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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49제

천붕 7일째 - 아름다운 시절

 

 

 

아름다운시절

 

부엌에서 아궁이 불 때는 냄새가 좋았다.

한 여름 호롱불 아래 밥을 먹을 때 마당에서 태우는 모깃불 덤불 향을 아직 기억한다.

어머니가 대전으로 올라 가기 전 5살 이전 시골에서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 있는 게 있다.

외할머니 돌아가셨을 때 누구의 등 엔가 업혀서 상여를 따라 산길을 오르던 기억

할머니 등에 업혀 마실 댕기던 기억.

그리고 다섯 살 때 까지 젖을 먹었는데 어느 날 하루 놀다가 돌아 오니 어머니가 젖에다가

빨강 물감을 칠해 놓고 이젠 젖을 먹을 수가 없다고 하시는 통에 마당을 구르며 울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열차를 타던 기억이 있다.

배웅하던 할머니를 떨어지지 않으려고 울던 기억

어머니한테 가면서 할머니 보고 울다가 막상 할머니 한테 가서 어머니가 손을 흔들면 또

머니한테 가려고 울던 갈피를 잡지 못하던 어린 날의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이제 경로 우대자의 목전에 서 있는데 생각을 떠올리면 가물 가물 피어 오르는 5살 이전의

기억이 신기하기도 하다.

나는 시골에서 보기 드문 퉁퉁한 우량아 였고 내 이름은 기철이었지만 사람들은

이라고 불렀다.

할머니는 몸이 약해서 밭일을 거의 안하시고 나를 업고 마실 다니는 것이 일이었다.

 

내가 다섯 살 때 어머니는 고향을 등졌다.

한 번 시집오면 그걸 운명으로 알고 평생을 농군의 아낙으로 살아야 하는 그 시절 

당시 엄하기로 소문난 할아버님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어머니는 단호하게 시골을

떠났다.

이불 한 채 만 달랑 가지고 자식을 교육시키겠다는 일념으로….

지금 생각하면 그 때 낙담하고 실의에 빠졌을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경악과 충격 이었을 것이다.

60년대 장남이 부모를 버리고 객지로 나간다니…..

그리고 대전에 와서 한약방에 취직하고 이후 일자리를 얻어 아버님을 불러 올리기에

이른다.

그 때 대전에서 유명했던 혜화당 원장과 그 부인과의 인연으로 훗날 동생 영희가 대학을

졸업하고 당시 혜화당에서설립한 대전대학교 교직원으로 취업 까지 할 수 있었으니 말단

일을하던 어머니의 삶의 적극성과 성실성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우리는 처음 이사해서 삼성동 주택에 딸린 단칸방에서 세 들어 살았다.

그 곳에서 어머니는 동생 영희를 낳았다.

그 때 주인집 아줌마는 삼성초등학교 선생이었고 은경이란 또래의 아이가 있었는데 내가

매일  그 애와 놀다가 꼬집히고 할퀴어서 들어와 어머니가 많이 속상해 했던 기억이 있는데

어느 날인가 는 내가 그 아이를 심하게 할퀴어서 난리가 난 적이 있다.

그 집 할머니가 인자하고 좋으신 분이었는데 내가 은경이와 놀고 있으면 꼭 같이 불려 들여

먹을 것을 주시곤 했다.

정이 많으신 분들이라 문창동에 이사 와서도 할머니와 어머니의 친분은 계속 이어졌다.

난 어릴 적 소문난 울보였다.

지금 생각하면 어릴 때 많이 운 사람이 감정과 감상이 훨씬 풍부한 것 같다.

조선 펄도에도 흔치 않을 울보 정은이는 어릴적부터 창의력이 풍부하고 독창적인 사고가

남달랐다.

지금은 인터넷 창작활동을 지원하는 회사에 근무하는데 글 쓰는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자신의

적성과 재능에 맞는 길을 걷고 있다..  

 

1년인가 삼성동에서 살다가 어머니는 돈을 모아 문창동으로 이사 갔다.

문창동에서 세를 들어 살다가 집을 샀는데 좋아하시던 어머니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사실 그 집도 혜화당 원장의 소유였는데 부모님이 거기 세를 들어 기거하다가 당시 시세로는

엄청 싼 값으로 사게 되었던 것이다.

