괘일산 정상
눈부신 봄빛의 교태와 유혹으로 혼미하게 다가온 잔인한 사월은 여름처럼 들이친 비와 자욱한 황사에 묻혀 조용히 바람결에 날리어 갔다. 엊그제 친구들과 통영의 바닷가에서 하얀소주로 밤을 하얗게 새우고 나서 병든 닭처럼 맥아리 없이 유람선을 타고 통영 바다를 떠돌았고 촉석루에서 논개의 한을 담아 조용히 흐르는 푸른 남강을 바라 보았다. 오늘 다시 7번째 호남정맥 출정일 새벽 같이 밥 한 그릇 비우고 또 배낭을 둘러메는 봄바람 난 낭군을 보며 마누라왈 “우리 서방님 심도 좋아유” 사월의 마지막 날 다시 돌아오지 않을 2006년의 사월은 성급한 염천의 서슬 푸른 하늘 빛으로 방축재에 서성이고 있다. 갈수록 짧아지는 봄과 길어지는 여름 잔인한 4월의 마지막 날이 비키니를 입어야 하는 계절의 여왕을 위한 무더위의 전주곡을 울리고 있다. 방축재 길 가의 꽃을 배경으로 사진 한 장 때리고 설레임 속에 미답의 처녀지를 향해 발자국을 옮긴다. 시라테골에서 이동베이스 캠프가 기다린데서 컨디션도 좋지 않은 상태라 아얘 배낭을 벗어버린 채 지팡이 하나 들고 길을 잡는다. 발걸음이 가볍긴 한데 묘터를 돌아보는 지관인지 뱀 잡는 땅꾼인지 어째 좀 날날이 같다. 오늘의 호남길에는 어떤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을까?
호남정맥 제 8구간
산행지 : 호남정맥 제 8구간(방축재-괘일산-과치재) 일
자 : 2006년 4월 30일 (일요일) 날
씨 : 바람이 좀 있는 무더운 날 산행거리 :
16.5km 산행시간 :
약 7시간 52분 동 행 : 나선생님,산꼭대기,새벽안개,담헌,양반곰, GOODMAN,백운봉,
금강초롱 한림정
,칸, 계백장군, 이창근님,김찬기님 (14명) 호남정맥
제8구간 경유지별 시간
방축재 출발 :
08:40 88고속도로
:
08:51 지하 이동통로 : 09:12 (고속도로상 고지산
들머리) 316.9봉(고지산) :
09:34 88고속도로
:
09:55 이천서씨묘 :
10:13 봉황산
:
10:35 일목고개차도 :
10:58 복숭아 과수원 :
11:14 서암산 정상 :
11:29~11:36 시라테골고개 :
12:00 민치
: 12:25 하산,식사후 출발 :
13:20 능선고압철탑 :
13:40 설산 어깨 능선 : 14:20 (설산과 괘일산
갈림길) 설산능선 암봉 :
14:25 괘일산 등산로 안부 : 14:32 괘일산
1봉 :
14:48 괘일산
2봉 : 14:52
괘일산
3봉 :
15:01 임도
: 15:25 무이산 삼거리 :
15:40 270봉
: 15:55 240봉
:
16:17 과치재
:
16:32
알고는 있었지만 시작하고서 얼마 되지 않아 정맥은 88고속도로에 치명적인 관통상을 입고 있다. 이게 고속도로여 뭐여 명색이 고속도로인데 중앙분리대도 없는 초라한 길
88고속도로
국도 보다도 차량통행이 뜸한 길을 동네 뒷길 건너듯 서둘러 수림으로 들어 가는데 이 동네가 워낙 담양에 가깝다 보니 산속에도 대나무가 자라고 있다. 황산 풍경구에서 보았던 아람드리 대나무는 아니지만 산 위의 대나무 숲이 이채롭다. 내가 거의 꼴지에 붙었는데 선두가 길을 잃는 바람에 순식간에 중간 그룹에 합류하는 개가(?)를 올린다. 대책없이 바뀌는 능선의 흐름으로 보아 오늘 앞에서는 사람은 좀 피곤할 수도 있다. 계속 뻗어갈 것만 같았던 마루금은 힘이 빠졌는지 도로로 다시 주저 앉아 두 번째 관통상에 피흘리고 있다. 몇 백m를 고속도로 갓길을 따라 걸어 가면서도 우리가 88고속도로를 너무 무시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능선의 흐름이 완전히 자즈러져 있는데다 고속도로가 그 위를 달려가니 능선흐름의 큰 그림이 잡히질 않는다. 