고 자격증이 있다 해도
경험이 없는 나이 많은 초보들은 채용을 잘 안 한다고 했다.
취업을 확실히 약속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을 때 자격증을 따면 모를까 무작정 따는 것은
시간 낭비가 될 수 있다고…
그리고 덧붙이는 말
“이제 어르신은 눈 높이를 낮추셔야 해요?”
헐~ 내가 언제 눈이 높았던 적이 있나?
상담의 결론은 마음의 위안을 위해서 건, 실제적인 준비를 위해서 건 자격증은 자신의 분야에
관련된 것을 취득하는게 가장 좋고 자격증을 취득은 현직일 때 마무리되어야 한다는 거였다.
“뛰는 넘 위에 노는 넘 있다.”
“인생 별거 있나? 물 들어 올 때 노젓고, 다리심 짱짱할 때 열심히 돌아 댕기는 거지!”
이런 말들이나 핑핑 하고 조선 팔도 쏘 다녔으니 내가 자격증을 딸 시간이 어디 있었겠나?
하지만 그런 거 안하고 잘 놀았으니 취업이 안 된다 해도 덜 억울한 거다.
사실 갑작스런 상황변화에 마음을 많이 혼란스럽긴 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안정을 되찾고 그
충격 또한 나의 방식으로 나름 잘 소화하고 있었으니 아쉬울 것도 후회될 것도 없었다.
.
하여간 난 작전을 바꿨다.
고용보험을 타기 위해 의무적으로 인터넷 구직활동에서 벗어나 실제적인 구직에 뛰어들었다.
차별 없을 만한 일자리에 이력서를 넣고 나서 형식적인 구직활동이 아니라 취업을 하고
싶으니 굳이 나이가 문제되는 일이 아니라면 꼭 한 번 인터뷰 기회를 달라고 했다.
그리고 딱 2가지만 강조 했다.
한 직장에서 31년 근무한 것과 건강과 체력은 아직 젊은이들 못지 않게 짱짱하다고
그리고 고용보험이 채 끝나기 전에 식자재 유통업체에 취업 되었다.
그것도 젊은 친구와 1개월 인턴쉽을 겨룬 끝에…..
어쨌든 나는 일자리를 구했고 내가 하고자 원한 일이었으니 감사한 마음으로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예전 보다는 더 힘든 일이었지만 내겐 일단 일을 한다는 게 중요했고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 또한 즐거운 경험이었다.
보수는 작았지만 주 5일제 근무라 은퇴하기 전과 별다름 없이 주말이면 산과 함께하는
내 삶의 패턴은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나는 별 불만이 없었고 나는 빠르게 마음의 안정을 찾아 갔다.
걱정했던 젊은 직원들과의 사이도 좋았다.
최저임금은 자꾸 올라가고 경쟁은 치열해져서 예전보다 더 열심히 일해야 사업체를
유지할 수 있는 사업주의 고충도 이해할 수 있었지만 많은 젊은 이들은 그렇지 못했다.
사장이 날 채용한 이유도 수긍이 갔다.
한 지붕 아래서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의 서로 다른 입장은 이질적인 문화처럼 자주
충돌을 일으켰고 나는 중재인의 역할을 자처 했지만 그 때마다 직원들은 자주 바뀌었다.
그리고 나는 목표로 한 2년을 좀 남겨두고 홀연히 사표를 던졌다.
예정보다 좀 빨랐지만 스스로와 약속한 일 이었다.
막상 일을 하게 되면 또 다른 고민과 생각이 따라 붙는다.
중소 업체는 대체 인력이 거의 없어서 주말 외에는 자유가 철저히 통제된다..
일단 일 속에 뛰어 들면 일과 자유를 둘러싼 해묵은 갈등이 또 다른 양상으로 표면화 된다.
그리고 어느 날 문득 내 인생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얼마 남지 않은 젊음은 모래시계처럼 흘러내리는데 나는 싼 노동에 나의 꿈과 자유를
저당잡힌 채 도시의 한 귀퉁이에서 말라가야 하는가?
일에 대한 생각과 마음이 정리되고 그 일이 다시 현실이 되면 원초적인 욕망처럼 가고 싶은
나라에 관한 꿈이 다시 고개를 드는 것이다.
세계일주를 시작하는 것도 아닌데 버킷리스트에 담긴 여행하나 하지 못하고 자꾸 미루다
보면 난 훗날에도 떠나지 못할 것이다.
나중에 분명 후회할 것 같았다.
그래서 떠날 수 밖에 없었다.
긴 여행에서 돌아와서야 울던 가슴이 잠잠해졌다.
그리고 다시 주어진 자유는 아무런 갈등 없이 예전 보다 좀더 효율적이고 짜임새 있게 사용
할 수 있게 되었다..
자유의 한 귀퉁이를 과감하게 도려내어 자격증도 땄다.
나는 거금 250만원을 들여 드론 교관을 목표로 드론 자격증을 취득했다.