그 당시 대전 천 변에 있던 우리 집은 땅이 상당히 넓어서 어머니는 그 마당에 상추나 깻잎

등의  채소를 심으셨고 나는 그 안에다가 메추리도 키웠는데  나중에 그 앞의 작은 도로가

넓혀지는 과정에서 일부가 시에 수용되었고 그 후에도 한 번 더 도로에 편입되어  앞 마당을

거의 잃어 버리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아쉽고 안타까운 일이었다.

어머니는 그 곳에서 영수를 낳고 그 이듬해에 또 임신을 하셨다.

당시 힘든 생활 탓에 도저히 키울 여력이 없다고 판단하신 어머니는 낙태를 많이 고민 하셨

지만 결국 낳기로 결정 하셨다.

그런데 낳고 보니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다...

그렇게 해서 일란성 남,녀 쌍둥이 영태와 영숙이 우여곡절 끝에 동생으로 태어났고 어머니의

삶은 또 다른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

아무리 지 먹을 거 다 가지고 나온다고 생각하며 자식들을 낳던 시절이었지만 어머니의 정신

적인 중압감을 상당하셨을 것이다.

아이가 세명이 되면서 어머니는 애들을 키우며 살림 하시느라 살이 쭉 빠졌고 얼굴에는 까만

기미가  잔뜩 끼었다.

아이들 울음 소리에 밤잠 인들 제대로 주무셨을까?..

말이 그렇지 아이들이 둘 있는데 갓난아기 세명을 더 키워야 하는 상황이었으니 어머니가

겪었을 정신적인 부담에 겹친 육체적인 피로는 상상을 초월한 수준 이었을 것이었다.

과로로 쓰러지지 않으신 게 천만다행 이지만 사실  쓰러질 수도 없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그 후 한꺼 번에, 아기 셋이 감당하기 어려웠던 어머니는 급기야 시골에 있는 언니에게 도움을

청했고 고종사촌 격이 되는 정순이 누님이 내려와 몇 달간 아기들을 돌보아 주셨다.

아이를 돌보는 와중에 엄마와 정순이 누님은 방 안에 피워 놓은 난로 위에 주전자를 올려

털실을 주전자 안으로 통과 시켜 뜨개질을 하곤 했다.

어느 날 저녁에도 그렇게 뜨개질을 하는데 난로 위에 얹어 놓은 주전자가 넘어지면서 누나가

심하게 발을 데는 일이 발생했다..

어린 기억에도 허물이 다 벗겨지는 커다란 화상이었다.

어머니는 당시 아이 다섯을 키우며 살아가느라 경제적으로도 힘든 상태여서 동생들을 돌봐준

정순이 누님에게 사례를 할 형편이 아니었다.

돈도 주지 못하고 발에 화상 까지 입고 채 고향으로 돌아가는 정순이 누님이 얼마나 안스럽고

미안하셨을까?

어머니는 정순이 누님을 평생의 빚으로 안고 살았다.

그래서 늘 고향 사부리 부모님 산소에 가보시고 또 정순이 누님을 만나 그 때의 수고비를 정산

해마음의 빚을 청산하는 것이 어머니의 소망으로 남았다.

우릴 키우시는라 늘 생활고에 시달리시던 어머니는 결국 그 기회를 만들지 못하신 채 또 많은

세월이 흘러 갔고 장성해서도 지 살기 바쁜 자식들은 그 어머니의 마음을 살펴드리지 못했다.

그냥 흘려 듣다가 병세가 위중한 날에 서야 비로소 계획을 잡았지만 그날은 또 유독 어머님

건강이 좋지 않으셔서 결국 어머니는 그렇게 마음의 빚과 응어리를 안고 먼 길을 떠나신 것이다.

 

다섯 아이들을 키우시며 마주하는 세상과의 전쟁과 혹독했지만 어머니는 늘 중심을 잃지 않고

두려움 없이 세상과 맞서 나갔다..