우측으로 연결되는 산이 없긴 한데 도로를 따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혹시 도상의 진입로를 넘어선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때 쯤 뒤쫓아 온 금강초롱님이 잘못 가고 있다고 쐐기를 박아 버리니 영락없이 고지산 들머리를 놓친 줄 알았다… 1km쯤 도로를 따라 올라가다 보니 배수로가 있는 곳에 표지기가 무더기로 나부끼고 있다. 그러면 그렇지
고지산 들머리 (88고속도로 지하이동통로)
고지가 바로 저긴데… 희한하게도 정맥길은 고지산 쪽으로 휘어져 S자 커브를 그리며 돌아 나오고 있다. 조물주께서 잠시 졸음을 참지 못하신 모양이다. 316.9봉(고지산) 방축재로부터 54분 이젠 바야흐로 더운 날의 시작이다. 무더위와 싸우느라 심신은 피로하고 영혼은 흐느적거리는 계절이 돌아왔다. 자연탐미의 갈증은 타는 목구멍의 해갈의 생리적 욕구에 지배되고 더 많은 땀과 인내를 요하는 계절이 도래한 것이다. 땀 많이 흘리는 사람 , 물 많이 먹는 사람 , 체중이 무거운 사람들이 고생스러운 계절이 돌아온다.
316.9봉 삼각점 확인하고 정상에서 잠시 휴식한다. 지난번 출정 때와는 분위기가 확연히 다르다. 연초록 잎들은 벌써 무성해져서 낙엽이 쌓인 길과 능선의 조망을 가리고 가는 길에 가시덤불이 아직 굳어지지 않는 초록의 가지로 얼굴을 할킨다. 특이하게 멀리 휘어져 들어온 고지산 정상 사계의 조망이 허락되지 않는 외로운 고지에서 잠시 휴식한다.
고지산 삼각점
한겨레 산악회와 함께할 진부령 향로봉 산행이야기를 나누다 제일 앞에서 내려오다 보니 거미줄이 얼굴에 척척 감긴다. “오늘 이 길을 먼저 지나 간 사람이 없구나” 다시 88고속도로 내려온 길에 88고속도로 확장공사가 한창이다. 고속도로 아래쪽에는 공사중인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는데 떼거리로 공사장 절개지로 내려와서 고속도로 난간을 월담 한 다음 다시 불덴 망아지처럼 서둘러 도로를 무단횡단 위험하고 아슬아슬한 귀연종주팀 모험의 현장이다. 고속도로가 확장되면 다음 정맥종주자들은 이 구간을 어찌할까?
고지산 등정후 다시 내려선 88고속도로
고속도로 무단횡단 현장
봉황산(고지산으로부터 1시간) 고속도로에서 올라 평화로운 밭둑 길을 지나자 묘목을 키우고 있는 낮은 구릉의 농장을 지난다. 이목고개에서는 부부가 밭을 손질하고 있다. 열심히 일하는데 배낭을 메고 지나려니 개미 일터를 지나는 베짱이 같아 미안스럽다. 순한 오름 길을 올라 봉황산에 올랐다. 거창한 이름이 무색하게 정상은 200m급 봉우리로 동네 뒷산 같다. 앞쪽에 설치되어 있는 삼각점으로 봉황산을 확인할 수 있다. 처음 모두 함께 휴식하며 쑥떡과 과일을 나누어 먹는다.
봉황산 가는 길 이천서씨묘
봉황산 삼각점
일목고개(봉황산으로부터 23분) 한참을 내려오다 보니 무덤가에서 시계가 트이고 가야 할 서일산이 올려다 보인다. 편안한 단풍나무 숲길을 걷는다. 더운 날이지만 부드러운 구릉지대로 이어지는 마루금 위에서 그래도 바람이 불어주니 한결 발길이 가볍다. 그렇게 푸른 산 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 대나무 숲을 지나 갔다. 대나무 숲에서는 “쏴아”하는 바람소리가 몸에 닿는 바람보다 더 시원하다.
일목고개 내려서기 전 묘지에서 바라 본 서암산
일목고개 전 대나무 숲
일목고개 차도에는 나른한 오후가 걸려 있다. 전라남도 담양군과 전라북도 순창군의 경계 양쪽면으로 다른 군을 표시하는 이정표가 이채롭다.
