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군자산에서 첫눈을 맞았으니 서석대와 입석대에 빙결된 태고의 풍경과 광활한 고원의
눈꽃을 만나고 싶었다.
내 뇌리에 각인 된 어느 해 겨울의 장엄한 풍경 이었다.
“세월은 너울 너울 많이도 흘렀구나 …”
그 시절 친구들은 모두 어디로 가고 지난날의 쓸쓸한 감회에 젖은 할배 둘만 세월여행 중이다.
6시간 30분 정도 소요되는 무등산 환종주 계획이었다.
증심사 쪽으로 길게 돌으면 8~9시간은 걸릴 터라 원효사를 중심으로 동화사터를 가로
지르는 중봉능선을 따라 서석대에 오르고 그곳에서 인왕봉을 다녀와서 입석대와 장불재
규봉암을 거쳐 원효사로 돌아내리는 코스다.
오랜 세월에 미세한 기억들은 풍화되어 두루뭉실해졌다.
편안한 길이었고 안양산과 백마능선으로 이어지는 호남정맥 길은 부드럽고 아름다웠으며
규봉암은 마치 중국 산수에 은거한 도인의 암자인 듯 신비로운 모습으로 남아 있다..
철쭉과 함께 피어나던 백마능선의 봄도 기억 속에 남아 있지만 지배적인 느낌은 얼어 붙은 입석
대와 서석대가 무채색 질감으로 보여주던 태고의 장엄함과 가슴을 흔들 던 겨울 풍경화의 벅찬
감동이었다.
“그 해 겨울은 따뜻했네!”
뇌리에 남아 있는 서슬푸른 겨울의 풍경이라면 추워도 보통 춥지 않았을 텐데 고통의 기억은
죄 걸러지고 즐겁고 행복한 산행의 여운과 잔상만이 앙금처럼 남아 있어 마치 오늘은 오랜
친구를 만나러 가는 반가움이 가득한 여행길이디.
.
허기사 당시에는 고통이 또한 즐거움이었다.
고통은 언제나 기쁨과 등을 맞대고 있었다.
그것은 가슴 깊은 곳의 감동을 길어 올리는 기쁨의 마중물이었다.
호기심이 가득한 내 젊은 날 날카롭고 예민한 감성과 강철 같은 체력으로 누리는 세상의
눈부신 아름다움은 내 인생을 있는 그대로 풍요롭고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다.
삶에 대한 아무런 의문과 두려움도 없었고 나의 정신력과 체력에 대한 무한 신뢰가 있었다.
거기에 천지와 명산의 좋은 기운이 가세하여 휘몰아 치는 상승의 기류는 거침이 없었다.
단지 가보지 않은 더 힘들고 더 높고 더 먼 곳의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욕심만 드글드글했다.
원효사 주차장에 파킹하고 오르는 길
한 잎 나뭇 잎마저 남겨두지 않고 죄 떨어뜨린 빈 단풍 숲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20여분 도로를 따라 오르다 늦재 삼거리에서 산길로 접어들었다.
잠시 빈 숲의 산허리를 돌아 소나무 벤치 위 능선 길로 올라서자 태고의 바람이 불었다.
엄청난 바람이었다..
그래도 날씨가 푹한 날이라 바람이 쇳소리를 내도 살을 에이는 듯한 차가움은 아니었지만
바람의 세기로만 본다면 내 생애 만난 기억할 만한 그 어느 바람에도 필적할 만 했다.
소백산 비로봉과 문장대의 겨울바람
그 어느 해 새벽 해맞이 길의 남덕유 정상 바람
오늘 무등산 신령님은 내게 무엇을 보여주실까?
아련한 추억 속에 기대감이 펄펄 살아나는 바람의 여행길 이다.
아무리 바람이 세차게 불어도 이 길은 내 아름다운 추억으로 연결된 실크로드 였다.
그렇지 않아도 사위가 막힘이 없는 데 좀 더 높은 전망 바위 위에 서니 바람에 몸이 날라가
버릴 것 같다.
아래로 굴러 떨어질 까봐 바위 난간에 설 수가 없다.
내려와 길을 걷는데 몸이 길 옆으로 밀리는 강한 바람이다.
영하의 기온이 아니었으니 망정이지 지난 번처럼 기온이 급강하 했으면 오늘의 여장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산행이었을 지도 모른다.
중봉의 바람 맛은 압권 이었다.
그 바람은 내 가슴 잠자던 야성을 다시 깨워 냈다.
