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를 보내는 빈소는 외롭지 않았다.
내 근조 화환도 예상외로 7개가 들어 왔지만 셀 수 없이 들어 왔다.
나중에는 놓을 장소가 마땅치 않을 정도 였다.
대우건설 소장으로 있는 영수 화환이 대부분이었지만 밀려드는 국화 꽃의 파도는
엄청난 위세 였고 그 향기는 빈소에 가득했다.
코로나가 휩쓸고 지나간 이후에 다시 복원되는 엄청난 리바운싱 이었다.
어머니 장례를 모시면서 나의 기준이 조금은 부끄러워 졌다.
아주 친한 친구는 20 만원
계속 만나며 관계를 이어가는 친구는 10만원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5만원
퇴직 후의 어쩔 수 없는 긴축재정으로 경제적인 관점에서 세운 기준이었다.
코로나 때는 친한 친구들도 경조금으로만 대신 했다.
어쩌면 코로나는 좋은 핑계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그런 문화는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친한 친구들은 만사를 제쳐 놓고 달려와 내 슬픔을 위로해 주었다.
중학친구들, 고교친구들, 대학친구들, 군대 친구들 그리고 사회 친구들 ,회사 OB 친구들
백도김 모임, HIOF , 78ENG, 이기자전우회, 전인회, WOLF
모두가 나의 인생 후반기를 함께하는 소중한 친구들이다.
한재규 대표이사는 강태엽 재무이사와 함께 손수 찾아 주었다.
수 년 째 만날 일 없이 소원 했던 대선배님들 배회장님,박전무님, 김감사님,강이사님도
조문해 주셨고 우성을 떠나 업계에서 대표나 간부로 활약을 이어가는 후배들도 대거
서울이나 당진 등 멀리에서 늦은 시간에 방문해 주었다.
경원영업소 하차장 관리 이태원사장과 벌크기사 3명이 같이 원주에서 달려 왔다..
벌크 운송 기사님들은 주문이 들어 오면 바로 차를 몰고 나가야 하는 데 밤 늦게 까지
운송할 생각으로 달려 내려 온 거다
헐~ 난 그 정성에 감동 먹고 소리쳤다.
‘다 내려오면 영업소는 누가 지키냐고?”
내가 잊고 있었거나 생각지 못한 많은 사람들의 방문은 정말 뜻 밖이었고 예상 밖이었다.
나는 지인들의 애경사를 챙기는 기준에서는 아얘 수준 미달의 사람이었다.
코로나가 맞물려 있는 기간도 있었지만 멀리 있다는 핑계로 친한 친구나 회사 동료의 상가도
거의 조문하지 못하고 조의만 표했다.
친한 친구 자녀의 결혼 또한 그런 경우가 많았다.
봄.가을 내 일정은 노는 계획으로 늘 빽빽 했는데 야외 나들이 씨즌은 애경사와 또한 많이
겹칠 수 밖에 없었다.
몇 달 일찍 잡는 계획이지만 내가 거의 많은 모임의 여행길을 주도하다 보니 다른 사람처럼
쉽게 빠질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많은 결례를 범하고 말로 때운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는데 친구들과 동료들은 그런 것에
아랑곳 하지 않고 많이 찾아 주었다.
산친구와 선배들도 많이 찾아주거나 조의를 표했고 한림정은 출장 중이라고 직장생활하는
부인을 대신 보냈다.
전산실 직원들은 현직이든 퇴직이든 할 것 없이 100% 조문해주었고 그 옛날 전산실장 시절에
함께 일했던 진솔루션 대표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조화를 보내고 조문을 해주었다.
그는 20년 전 나와 맺은 악연(?)으로 끊임 없이 나의 애경사를 챙겨오고 있다.
예전에 같이 근무 했던 직원들은 회사를 떠났거나 근무하거나 상관 없이 많은 조문과 조의를
표했고 논산공장과 아산공장의 많은 여직원들도 조의금을 보내왔다.
