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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백두대간 제 20구간 (작점고개-눌의산-궤방령)

구    간: 제 19구간 (작점고개-눌의산-궤방령)
도상거리: 14km
일    자: 2003년 3월 8일(토~일)
날    씨: 눈 그리고 갬
기    온: -6c ~7c

토  11 : 50 시민회관
일  01 : 10 작점고개출발
     02 : 00 사기령
     03 : 40 금  산
     04 : 00 추풍령 (223M 철도. 힐튼장)
     04 : 05 굴다리
     05 : 30 눌의산
     06 : 20 날새다
     07 : 20 가성산
     07 : 30 248봉
     08 : 50 궤방령   

흐린 날씨 그리고 
심야에 떠나는 심산 여행
오랫동안 야간 산행과 멀어 있었다.
지지난주 체력적인 문제가 없다는 것은 확인 했지만 보길도 가족여행으로 지난 주 등산을
걸렀으니 잠 안자고 움직이는  산행이 부담스러울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30km에 13시간 정도 예상되는 산행이다.

나 때문에 몇 주가 미뤄진 “좋은친구들” 부부동반 모임도 오늘이다.
복조리 가든에서 시작하는 3시간 산행인데 도합 15시간 산행이 무리가 되지 않을까?
“어떻게 되겠지….”
모처럼 만난 친구들과 봉황정 가는데 하늘 가득 눈이 내린다.
세상에…. 춘삼월의 하늘은 아직 뿌릴 눈을 간직하고 있는 모양이다.
나야 올해 눈에 지치고 물릴 정도로 숱한 눈을 보았지만
다른 사람들 모두 근교의 산일 망정 잿빛 도시의 모습에서 떨어져  자연의  한가운데서
맞는 장한 눈의 모습에  마음들이 들뜨는 모양이다.
모두 수다스러워 지고 어린아이들처럼 좋아한다.
임도를 따라 산모퉁이를 돌아 오르는 길들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 쌓여 바람의 흐름이 정지
되어 있다.
커다란 눈들은 흔들림 없이  조용히 그리고 아주 천천히  대지에 내려 앉고 있다.
평화로움 속에
금새 흰 눈으로 덮여가는 인적 없는 산길과  나무들….
근교에서 조용히 만난 눈은 
서류을 정리하다 문득 발견한  아득한 시절의 빛 바랜 한 편의 시처럼 반갑고 아늑하다.
오랜만의 만남과 눈이 만들어 준 야외의  분위기에 취해 대간 출정을 목전에 두고 식사와
함께  5잔 정도의 술을 마셨다.


버스는 밤 12시 경에 대전  톨게이트를 나선다.
참으로 어정쩡한 밤이다.
1시간 정도면 작점 고갯마루에 도착할 것이다.
괜히 잠들었다가는 더욱 피곤할 테고 그저 점점이 명멸하는 차창 밖의 불 빛을 바라보는
것으로 수면을 달래려 했다.
한 숨도 자지 못한 상태에서 장시간의 산행이 신체리듬의 변화를  가져오지나 않을까?
이동거리도 짧은데 굳이 잠 안자고 또 보이지 않는 칠흑의 어둠 속에서 대간의 형체를
더듬어 가는 의미는 무엇에서 찾아야 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어리석은 출정이 아닐 수 없다 .
강원도야 이동거리가 길고 산세도 험한데다 만일의 경우 탈출로가 여의치 않기 때문에
여러가지 경우의 수를 감안해서   어느 정도  무박산행이 불가피하겠지만 이동거리가
짧은 추풍령 인근이야 굳이  무박의 이유가 있을까?
백두대간은 스스로의 인내와 체력의 한계를 시험하는 고행이 아니라 자연을 즐기며 인생을
배우자는 의미가 아닌가?