나는 광활한 고원에서 숨막힐 듯 불어가는 세찬 바람을 맞으며 나는 다시 리프레쉬 되었다.
살아가면서 가끔은 내 안의 에너지가 고갈 됨을 느낄 때가 있다.
나이가 있지 늘 푸른 소나무처럼 독야청청 할 수가 있으랴?
그 고갈은 반드시 체력적인 힘겨움 때문은 아니다.
마음이 지칠 때 무언가 무거운 짐이 되어 마음을 억누를 때 그런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나이가 들면 그런 시간이 좀 더 자주 찾아오고 그 회복의 꼬리도 느려진다.
젊은 날처럼 무시하거나 저항하지 않고 받아 들이려니 마음이 힘들어 하는 것이다.
그 고갈을 극복하는 너의 힘은 무엇인가 ?
삶이 시들해지고 세상사는 일이 재마가 없어질 때, 가슴이 답답할 때
그 때 너는 무엇을 하는가?
마음이 후련해지고 가벼워졌다.
광활한 무등 세상은 나를 무둥 태워 젊은 시절의 흥겨운 나로 되돌아가게 해 주었고
세차게 부는 무등의 바람은 내 마음의 깊은 곳까지 불어가 답답하고 단조로운 날들을
일거에 날려버렸다.
“그래 원래 나는 고원을 질주하는 야생마였던 거야 !
마구간에서 늘어지게 잠만 자다 보니 내 스스로 길들여져 버리고 지난 날의 영광과
감동을 잃어버렸던 거지,”
중봉에서 홀로 산님에게 사진을 부탁했는데
바람은 표석을 잡지 않으면 나와 조사장을 통째로 날릴 심산이었다.
ㅎㅎ 전혀 예상치 못한 장대한 바람 풍경이었다.
장불재로 휘돌아 가는 도로를 바라보며 옛 기억을 더듬어 본다.
나의 베이스캠프는 늘 증심사 구역이었기에 원효사에서 중봉을 거쳐 서석대로 오르는
이 길은 처음 가는 길이다 .
입석대와 같은 풍경이 있는 쉼터에서 바람은 고요했다.
조사장은 쉬지 않고 서석대를 향해 가고 산님 한 분이 쉼터에서 요기를 하고 있었다.
조사장도 식사터를 생각했겠지만 바람은 들이치지 않아도 볕이 들지 않는 곳이라 내처
올라 갔을 터이다.
오늘도 비장의 비닐 쉘터를 가지고 왔을 것이다.
산님과 인사를 나누고 이러저러 대화를 나누는데 거의 매주 무등에 오르는데 이렇게
세찬 바람은 이례적이라고 했다.
“ 영하로 떨어지는 날에 오늘 같은 바람이 불었으면 산행 못하지요 ”
광주 토박이님의 말로 짐작컨데 전혀 예상치 못한 갑작스런 바람이다.
오늘 무등 산신령님의 무릉객 환영 세리모니는 세찬 바람이었고 그 차지 않는 바람
결에는 사랑이 담겨 있었다
.
우리는 그렇게 서석대에 올랐다.
조사장은 인생 통산 첫 번 째 오르는 무등의 정상이다.
감회가 새로웠다.
산천은 의구하되 인 걸은 간 곳 없다.
나는 할배가 되어 돌아 왔고 그 시절 친구들은 모두 세월의 바람에 날려 갔다.
무수한 꽃이 피고 지는 것에 무심했으니 내 인생이 시들어 가는 것에도 초연해야 겠지.
어쩌면 내 인생은 야생의 풀 꽃과 화병이 꽃과 약봉지 거리만큼 남아 있는 셈이다.
이만 하면 더 욕심 부릴 것도 없지 않은가?
친구와 함께 건강하게 이 거친 야생을 누릴 수 있는 한은 내 인생에 아쉬움과 불평이란
사치스럽고 부질 없는 일일 뿐이다.
나나 조사장은 자연과 천지신명이 허락할 때 까지 끊임 없이 어딘가에 오르고 어딘
가로 걸어갈 것이다.
바램이라면 아주 오랫동안 아름다운 대자연의 누리며 내 영혼의 흥겨운 콧노래를
듣고 싶다.
오늘의 아쉬움이라면 인왕봉을 다녀올 수 없다는 거
코 앞에 보이는 인왕봉은 보수공사로 막아 놓고 마치 범죄 현장이라도 되는 듯 길목에
로프를 칭칭 감아 놓았다.