어머니는 보내는 그 시간을 또한 나를 돌아 보는 시간이었다.
그 시간은 또한 관계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었다.
진심 만이 통할 수 있는 ….
그 짧은 한 줄의 부고장 하나로 갑작스럽게 통보 된 하루만의 장례임에도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어머니 빈소를 방문해 주었다..
어머니가 흐믓하게 내려다 보시는 것 같아 상중에도 마음이 편안 했다.
음식값만 1500만원 정도 들었다.
국과 밥이 450인분 , 기타 수육,과일,기타 음료 술,떡값 인데 인당 33,000원 정도 소요된
비싼 가격이긴 하지만 단 하루 만에 많은 조문객들이 문전성시를 이루어 어머니의 가시는 길을
밝혀주고 또 아픈 가슴을 위로해 주어 슬픔에 잠길 틈이 없었다.
어제는 먹먹한 가슴으로 깨어나 사우나를 다녀오고 마눌과 아침겸 점심을 먹고 봄철 등산
바지와 티셔츠를 사가지고 돌아 왔다.
저녁에는 조문객의 명단을 정리하고 답신 메시지를 넣었는데 아버님 돌아가셨을 때처럼 이번
에도 일일이 개인 답글문자를 보내고 전화를 했다.
이번에는 그 때보다는 수가 적어 훨씬 수월한 편이었지만 어제 오후에 이어 오늘 3시까지 이어졌다.
세월도 많이 흐르고 세상도 많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상가에서 고스톱을 치며 하루를 꼬박 새워 친구의 아픔을 위로 했다.
조문 문화가 바뀌고 나서도 친한 친구나 더 친해지고 가까워지고 싶은 사람의 상가는
일부러 밤늦게 갔다.
한가한 시간에 오래 얘기를 하다 보면 친구와 더 가까워 질 수 있으니..
산에 반쯤 미쳐 있던 시절에는 그 전날에 가서 아얘 그 지역 유명산 아래서 자고 산을 타고
내려와 결혼식장에 들르거나 밤 늦게 조문하고 그 다음날 산을 타고 돌아 오기도 했다.
그 역동적인 시절은 지나갔다.
세상은 바뀌고 어머니도 가시고 나 또한 늙어 간다.
"엄마 49제가 안 지났으니 아직 우리 곁에 있는 거지?
국화 꽃 냄새가 등천하는 길을 따라 엄마 보내는데 마음 아프지만 그래도 뿌듯하더라
영수 파워가 새삼 막강했고 다른 형제들도 많은 사람들의 조문과 위로를 보내 주어
엄마를 보내는 날임에도 쓸쓸하거나 외롭지 않았어
엄마가 몸소 보여 주신 삶이 수 많은 정성으로 꽃 피어난 날 이었네
엄마
나도 그래도 잘 산 것 같아
경로우대대 할배 은퇴한지 10년이 다 되는데 이 정도면 아즉 쌀아 있는 거지?
관섭아지매 하고도 통화하고 이자 누나 종태형 조희형 그리고 미자 미숙
다 통화 했어.
삼촌도 오셨고 영애 기호 기수도 다 왔는데 삼촌도 이젠 예전 같지 않으시네
삼촌도 걱정스럽고, 기수와 기태도 걱정스럽고 ….
엄마 우리 형제들은 걱정하지 마세요
먼 길 가시는 길에 보셨듯이 다들 씩씩하게 잘 살아 갈 거예요."
2024년 3월 16일 (토) 천붕 2일째 (소천 5일째)
'어머니49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천붕 7일째 - 아름다운 시절 (0) | 2024.03.24 |
---|---|
천붕 6일 째 - 부처님의 뜻 (0) | 2024.03.20 |
천붕4일째 - 어머니 친구 (0) | 2024.03.19 |
천붕 3일째 -어머니의 일기 (0) | 2024.03.18 |
천붕 1일 째- 엄마 편히 쉬세요. (0) | 2024.03.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