우리집 문간방에는 종숙이네가 세들어 살았고 한 때는 사진사였던 정인이 형과 복싱 선수 였던

광호형이 하숙을 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머니는 완전 슈퍼우먼 이었다.

이이 다섯을 키우면서 살림을 하고 하숙생 밥 까지 해대던…..

우린 어머니와 같이  화물 꼬리표도 만들고 사탕 봉지도 싸는 부업을 했다.

나중에는 봉투도 붙였다..

엄지와 검지에 못히 박히도록 해도 얼마 안되는 돈이지만 영희까지는 인력 종원이 가능했다.

 

그 이후로도 곤계란집,속초가족, ,성자네,동현네 등 많은 사람들이 우리 집 문간방을 거쳐 갔다

초등학생이 된 내가 돌봐야 하는 동생들이 네 명이나 되니 학교에 갔다 오면 아이 한 명은

내 전담이 었고 나는 포대기를 둘러 생을 업고 시장을 밥 듯이 다녔다.

 

 

 

 

대전에 살면서 나는 아버지와 방학 때면 시골에 내려 갔다.

가끔은 영희를 데리고 가기도 했다.

기차를 타고 갔는데 덜컹거리는 기차의 기억이 너무도 좋았다.

가면 온 마을사람들이” ‘이 왔네  ~ ‘이 참 많이 컷네 하시면서 반겨 주셨다.

중학교 때까지 시골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서 모두들 호롱불 아래서 생활했다.

여름에는 멍석을 깔고 마당에서 저녁을 먹었는데 할머니나 작은 엄마는 늘 나를 할아버지와

겸상하여 밥을 먹게 하셨다.

할아버지는 말 수가 적으셨지만 깊은 정이 있으신 분이셨다.

나는 항상 사랑방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잤는데 어느 날부터 인가는 코고는 소리에 내가 잠을

못 자는 걸 알고 볏단을 갖고 산에 가서 주무시고 내려오셨다.

소여물을 쑤느라 방이 너무 더워서 잠자기 힘들어 하자 그 다음부터는 내가 오면 아얘 다른

곳에서 물을 쑤셨다.

할아버지는 가끔 대전에 오셨지만 하룻밤을 주무시고 나면 서둘러 내려가셨다.

 

할아버지는 위암으로 돌아가신 것이었다.

동네에서 약만 지어드시고 그 어머어마했을 통증을 혼자 견디시다가 속이 다 썩어서야  막판에

병원에 가셨고 어머니의 가슴에 다 썩어내린 오장과 피를 쏟아 내시고  돌아 가셨다.

난 지금도 할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마음의 빚이 있어 객지행을 허락하셨을 걸로 생각한다.

생전 누구에게 폐끼치실 분이 아닌 꼿꼿하신 할아버지는 어리석은 두 아들로 인해 남모를 

마음 고생을 많이 하시다가 그렇게 어머니 품에서 돌아가셨다.   

 

잔혹하고 슬픈 가족사 였다.

난 당시 잠시 할아버지 생각에 짠하긴 했지만 철들고 오래 떨어져서 생활한 탓에 할아버지의

생각과 슬픔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단 한 번 내 꿈에 찾아 오셨다.

돌아가시고 얼마 안된 어느 날의 꿈에서 였다.

할아버지는 하얀 두루마기를 입고 서서 물끄러미 나를 바라 보시다가 뒤돌아 휘적휘적 걸어

가셨다.

꿈에서 나는 어린아이로 돌아가 있었고  밭일하러 가시는 할아버지를 따라가던 그 때처럼

할아버지 뒤를 따라 갔다.

한참 익숙한 산길과 들길을 걸어가다가 개울이 나왔다.

그 곳에서 할아버지는 여느 때처럼 나를 건네 주지 않으셨다.

나는 물가에 앉아 우는데  할아버지는 건너편에서 나를 돌아보며 어서 돌아가라고 몇 번

이나 손짓을 하셨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내 시야에서 사라졌고 나는 울다가 잠에서 깨어 났다.

 

다음날 기연이와 병철이와  금강으로 고기를 잡으러 갔다.

낚시를 하다가 날이 더워서 물가에서 수영을 하는데 조금씩 강안으로 들어가 놀다가 병철이와

내가 물에 휩쓸렸다.