결국 자기만족이 되어 버렸디만 이건 국가 자격증이다
당시 드론 교관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해서는 400만원의 비용 소요가 추가적으로 필요했는데
너무 큰 돈이라 대전과 인근 도시의 모든 드론 교육센터에 전화를 해서 60살 노친네가 교관
자격증을 따면 교관으로 채용해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한결같이 어렵다고 했다.
그들이 원하는 교관의 평균적인 나이 기준은 45세 정도였다.
나는 피 같은 드론 투자금을 과감히 손절하고 투자를 중단했다.
현재 나의 자격증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농약살포와 드론 촬영 밖에 없다.
하지만 4전 5기 끝에 취득한 나의 자격증이 나의 자부심이자 내 삶의 사용 설명서
같은 역할을 하는 것에 만족한다.
그리고 견설회사 다니는 동생의 주선으로 방수자격증을 취득하여 건설회사에 직원으로
등록했다.
그리고 또 세월이 흘러 갔다’
다시 일자리를 구하기가 힘들 거라 생각했지만 나는 다시 일자리를 구해서 일을 시작했다.
또 매일 수 밖에 없는 일이었지만 내 삶의 갈증은 당분간 해갈되었으므로 일자리를 굳이
포기할 이유도 없었다.
중요한 건 보수가 아니었다.
내 가슴이 울 때 언제나 떠날 수 있는 그런 자유로운 일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일자리를 구하는 건 생각처럼 쉽지는 않은 일이었다.
어느덧 나는 회갑을 맞이 했다.
친구들과 회갑 때 부부동반 중국여행을 가자고 약속을 했었는데 막상 그 날이 오자
59년 동갑 친구 5명 중 갈 수 있는 친구가 아무도 없었다.
나는 마눌과 중국 계림 여행을 5일간 다녀 왔고 중국에서 들어오자 마자 코로나가 무서운
기세로
영토확장을 시작했고 세상은 역사상 유래가 없는 새로운 전쟁에 휘말렸다.
세상을 오가던 비행기는 수 많은 비행기들은 날개를 접었다.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코로나 세상에서 저 넓은 세상을 향한 내 가슴의 울음도 멈추었다.
세상은 요동쳤다.
코로나로 인해 많은 것이 바뀌었다.
은퇴한 시니어들에겐 그래도 코로난 전의 세상은 양반 이었다.
나름 구직의 틈새 시장이 있었고 만날 친구들이 있었다.
젊은이들의 잦은 이직 대신 나이든 사람들의 진득한 성실성을 선호할 수 있었던 고용주들의
선택의 폭과 여유도 사라졌다.
시니어들의 취업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최저임금이 더 많이 오른 만큼 고용주들은 고용인원들을 더 줄였다.
더 적은 인원으로 생산성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업무량은 늘어나고 업무처리 능력이
더 중요해졌다.
어짜피 임금을 더 올려 줄 바에는 제대로 일할 수 있는 젊은이들이 필요해 졌고
성실성으로 버티던 나이든 사람들의 할만한 일자리는 급속히 줄어들었다.
아이러니 하게 너무 힘든 자리, 자존감이 떨어지는 일터, 장래성이 없는 일등 젊은이들이
기피하는 일자리에 더 많은 노인들이 몰리고 그 자리의 경쟁도 점점 치열해져 갔다.
직장을 그만두거나 일자리를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이제 없어졌다..
설령 그런 일자리를 다시 갖지 않는다 해도 아쉬울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일은 다시 구하면 되고 정규 일자리가 없으면 알바를 하면 된다.
더 이상 생활비를 못 가져다 준다고 해도 내 역할은 거기 까지고
내가 가지고 있는 돈은 생각하기에 따라 한 세상 살아 가는 데 그렇게 부족한 돈이 아니었다.
더 많은 돈을 벌었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내 눈이 바뀌었고
인생에 대한 나의 생각과 마음가짐이 바뀌었고 ,내가 풀어야 할 삶의 방정식의 해답을
스스로 깨우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다시 행운이 따라 주었다.
나는 엄중한 코로나 시국 시니어들에게 모든 게 최악이라는 상황에서 다시 옛 직장으로
돌아갔다.
기회만 되면 펑펑 놀았는데 옛 회사는 고맙게도 날 다시 불러 주었다.
보수도 좋아지고 근무여건도 좋아졌다.
계약직이지만 같이 근무 했던 후배들의 대우를 받으며 잃하니 일할 맛도 나고 마음도 편하다.
나는 아직 짱짱하고 나는 꿈은 아직 진행중이다.
지금은 마음의 갈등조차 없다.
생각지도 않은 코로나는 벌써 2년을 넘기고 있고 여전히 세상의 길은 막혔으니 나는 아쉬울
것도 없이 근무에 충실하면서 훗날을 기약하면 된다.
지나고 나니 내가 살아온 과정이 나의 평판이고 나의 얼굴이었다.
그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삶과 나에 대한 나의 마음가짐 이었다.
이 일을 언제까지 할지 모른다.
어느 날 회사는 나보다 더 능력 있다고 판단하는 사람을 내 자리에 앉힐 수도 있고, 코로나가
사라지는 어느 날 잠자고 있는 나의 유목과 방랑의 유전자가 다시 꿈틀거리고 일어나 다시
배낭을 둘러메도록 할지 모른다.
