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수심 천재보
(三日修心 千載寶)
"삼일수심(三日修心)은 천재보(千載寶)요,
백년탐물(百年貪物)은 일조진(一朝塵)이다."
사흘 닦은 마음은 천년의 보배요,
백년 탐한 재물은 하루 아침의 티끌이다.
죽음의 체험을 하는 프로그램이 있다고 한다.
죽은 것처럼 관 속에 들어가 누우면 관 뚜껑이 닫히고 그 속에서 5븐가량
머물다가 나오는데 관에서 나온 사람마다 눈물을 흘린다고 한다.
우린 머지 않아 의식이 없이 거기에 눕겠지만
의식이 있는 채로 거기에 누어 먼저 자신의 죽음을 대면하고 그 의미를 깨닫는 과정에서
느끼는 많은 감정과 생각 때문일 것이다.
내가 대면하는 건 막막한 허무
철저한 고립과 단절이다.
거기 있는 나도 결국에는 나를 인식하지 못하니 나조차 내게 귀속됨이 아니겠지만
모든 내 것의 부질없음이다.
아무 것도 그 세상으로 가지고 올 수가 없다.
내가 공들여 쌓아 올린 수 많은 것들
오랫동안 이어 온 수 많은 관계들
시간의 종착역에는 아무 것도 가져 갈 수 없고 누구의 배웅도 받을 수 없다.
끝없는 적막과 깊이를 알 수 없는 고독 속으로 가져갈 수 있는 건
단지 세월에 마모되어 기능이 중단 된 내 육신과 내 마음 하나
그래 마음이다.
정작 거기 눕게되면 그 마저도 사라지지만 관에 들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내 곁에서 나를
위로하고 나를 배웅할 수 있는 건 내 마음 뿐이구나 !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속절없고 부질없음에서 깨어나야지
뗄래야 뗄 수 없는 그 친구와 잘 살아야지
내 마음의 심연을 찬찬히 들여다 보고 그 곳에서 울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야지
세상의 중요한 가치와 우선순위를 다시 바꾸어야지
궁극의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죽음을 앞에 둔 겸허함이고
세속의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고요함이 아닐까?
" 더 슬퍼하고 더 기뻐하지만 그 슬픔과 기쁨에 젖지 않을 뿐이고, 기뻐하되 기쁨에 물들지 않고
절망하되 절망에 물들지 않는다.
불의를 보면 분노하나 그런데 그 분노에 물들지 않는다.
슬픔과 고통과 절망 속에 있어도 '나[我]'가 상(傷)하는 일이 없다."
범인이 해탈의 지경에 들어선 도인의 깨달음에 가까이 다가갈 수는 없겠지만
어렴풋이 죽음의 철학을 이해하는 것 만으로도 내 삶을 돌아 보는 시간이 될 것이다.
내 삶이되 내가 사라지고 세상에 휘둘려 온 나의 삶은 역설적으로 거기 집착하는 내가
있었기 때문이다.
무비 스님이 말했다.
"하수들이 바둑을 둘 때 고수의 눈에는 다 보인다. 어디에 두면 죽고, 어디에 두면 사는지 말이다."
삶도 마찬가지다.
삶에 '나'가 없으면 지혜가 생기고, 그래서 인생에서도 고수(高手)가 되는 것이다.
남의 바둑에 훈수 두듯이, 한 발 뚝 떨어져서 나의 바둑을 바라보는 여유와 거기서 나오는
지혜로 나의 바둑을 풀어가면 된다”
번뇌와 집착 그리고 세상의 욕심으로 채워진 나를 버리고
세속의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 같이 자유로운 마음으로 돌아가라
2024년 4월 22일 월요일 천붕 39일 째 소천 42일 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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