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차 남도 기행
윤선도유적지 : 녹우당
유물전시관
백련사
다산초당
강진 청자박물관
가우도
간밤에 세찬 비가 뿌리고 바람이 심하게 일었다.
계곡 깊은 곳에 은거한 숙소가 이정도 이라면 바닷가는 모진 풍랑이 일었을 게다.
설핏 잠에서 깨면서 세찬 바람소리를 빗 소리를 들으며 다시 잠들었는데
한옥 자체가 순환 기능이 좋아서 인지 난방과 잘 조화를 이루어 쾌적한 상태에서
숙면을 취했다.
아침에 일어나 1시간 30분 계곡의 물길을 바라보며 1시간 30여분 사우나를 하다.
마눌이 특별 예약한 코스 …
일본 온천 여행의 느낌이 살아 난다,
두륜산 새벽 산행 까지 포기하고 그 스케쥴에 따랐는데
아마도 무릉객이 산 밑에서 은거하면서 그 산을 둘러보지 않는 첫 날일 게다.
간밤에 내린 폭우로 불어난 계곡의 물을 보면서 누린 새 아침의 힐링과 호사
여행은 어떤 모습으로도 삶의 여백과 아름다움을 지나치지 않게 한다.
기분 좋은 목욕 후에 유선관 까페에서 아메리칸 스타일로 조식을 마치고 다시 리프렛쉬
되어 상쾌한 기분으로 2일차 남도여행 길을 출발했다.
윤선도 유적지
녹우당과 유물전시관
숙소에서 윤선도 유적지는 약 7km 떨어져 있다.
윤선도 유적지에 도착하니 연못과 정자가 먼저 반긴다.
가랑 비가 뿌리는 다소 쌀쌀한 아침이다.
유물전시관에 들어가니 관리하시는 분은 청소하느라 바쁘고 두개 층으로 이루어진 전시관
에는 아무도 없다.
윤선도 유물전시관에는 해남윤씨 어초은공파 사람들의 역사 유물이 전시된 공간이다.
윤선도의 자화상과 고산의 증손자로 문인 화가였던 공재 윤두서의 작품들을 비롯해 . .
해남 윤씨가 사람들의 유물과 회화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국보 제240호 윤두서의 자화상과 보물11점 외에 1천 800점 유물이 전시되었다고 한다.
한 가문에서 고택을 비롯해 조상대대로 보관해온 유물이 5000점에 이른다고 하니
역사처럼 이어온 가문의 정신과 자부심이 대단한 명문가임에 틀림없다.
윤선도 유물전시관에는 해남윤씨 어초은공파 사람들의 역사 유물이 전시된 공간이다.
윤선도의 자화상과 고산의 증손자로 문인 화가였던 공재 윤두서의 작품들을 비롯해 . .
해남 윤씨가 사람들의 유물과 회화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국보 제240호 윤두서의 자화상과 보물11점 외에 1천 800점 유물이 전시되었다고 한다.
한 가문에서 고택을 비롯해 조상대대로 보관해온 유물이 5000점에 이른다고 하니
역사처럼 이어온 가문의 정신과 자부심이 대단한 명문가임에 틀림없다.
조선조의 문신 국문학 대표의 시조시인 윤선도
올곧은 성품의 선비로 집권층에 대한 상소와 규탄으로 유배와 옥사를 반복하는 등
정치적 기복이 심했던 분이다.
허망한 세상과 정치에 환멸을 느껴 낙향 아름다운 자연에 은거하며 학문과 풍류를 즐기며
유유자적한 삶을 살았고 그 곳에서 풀어낸 문학적 역량과 감수성으로 후대에는 정치인
으로서 보다 문인으로 그 이름을 드높였다.
남도에서는 윤선도를 빼변 애기가 되지 않는다.
어딜가나 고산 윤선도가 따라 온다.
사실 윤선도의 발자취와 문학을 따라 가려면 해남 보다도 보길도를 가야 한다.
세상을 등진 선비가 노년의 여생을 보냈던 그 곳
그래서 한국의 산에 푹 빠져 있던 내 젊은 날에도 아직 가슴속에는 그 문학의 감수성이
남아 그의 자취를 따라 해남과 보길도를 거쳐 땅끝으로의 머나먼 여행을 했는지도 모른다.
마눌과 아이들 까지 대동하고 …
그의 대표 작품인 산중신곡이나 어부사시사를 보면 자연에 심취한 소박하고 한가로운 삶의
기쁨이 여기저기 묻어 난다.