일목고개
차량의 왕래가 없는 조용한 국도를 건너 복숭아 밭 길을 오른다. 복사꽃잎을 떨어뜨리며 화려한 날을 보내는 복숭아 밭 아래 마을의 평화로운 풍경이 가슴에 들어와 앉는다.
일목고개 위 복숭아 밭에서 바라 본 마을 풍경
서암산(일목고개로부터 31분) 서암산 가는 길에 멋진 그림 하나 걸려 있다. 대충 이런 그림 길 앞에는 서암산이 우뚝 솟아 있고 좌측엔 연초록의 화폭을 배경으로 잎새를 떨구는 복숭아 나무 밭고랑 사이로 보이는 신록이 푸르다. 흐르는 세월과 봄을 아랑곳 하지 않는 늘 푸른 소나무 멋드러진 소나무들을 바라보며 황토 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상신기 마을에서 바라본 서암산
서암산 가는 길 황토밭길 옆 소나무 군락
서암산 가는 길 복숭아 밭
아늑하고 편안한 느낌이 드는 마을 들녘이다. 어릴 적 추억이 있어 고향을 닮은 곳을 만나면 이런 곳이라면 은퇴하고 유유자적하게 살아가기 좋다는 생각이 먼저 드는데 이상과 현실의 차이란 우리가 나이 들어 꿈꾸는 전원생활과 나이 들수록 더 사람과 어울리고 주거 환경이 편리 한데서 살아야 하는 괴리만큼 크다. 여름 같은 날 바람 멎은 가파른 서암산을 치고 오르려니 제법 힘이 든다. 그래도 내려다 보이는 풍경이 피곤함을 걷어간다.
서암산 오름길에 바라 본 전원 풍경
서암산 정상에는 산불감시초소가 있다. 감시초소 안에는 순박하게 생긴 아저씨 한 분 계시는데 산불주의 대상들이 떼거리로 올라 왔는데도 경계의 빛이 없이 너무 친절하다. 백운봉님이 농담반 아저씨 무전기를 가지고 상부에 보고해야 하지 않느냐고 하니 신원파악이니 뭐니 해서 오히려 우리한테 번거롭다고 안 하는 게 낫다고 한다. “우린 한 명도 담배 안 피우고 라이터 같은 건 가지고 다니지도 않아유” 멀리 보이는 산을 물으니 설산이라 하신다. “이 더위에 무슨 설산?” 사람이 그리웠을 아저씨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기념 사진 한 장 찍고 다시 여장을 수습하여 바람마저 자즈러진 여름날 같은 무더위 속으로 떠난다.
서암산 정상 산불 감시 초소
서암산 정상에서 바라본 설산 조망
지도상으로 보면 옆에 솟아 있는 봉우리는 정맥마루금이 비켜 가는데 우리가 내려가는 길이 표지기도 없는 길을 따라 너무 가파르게 하강하기에 잘못된 길인 것 같아 혼자 가는 길을 되돌려 확인차 456봉 정상에 올랐다. 정상엔 표지지 두어 개 달려 있고 숲에 가려 사위가 전혀 조망이 되지 않는다. 올라온 반대편으로 내려서니 비로소 제법 많은 표지기가 보이고 등로는 급한 내리막을 길게 타원으로 휘돌아 한참 아래 쪽에서 우리팀이 내려 갔을 등로와 만나고 있다. 정맥이 서암산에서 좀더 높은 봉우리 하나를 올린 다음 급하게 내려 앉는데 굳이 이 봉우리까지 정맥 마루금으로 보지 않아도 무방할 듯하다.
혼자 떨어져서 좀더 속도를 내서 약속한 도상의 시라테골 도로에 도착했는데 어째 좀 분위기가 이상하다. 차가 다니는 포장도로쯤을 예상했었는데 능선을 절개한 작은 수레 길이다. 우리팀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우측으로 내려가니 작은 시멘트 길이 이어지고 밭과 민가의 모습이 드믄드믄 보이는데 이동베이스 캠프의 모습도 찾아볼 수 없다. 다행히 멀리 길 아래 쪽에 금강초롱님과 칸님이 전화를 하면서 분주히 이동하고 있기에 열심히 쫓아 내려간다. 밥 때가 다 되었는데 뿔뿔이 이산가족이다. 다른 대원들은 시라테골 고개를 넘어 서흥고개로 가고 있는 중이고… 기사님이 약속장소를 찾지 못했고 마을 아래쯤 어디에선가 전기 줄에 걸려 있다고 한다. 버스가 웬 전기줄? 서흥고개 쪽에서 식사할 예정이라는데…. “오늘은 궁합이 제대로 안맞네…” 구간을 펑크 내고 도로를 따라 가기 뭐해서 다시 시라테골 고개까지 눈썹을 휘날리며 구보 오늘 무더위에 참 여러가지 한다. 그래도 지팡이하나든 몸이 가벼우니 금새 끊어진 능선에 다시 올라서서 별 높낮이 없는 산길을 따라 간다. 중간에 서흥고개를 지나치고 서흥고개라고 믿었던 민치에서 대원들과 합류했다. 분명 고개다운 고개를 보지 못했는데 모두들 서흥고개를 지나버렸으니 무언가에 홀린 것 같은 날이다.
