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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제주도 둘째날 - (어리목-윗세오름)

 

 

 

제주의 날이 밝았다.

오늘 일정이 등산이라고 아침 든든히 먹고 출발하라고 은비가 일부러 조식이 유명한 호텔을

예약했다.

내 기준으로 너무 비싼

우리 같은 한물간 쉰세대는 다재기 한 숫갈 넣어 해장국 한 그릇 걸쭉하게 때리면 그만인데

사실 해외 여행 가도 늘 접하는 호텔조식이라 별 기대를 안했는데 여긴 완전 상설 뷔폐와 같은 풀코스다.

~ 보다 삶의 질을 위하여 아침을 승려의 식단으로 바꾼 지가 오래지만

딸래미 성의가 있고 견물생심이라 했으니 황제의 식탁에 앉아 감사 기도만 할 수 없는 노릇이라

다시 본색이 드러난다.

야들 외국인 카지노 운영하고 밥장사 까지 겸하느라 숙박비를 비싸게 받는 모양….

역대 왕들이 새남터의 망나니 보다 더 못살고 요절한 건 우리 삶에 관한 많은 것을 시사한다.

우리 유전자에 각인된 오랜 삶의 역사를 무시해서는 안된다는 거

 

매 끼니마다 조선팔도에서 올라 온 맛 있는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귀한 신분이라 땀 흘려 운동은

할 수도 없는데 매일 밤 천하의 미색들을 끼고 방사를 즐기니 금지옥엽 옥체인들 배겨날 수가

있는가?

그 뿐인가?

만인지상 지존의 자리에 대한 정신적 압박과 사사건건 바락바락 대드는 신하들

변방을 괴롭히는 오랑캐들예 뻑하면 생트집 잡아 군신이 예를 다하고 조공을 바치라고 으름장 놓는

떼국넘들 사대 당파 속의 국정운영과 역모와 시해의 스트레스 까지

뭐 하나라도 건강에 우호적인 환경이 있는가?

 

음식을 줄이고 마음을 비우고 혼탁한 인간세상을 벗어나 자주 자연으로 돌아가 우리의 삶을 더 단순하게

만드는 것이 인생 후반부의 건강한 삶의 비결이 아닐까?

 

마눌이 일부러 날짜를 맞추었는지 오늘이 한라산 철쭉제 시작일이다.

날이 흐렸지만 비소식이 없으니 별로 걱정은 되지 않는다.

어제 같은 땡 빛에 무더위가 계속되면 오히려 산행이 힘들어 질 것이다.

 

느긋하게 식사를 하고 어리목에 가니 그 넓은 주차장이 거의 만차고 한 켠에서는 철쭉제 참가자들이 출발

전 발대식을 하고 있다.

아침 8시 반 밖에 되지 않았는데.....

 

흐미 ~~

저 인파가 풀리면 어리목 등산로 정체가 심각해 지것네……

 

비가 안 온다더니 하늘이 더 흐려지고 비가 한 방울씩 떨어진다.

신령님 오늘 무릉객 왔어유!”

 

마눌을 채근하여 표석에서 인증 사진 한 장씩 찍고 서둘러 출발하다

무수히 왔던 제주도에서 딱 한 번 올랐던 길이다.

계절 까지 다르니 등로에 대한 아무런 기억이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그 산의 진면목을 제대로 보려면 사계절에 다 올라야 한다.

아니 산은 팜파탈의 여인과도 같아서  끼고 살지 않는 한 그 여인의 맨 얼굴을 볼 수가 없다.

옷과 헤어스타일 그리고 표정과 분위기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 보이는 여인처럼

계절의 변화가 몰고 오는 완벽한 페이스리프트에 태양과 별, 안개와 구름과 바람 그리고 비와 눈 등의

무수한 변수의 조합이 개입하고 그 메트릭스에  호산자의 심리까지 결부되면 우린 매 번 다른 산을

만나는 거다.

그래서 제주 귀신 김영갑의 말처럼 우린 매일 오르되 늘 다른 얼굴을 한 산을 만나고 부지런히 올라

댕기다 보면 숨이 멎을 듯하고 모공이 송연해지는 자연의 오르가즘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우린 뒤따라 오르는 사람들에게 등로를 양보하면서 천천히 제주 산행의 여유를 즐겼고 마눌은 다소

힘들어 하긴 했지만 생각보다 잘 올라 갔다.