현대인이자 자연인에 가까운 나도 그 시를 감상하면 여유로운 풍류와 낭만이 느껴진다.
정치판에서 많은 마음고생과 고초를 겪었지만 모든 걸 버리고 자신이 원하는 자연인의
삶을 살았으니 나름 행복한 여생을 보냈을 것이다.
펼쳐내지 못한 대장부의 꿈과 맷힌 한은 남도의 시린 자연이 모두 치유하였을 것이다.
오히려 신선과 같은 삶을 살아가면서 부질없은 세속의 욕심과 미망은 남도의 해충에 죄 날려
버리고 더 깊어졌으니 그런 시를 쓸 수 있었지 않았을까? .
하지만 고산은 요즘으로 따지면 궁박한 삶을 살면서도 정신적인 평화에 만족하는 산속의
남루한 자연인 들과는 격이 달랐다.
일단 물려 받은 돈이 많아 보길도를 통째로 전세 내어 집과 정원 그리고 독서당 까지 짓고
그 때묻지 않은 아름다운 자연 속에 스스로의 왕국을 만들었으니 삶에 대한 걱정없이
풍류와 낭만만 즐기면 되는 부족함이 없는 자연인이었다.
당시 84세 까지 사셨으니 천수를 누리다 가셨는데 정계를 떠나 스트레스가 사라지고
아름다운 보길도의 자연 속에서 근심걱정 없는 마음 편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사실 유물전시관을 돌아보면서 가장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게 공재 윤두서의 초상화였다.
그 날카로운 눈매와 위엄서린 풍채에 한참을 바라보았는데
나중에 자료를 검색해보니 이게 국보란 거다.
ㅎㅎ 그러고보면 무릉객도 예술품 보는 안목이 있는 거여……
날카로운 눈은 정면을 응시하면서 마치 자기 자신과 대결하는 듯한 느낌을 주고 굳게 다문
두툼한 입술에서 강인한 인상이 느껴진다.
얼굴의 수염 한올까지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어서 보는 이들을 압도시킨다.
일반적인 인물화들과는 달리 머리위의 탕건과 양 귀가 생략되어 있는걸로 보이는 강렬한
독특한 이미지의 그림이다.
- 나무위키 비평
고산유적지에서는 녹우당 외에도 오랜 역사와 전통을 말해주는 은행나무와 비자림,
안채, 행랑채, 헛간, 안사당, 고산사당, 어초은사당 ,추원당, 고산유물전시관등을 돌아 볼 수 있다.
고산 윤선도(1587-1671) 유적지에는 사랑채인 녹우당이 있다.
600년 전통을 이어온 해남윤씨 어초은파의 종가 고택인 녹우당은 덕음산자락에 은거한
우리나라 최고의 명당자리 중의 하나로도 알려진 곳이다.
내친 김에 내가 좋아하는 윤선도의 감성 시조 감상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 봄 - 고기잡이를 떠나는 광경 앞포구에 안개가 걷히고 뒷산에 해가 비친다 배 띄워라 배 띄워라 썰물은 거의 빠지고 밀물이 밀려온다 삐그덕 삐그덕 어기여차 강촌에 온갖 꽃[백화만발(百花滿發)]이 먼 빛으로 바라보니 더욱 좋다 날씨가 덥도다 물 위에 고기 떴다 닻 들어라 닻 들어라 갈매기 둘씩 셋씩 오락가락 하는구나 삐그덕 삐그덕 어기여차 낚싯대는 쥐고 있다 탁주병은 실었느냐 동풍이 잠깐 부니 물결이 곱게 이는구나 돛 달아라 돛 달아라 동쪽호수(東湖)를 돌아보며 서쪽호수(西湖)로 가자꾸나 삐그덕 삐그덕 어기여차 앞산이 지나가고 뒷산이 나온다 우는 것이 뻐꾸기인가 푸른 것이 버들 숲 인가 배 저어라 배 저어라[여음, 조흥구] 어촌의 두어 집이 안개 속에 들락날락[나왔다 들어갔다 - 보였다 안 보였다. 삐그덕 삐그덕 어기여차 고운 볕 쬐이는데 물결이 기름 같다 배 저어라 배 저어라 그물을 던져 둘까 낚싯대를 놓으리까 삐그덕 삐그덕 어기여차 탁영가에 흥이 나니['탁영가에 흥이 나니'라는 말에는 시인이 둘러싼 환경이 더없이 맑고 깨끗하여 만족스러워하는 마음이 드러나고 있다] 고기도 잊겠도다[고기잡이도 잊을 만큼 평화롭고 풍요로운 봄의 정취를 그림] - 맑고 아름다운 봄의 강과 흥취 (탁영 : 갓 끈을 씻다. 