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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49제

천붕 17일 째 - 워낭소리

 

 

워낭소리

영화 ‘워낭소리를 보고 싶었다.

어머님을 모시고 갈까 했는데 마눌하고 먼저 보고 괜찮을 거 같으면 아이들하고 한 번 보여드리

기로 했다.

 

찡한 감동의 영화라기 보다는 가슴이 답답해지는 영화였다.

할아버지의 얼굴이 오버랩되었다.

돌아 가시기 몇 일 전 까지 들일을 하시다 돌아가신 할아버지

60년 대 초 장남과 맏며느리가 농사를 짓지 않고 도시로 떠난다고 했을 때 그 낙담과 충격은 어

떠셨을까?

 

영화는 고단한 시대의 삶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우리 부모들의 지난한 인생역정에 관한 이야기다.

소의 죽음과 더 이상 울리지 않는 워낭소리는 이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의 서글픈 조종이다.

자식들을 아홉명이나 낳고도 발가락이 썩고 몸이 병들어 가는데 농사를 그만둘 수 없는 아버지

업처럼 그 아버지와 엮여 있는 어머니와 소의 애처러운 운명

소는 젊은 소에게 자신의 자리와 먹이를 빼앗기고 이젠 더 이상 세월을 지탱할 힘마저 없으면서도 집과 들을 오가야 한다

어머니는 이젠 세월에 휘어진 허리로 신세타령을 입에 붙이고 살면서도 지긋지긋한 일에서 벗어 날 수 없다.

이젠 병든 남편을 수발하면서 그런 남편마저 없는 세상을 살아갈 일이 더 큰 걱정이다.

 

노인과 소는 어쩌면 행복했을지 모른다.

노인은 오지 산골에 묻혀 자신이 늘 해오던 일을 했을 터이다

다른 삶이 방식이라고는 생각해 본적도 없고 다른 인생이라고는 꿈꿔 본 적이 없을 것이다.

소는 노인을 만나 힘든 삶을 살았지만 하루도 빠지지 않고 손수 끼니를 챙겨준 할아버지가 있어 행복했을 것이다.

혹시라도 풀을 뜯어 먹다 잘못되지 않을까 싶어 농약을 치지 않는 할아버지 마음이 있어 모진 세상에도 외로움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행복한 날도 많았을 것이다.

소와 함께 농사를 지으면서 재산을 모아 아이들을 교육시키고 땀흘려 번 돈으로 부인의 화장품도 사주었을 것이다.

누렇게 익어가는 들판을 바라보고 소와 함께 무럭무럭 자라나는 아이들을 보면서 살아 가는 재미를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세둴의 모진 칼바람을 느껴야 했을 것이다.

병든 소에 매질을 하면서 들로 이끌고

골이 부서지는 아픔을 참아내며 다시 파종을 하고

예전 같지 않은 기력과 자신의 품을 떠나 남들처럼 살아가는 자식들을 바라보면서 인생의 무상함을 느꼈을

것이다.

 

영화는 광고처럼 촌부와 소의 우정은 아니었다.

숙명처럼 엮어진 그들 삶과 그 단조로운 인생에 대한 서글픈 회한과

세상의 흐름에서 밀려 가는 세대의 쓸쓸한 퇴장에 관한 이야기일 뿐이었다.

거기엔 교훈도 감동도 없다.

단지 바뀌어 가는 세상에 대한 체념과 안타까움

그냥 가슴 답답한 설움 같은 것만 남았다.

 

태양이 서산으로 떨어질 때 느끼는 황량함과 목덜미를 스치는 바람의 한기가 느껴지는 영화다.

아이들과 어머니에게는 보여드리지 않기로 했다.

어머니는 그 고달픈 인생을 스스로에게 치환하실 것이다.

아홉의 아이들을 놓고도 허리 뿌러지게 일해야 하는 할머니와 머리의 통증과 썩어가는 발가락을 가지고도 엎드려 농사를 지어야 하는 할아버지의 운명과 그런 세상을 슬퍼하실 것이다.

그러고 나서 다시 흔적없는 세월에 흩날려 간 아버님의 인생을 한탄하실 것이다.

 

마눌과 나오는 길에 어머님이 그러셨다.

세상 사는 것 잠깐이다.

하고 싶은 것 하고 재미 있게 살아라….

 

                                                                                                                               2009 1월

 

                                2024년 1울 31일 일요일  천붕 17일 째 - 소천 20일 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