민치
민치(서암산으로부터 49분) 민치 역시 차도는 아니었고 고개의 상태는 시라테골 보다 더 열악하다. 시라테골은 고개에서 우측 길로 내려서자 작은 시멘트 포장길이 나타났는데 민치에서는 고개우측으로 내려서자 눈에 보이는 멀리까지 산이 막아서고 있다. 우째 이런 일이… 배낭 무게 좀 줄이려고 잔머리 굴리다 쫄쫄 굶게 생겼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 쌓여 있으니 핸드폰도 터지지 않고 갈 길은 먼데 밥과 물은 오리무중이고 정말 산넘어 산이네…. 하여간 열씸히 산길 따라 내려갔다.
민치에서 밥 찾아 하염없이 내려가는 길
비닐하우스 나오고 작은 시멘트 포장길이 나오고서도 한참을 내려가다가 이젠 저 모퉁이를 돌면 큰길을 만나겠지 한 곳에서 작은 시멘트포장도로 갈림 길만 보이고 인적 없는 도로는 다시 고개를 넘어 간다. 금강초롱님과 전화통화는 븥었다 끊어졌다 하면서 제대로 연락이 되지 않고… 분명 멀지는 않을 텐데 서로의 위치를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고 오늘 오후에도 고생 꽤나 해야 될 텐데 우리가 차 길을 따라 한 없이 내려갈 수는 없고 일단 삼거리에서 모두 퍼졌다. 몇 명이 어렵게 전화통화를 시도하고 도로 고갯마루 까지 가서 한참을 전화와 씨름하고 나서야 고개 위에서 반가운 이동 베이스켐프가 붉은 위용을 드러낸다. “다음부터는 절대 배낭과 밥줄은 놓고 다니지 말아야지…” 길 아래 우측 그늘에 우여 곡절 많았던 식단을 차렸다. 바람은 시원하고 지나는 차도 없는 한여름 같은 오후 함께모여 시원한 맥주도 마시고 매실주도 곁들여 시장을 반찬으로 만찬을 즐긴다. 오늘은 무더위에 집단 알바의 날이라 모두들 심리적으로 위축되어 한 시간 남짓한 구간을 앞당겨 고속도로에서 끊기로 했다. 방아재 까지는 1시간 반 정도의 거리라 다음 구간이 걱정이 되어 예정대로 밀어 부치자는 의견을 내긴 냈는데 대세는 이미 기울었다. 다음 구간에 별 무리가 없다니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리… 우리가 산길을 걷는다는 것은 단순한 고행의 걸음이 아니다. 그 걸음 속에는 무수한 교훈과 위안과 깨달음이 있다. 오랫동안 산과 함께 해온 사람들 그 마음씀씀이의 넉넉함이 산을 닮아가는 사람들과의 동행이 있어 정맥길이 더 부드러워진다. 주린 배를 움켜잡고 내리던 길을 이젠 부른 배로 뒤뚱거리며 오른다. 바람도 막힌 산길 갈림길에서 일부대원은 우회로를 따라 가고 앞만 보고 제일 앞에서 무조건 능선을 행해 걸어 오르는데 그 길이 아니란다. “별놈의 곳에서 알바를 다 하네…” 내려 왔던 능선 제자리에 다시 서서 괘일산을 향해 오른다. 목장지대인지 철조망이 쳐있는 길을 따라 고압철탑을 지나고 10여분을 올라 설산 어깨 능선 앞에 위치한 전위 능선에 서니 바람이 너무 시원하다. 양반곰님이 무더운 날에 힘드신지 아얘 능선에 드러누워 휴식한다.