탁영가에 흥이 남은 주변이 더없이 맑고 깨끗하여 즐거운 흥이 절로 살아남을 묘사) 석양이 기울었으니 그만하고 돌아가자 돛 내려라 돛 내려라 물가의 버들 꽃은 고비고비 새롭구나 삐그덕 삐그덕 어기여차 정승도 부럽잖다 만사(萬事)를 생각하랴 방초(芳草)를 밟아보며 난지(蘭芷)[난초와 지초]도 뜯어 보자 배 세워라 배 세워라 일엽편주에 실은 것이 무엇인가 삐그덕 삐그덕 어기여차 갈 때는 안개더니 올 때는 달이로다 취(醉)하여 누웠다가 여울 아래 내려 가려다가 배 매어라 배 매어라 떨어진 꽃잋이 흘러오니 신선경(神仙境)이 가깝도다 삐그덕 삐그덕 어기여차 인간의 홍진[붉은 티끌 - 속세의 더러움] 얼마나 가렸느냐 낚싯줄 걸어 놓고 봉창의 달을 보자 닻 내려라 닻 내려라 벌써 밤이 들었느냐 두견 소리 맑게 난다 삐그덕 삐그덕 어기여차 남은 홍이 무궁하니 갈 길을 잊었더라 내일이 또 없으랴 봄밤이 그리 길까 배 붙여라 배 붙여라 낚싯대로 막대 삼고 사립문을 찾아보자 삐그덕 삐그덕 어기여차 어부의 평생 이러구러[이럭저럭] 지낼러라 산중 신곡 발췌 <만흥(漫興) 1> 산수간(山水間) 바위 아래 띠집을 짓노라하니 그 뜻을 모르는 남들은 비웃고들 있지만, 어리고 햐암의 뜻에는 내 분인가 하노라. <만흥(漫興) 2> 보리밥 픗나물을 알마초 머근 후(後)에, 바횟긋 믉가의 슬카지 노니노라. 그 나믄 녀나믄 일이야 부럴 줄이 이시랴. 1) 알마초 : 알맞게 먹은 뒤에, 2) 바위 끝 물가에서 실컷 노니노라. 3) 그 나머지 다른 일이야 부러워할 것이 있으랴. 추야조(秋夜操) 창승(蒼蠅)이 쓷뎌시니 리채 노하시되, 낙엽(落葉)이 늣거오니 미인(美人)이 늘글 게고, 댇숩피 빗치 으니 그 보고 노노다」 쉬파리가 죽었으니 파리채를 놓았으되 늦가을이라 낙엽지니 어여쁜 님 늙으시겠네 대숲에 달빛이 밝으니 그것이나 보고 노노라 머흔구름 한치 마라 세상을 가리운다. 파랑성 염치마라 진훤을 막는고야 두어라 막히고 가린 줄은 나는 좋아하니라 험한구름 원망하지 마라 세상을 가리운다. 파도소리 싫어하지 마라 속세의 시끄러움을 막아준다. 그냥 두어라 가리고 막힌 것은 나는 좋아 하노라 . 윤선도의 5벗 오우가 五友歌 (윤선도, 1587~1671) 내 벗이 몇인가 하니 수석(水石)과 송죽(松竹)이라 동산에 달 오르니 그 더욱 반갑구나 두어라, 이 다섯밖에 또 더하여 무엇하리. 구름 빛이 좋다 하나 검기를 자주 한다 바람 소리 맑다 하나 그칠 때가 많구나 좋고도 그칠 때가 없기는 물뿐인가 하노라. 꽃은 무슨 일로 피면서 쉬이 지고 풀은 어이하여 푸르는 듯 누르나니 아마도 변치 않을 것은 바위뿐인가 하노라 더우면 꽃피고 추우면 잎 지거늘 솔아, 너는 어찌 눈서리를 모르느냐 구천에 뿌리 곧은 줄을 그것으로 아노라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곧기는 누가 시키며 속은 어이 비었느냐 저렇게 사시에 푸르니 그를 좋아하노라 작은 것이 높이 떠서 만물을 다 비추니 밤중에 광명이 너만 한 이 또 있느냐 보고도 말 아니하니 내 벗인가 하노라. - 1791년 (정조 15년) 서유린 편집 <고산유고 孤山遺稿> 윤선도(尹善道) 1587(선조 20)∼1671(현종 12). 조선 중기의 문신·시조 작가. 본관은 해남(海南).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 또는 해옹(海翁). 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을 지낸 유심(唯深)의 아들이며, 강원도관찰사를 지낸 유기(唯幾)의 양자다. 유기는 유심의 동생으로 큰댁에 입양되었고, 선도는 유기에게 입양되어 가계를 이었다. 당시 금서(禁書)였던 『소학 小學』을 보고 감명을 받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18세에 진사초시에 합격하고, 20세에 승보시(陞補試)에 1등 했으며 향시와 진사시에 연이어 합격하였다. 1616년(광해군 8) 성균관 유생으로서 이이첨(李爾瞻)·박승종(朴承宗)·유희분(柳希奮) 등 당시 집권 세력의 죄상을 격렬하게 규탄하는 『병진소 丙辰疏』를 올렸다. 