갑자기 물이 깊어진 탓이었다.

수영을 잘하는 병철이는 재빨리 뒤로 누어 송장헤엄을 치며 물 따라 내려가다가 물가로 나오고

수영을 할 줄 모르는 나는 허우적 거리며 몇 번 씩 가라 앉았다 떠오르기를 반복하며 떠내려 갔다.

낚시하던 사람들이 쫒아 내려오고 난리가 났다.

나는  물을 먹으면서  모냥 빠지게  살려주세요를 외치면서 한참을 떠내려 갔는데 병철이와

사람들이  아랫 쪽 강가까지 따라 내려와  손을 맞잡고 나를 건져 주었다.

거의 죽음 가까이 다가 간 날이었다.

그 날 죽음에 가까웠던 그 순간 난 지난 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내 뇌리를 스쳐 지나는 걸 지켜

보았다.

그 때 어머니 한테도 이야기 했지만 참으로 신비로운 경험이었다.

나는 지금도 생각한다.

아마도 그 날은 할아버지가 내 생명을 구해주신 날 이었을 거라고 ..

 

방학 때  할아버지 댁에 갈 때 마다 나는 혼자 산이며 들로 쏘다니며 메뚜기를 잡았다.

아랫 마을을 지나면 나오는 연 못은 내 놀이 터었다.

나는 난초가 무성하게 핀 그 못에서 물방개를 잡았다.

그 곳에는 대전 천에는 귀했던 커다란 장수 잠자리가 많이 날라 다녔는데 아무리 

너무 빨라서 아무리 잠자리 채를 휘둘러도 잡을 수 없었다.

형과 동네 형들은 초가 지붕아래 후렛쉬를 비추어 참새를 잡았다.

그 참새 맛은 지금 생각으로도 정말 기가 막히게 맛 있었다.

동네 형들은 내가 내려 가면  목화를 따서 주고 오디나 보리똥 따위를 따서 주었다.

그리고 콩서리

콩이 익을 때쯤 콩나무를 베어다가 불을 피워 구워 먹었는데 그 맛은 잃어버린 고향과 어머니

럼 영원히 다시 맛볼 수 없는 것이었다.

군대 시절 뻬치카에 끓여 낸 라면과 차갑게 얼어 붙은 경월 소주의 그 맛처럼 현실에서 느낄 수

없는  가슴 속에 남아 있는 추억일 뿐이다.

 

초등학교 때 시골에서 잡은 장수 풍뎅이로 암.수 두마리를 여름방학 곤충채집 숙제로 제출했는

친구들의 관심을 집중시면서 단박에 수를 받았다.

 

 

 

문창동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은 너무 많다.

나는 당시에도 산을 좋아해서 동네 아이들을 데리고 보문산과 동명 중학교 산에 자주 올랐고

어느 날은 멀리 식장산 까지 원정을 갔다.

나는 산 딸기가 많은 곳과 풍뎅이 서식지를 알고 있었다.

나보다 큰 아이들도 잘도 나를 따라  다녔다.

당시에는 동네에 아이들이 너무 많아서 사시사철 밖에서 노는 통에 내 손은 말끔한 적이 거의

없었다.

도둑놈잡기 ,공집기 ,자치기.비석치기 딱지치기,구슬치기 놀이는 무궁무진했고 놀 아이들은

넘쳐 났다.

아이들 한테 나는 인기가 좋았다.

나는 들은 옛날 이야기를 재미있게 꾸며대는 기술이 출중했고 거기다가 내 상상력을 가미해서

새로운 이야기를 지아내니 그 얘기를 들으려고 많은 꼬맹이 들이 나를 졸졸 따라 다녔다.

 

당시 대전천 물은 참 맑았다.

사람들은 그 곳에서 빨래를 하고 밤이면 목욕을 했다.

동네 형들과 어울려 햇불을 들고 밤고기를 잡으러 나서면 개울 한 가운데서 목욕하던  동네

아주머니들이  깜짝 놀라서 그 쪽으로 오지 말라고 소리치곤 했다.

천에는 물고기도 엄청 많았다. 