설산어깨능선(민치에서 50분) 잠시후 완만한 오르막을 올라 설산 어깨 능선에 섰다. 우측으로는 괘일산 좌측으로는 설산 갈림길이다. 설산은 700여 m 정맥 마루금에서 떨어져 있지만 설산 가는 길
암봉의 풍광이 죽인다고 산행기를 읽은 기억이 있어 길 한 쪽에 배낭을 두고 설산 좌측 길을 따라 암봉으로
간다. 암봉에서는 서암산 이후 모처럼 거릴 것 없이 사계가 트이고 몸이 떠밀릴 것 같은 대찬 바람이 불어 너무 시원하다. 무성해가는 연초록 잎들이 조망의 즐거움을 빼앗아 가는데 이런 멋진 조망처를 만나기가 쉽지 않아 바위에 걸터앉아 한참을 시원한 바람에 몸을 내맡겼다.
설산 가는 길 조망바위에서 바라본 서암산
조망바위에서 내려다 본 풍광
평평한 안부에 섰다. 이제 까지는 전라북도와 전라남도의 경계선을 따라 같는데 이제는 비로소 모두 전라남도 땅이다. 괘일산을 향하여 난 일반등산로 인지 갑자기 넓어진 길과 주차된 차 옆에서 무드를 잡고 있는 연인들을 만나니 고도감이 헷갈린다. “분명 상당한 높이를 치고 올라 왔는데 차가 올라오는 길이네…” 모처럼 나물 캐는 부부도 만나고 수풀 사이에서 이정표를 발견한다. 지나온 길 방향으로 설산이 1km 괘일산이 1.2km 아래로는 수도암이 1.8km 거리에 있다.
괘일산 가는길 안부 이정표
오늘 호남길에는 낯익은 유명한 산이 별로
없다. 동네 뒷산 같은 조금은 단조로운 길이었는데 괘일산에서 일어버린 암릉의 기억이 되살아 난다. 괘일산 오름 길 송림을 터는 바람소리가 시원하다.
괘일산 가는 길 바람이 시원한 소나무 숲길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만난 예상치 못한 멋진 풍광이 시원한 바람과 함께 산행의 피로를 날려준다. 이름없는 산에서 발견하는 숨겨진 아름다움들이 호남정맥의 묘미가 아닐까?
괘일산(14:48~15:05) 분주하긴 하다 우회로가 있어도 바위 절벽에 걸려 있을 풍광에 대한 기대가 칼날 같은 암릉의 모서리와 로프를 잡아채고 있으니… 세 번 힘겨운 오르내림을 반복하며 세개의 바위 봉우리에 올라 평화로운 호남의 산야와 흘러가는 산릉을 바라본다. 좌측은 깍아 지른 절벽 절벽 난간을 따라 웅장한 모습으로 도열한 채 어깨에 노송의 우아함을 걸고 정맥길을 따라 진군하는 암릉의 모습이 압권이다. 괘일산이 없는 8구간이란 김빠진 사이다요 뜨끈해진 맥주 괘일산의 마지막 봉우리 소나무 밑에 앉아 지나온 길과 바람이 불어오는 빈 하늘아래 펼쳐진 평화로운 풍경에 젖는다. 산행 길에 다행스러운 건 눈은 자꾸 사치스러워 지기만 하지 않는다는 거 공룡능선의 장쾌한 암릉미와 황산의 수려한 이국적 풍광을 돌아 보고 난 후에도 정맥길의 소박한 아름다움에이 여전히 내 가슴을 흔들고 있다. 내 눈은 세상의 수많은 비경과 아름다움을 비교하지 않는다. 허기사 우리의 척박한 삶이 얼마나 아름다움과 감동에서 놓여나 있는지 우리가 깨닫는다면 자연 속을 소요 하는 것 자체가 이미 감동일 게다. 자연 속에서 기쁨과 아름다움에 반응하는 감정의 촉수는 더
민감해진다.
괘일산 1봉
괘일산 2봉
괘일산 3봉
괘일산 2봉에서 바라본 지나온 1봉과 설산
괘일산 정상 소나무 그늘에 앉아 알프스님이 비슬산에서 떠올린 도종환님의 시 한구절이 생각난다.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힘겨운 인생항로를 살아가다 보면 별별 날이 많다는 본래의 의미가 아니라 무언가에 젖어 들지 않고 살아가는 삶의 건조함으로 내 가슴속에서 다시 해석되는 말 “취하라 , 술과 시와 덕 아니면 그 무엇에라도…” 내 친구 성박사는 낚시에 미쳤다. 저녁이 이슥해서 떠나 밤을 하양게 새우며 물안개 피는 호수의 고요한 수면의 찌만 바라보다 돌아온다. 내 동생은 주말이면 그림을 그리고 난 가쁜 숨을 몰아 쉬며 하루종일 산길을 빠대다 돌아 온다. 모두들 행복을 불러내는 주술이 하나씩 있다. 그 집착과 중독이 삶에 기쁨과 의미를 부여한다.