작점고개는 초입에서부터 발목 높이의 눈이 쌓여 있다.
고갯 길을 따라 오르는 길은 눈 밭을 헤쳐나가기가 힘들기 때문에 깊게 파인 자동차  바퀴
자욱을 따라  길게 두 줄로 오른다.
헤드랜턴을 쓴 사람
랜턴을 목에 건 사람
랜턴을 손목에 차거나 들고 있는 사람
랜턴 하나에도 저마다의 개성을 담아 내며 불면의 야간 산행을 감행하는 이 못 말리는 
동류의 인생들
15명은  오늘의 험로를 예상이나 하는 듯이 말 없이 묵묵히 걷고 있다.
3월 2일 보길도에서 따뜻한 봄 햇살과 벌써 웃자란 싱그러운 초록의 보리밭 그리고  눈부신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수줍게 피어 있던 동백의 봄을 만나고 왔는데 
바람은 차고 눈발이 날리는 여기는 아직 깊은 겨울이 서성이고 있다.

궤방령 까지 7시간 산행 그리고 궤방령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황악산을 거쳐 우두령으로
내려서는 6시간 산행이라는데  선두에서 1시간씩 앞당기면 11시간이면 마무리할 수 있겠다.
몸을 최대한 가볍게 하기 위해 산악대장이 배낭을 차에  남겨 둔 비무장 산행을 제안해서
모두들 가벼운 행장이다.
예전에 닭목재 를 거쳐 삽당령에서 탈진할 때도 비무장 산행이었는데 개인적으로 비무장
산행은 상당히 위험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익숙한 뒷동산의 등산로도 아니고 어떤 돌발 사태가 발생할지 모르는 백두대간 인데….
지난 경험들로 보아 산은 언제나 충분한 준비와 교만하지 않는 진지한 마음가짐으로 다가가
야 한다.
특히 많은 체력이 소모되는 장거리 산행은  힘이 남아돌 때 부단히 먹을 것을 먹어 체력을
보강하지 않으면 오버 페이스가 되는 어느 순간에 갑작스런 탈진이 찾아 오고 그 때는 음식
물을 섭취하더라도 남은 거리의 고통스런 산행에서 헤어나기 힘들다.
배낭은 차에 남겨 놓았지만 어깨에 메는 조그만 가방에 나는 요구르트와 주스 한 봉 빵이며
과자 까지 챙겨 넣었다.
가장 긴 시간의 산행로
눈이 많이 내리고 아직 쌓인 눈이 많이 남아 있는 오늘은 체력 안배에 더 신경을 써야 할지
도 모른다.
날리는 눈발이 얼굴을 간지럽히고 어디가 어딘지 분간하지 못하는 어둠 속에서 몇 번인가
선두가 바뀌어 일행의 중간 쯤에서 2시쯤 사기점 고개에 도착했다.
대간객 외에 사람들의 왕래가 많지 않았을 등산로에는 어둠 속에서 표정 없는 얼굴에 걸리
는 나뭇가지들이 많기도 하다.
어떤 구간에서는 가다가 가지에 걸렸는데 갑자기 불 빛이 없어졌다.
헤드렌턴이 없어져서 그걸 찾는다고 두리번거리는데
헤드랜턴은 나뭇가지에 대롱거리면서 빛나고 있다..
그 모습을 보고 뒤따라 오던 친구가 얼마나 재미 있어 하던지.
어쨌든 심야의 불완전한 침묵이 웃음으로 깨어질 수 있어서 좋았다.
지겨운 어둠은 새벽에서 너무 멀리 있으니 시계를 볼 엄두도 나지 않는다.

금산 채석장을 지났는지 안 지났는지 모르지만  여러 번의 구비와 경사를 올라  3시 35분
경 어느 봉우리를 올라서자 불 빛이 많이 모여 있는 추풍령이 보이고 휴게소의 밝은 불 빛
도 보인다.
애쓰게 올라온 길은 다시 고도를 낮추어 급강하 하는데 어디서 불자동차 싸이렌 소리도 들리
고 보이지 않는 길 위로 개 짖는 소리도 들린다.