숲에 가리어 있으면 올라 갔다 오련만 서석대에서 빤히 올려다 보이니 그럴 수도 없었다.
조사장은 여기서 다 보이니 거기에 올라간 거나 마찬가지 아니냐고 하지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에베레스트 등정자들이 몇 백 미터 봉우리를 앞에 두고도 분루를 삼키며 회군하는
거와는 비교되지 않겠지만 하여간 서운했다.
인왕봉을 개방한다고 그리 떠들어 대더니만 이제 얼마 되었다고 그 길을 슬그머니 막느
냐는 말이다.
개장 광고는 엄청 해대고 폐장 광고는 없었으니 우리 말고도 개방한 인왕봉을 염두에
두로 무등에 오른 사람도 꽤 많았을 터인데 모두 실망하고 돌아 가야겠다..
입석대 까지 가는 길 반석바위에서 비닐쉘터를 두르고 점심 식사를 했다.
바람의 악사가 공연하는 째즈는 거의 광시곡 이었다.
쉘터를 걷어버리려는 듯 미친 듯 불어대는 바람을 막기위해 사투를 벌이면서 또 그
우뢰와 같은 음악을 들으면서 어쨌든 우린 온실 속의 화초처럼 따뜻한 가운데 점심
식사를 했다.
이마에서는 땀까지 났다.
단지 간발의 차이 였다.
입석대 데크가 그렇게 잘 되어 있을 줄은 몰랐다.
그 곳에서 임시 베이스 캠프를 만둘었으면 천하절경을 보며 감미로운 묵음의 부드러운
선률 속에서 조용한 만찬을 즐길 수도 있었을 텐데….
대학생들 몇 명을 만나 서로 사진을 부탁하고 아얘 돗자리를 깔고 난간에 기대어 휴식
하고 있는 광주 아줌씨를 만나 무등산에 관한 이러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최상의 컨디션으로 누리는 기분 좋은 무등산이었다.
우린 장불재로 하산했다.
광활한 고원의 평원
내 젊은 날의 추억과 웃음이 허공에 떠돌고 있는 곳이다.
왈칵 그리움이 밀려와 코 끝이 찡했다.
내가 시방 65살이 맞아?
백두대간 두 번에 무수한 정맥 길
손바닥의 실금 같이 무수히 퍼져 있는 길을 따라 걷다 보니 벌써 해거름이다.
인생이란 아무 것도 아니었어 !
소로가 그랫던 것처럼 삶이란 의미없이 이 쪽에서 저 쪽으로 돌을 던지는 무의미한 행동이었는
지도 몰라.
최고의 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고 떠들어 대고 았지만 마음은 벌써 내리막을 걷고 있음을
다 알고 있는 거지 …
규봉암 가는 길은 돌 길이었다.
그 길의 기억은 뚜렷이 남아 있었다.
규봉암은 상전 벽해였다.
마치 어느 중국의 절에 온 것처럼 이국적이고 웅장하게 변해 있었다.
세월이 흐르긴 많이 흐른 모양이다.
광주시는 절벽에 은거한 암자의 관광 잠재력을 알아 챘을 터이고…..
예전에 없던 축대와 담을 쌍아 성처럼 위풍당당해졌는데 마치 암자가 대찰로 환골탈퇴
하려는 위세였다.
장불재에서 1.7 km지점에 규봉암이 있고 꼬막재 까지 5km가 넘으니 꽤나 먼 거리였다.
이 길을 몇 번 걸었는데 이렇게 먼 길 이었음이 오늘 다시 걷고서야 비로소 새삼스러워
진다.
부드럽고 평탄한 길이었다는 기억과는 달리 길은 기복과 낙차도 제법 있고 발이 불편한
돌길이라 만만치 않은 길이었다.
오랜 세월이 일으킨 풍화작용이고 내가 세월에 낡아간 탓인 게다.
조사장은 막바지 여정을 다소 힘들어 했다.
후덕한 무등의 이미지로 내가 제시한 6시간 30분이 너무 널널하게 시간을 계산한 것으로
판단했던 조사장은 가도 가도 보이지 않는 꼬막재가 더 길게 느껴졌을 것이다.
원효사 하산 까지 꼬박 6시간 30분 걸렸다.
에상시간에 딱 맞아 떨어졌지만 장불재에서 인왕봉 까지 다녀왔더라면 7시간이 훌쩍 넘어
갔을 것이다.
전혀 기억에 남아 있지 않은 장거리 여정이었다.
하지만 난 바람의 여정이 즐겁고 만족스러웠다.