 

울창한 숲은 싱그러웠고 조용히 가라 앉은 날씨에 숲은 더 짙은 피톤치드 향을 내뿜어 코를 뻥 뚫어

주었다.

출발선의 해발이 높고 고도가 자꾸 높아짐에 따라 숲의 녹음은 연초록 산색으로 점점 도드라 졌다.

여기는 아직 5월의 초봄 같다.

어쩌면 우리는 오늘 그 산과 계절의 기운을 받아 더 높이 오를수록 더 젊어 질지 모른다.

 

계곡의 물이 나오면 어리목 평전이 멀지 않은 거라고 했다.

1시간여 올라온 고지에서 신비롭게 흐르는 개울을 만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해발 1400미터 표석이

나온다.

벌써 1400미터 까지 올라 왔다고?

그리고 샘이 나와서 갈증이 나던 차에 한 바가지 떠 마시는데 그 차갑고 시원한 물 맛이라니?

이거 에비앙에 버금가는 삼다수 최상의 원수 아닌가베?

나는 알프스를 주유하면서 가는 골짜기 마다 에비앙의 원수를 원 없이 마셔보았다.

목젖을 꿀럭이면서

물이 설면 설사를 한다고 했지만 산에서 물을 마시고 잘못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무수한 날 내노라 하는 산들의 기를 받고 산에서 솟아나는 성수들을 마시고 그 흐르는 물에 목욕

재개하면서 세상의 진폐를 씻어 내었으니 내 어찌 사이비  신선의 반열일 망정 오르지 못할소냐?

 

드디어 다소 갑갑한 숲을 벗어나 광활한 어리목 평전에 도달하다.!

이렇게 광활하고 후련 했던가?

우린 평전의 초입 들마루 같은 데에 앉아 다리쉼을 하면서 간식을 먹고 주변의 풍경을 즐기며 천

천히 위세 오름을 향해 나아 갔다.

 

한라산 눈밭 뿐 아니라 철쭉의 화원도 이렇게 아름다웠던가?

난 셀 수 없는 정도로 세상의 수 많은 아름다운 비경을 돌아 보았고 그 때마다 최고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지만 오늘도 최고의 풍경이다.

지금 내 앞에 펼쳐진 풍경이 가장 아름답고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이 가장 소중한 것이니 진짜

내 생애 최고의 풍경은 아직 미답으로 남아 있다.

내 생애 최고의 풍경을 만나기 위해 나는 늙지 않아야 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찾아가는 발걸음은

멈추지 말아야 한다.

 

1500고지에 이렇게 광활한 평원이 있고 그 위에 꽃이 피어나고 샘이 솟아나고 맑은 물이 흐르니

여기가 이승의 경계를 허문 천상의 화원이 아니련가?

 

늘 신과의 동행이 느껴지는 제주도였다.

나 혼자 오르던 새벽 백록담에서도

마눌과 함께 했던 그 겨울의 장엄한 설국에서도

오늘 한라 신령님은 뜨거운 햇빛을 거두시고 고요히 가라 앉은 산록에 맑은 바람을 풀어 무릉객

을 환영해 주셨다.

벅찬 마음에서 파도처럼 물결치는 건 아름다운 세상의 감동 뿐이 아니었다.

내 평생 사랑한 산의 진정을 이렇게 알아 주시는 구나!

 

시간에 쫒길 일도 없다

옮기는 발걸음마다 시시각가 달라지는 아름다운 풍경이고 가던 길 뒤 돌아 보아도 한 폭의 그림

이니 이건 산행이 아닌 신선놀음이다.

이런 풍경을 바라보면서 평전을 가로 질러 위세오름을 거쳐 영실로 내려 가는 길이 혹여 힘들게

느껴진다면 남은 생애 삶의 많은 기쁨과 감동을 포기하여야 할 것이다.

 

한라산 만세!

대한 민국 금수강산 만세 !

우리는 절절한 감동 속에  평생 잊지 못할 풍경 속을 걸어 윗세 오름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