차 소리가 가까이서 나는 걸로 보아 고속도로와 같이 가고 있는 모양이다. 다시 산허리를
돌아 올라  발아래 소도시의 황색 불 빛이 더 가까이서 내려다 보이는 추풍령으로 내려
서는 막바지에서 길이 끊겼다.
백두대간 지표인 리본도 사라지고  모두들 어찌 할 바를 모르고 길을 찾느라 분주한데 끝내
길은 나타나 주지 않는다.
결국은 뒤따라 온 후미의 김 대장이 사태 파악을 하고 곧바로 길이 아닌 곳으로의 하산을
결정했다.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길을 잃어 버리고 흰 눈이 덮여 있는 경사 45도의 산비탈에 길을 만들
면서 도시의 불 빛을 향해 돌진하는 심야의 괴한들
가지에 걸리고 눈과 낙엽에 덮혀 있는 바위에 부딪히면서 흡사 쫓기며 울부짖는 짐승의 모습
으로….
군대시절의 특공작전에 투입된 느낌마저 든다
그래도 김대장의 판단력과 결단력이 놀랍다.
거기서 길을 찾느라 우왕좌왕 하느니 불 빛을 바라보며 길 없는 급경사를 그대로 내려가는
것이 낫다는 신속한  결정.
오랜 시간의 경험과 강인한 정신력의 산물일 것이다.

회사 일을 하면서도 우리는  항상 많은 판단에 직면한다.
신속한 판단과 결정으로 과감히  업무를 추진하는 것이 지나친 신중함으로 실기하는 것보다
더 높은 성과를 만들 수 있음을 자주 본다.
신속한 결정과  비전공유.
그리고 역량을 결집한 전력투구
설사 그 판단이 잘 못되었더라도 빠른 의사 결정 하에 이루어지는 체계적인 업무추진은 잘못
된 결정 만큼의 오차를 충분히 상쇄한다 .

해발 제로 추풍령으로 난입했다.(추풍령이 산간마을이니 해발제로 일 리는 없지만)
15명의 무장괴한이 백두대간을 넘어 침투한 추풍령은 주황 수은등 아래 평화롭다.
늦은 시간에도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차량의 소음만 간헐적으로 새벽공기를 가르고 이따끔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
현재 시간은 3시 50분
폐쇄된 철길을 따라 이동한다.
가로등 불 빛을 따라 철길을 걷는다.
모두들 잠들어 있고
백두대간 종주객들은 느닺 없이 마을로 내려와 철길을 따라 걷고 있다.
앞 쪽에 힐튼장 여관의 간판이 보인다.
누군가 저기 들어가 2시간만 자고 가자고 했다.
고속도로로 끊어진 추풍령 고개를 통과해서 이어지는 대간로로 넘어가야하기 때문에
굴다리 아래로 들어서서 잠시 휴식한다.
아직까지 그렇게 힘들고 피곤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데 잠을 안자서 인지 정신이 좀 멍해
지는 느낌이 든다.
건강원에 의뢰해서 만든 사과쥬스를 팩 하나를 마셨다.
바람과 눈은 아직 밀월 중인데  정지하는 시간이 길어지니 온통 젖은 장갑에 손이 먼저
시리기 시작하더니 시린 새벽공기가 이내 체온을 뺏어 간다 .
모두들 용가리 처럼 허연 입김을 뿜어 댄다.
창피하게도 꽃핀다는 춘삼월에  나는 추풍령 굴다리에서  사시나무 떨 듯 이빨을 부다닥
거리고 있다.