그 때가 언제인지 궁금하지도 않고 걱정 또한 되지 않는다.
신이 그 때를 알려주고 내 가슴은 그 때 또 알아서 울 것이다.
난 나를 믿고 나의 판단을 믿고 나의 운을 믿는다.
지금 까지 잘해 왔듯이 앞으로도 잘해 갈 것이다.
설령 무엇이 잘못되고 나빠진다 하더라도 그것이 또 무슨 문제가 있을까?
사간이 알아서 해결해 줄 거고 그렇지 않더라도 우린 살아가면서 또한 죽어가고 있으니
이제 무언가 조금씩 나빠지는 게 당연한 일 아닌가?
나이 들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단지 돈을 벌어서 좋은 건 아니라 스스로의 자존감을 유지하고 마음의 안정을 유지하고
자신의 삶을 더 소중하게 만들어 준다.
하지만 우리는 다시 돌아오지 않은 너무 짧은 시간에 관해 이야기 해야 한다.
더 이상 허비할 수 없는 우리의 남은 젊음과, 나의 영혼의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중요한 것은 세월은 마구 흘러간다는 거다.
더 많이 갖고자 해도 그럴 수 없다는 것이고 더 많이 가진 만큼 내일 더 행복한 것도 아니다.
정작 우리가 은퇴 이후에 벌어들이는 건 어쩌면 돈이 아니라 두려움에 대한 자기 위안 일지도
모른다.
정상에서 내려와 날 저무는 산 길을 내려가는 외로운 산객의 수심과 같은….
세상이 뿌려 대는 공포의 지라시에 현혹지 말고 자신이 확대 재생산한 두려움에 더 이상 가
위 눌리지 말아야 한다.
살아가면서 하게 되는 수많은 걱정과 두려움이 우리가 닥칠지 모르는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파수군이 될 수도 있지만 우리의 영혼을 좀먹고 인생을 낭비하게 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필요한 것은 걱정이 아니라 예측과 대비이고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패닉과 공포가 아니라 대응과 수습이 필요할 뿐이다.
정말 어리석은 건 해결책도 없이 걱정만 하다가 정작 무슨 일이 일어나면 우왕좌왕 하다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몰고 가는 것이다.
나는 무엇이 두려워 또 실체 없는 두려움에게 나의 소중한 시간을 내어 주는가?
배에 힘을 주어라!
산전 수전 공중전에 육박전 까지 치루면서 험한 세상 이렇게 잘 살아 왔는데 지금 와서
겁날게 그 무엇이 있으랴?
후회할 시간 조차 얼마 남지 않은 나의 소중한 시간들.
지금처럼 내 방식으로, 내 스타일 대로 살아 가는 거다.
남들 눈에는 대단해 보이지 않아도 소중한 내 인생이다.
“어떤 인생을 사느냐”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어떻게 나의 인생을 살아 가는가?”
얼만큼 나와 내 인생을 사랑하는가?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면
아니 수입 없이 먹고 살아갈 두려움에서 벗어나면 그 다음엔 선택은 자신의 몫이다.
그리고 내 인생 대학의 최종평가자는 나 자신이다.
내가 색연필로 동그라미 다섯개 그리고 ‘참잘했어요!” 도장 찍으면 내 인생은 그냥 멋진
인생이 되는 것이다,
내 가슴이 여전히 뜨거운 한
더 넓고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열망이 살아 있는 한 나는 늙지 않는다.
그날까지 짱짱하게 체력을 유지하고, 건강을 유지해서 지금은 잠시 미루어 둔 미완의
꿈들을 하나하나 구체화 해나갈 것이다.
PS)
내가 아는 정말 멋진 인생을 산 사람
그를 한 번도 만난 적도 없고 , 얼굴도 잘 모르는 프랑스 작가 미셀 트루니에...
그는 묘비명에 이런 말을 남겼다.
" 내 그 대를 찬양 했더니
그대는 백배나 많은 것을 갚아 줬다.
고맙다 . 나의 인생이여 !"
이 보다 더 잘 살고 더 멋지게 인생을 마무리 한 사람이 또 있을까?
그대에게 드린다. 늙지 않는 노년을 위한 멋진 시
The Oak
- Alfred Tennyson -
Live thy life,
Young and old,
Like yon oak,
Bright in spring,
Living gold;
Summer-rich
Then; and then
Autumn-changed,
Soberer-hued
Gold again.
All his leaves
Fall'n at length,
Look, he stands,
Trunk and bough,
Naked strength.
알프레드 테니슨은 [떡갈나무]
그대 삶을 살아라
늙어서나 젊어서나
저기 저 떡갈나무 같이,
봄엔 찬란하게
살아있는 황금처럼.
여름엔 무성하게
그리고, 그 후
가을이 오면 색이 바뀌어
다시 은은한
황금빛으로.
모든 잎사귀
마침내 다 떨구고 나면
보라, 우뚝 서 있는
둥치와 우듬지,의
벌거벗은 힘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