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도패밀리

삼촌 병문안

 

 

삼촌 병문안

 

어머니 기제사가 마침 3월 연휴였다.

31일에는 삼일절 기념 산행을 다녀왔다.

 

계룡산 연천봉, 관음봉,,삼불봉에서 비로소 담담한 마음으로 나의 겨울과 이별을 고했다.

눈이 많이 왔지만 활개치고 떠날 수 없었던 아쉬운 겨울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2일에는 형제, 가족들과 모여 어머니 첫 제사를 지냈고 3일은 대구로 삼촌 병문안을 갔다.

은비엄마와 영수 그렇게 셋이서 ….

 

마지막 삼촌을 보러 가는 길이다.

삼촌을 보면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슬픈 인생이 오버랩 된다.

 

위암으로 속이 다 썩어 문드러질 때 까지 고통을 참으시다 어머니 가슴에 그 아픔과

피맺힌 인고의 응어리를 토하시며 돌아가신 할아버지

 

평생 감기 한 번 안 걸린 건강을 자랑하셨지만 세상의 인연과 기억을 모두 훨훨 날리

시고 자식들 다 키워내고 비로소 살만하게 되었던 날에 어머니한테 진 마음의 빚

일부조차 제대로 갚지 못하고 허망하게 떠나가신 아버지  

 

자식들의 목에 늘 가시처럼 걸려 있던 삼촌은 빈주먹 쥐고도 혼자만의 세상을 나름

씩씩하게 살아 내셨다.

누구에게도 신세지고 싶지 않은 그 성격은 그렇게 병을 키웠고 부서지고 쇠잔해지는

육신의 아픔을 안으로 삭혀오다 더 이상 견디지 못 할 때쯤 그렇게 허물어져 어쩔 수

없이 지식들의 짐이 되셨다.

 

듬성 듬성 빠진 이빨, 심하게 절뚝거리는 다리 그리고 몰라보게 야윈 얼굴 ….

몇 년 새 부쩍 달리진 모습으로 삼촌은 어미니 빈소를 찾으셨다.

 

삼촌 잘 지내세요 ? 내가 물었을 때

내는 편하다. 니는 어떠냐?” 하시던 삼촌을 안부가 이젠 예전과는 다르다는 건 병색

이 뚜렷한 얼굴과 몸을 가누는데도 힘이 든 그 모습에서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 때 기호한테 정신도 오락가락 하시니 요양원을 알아 보는게 좋을 것 같다고 얘기

했었다.

그 후 할아버지와 할머니 묘소 개장을 하겠다는 의견을 전해드리고 절뚝거릴 망정

걸어 다니시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뵈었던 건 묘소를 개장하던 작년 67일 이었다.

 

 

 

그리고 삼촌의 병원 입원 소식을 들은 건 새해 첫날 이었다.

여러 군데 성하지 않은 몸으로도 한사코 병원 가시기를 거부한 삼촌은 막다른 길에서

기호에게 모든 걸 맡긴 채 그렇게 노인 병원에 입원하셨다.

노인병원에서도 받아주지 않으려는 것을 종합병원 측에서 잘 설득해서 기호 집에서

가까운 노인병원에 모시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소변 줄로 볼일을 보면서 계속 누워서 생활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기호와 제수씨가 번갈아 틈틈히 보살피고 한 달에 한 번씩 소변 줄을 갈러 종합병원

으로 모시고 다녔다.

그 시간이 벌써 2개월이나 흘러간 것이다.

 

증상은 계속 악화 되었고 종합검진과 조직검사를 통해 전립선암 4기로 최종 판명

되었다.

염증은 허리와 어깨까지 전이 되어 수술과 치료는 무의미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세월이란 게 원래 그렇게 허망하게 지나가는 것이라서 차일피일 미루다 보면 생시의

얼굴 한 번 뵙지도 못 한 채 장례식에서 인사 드려야 할 것이다..

돌아 가시고 빈소를 찾는 건 살아 있는 자식들에 대한 예의를 차리는 것 외에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이다.

생과 사로 갈라지면 부모 자식의 인연의 길도 막혀 버리는데 속세에서 맺은 삼촌의

연은 이승을 떠나시기 전에 마무리 함이 도리인 듯 싶다.

 

찻집에서 기호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30에 어머니를 여의고 홀로 짊어진 그 힘든 세상의 짐을 내가 왜 모를까?