이로 인해 이이첨 일파의 모함을 받아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되었다. 그곳에서 『견회요 遣懷謠』 5수와 『우후요 雨後謠』 1수 등 시조 6수를 지었다. 1년 뒤 경상남도 기장으로 유배지를 옮겼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이이첨 일파가 처형된 뒤 풀려나 의금부도사로 제수되었으나 3개월만에 사직하고 해남으로 내려갔다. 그 뒤 찰방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1628년(인조 6) 별시문과 초시에 장원으로 합격해 봉림대군(鳳林大君)·인평대군(麟坪大君)의 사부(師傅)가 되었고, 사부는 관직을 겸할 수 없음에도 특명으로 공조좌랑·형조정랑·한성부서윤 등을 5년간이나 역임하였다. 1633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예조정랑·사헌부지평 등을 지냈다. 그러나 1634년 강석기(姜碩期)의 모함으로 성산현감(星山縣監)으로 좌천된 뒤, 이듬해 파직되었다. 그 뒤 해남에서 지내던 중 병자호란이 일어나 왕이 항복하고 적과 화의했다는 소식에 접하자, 이를 욕되게 생각하고 제주도로 가던 중 보길도(甫吉島)의 수려한 경치에 이끌려 그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정착한 그 일대를 ‘부용동(芙蓉洞)’이라 이름하고 격자봉(格紫峰) 아래 집을 지어 낙서재(樂書齋)라 하였다. 그는 조상이 물려준 막대한 재산으로 십이정각(十二亭閣)·세연정(洗然亭)·회수당(回水堂)·석실(石室) 등을 지어 놓고 마음껏 풍류를 즐겼다. 그러나 난이 평정된 뒤 서울에 돌아와서도 왕에게 문안드리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1638년 다시 경상북도 영덕으로 귀양갔다가 이듬해에 풀려났다. 이로부터 10년 동안 정치와는 관계없이 보길도의 부용동과 새로 발견한 금쇄동(金鎖洞)의 산수 자연 속에서 한가한 생활을 즐겼다. 이 때 금쇄동을 배경으로 『산중신곡 山中新曲』·『산중속신곡 山中續新曲』·『고금영 古今詠』·『증반금 贈伴琴』 등을 지었다. 그 뒤 1651년(효종 2)에는 정신적 안정 속에서 보길도를 배경으로 『어부사시사 漁父四時詞』를 지었다. 다음해 효종의 부름을 받아 예조참의가 되었으나 서인의 모략으로 사직하고 경기도 양주 땅 고산(孤山)에 은거하였다. 마지막 작품인 『몽천요 夢天謠』는 이곳에서 지은 것이다. 1657년, 71세에 다시 벼슬길에 올라 동부승지에 이르렀으나 서인 송시열(宋時烈) 일파와 맞서다가 삭탈관직되었다. 이 무렵 『시무팔조소 時務八條疏』와 『논원두표소 論元斗杓疏』를 올려 왕권의 확립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1659년 효종이 죽자 예론 문제(禮論問題)로 서인파와 맞서다가 패배해 삼수에 유배되었다가, 1667년 풀려나 부용동에서 살다가 그곳 낙서재에서 85세로 죽었다. 정치적으로 열세에 있던 남인 가문에 태어나서 집권 세력인 서인 일파에 강력하게 맞서 왕권 강화를 주장하다가, 20여 년의 유배 생활과 19년의 은거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으로 화려한 은거 생활을 누릴 수 있었고, 그의 탁월한 문학적 역량은 이러한 생활 속에서 표출되었다. 그는 자연을 문학의 제재로 채택한 시조 작가 가운데 가장 탁월한 역량을 나타낸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 문학적 특징은 자연을 제재로 하되 그것을 사회의 공통적 언어 관습과 결부시켜 나타내기도 하고, 혹은 개성적 판단에 의한 어떤 관념을 표상하기 위해 그것을 임의로 선택하기도 한 데에 있다. 