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연습
도처에 난무하는 죽음의 그림자다.
자식을 먼저 앞세웠던 5년 선배 조부장이 8월에 돌아 가시더니
친구 영수가 중환자실에서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먼 길을 떠났다.
그리고 그날 9월 5일 어머님은 암선고를 받으셨다.
어머니는 평생 처음으로 제사에 참석하지 못하셨다.
그리고 추석 다음날 관섭아재가 돌아가셨다.
아버님 돌아가시고 가끔 할아버님 묘소에서 만나 뵌 것 말고는 별다른
교류은 없었지만 내가 아는 가장 큰 집안 어른이 세상을 떠나신 거다..
명절 연휴였지만 빈소로 찾아뵙고 마지막 인사를 할 수도 있었는데 인수아재의
연락을 받지 못해 조문을 하지 못했다.
관절이 안 좋으셔서 오랫동안 고생하셨는데 몇 년 간은 전립선 때문에
많은 힘든 나날을 보내셨던 모양이다.
밤에 소변을 보시려고 보행기를 잡고 화장실 가시다가 뒤로 넘어지셔서 갈비뼈
2대가 골절이 되어 요양병원에 입원하셨다가 3개월 만에 돌아가셨다고 했다.
슬하에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는데 딸은 시집을 보내지 못하셨다.
아지매는 30여분 전화로 상황설명을 하는 내내 때론 격앙되기도 하고 때론
자책으로 울먹이기도 하면서 심한 감정의 기복을 보였다.
자식들은 직장생활 하느라 비쁘고 자신도 허리가 좋지 않아 병원에 입원한
상태인데 돌봐드리지 못해 돌아가시게 했다고 안타까워 했다
6인실 병실이 답답하다고 자꾸 집에 보내달라고 시끄럽게하셔서 다른 환자들이
병원측에 요청해서 할 수 없이 1인실을 사용하고 24시간 간병인을 썼다고 했다.
간병비까지 한 달에 500만원씩 나갔는데 조선족 간병인은 밤에도 제대로 돌보아
주지 않고 병원측에서도 별 신경을 써주지 않아서 힘든 시간을 보내셨다고… .
병원을 옮기실 때 만난 아재는 말씀도 잘 못하시고 눈물만 흘리시더라고 울먹였다..
돌아가시기 전날 갑자기 상황이 안 좋아지셨는데 병원측에서는 심각한
상황으로 인식하지 못해 가족들을 부르지 않아서 아무도 임종을 지키지 못한 채
그렇게 쓸쓸히 보내 드려서 한이 된다고…
그리고 그동안 물을 제대로 드시지 못하셨는지 혀가 말리고 입안이 다 말라서
너무 원통하고 가슴 아프시다고 말을 잊지 못하셨다.
다 허망한 삶이다.
안타까워도 아재는 그렇게 돌아가시게 운명지워 있었다.
넘어지지 않으시거나 아니면 그렇게 안 돌아 가시고 병원에 누워서 1~2년 생명을
더 연장함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
당신도 행복하지 않으시고 가족들은 더 힘들었을 것이다.
영수 부인이나 아지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 생명이 떠나가고 또 떠나 보내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새삼 실감이 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참으로 불공평하다.
누구는 고생을 다 끝내시고 이제는 발 뻗고 편하게 사시면 되는 때에 홀연히 떠나기도
하고 누구는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서 있는 가산 다 탕진하고 고생고생하다 돌아가시셔서
남은 배우자를 힘들게 하기도 한다.
누구나 자신의 기준으로 보면 그 불공평은 더 심화 된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자신은 동분서주하면서 열심히 사는데 늘 삶에 허덕이고 다른 사람들은 허허실실 헐렁헐렁
하면서도 잘 살아 간다고....
마음 씀씀이가 너그러우셨던 관섭아재는 사업이 기울고 관절이 병들어 오래 고생하셨고
인색하고 이기적인 인수아재는 부와 명예에다 아직까지 짱짱한 건강을 과시하며
잘 살아가고 있다.
우린 어떤 기준으로 운명이나 신이 우리 삶에 개입하는 지는 잘 모른다.
전생의 업보인지? 아니면 현생에 쌓은 덕인지?
죽음에 관해서는 더 그렇다.
누구보다도 존경을 받고 또 믿음에 독실하셨던 김수환 추기경님이나 법정스님은
마지막 길을 떠나실 때 많은 고생을 하셨다.