괘일산 3봉의 소나무
괘일산을 내려오며 바라본 암봉
괘일산 내려오는 길 소나무
괘일산 하산 풍경
참 세월이 빠르기도 하지 주화산을 오르던 내 발 밑에서 서걱거리던 서릿발이 엊그제 같은데 5월이면 우리는 무등산에서 호남 출정 상반기를 결산한다. 이렇게 어이 없이 흘러가는 세월이 말 없이 그 무수한 인생의 나이테를 그어놓았다.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어 마음만 하릴없이 바쁜데 인생의 봄날은 짧은 봄처럼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가? 아둥바둥해도 세월은 간다. 기쁜 일 즐거운 일만 가슴에 담고 살아가기에도 너무 짧은 우리의 인생길이다. 쓸데 없는 번민은 저 바람 부는 그루터기에 걸어 놓고 빈 마음으로 허허롭게 내려갈 일이다. 잠시 멈추어 서서 지난 시간을 뒤돌아보면 꿈처럼 지나버린 세월보다도 잔인한 사월처럼 그렇게 빨리 지나가 버릴 내 인생의 남은 황금기가 너무나 소중하고 아까워진다.
괘일산 내림길에 바라본 저수지 풍경
오솔길 안부(괘일산으로부터 20분) 괘일산 마지막 봉우리에서 마루금은 우측으로 방향을 틀어 흘러 내리고 완만한 능선길을 가다가 무이산 오름길 전에 평편한 안부를 만난다. 지도상에 희미한 길표시가 되어 있는 지점이다. 무이산(임도 안부로부터 15분) 제법 넓은 공터와 소로길이 있는 안부를 지나 10여분 정도 오름 길을 오르면 삼각점이 있는 무이산 정상에 도달한다. 304.5m로 일대에 걸출한 암봉의 괘일산을 지나 오다 보니 별로 주목을 끌지 않는다. 높이가 140여m 차이가 나는데 공터에서 멀리 바라다 보이는 지나온 괘일산이 훨씬 높은것처럼 올려다 보인다.
무이산 삼각점
과치재(무이산으로부터 52분) 과치재에는 몇 개의 두어 개의 200m 봉우리를 별로 의식하지 않은 채 넘고 예상보다 더 이른 4시 30분에 떨어졌다. 해는 아직 중천에 있다. 과치재는 그렇게 어정쩡한 위치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다. 어제의 여독을 걱정했는데 아직 시간과 힘이 남았다. 요즘은 다친 팔의 후유증으로 인한 체력저하에서 벗어나 호시절의 몸 상태로 돌아가고 있어 새벽같이 일어나 먼 길을 달려와서 너무 짧은 시간으로 마무리되니 좀
아쉬운 감이 든다.. 이런 날도 있어야지
2% 부족함으로 다소 여유로운 귀가길이 되겠다. 순차적으로 씻으러 가는 대원들 땜시 개가 심하게 짖고 종업원이 투덜거리는 주유소 옆 화장실에서 세수하고 머리를 감으면서 또 한 구간의 정맥길을 마무리 한다. 아직 강렬한 태양이 여전히 뜨거운 햇빛을 던지고 달구어진 대지가 열기를 뿜어내는 괴치재 그래도 가끔 시원한 바람이 불어주는 과치재에 앉아 한잔의 막걸리를 마시고 뜨거운 동태 찌게를 먹는다. 내가 먹은 막걸리와 김치찌개 그리고 동태찌게 만큼 내 발길이 지나간 정맥 길이 늘어난다. 장성호와 정읍을 너무 많이 지나다 보니 내 머리에는 백양사 슈퍼를 지나면 민약국이 나오고 삼거리 한의원이 나온다는 쓸데 없는 정보까지 저장 되어 있다. 돌아오는 길에는 아침에 보았던 삼나무 숲길이 더 낭만적이고 초록의
들판에 흐드러지게 핀 자운영이 더 정겨워 보인다.
과치재 풍경
과치재 풍경과 다음에 올라야할 연산 능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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