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친구가 세상을 등진다는 건 슬픈 일이다.
난 친구 영수가 중환자실에서 떠나며 걸었던 마지막 전화를 잊을 수 없다.
“ 영욱아 잘 지내라 !”
내가 퇴직하고 여행을 떠난 던 날 영수는 기어코 동해 까지 쫒아 와서 술 한 잔 따라 주었다.
그 날 이후 우린 생애 딱 한 번의 부부동반 여행을 함께 했다.
그리고 둘째 아들까지 다 장가 보내고 살만 해지고 나서 친구는 그렇게 홀연히 떠나갔다.
1 년 전 투병 중에 시내에서 만나 점심 한끼 하고 어느 날 함께 대청호 산책 한 번 한 것이
우리 만남의 끝이었다.
만남을 차일 피일 미루면서 전화 속의 언어는 점점 어눌해져 갔고
갑자기 바빠진 내가 몇 주간 전화를 못하자 먼저 전화를 해 온 것이었다.
“ 영욱아 잘 지내라 !”
그 전화는 중환자실에서 한 영수의 마지막 인사였다.
난 영수가 6월부터 중환자 실에 있었다는 걸 비로소 부인에게 들었다.
중환자실에서 죽어가던 친구의 마지막 인사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근황을 묻고
치료 잘하라는 상투적인 내 얘기만 한 것이다.,
난 하나의 생명이 그렇게 허약한 것이었음에 다시 아연했다.
어깨와 등에 진 짐 모두 내리고 허허롭게 술 한잔 나누면서 그렇게 살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날에 친구는 그렇게 모든 걸 다 내리고 아주 가벼워 진 채 훨훨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친구야 어쩌냐?
우린 아무런 이별 준비를 하지 못했는데…..
무릉객 이별 연습 중 2022년 9월
죽다는 것은 내 안에서 무언가 하나씩 허물어 지고 사라지는 것이다.
삶은 죽음과 연결되어 있지만 인식의 끈은 짧은 인생보다도 더 짧고 죽는다는 것은 너무도
아득해서 생각조차 쉽사리 그 끝에 닿을 수 없다.
살아감이 바쁜 우린 천천히 다가오는 그림자 조차 아랑곳 하지 않는다.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욕심과 집착은 마치 영생을 누릴 것처럼 만족을 모른다.
산 그림자려니 ….
그 그림자는 누군가의 외로운 노을과 함께 서산으로 뉘엿뉘엿 넘어갈 뿐이다.
누구나 생각한다.
나의 황혼은 노을처럼 낭만적일 것이다.
하지만 늘 푸를 것 같은 청춘도 시들고 마냥 넘치던 샘물도 바닥을 드러낼 때가 온다.
가끔 내 주변을 흘끔 거리는 사신(死神)을 본다
죽음이란 세월의 바람에 내 안의 모든 것들을 날려 버리고 마지막 남은 나의 몸이 한줌의
재로 훨훨 날아가는 것이다.
열씸히 살아가는 어느 날 죽음이 손을 흔들며 내 옆을 지나간다.
우린 비로서 죽음의 존재를 깨닫고 그가 내게 조금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우린 어떤 기준으로 운명이나 신이 우리 삶에 개입하는 지는 잘 모른다.
전생의 업보인지? 아니면 현생에 쌓은 덕인지?
죽음에 관해서는 더 그렇다.
누구보다도 존경을 받고 또 믿음에 독실하셨던 김수환 추기경님이나 법정스님은
마지막 길을 떠나실 때 많은 고생을 하셨다.
신은 그 충실한 대리인들 조차 세상을 떠나는 고통에서 면제해주시지 않으시는 걸 보면
옛말처럼 삶과 죽음이 그냥 다 정해진 운명이고 타고난 팔자 인지도 모른다.
단지 삶의 의지와 노력이 그 정해진 틀에서 더 나은 삶을 살게 하는 동력이되는 것이고...
난 오늘도 어머니가 남은 여생을 많이 아프시지 않고 돌아기시길 기도한다.
짧은 시간이 남아 있을 망정 지금 만큼이라도 건강하시다가 편하게 눈을 감으시면
좋겠다..
남들은 자식과의 정이 돈독할수록 그 정을 떼기 위해 자식들 고생시키다 가신다고
하는데 어머니는 떠나실 때 조차 그렇게 모질지 않을 것 같아 더 슬프다.
무릉객 에세이 죽음이 내게 말했다. 2014년 4월
내 바람대로 엄마는 너무 힘들지 않게 그렇게 훌쩍 떠나셨다.