또, 대부분의 경우 자연은 엄격히 유교적인 윤리 세계와 관련을 맺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자연과 직접적인 대결을 보인다든가 생활 현장으로서의 생동하는 자연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그가 자연이 주는 시련이나 고통을 전혀 체험하지 못하고 유족한 삶만을 누렸기 때문이다. 문집 ≪고산선생유고 孤山先生遺稿≫에 한시문(漢詩文)이 실려 있으며, 별집(別集)에도 한시문과 35수의 시조, 40수의 단가(어부사시사)가 실려 있다. 또, 친필로 된 가첩(歌帖)으로 『산중신곡』, 『금쇄동집고 金鎖洞集古』 2책이 전한다. 정철(鄭澈)·박인로(朴仁老)와 함께 조선시대 삼대 가인(三大歌人)으로 일컬어지는데, 이들과는 달리 가사(歌辭)는 없고 단가와 시조만 75수나 창작한 점이 특이하다. ≪참고문헌≫ 孤山遺稿, 記言, 孤山硏究(李在秀, 學文社, 1955), 松江과 孤山의 詩境(崔珍源, 成均館大學校論文集 3, 1958), 高麗末·李朝初의 漁父歌(李佑成, 成均館大學校論文集 9, 1964), 尹孤山論(鄭炳昱, 月刊文學 9, 1969), 尹善道의 自然觀(尹星根, 文化批評 7·8, 1970).(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몽천요(夢天謠) 1652년(효종 3) 윤선도(尹善道)가 지은 연시조. 모두 3수. ≪고산유고 孤山遺稿≫ 권6 하 별집에 실려 있다. 〈어부사시사〉를 지은 이듬해 성균관 사예(司藝)로 특소(特召)되어 승지에 제수(除授)되었으나, 주위 신하들의 심한 시기와 노환으로 인하여 물러나 양주(楊州) 고산(孤山)에 머물러 있을 때 지은 작품이다. 〈몽천요〉에는 발(跋)과 함께 한역가가 실려 있다. 발에 보면, “무릇 내가 탄식하고 영탄하는 나머지 나도 모르게 그것이 소리로 나와 길게 말하니 동학들이 희희거리며 놀리거나 꾸짖음이 어찌 없으리요마는, 내가 진실로 그만둘 수 없는 것은 이른바 ‘내 옛사람을 생각하여 진실로 내 마음을 알았도다’라는 것이다.”라고 하여 작품을 짓게 된 심정과 자신의 처한 환경을 적고 있다. 제1수에서는 꿈엔지 생시엔지 올라간 백옥경에서 옥황은 자신을 반겨주나 뭇 신선은 꺼린다고 하며, 그렇다면 다 그만두고 다시 오호연월(五湖烟月)로 돌아가겠노라고 하였다. 뭇 신선의 꺼림 속에 있느니 차라리 강호 속에 묻혀 시비를 잊고 지내는 것이 훨씬 낫겠다는 것이다. 제2수는 제1수의 부연·확장이며 은거지로 물러난 현재의 처지를 더욱 안타까운 심정으로 노래하였다. 제1수의 옥황의 반김이 웃음으로, 군선의 꺼림이 꾸짖음으로 바뀌어 태도의 강화가 드러난다. 끝 구에서는 백억만 창생에 대한 근심을 말하여 결국 옥황은 임금이고, 군선은 조정의 신하들임을 구체적으로 드러내었다. 제3수에는 군선은 보이지 않고 옥황만 나타난다. 역시 우의적 표현으로 현실에 커다란 환란이 닥치거나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하였을 때 어떻게 하겠느냐고 임금에게 물어보려 하였으나 채 묻지도 못하고 그냥 돌아왔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내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은 17년 만에 “머도록 더옥 됴타”던 인간세상에 돌아왔으나 여전히 시기와 헐뜯음으로 그를 맞이하는 세상에 대한 허탈한 마음을 담아 노래한 것이다. 은거 끝에 현실에 돌아와서 받는 그의 실망과 좌절감을 우의적인 언어로 잘 표현하였다. 지은이가 겪는 강호와 현실 사이에서의 이러한 갈등은 〈어부사시사〉에서의 강호가도(江湖歌道)의 표방과 함께 조선조 사대부들의 처사접물(處事接物)을 이해하는 데 유익한 시사를 준다. ≪참고문헌≫ 尹孤山硏究(李在秀, 學友社, 1955), 國文學과 自然(崔珍源, 성균관대학교출판부, 1977), 孤山硏究(孤山硏究會, 1986).(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백련사
강진 백련사
올해는 심한 가뭄으로 동백이 좋지 않았다.