신은 그 충실한 대리인들 조차 세상을 떠나는 고통에서 면제해주시지 않으시는 걸 보면
옛말처럼 삶과 죽음이 그냥 다 정해진 운명이고 타고난 팔자 인줄 모른다.
단지 삶의 의지와 노력이 그 정해진 틀에서 더 나은 삶을 살게 하는 동인이되는 것이고...
난 오늘도 어머니가 남은 여생을 많이 아프시지 않고 돌아기시길 기도한다.
짧은 시간이 남아 있을 망정 지금 만큼이라도 건강하시다가 편하게 눈을 감으시면
좋겠다..
남들은 자식과의 정이 돈독할수록 그 정을 떼기 위해 자식들 고생시키다 가신다고
하는데 어머니는 떠나실 때 조차 그렇게 모질지 않을 것 같아 더 슬프다.
남편을 잃은 아지매의 슬픔이 내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난 영수의 마지막을 지키지 못한 것처럼 아재의 가는 길에 문상도 못하고 그렇게
떠나 보냈다.
아버지는 인수 아재는 끔찍히 싫어하시고 관섭아재는 좋아하셨다
할아버지 할머니 묘를 쓴 곳이 시골의 관섭아재 땅인데 정작 아재는 가만히 계시는데
인수아재가 나서서 땅값을 내라고 성화를 냈던 모양이다..
그 때 돈으로 400~500을 낸다고 했는데 그 돈으로 뭐를 하냐고 안받는다고 해서 아버지도
그러면 그만두라고 하시면서 땅 값을 내지 않으셨다.
그 땅이 원래 할아버지 땅인데 큰 할아버지가 뺏아 가신 거에 대한 반감이었고 또
시골 임야를 묘자리로 썼다고 사촌 간에 너무 많은 돈을 요구한데 대한 불쾌함 때문 이셨다..
관섭 아재는 그럴 사람이 아닌데 자기 것도 아닌 걸 가지고 인수 아재가 나선 거라고…
언제가 선산 묘소의 축대가 허물어졌다 해서 나는 동생들과 상의해서 150만원인가를 송금해
드렸는데 그 때 인수아재는 얼마의 돈을 보탰는지 모르겠다.
아지매는 인수아재가 친척들엑 제대로 연락도 안하고 염할 때나 추모공원에 모실 때도
오지 않았다고 많이 서운해 했다.
하여간 그런 히스토리도 다 알고 있는데다가 본인도 투병중인 상태에서 남편을 여윈
아지매가 안스러워 어머니와 동생 영수와 상의해서 회비로 100만원 부의금으로 이체했다.
그리고 나 말고는 별로 만난 적도 없는 동생들이겠지만 아버님과 어머님을 생각해서 10만원
씩 보내라고 통발했다.
자식들은 시골에 선산이 있어도 아버지를 추모공원에 모셨다.
먼 곳에 모신 들 돌봐 드리기 더 힘들다고….
어머니 말씀처럼 우리도 어머니 돌아가시면 할아버지 할머니 묘소를 파묘해서 시골 뒷산에
뿌려드려야 할 것 같다.
이번에는 어머니 수술도 있었지만 삼형제가 모여 다녀오기가 갈수록 쉽지 않다 보니 추석 때
라도 제대로 보살펴 드리지 못하고 있으니 ….
살아가면서 수 많은 망자들의 빈소에 절을 하며 그 분들을 배웅하였는데 이제 60을 중반을
넘어가는 나이에 점점 더 가까워지는 죽음의 그림자를 의식한다.
한 치 건너 죽음이란 늘 담담하였지만 이젠 친구와 친척 아재 죽음까지 마주하다보니
어머니와의 이별을 일깨우는 신의 경고장을 받아 든 듯 마음이 자꾸 착잡 해진다.
삶이란 이별을 운명처럼 안고 가는 것이지만
세상에는 그 수 많은 이별연습으로도 결코 담담해질 수 없는 슬픈 이별들이 많다.
오늘도 슬픈 이별의 아픔을 딛고 꿋꿋이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심심한 위로와 격려를 보내고
아직 많은 이별을 감당해야 하는 나의 건투를 빈다.
아지매
관섭 아재 마지막 가시는 길 배웅 못해드려서 너무 서운하고 죄송합니다 ᆞ
아재가 좋은 곳에서 편히 잠드시길 바라고
아지매도 가슴아프시 겠지만 마음 잘 추스리시고 내내 평안 하시길 기원합니다 ᆞ
어머니와 저 둘째와 동생들의 작은 성의로 인사를 대신함을 너그러이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ᆞᆞ
대전에서 도영욱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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