평소 살아오신 방식대로 행여 자식들에게 누가 될세라 모든 이별 준비 해 놓으시고
그렇게 서둘러 떠나셨다.
젊은 날부터 늘 어머니 가까이에 있었고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일주에 한 번은 찾아 뵈며
살아왔지만 떠나시고 나니 모든 게 아쉽고 죄스럽다.
좋은 날의 기억도 많은 데 난 엄마와 뼈아픈 이별을 나눈 효동에서의 이틀 밤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다.
오랫동안 어머니 주변에서 어머니 친구들을 지켜 보았다.
80이 넘은 삶은 자신의 삶이 아니었다.
그건 살아 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 내는 것이었다.
마리아 아줌마는 늘 엄마에게 신세한탄을 했다..
우리 어렸을 때는 참 잘 사셨는데 자식들이 힘들어 지고 몸이 아프시면서 마음이 편치
않으신 탓 이었다.
침으로 기구한 운명이었다.
남편은 아파서 거동이 불편하고 당신도 불편하신 데 큰 아들은 이혼 후에 객지를 떠돌고
작은 아들은 독신으로 살다가 부모를 앞서서 떠났고, 딸은 남편을 먼저 떠나 보냈다..
아주머니는 아픈 다리와 아픈 몸으로 손주와 소녀를 돌보아 왔다.
한 동네 살았던 은희 엄마는 벌써 수 년 째 노인 병원에 계신다.
송옥숙 아주머니는 극진한 자식들의 보살핌 속에 잘 살아 오셨지만 관절 수술 하시고 나서 오히려
거동도 불편하고 건강이 눈에 띠게 악화 되셨다..
갑작스런 어머니의 병세 악화를 참으로 안타까워하고 아파하셨고 통화가 안되는 어머니 대신
내게 절절한 마음을 토로 하셨다.
엄마와 관계가 각별했던 기호 아줌마는 80이 넘은 나이에도 아픈 몸으로 병든 남편을 병수발하고
이혼한 자식의 손주들을 돌보며 어렵게 사시다가 어머니 가시기 몇 달전 그렇게 떠나셨다.
치매에 걸린 남편 노인 병원에 남겨두고서...
예전에 어마 집에 들르면 가장 많이 같이 계시던 어미니의 절친 이었다..
많은 어머니 친구분들이 먼저 세상을 떠나셨고 남은 분들은 빈소를 찾을 상황이 되지 못했다.
어머니와 고스톱 치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던 곽길자 아주머니는 봉투에 애끓는 슬픔의 편지를
써서 봉투와 함께 보내셨다.
김낙충 아줌마,홍숙일 아줌마, 최기화 아줌마마 , 이순희 아줌마 등 많은 분들이 장례 다음날에
어머니 댁에 찾아와 그곳에 남아 있던 여동생에게 조의를 표하셨다.
수 많은 이 땅의 어머니들이 그렇게 남을 위해 살다가 힘들고 어렵게 세상과 이별하거나 혹은 죽음
보다 더 힘든 삶을 살아 내신다..
슬픈 어머니 시대의 아픔이이었고 늙어가고 낡아가는 살아 있는 모든 삼라만상의 운명이었다..
헌화와 조종은 그렇게 오래 이어졌다..
많은 죽음이 내게 역설적인 삶의 통렬한 의미를 일깨우고 삶의 태도에 관한 교훈을 주었지만
어머니의 소천은 삶의 허망함과 가득한 슬픔을 일깨웠다.
그 슬픔은 오래 지속될 것이었다.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으시고 많은 사랑과 희생을 베푸시면서 행복을 느끼
셨다.
헐벗고 굶주려도 잘 살아 주는 자식들로 인해 배부르셨고 다 커서 휘청거리는 아들들의 슬픔에
그 마른 가슴이 또 아프고 저리셨다.
나는 어머니처럼 그렇게 살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좋은 아버지도 되지 못하고 그렇게 대접받는 아버지가 되지도 못할 것이다.
청개구리 자식은 어머니 죽음에서 이제 정말 나를 위해서 살아야 할 삶의 교훈을 되새기려 노력할
이다.
난 어머니 뜻대로 여전히 씩씩하고 즐겁게 살아갈 것이지만 세월은 다시 그 아들을 쇠약하게 만들어
갈 것이다.
쓸쓸한 장례식을 준비하면서…..
괜찮다.
니 마음대로 해라 !
내 마음의 등불이 꺼졌다.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지만 예전 같지는 않을 것이다.
분명한 건 세상의 절대선과 절대적인 사랑이 영원히 사라졌다는 것이다.
2024년 3월 18일 (월) 천붕 4일 째 (소천 7일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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