자신의 남은 생을 아무 것도 준비하지 못한 병든 아버지

그리고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동생

그건 벗어던 질 수 없는 기호의 업이고 또한 운명이었다.

담담히 얘기하는 그의 언어 속에서 장남이 느껴야 하는 세상의 무게와 삶의 고뇌가

오롯이 가슴으로 전해졌다.

 

산 자와 죽은 자의 이별이 그렇게 녹록할 리가 없다.

일주일에 한 번씩 드실 걸 가지고 찾아 뵙고 그리고 문제 있을 때 제수씨와 번갈아

병원을 드나드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삼촌은 많이 마르시긴 했어도 생각보다 편안한 얼굴 이었다.

돌아가시기 몇 달 전의 할아버지 모습과 너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촌 여기 왜 이러고 있어 빨리 일어나서 돌아 다녀야지 ?..”

 

나와 영수는 기억하고 은비 엄마는 기억하지 못했다.

이가 없으니 무르고 단 음식만 주로 드시는데 예전 아버지처럼 병원에서 음식을

많이  못 드시는 지 기호가 주는 대로 모두 맛 있게 받아 드셨다.

예상과 다르게 눈도 초롱초롱하고 의식도 또렸 하셨는데 기호 말로는 그 때 그 때

상황에 따라 컨디션이 많이 달라 지신다고 한다.

아프거나 불편한 데가 없냐고 물어도 다 괜찮다고 하시는 건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많이 누워 계시나 욕창의 기미가 있다고 하는데 그래도 드시는 걸로 보아 당분간은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다가 기호가 이불을 걷으며 보여주는 다리를 보고는 아연

실색했다.

관절염이 심해진 이후 계속 걷지 못한 다리는 가죽 외에는 살이라고는 하나도 붙어

있지 않았다.

절뚝거리며 걷던 삼촌이 보행의 기능을 상실한 채 병원에 눕고 나서 채 3개월이

되지  않아 다리가 그렇게 변해버린 것이다.

절망적인 그 다리를 만지며 우린 그저 참담한 심정이었다.

 

저 상태로는 소변 줄을 갈러 병원에 가기 위해 혼자서 휠체어에 태우고 또 차에

태워서 모시는 건장정이 아니고서는  거의 불 가능해 보였다.

 

삼촌 몸조리 잘하고 계셔요!  또 찾아 뵐께요라고 공허한 말과 함께 병실을

나오면서 마지막 바라 본 삼촌의 마지막 눈빛은 슬픔의 빛깔로 오래 기억될 것

같았다.

벌써 힘든 시간이 많이 흘러갔는데 어머니 제사에서도 빌었 듯이 삼촌이 편하게

생을 마감하시고 기호의 마음의 짐도 가벼워 졌으면 좋겠다..

 

기호에게는 다른 것보다 이제 자주 찾아 올 통증이나 잘 조치하라고 당부했다.

그냥 맛 있는거나 사드리라고 30만원 쯤 봉투로 전해줄 생각이었는데 영수가

현금을  준비해 오지 않아서 기호에게 계좌를 받았다

인사를 나누고 헤어져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영수 의견에 따라 50만원을

송금했다.

많은 돈은 아니지만 형제들의 뜻이니 마지막 가시는 길 잘 보살펴 드리라고….

 

마음이 무거웠던 하루였지만 이 또한 우리가 한 세상을 살아가는 통행세 였다.

삼촌 나이가 79세 이시다.

할아버지 아버지 모두 그 언저리 쯤에서 돌아 가셨다.

 

어머니나 삼촌의 마지막 길을 대하면서 죽음에 대해 조금씩 담담 해진다..

죽음은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비바람에 심하게 흔들리던 낙엽 한 장이 어느 날 홀연히 땅으로 떨어지는 것이었다..

중요한 건 죽음을 위한 투쟁도 아니고 죽음 자체도 아니었다.

삶이었다.

어쩔 수 없이 세상에 휘둘리고 남들에게 의지해야 하는 삶이 아니라 내 주관과 의지

대로 살아갈 수 있는 나의 시간 이었다.

 

 

죽음이 저렇게 가깝고 가벼우니 그 삶이 굳이 무거울 이유가 없다.

 

짧아도 좋으니 다만 오래 누워있지 않고

그냥 바람 부는 대로 나부끼고 내가 가고 싶은 데로 걸어가다가 조용히 떠나면 좋겠다..

신의 가호가 삼촌과 사촌동생들에게 함께 하기를 빈다.

 

 

                                                               202533일 일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