가끔은 동네 형들이 싸이나를 풀어서 고기를 잡기도 했는데 그 때면 세숫대를 가지고 가서

물고기를 잡았다.

비실거리며 수면으로 떠오르는 물고기를 세숫대로 수면을 치면서 잽싸게 나꿔채는 것이다.

어린 내가 사실 쌩쌩한 물고기를 잡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어느 날 인가 혼자 아침에  개천으로 내려갔다가 얕은 물가에 나온 붕어 한 마리를 발견했다.

정말 조심조심 다가가서 고무신 두 짝으로 포획 하는데 성공했다.

오롯이 내가 손으로 잡은 최초의 물고기 였다.

그 때의 기쁨이라니…..

난 그 물고기를 항아리에 넣고 일주일 이상을 물을 갈아 주며 정성스레 키웠다.

어느 날 인가 밖에서 놀다 보니 너무 뜨거운 햇빛에 물이 데워져서 붕어가 허연 배를

뒤집고 물 위로 떠올라 죽어 있었다.

그게 얼마나 슬프고 원통했던지 나는 주저 앉아 계속 울어 댔다.

그 때 어머니가 하신 말씀인 기억난다.

네 엄마가 죽어도 그렇게 울지 않겠다 이눔아 !

정말 엄마가 가시는 길에는 그렇게 대성 통곡하지 않았다..

그 진한 서러움을 꾹꾹 눌러대면서  꺾꺽이며 소리 죽여 울었을 뿐이었다.

 

장마가 지면 큰 물이 내려 갔다.

당시 어린 나이에는 불구경과 물구경이 최고의 놀이였다.

장마가 심한 날 에는 시커먼 흑탕물이 천 변  도로 바로 아래 까지 넘실 거렸다.

큰 나무가 뿌리채 뽑혀서 내려가기도 하고 돼지가 허우적 거리며 물에 흽쓸려 내려

가기도 했다.

그런 날이면 어김없이 수 많은 제비가 하늘을 뒤 덮었고 수면과 허공에서 먹이를

나꿔챘며 야외 축제의 분위기를  뛰웠다.

어느 날 인가 동생이 탄 유모차가 도랑아래로 굴렀는데 돌에 걸려서 중간 턱에서 넘어졌다.

장마비에 물이 차오르는 중이라 중간 턱 까지는 아직 물이 차지 않았는데 돌에 걸려 뒤집

혔으니 망정이지 어린 마음에도 충격과 공포의 순간이었다.

그게 영태였는지 영숙이였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잘못하면 줄초상 날 뻔한 아찔한 상황이었다.

 

큰 장마가 휩쓸고 지나가면 물이 점점 줄어들면서 천에는 맑은 물이 넘쳐 흘렀다.

그 때면 친구들과 발가벗고 물에서 수영을 했다.

어떤 날은 대전천을 따라 상류쪽 알빠우 까지 원정을 가곤 했는데  알빠우는 물이 휘돌아서

죽는 사람도 가끔 있었다.

 

그리고 나는 친구들과 철 길에 가는 것을 좋아 했다.

철 길 위에 못을 얹어 놓고 침을  뱉은 다음 돌무더기를 쌓아 위치를 표시 해 놓고 

열차를 기다렸다.

그 당시에도 인동 굴다리 위로 열차는 자주 지나 갔다.

그 때도 관광호라는  급행 열차가 있었는데 우리는 급행 열차를 아주 싫어 했다.

그  놈이 지나 가면  기차에 갈린 못이 너무 멀리 튕겨져 나가서 찾기가 힘들었다.

우린 천천히 지나가는 화물 열차를 좋아 했는데 화물열차가 자나가면 멀리서도 못이

어디로 튀어가는 지 거의 보일 지경 이었다.   

한 번은 칠길에 갔다가 집에 늦게 왔는데 그 때 한 녀석이 철둑에 갔다 왔다고 어머니한테

꼬질르는 통에  어머니 한테 먼지나게 뚜드려 맞은 적이 있다.  

 

친구들과는 잠자리를 많이 잡았다.