때깔이 문제가 아니라 꽃 몽오리가 많이 달리지 않아서 어제 비바람에도 떨어질 꽃봉우라기
많지 않았다.
옛 기억이 물로 씻어낸 듯 다 지워지고 아득해서 옛 기억의 실마리라도 찾으려고 꽃 없는
동백 숲을 오랫동안 배회했다.
26년의 세월의 먼지가 두껍게 앉아 있는 길을 걸었다..
절의 역사는 1000년을 거슬러 올라가니 속세의 십 수년이 무슨 대단할 것도 없겠지만
우리의 삶이 찰라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오래 객지를 떠돌던 탕자가 대하던 고향처럼
그렇게 울컥한 반가움이 일었다.
경내를 돌아 보는데 막내 매제가 전화를 했다.
행복에 겨운 격앙된 톤으로…..
어제는 화엄사에서 톡을 올리더니 오늘은 파도가 몰아치는 상족암을 거닐고 있다.
동번 서쩍 ! 매번 동선이 길다.
잠시 파도치는 상족 해변을 영상폰으로 감상하다.
여행을 좋아하고 마눌을 여행친구로 만들 수 있다면 가장 바람직한
노후준비가를 하고 있는 셈이다.
고기도 먹어본 넘이 먹는 거지 채식만 계속하다가 고기 먹을 라면 속에서
라는 법이라.
삼오제를 지내는 사람들이 있었다.
누군가 꽃 피는 봄에 길 떠나고 비 뿌리는 아침에 구천의 강을 건넜다.
처마 밑에 앉아서 그렇게 삶과 죽음이 같은 곳에서 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돌아보며
뜨거운 커피 한 잔을 마셨다
삶과 죽음이 그렇게 등을 맞대도 있으니 산자는 꿈틀거려야 누군가 살아있음을 알아채지
않겠는가?
백련사의 옛 모습
백련사에는 보물 2396호인 고려시대 사적비가 있다.
분명 아이들을 데리고 백련사에서 다산 초당을 넘어 갔었는데 그 길이 생각보다 멀었다.
신기하다 .
치매도 아닌데 아이들과 함께 걸어 넘었던 그 길의 기억이 없다.
고산이나 다산이나 다 유배지에서 자연의 아름다움에 심취했고 학문의 더 깊어졌다.
두 분다 그 당시 나이로 오래 삶을 살았던 건 부질 없은 허망과 욕심을 모두 내려 놓고
스스로 허허로워 졌기 때문일 게다
다산초당.
다산 초당의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여기서 10년을 기거하며 후학을 양성하고 불세출의 명저 목민심서와 500여권의 책을 저술하였으니
만약 다산이 유배이 형벌에 취해지지 않고 순탄한 정치 역정을 거쳤으면 다산은 수 많은
정치인 중의 한 명으로 남았을 터이고 조선의 실학은 실학은 그렇게 발전하고 집대성될 수
없었을 터이니 이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 아닌가?
다산 정약용(1762~1836)은 강진에 유배 내려와 백련사 인근 다산초당에서
여유당전서 500권을 찬술했고 그 곳에서 귀한 친구를 만났다.
대흥사 12대 강백을 지낸 아암 혜장선사(1772~1811)가 당시 백련사 주지로 있었는데
둘은 종교와 나이를 초월하여 각별한 우정을 나누었다.
우리가 걷는 이 길이 둘의 우정을 연결해 준 오작교 같은 길이다..
강진만과 백련사 차 밭은 짙은 안개에 쌓여 있었지만 새봄의 새순과 꽃들이 피어 나는
축축히 젖은 길에서는 짙은 숲의 향기가 가득했고 초당으로 난 그 길은 시종 부드럽고 편안했다.