호젓하고 조용한 장성읍을 떠올리다가 조사장은 광주 첨단지구를 낙점했다.
호텔도 많고 식당도 좋은 곳이 많다고 한다.
우린 광주시내 첨단지구 시내로 이동해서 깨끗해 보이는 비즈니스 호텔로 들어 갔다.
나중에 알았지만 숙박비가 78000원 이었다.
헐 ~ 술먹고 쓰러져 자면 아무 것도 모를 텐데 너무 비싼거 아녀?
허기사 조사장 가진 돈 이런 곳에 아무리 써대도 표도 안날 것이다.
조사장 스타일 대로 쓰면 반도 못 쓰고 다 외동 아들 주고 가야지 ..
호텔을 예약하고 우린 저녁 식사를 위한 식당을 물색 했다.
아무리 첨단지구라 해도 소고기는 잘 안 먹는 조사장이다 보니 한바퀴 돌아도 술과 함께
먹을 만한 곳은 횟집 밖에 없었다.
횟집 두 군데를 찜했는데 의견이 갈렸다.
나중에 상태 보고 들어가기로 하고 호텔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네온이 휘황찬란한 거리를
걸어서 식당으로 갔다.
두 식당 중 내가 좋을 것 같다는 횟집은 순식간에 문전성시였다.
테이블이 두 개가 남아서 우린 그 곳에서 식사하기로 했다.
소주 다섯 병에 맥주 한 병
과음이었다.
건강을 위해 열심히 산 탄 건 도루묵이 되겠지만 기분은 업 되고 정신적인 만족감을 고려하면
남는 장사였다.
게다가 나는 빈 몸과 맨 입으로 누리는 호사 아닌가?
기분 좋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거나하게 마셨다.
매운탕 대신 무신 일본 생선 말린 구이 안주를 더 시키는 바람에 식사가 부실한 것 같아서 라면
이나 하나 먹자고 했는데 조사장은 다시 전통 주점으로 갔다.
하도 많이 먹어 배불러 죽겠는데 조사장은 말릴 새도 없이 전과 홍탁 막걸리 까지 주문했다.
“이이고 이걸 누가 다 먹누 ?”
하여간 막걸리 몇 잔 마시다가 조사장이 1/3 도 안 먹은 술안주를 그대로 두고 가자고 한다,
헐 ~~
내가 남은 건 싸가자고 하니 됐다면서 손사레를 치고 계산해 버린다.
흐미 ~~ 조사장 술 취했어!
불바다 네온 싸인 도로 한 가운데 나오니 갑자기 방향감각이 없다.
길을 물어 호텔을 찾아가렸더니 조사장이 택시를 잡아 버려서 할 수 없이 타고 갔는데 내
생에 택시타고 간 가장 짧은 거리였을 게다.
호텔에 들어 마눌과 혀 꼬부라지는 소리로 통화하고 티브이를 겼는데 내 기억은 거기 까지였다.
8시간 퍼자고 일어나니 가관이었다.
불은 훤하고 Tv는 저 혼자 떠들고 있고 나는 웃통을 벗은 채로 침대에서 널부러졌다가 깨어났다.
잠자리에 대한 아무런 기억이 남아 있는 않는 시체와 같은 숙면이었다.
7시에 조사장 전화가 왔다.
왜 안 내려오냐고?
7시 30분 아니었나?
아 7시 출발이었구나 !
가다가 정읍 휴게소에 들렀는데 내장탕을 안먹는 조사장이라 키오스크에서 조사장은 라면을
빼주고 나는 정읍 국밥을 먹으렸더니 조사장도 국밥을 먹겠다고 했다.
세상에나! 조사장은 그 국밥이 맛있다는 소리를 몇 번이나 연발하면서 그 많은 국밥 국물까지
남김없이 먹어 버렸다.
"소내장탕 전통 국밥인데 원래 안먹는 거 아녀?"
조사장은 안 먹는 게 아니라 의사들이 안좋다 하니까 안 먹었던 것 뿐이었다.
하여간 바람과 같이 간 무등 여행은 힐링과 리프레쉬였고 우리 둘의 삶과 영혼을 위로하는
즐거운 여행길이었다.
산 행 일 : 2023년 12월 8일
산 행 지 : 무등산
산행코스 : 원효사 – 늦재 갈림길 – 동화사 터 – 중봉 –서석대 –입석대 –장불재-규봉암
– 꼬막재 –원효사
소요시간 : 6시간 30분
날 씨 : 맑고 엄청난 바람
동 행 : 조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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