암놈을 잡아서 한 쪽 다리에 실을 묶고 한 실의 한 끝을 나뭇 가지에 연결해서 허공에

날리면 숫 놈이 와서 붙었다.

농약을 치지 않는 시절이라 논에는 메뚜기가 많았고 개울에는 잠자리가 많아서 암놈을

앞세워 숫놈은 포획하는  방법은 잠자리 채 보다 훨씬 더 성과가 좋았다.

나는 어릴적 거미를 많이 잡아 먹었다.

당시 어릴적 나는 양쪽 고환 크기가 다른 짝불알 이었는데 할아버지가 그걸 낫게 하신다고

거미를 많이 잡아 구어 주셨고 초란을 많이 먹이셨다.

당시 시골의 거미는 꽤  컸는데 그걸 자주 구어 먹다 보니 그 맛을 알아서  거미를 보면

동네 형들 한테  잡아서 구워 달라고 했었다.

어릴적부터 거리낌 없이 그런걸 잘 먹다 보니 아이들은 방아깨비나, 풀무치 메뚜기

등을 잡으면 모두 내게 가져왔다

가재와 잠자리까지 죄다 가져왔는데 잠자리는 먹을 것이 별로 없지만 나는 그것까지  

모두 구어 먹었고 그게 신기한 아이들은 더 많은 잠자리를 잡는 족족 내게 가져왔다.

구은 잠자리 맛 역시 메뚜기와 비슷했다.  

  

정월 대보름은 장관이었다.

너나 할 것 없이 아이들은 깡통에 바람구멍을 내고 철사줄로 연결해서 쥐불놀이 통을

만들었다.

개불이 찌부리 통이라고 했던가?

우리는 통에 나무를 작게 쪼개어 넣고 불을 붙여 허공에 돌렸다.

쥐불놀이

어린 눈에도 휘영청 밝은 보름달 아래 쥐불놀이 통을 돌리던 광경은 장관이었지만

그 날은 내게 정말 두서 없이 분주한 날이었다.

우리집 담은 판자여서 지키지 않으면 아이들이 쥐불놀이 땔감으로 뜯어 냈다.

아버지와 동생들은 담을 지키고 나 역시 친구들과 쥐불놀이 하랴 또 집에 들러 판자

뜯어가는 놈을 감시하랴 동분서주하며 집과 개천을 바삐 오갔다.

그 보름달의 추억은 오래 도록 가슴에 남아 있다..

 

겨울에는 썰매를  타고 얼음배를 탔다.

그 때의 겨울은 지금보다 훨씬 추워서 겨울이면 개천은 으레 꽁꽁 얼었다.

집안은 위풍이 심해서 저녁에 누우면 입김이 나왔고 아침에 걸래는 항상 동태처럼

얼어 있었다.

 

당시 동네에는 만화방이 두 군데 있었다.

철호하고 나는 만화방을 자주 다녔고 집에서도 자주 만화를 빌려 보았다.

나는 만화가 너무 재미 있어서 돈이 생기면 집에서도 만화책을 많이 빌려다 보았다.

돈이 없던 어느 날 인가는 나와 동생들이 같이  저금통에 넣은 동전을 하나씩 빼서 철호

하고 만화를 보러 다녔는데 저금통 무게가 가벼워 지면서 엽전을 대신 넣었다가 그게

엄마한테 발각되어 무지하게 뚜드려 맞은 적이 있다.

당시 어머니는 나를 엄하게 훈육했다.

저녘 늦게 들어 온다 던지 거짓말을 한다 던지 하면 가차없이 매를 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말썽장이 문제아가 아니었고 엄마 말도 잘 듣는 편이었지만

돌보아야  할 동생들이 많았기 때문에 엄하게 규율의 틀을 잡으셨던 것 같다.

 

그렇게 우리는 한 지붕아래 고물고물여서 부모님의 고생을 먹으면서 무럭무럭

성장해갔다.

늘 배는 고팠지만 배를 곯은 적은 없고 부모님이 몸으로  막아 주신 덕분에 세상의

찬바람을 알지 못한 채 그렇게 이린 시절을 보냈던 것이다.

 

 

                                              2024년 3월 21일 -  천붕 7일 째 (소천 10일 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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