초당을 돌아 보고 다시 백련사 주차장으로 돌아오니 벌써 1시 넘어 간다.
흐미 ~~ 무신 해가 이렇게 짧다냐?
비가 또 추적거리기 시작한다.
그래도 이번 여행은 날씨와 찰떡 궁합이다.
둘아 다닐 때는 내리지 않던 비가 차를 타면 또 굵어지고 날씨는 저녁처럼 어둑해진다.
장어 주물럭 점심
점심은 마량포구에서 하기로 했다.
이쪽의 특산 해산물이 장어라 난 거북식당에서 장어 주물럭을 먹으려 했는데 마눌이
그냥 장어 소금구이가 아니면 연포탕을 먹는 게 나을 것 같다고 해서 연포탕을 먹기로 하다.
근데 마량항은 무안이나 독천과는 분위기가 또 달랐다.
만이라 멀리 육지가 보이는 바다지만 어디에도 갯벌은 없다.
마량항에 도착하니 1시 40분 30분은 족히 이동한 셈이다.
마량에서 가장 큰 횟집 궁전횟집으로 갔는데 연포탕을 끓일 만큼 낙지가 없단다.
그래서 일단 다른 곳을 알아보고 오는 것으로 하고 돌아 나왔는데 다른 곳에도 낙지가
없다.
목포나 무안과도 그리 멀지 않은데 뻘이 없어서 그런지 낙지가 귀하다.
설령 낙지가 있는 음식점을 찾는다 해도 싱싱하지 않을 거구 값도 비쌀 것이다.
그랴서 우리는 원안대로 거북식당에서 장어 주물럭을 먹기로 했다..
양해를 구하고 가지고 간 해창막걸리 한잔에 장어주물럭을 먹는데 그 맛이 가히 일품이다.
무릇 여행의 기쁨은 미각의 즐거움이 또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데 이번 여행길의 먹거리가
모두 괜찮아서 여행길의 행복을 풀무질 했다.
점심을 먹고 나오니 잔뜩 찌푸렸던 거짓말처럼 날씨가 개이고 햇빛이 구름 밖으로 나왔다.
제대로 한상 받아 잘 먹고 나오니 날씨까지 좋아졌다.
밝은 태양 아래서 눈부신 섬의 봄날을 맞게 되었으니 기분이 한층 좋아지고 발걸음도 가벼워
진다.
청자 박물관
가우도 가는 길에 강진 청자 박물관에 들렀다.
섬을 돌아보는 시간이 줄어드는 터라 지나칠까도 했지만 여기는 강진이고 강진은 고려 청자의
가마터가 있었던 중요한 지역이다.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청자의 80%가 이곳 강진에서 제작된 것이고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해마다 청자축제가 벌어진다는 정보를 검색하고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강진군 대구면과 칠량면 일대에는 고려초기부터 후기까지의 고려청자 가마터가 집중적으로
산재되어 있어 우리나라 청자발생과 발전 그리고 쇠퇴과정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단다.
이지역에서 발견된 청자요지는 총 188개 이르는데 현존하는 전국 청자요지의 50%에 해당 한다고….
그래서 그 중요성과 학술적 가치를 인정하여 1963년 국가사적 제 68g호 지장되어 보존되고
있다고….
요즘 비트코인이니 NFT니 하면서 역사도 없고 예술성도 없는 것들의 가치가 천정부지로
솟아 거래되니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문화현상이 일고 있다.
돈의 가치가 왜곡되고 에술과 문화의 가치에 혼돈이 일고 있다.
엔디워홀의 장난같이 그린 마릴린 먼로 그람이 2400억원?
그리고 족보도 없는 작픈들을 디지털화해서 잘개 쪼개서 수펀 만원씩에 판다고?
예전의 사고 방식으로는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이다.
한 조각 몇 천 만원에 사서 뭐 하냐구?
고려청자 하나를 사거나 그냥 버스타고 아름다운 해남의 자연 돌아보고 마량항에서 장어주물럭
한 판 놓고 쐬주 한 잔 걸치는 게 낫지…..
허기사 돈 많은 놈들이 심심해서 돈지랄한다는데 그걸 누가 말려?
자기들끼리 잔뜩 가격 올려 놓으면 그렇게 시세가 형성되는 거구 그런 것들은 팔아도
세금이 헐하니…..
그 사람들이 대중을 선동하고 현혹하여 한 밑천 챙기려는 상술에 지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 옛날어이없는 데덜란드 튜울립 투기처럼 머지 않아 신기루처럼 사라질 한 때의 유행.
어쨌든 청자 박물관은 해남 밭을 메는 중에 잠깐 맛 본 새참이었다.
우리 역사의 향기와 예술혼에 가까이 다가가고자 하는 무릉객의 가상한 노력
가우도
청자 박물관을 돌아 보고 가우도로 넘어 갔다.
강진군 80개섬중 유일한 유인도다
소의 머리형상을 닮았다 하여 소멍애 가(駕) 자를 써서 가우도란 이름으로 불린다고 한다.
강진만과 무인도를 조망할 수있는 섬으로 시원한 해풍을 맞으며 섬둘레로 조성된
2.7km 함께해길을 걸으며 힐링할 수 있는 작은 섬이다
1시간 30분 정도면 섬 한바퀴를 돌아 볼 수 있으니
마량항에서 점심 맛있게 먹고 청자박물관 가서 우리나라 문화의 정수 청자에대해 공부 좀하고
가우도로 넘어 가믄 된다 ·
양쪽으로 다리가 연결되어 있는 섬이다.
마량향쪽이 청자대교 강진 쪽이 다산대교 ·
마량항 쪽을 굳이 관광하거나 그 곳에서 식사 일정을 잡지 않았다면 다산대교를 건너와
가우도를 돌아 넘어가면 강진 일정을 더 여유로울 것이다.
가우도는 1시간 30분 정도면 섬 한바퀴를 돌아 볼 수 있으니 모로레일의 유혹에 넘어갈 것도
없다.
느리게 느리게 섬 기을 걷고 다산교 중앙 꼭대기 까지 가서 드넓은 강진만과 일대를
조망하고 영랑 싐터에서 영랑시와 가우도에 대한 시 멏점 찬찬히 감상하고 천천히 돌아
나와도 2시간 반 이면 족하다.··
윤슬이라 하던가?
태양 빛이 눈부시게 바다위에 부서지는 모습
해풍을 맞으며 그 한가로운 바다 풍경을 바라보며 걷다가 재수 좋으면 바닷바람에 은은하게
퍼져나가는 천리향의 그윽한 향기를 맡을 수 있을 것이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강진이나 대흥사 인근에 숙소를 정할 생각이라면 일몰을
감상하고 움직이는 것이 좋겠다 ·
늘 그렇듯이 힐링여행을 한다고 해놓고 하나라도 더 보려고 동분서주 했던 1박 2일의
남도여행길은 그렇게 끝이 났다 ··
나이가 들어도 버리지 못하는 야지리 근성
아직도 떨쳐내기 힘든 나의 여행방식 !
우린 26년 만에 강진에 다시 왔고 10년 내에 다시 찾은 수 있을지 모르니 온 김에 하나라도
더 가슴에 담고 싶은 마음
그런 마음이 나를 더 나답게 하는 게 아닐까?
아마 내 마음에서 그런 마음이 사라지고 보폭이 느려지는 날 난 더 빠르게 늙어 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더 많은 자유가 주어지니 마음만 먹으면 아름다운 남해의 풍광을
돌아볼 기회는 더 많을 것이다 ··.
우린 해남의 명산 달마산과 두륜산은 두어 번 씩 다 오른 터라 이번 여행에서는 제외시켰지만
가장 다이나믹하고 핫한 해남은 두륜산과 달마 산이 아닐까?
달마산 도솔암을 가지 않은 사람은 땡끝전망대와 땅끝팁 땅끝 전망대를 돌아보고
미황사와 도솔암을 품고 있는 달마고도를 걸어 보는 것도 좋겠다 ··
대흥사에서 오소재로 가련봉에 올라 두륜산으로 돌아 내리는 역동적인 두륜산 여정은
5시간 정도 소요될 것이다.
시간이 아깝거나 체력이 어려우면 케이블카로 두륜산 구경하고 대흥사 경내를 돌아 보고
대흥사 숲 길을 걷는 것도 좋은 선책이 될 것이다.
기회가 대면 마음 맞는 친구들과 남도의 명소와 남해 섬트레킹를 한 달 정도 해보고 싶다.
'여행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상에서 가장 긴 벚꽃 길 (0) | 2022.04.14 |
---|---|
봄날의 화암사 - 야생화 천국 (0) | 2022.04.06 |
남도 봄 여행 1 일차 - 해남 (0) | 2022.04.04 |
전인회 대천 여행 (0) | 2021.11.29 |
대청호반 산책 (0) | 2021.11.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