굴다리를 지나 대간로에 접어들었다.
농로 길을 벗어나면서 완만한 경사를 오르는데 1진에 합류하려고 몇 명을 추월하면서 서두
르다 눈길에 된통 넘어 졌는데 무릎을 떨어뜨린 스틱에 부딪혔는지 눈물이 다 찔끔나오고
통증으로 걸음을 옮기기가 어렵다.
처음에는 무릎뼈가 깨어졌는지 심히 걱정했는데 시간이 좀 지나자 괜찮아졌다.
그래도 이만하길 다행이다.
매사에 경거망동은 화를 부른다.

한쪽은 절벽인 능선을 지나는데 덩치가 가장 큰 의사양반의 랜턴이 가지에 걸려 절벽쪽으로
떨어졌다.
너무 큰키라……
우습기는 한데  웃을 수가 없다 .
그 친구는 저쪽능선으로 돌아 절벽아래서 반짝이는 랜턴을 주워와야 할 테니…..

눌의산 가는 길은 힘겨운 길이었다.
해발이 높아지면서 급경사로 가파르게 일어나 앉아 있는 등산로 위에는 엄청난 적설이 그대
로 남아 있다.
평상시에도 오르기 힘든 길을  아이젠도 없이 쌓인 눈 위로 걸어 올라야 한다.
아직 새지 않는 어둠을 등에 업은 채로….
최선봉에 서지는 않았지만 선두에서 3번째니 거의 러셀을 하면서 움직여 가야 한다.
발에 힘을 줄라 치면 눈이 푹 꺼지고 어느 구간에서는 눈 아래로 빙판이 있어 갑자기 발길이 밀린다.
그런 가파른 등산로가 하염없이 계속되니 체력소모가 점점 많아진다.
지금까지도 거의 쉼 없이 걸어왔는데   진행거리로 보아 7시간으로 예정되어 있는 1차 구간
을 6시간 안에 주파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
그래도 등산용 스틱이 많은 도움이 된다.
미끄러워 밀리는 곳에서  체중을 지탱해주고 중심을 잡아 주니 …
웬만한 등산로라면 교각 같은 두개의 다리와 중심을 잡아주는 가운데 작은 다리라면 족하겠
지만 눌의산 가는 길은 또 한 다리의 도움이 없이는 정말 힘이 들 수 밖에 없는 그런 길이
다.
중간에 이젠 허기가 느껴져서  어둠속에서 찹쌀모찌 두개를 먹었다.
가파르게 솟구 친 막바지 언덕을 올라  사방이 눈으로 덮혀 있는 산정에 올랐다.
처음 그것이 눌의산 인줄 알았는데 5분을 더 가자 다시 봉우리가 나타난다 .
야호!
눈 안개와 어둠에 쌓인 눌의산 정상은 말이 없다.

가성산 가는 길에서는 제일 앞에서 러셀을 하며 앞장서던 친구가 갑작스런 체력저하와 졸음
에 시달리고 있다.
아무 생각 없이 멍하게 앞 사람을 따라 가다가 앞에서 졸면서 등산로를 벗어나는 모습을
보자  내가 정신이 퍼뜩 든다.
닭목재 백두대간 구간 산행 중  깜깜한 밤에 비와 함께 쏟아 지던 졸음으로 거의 미칠
뻔했던 기억이 있다.
한번 쏟아지기 시작한 졸음은 싸대기를 한 대 맞던지 잠시 눈을 붙이던지 하지 않고는 헤어
나기가 힘든 법이다 .
가다가 자꾸 나무에 붙어 자려고 하는데  눈밭에 그냥 두고 갈수도 없고 잠시 기다렸다가
다시 깨워서 선두를 바꾸어 길을 재촉하는데 여간 고통스럽지가 않은 모양이다.
일부러 이 얘기 저 얘기를 붙여가면서 날이 새면 괜찮을 거라고 힘을 북돋으며  산행을
이어간다.

기다리던 새벽이 온다 .
멀리 까지 이어지는 흰 눈 위에 드리운 어둠의 베일을 조용히 걷어내며 안개사이로 더 먼
나뭇가지들을 어렴풋이 들추어내며 그렇게 새벽이 슬며시  다가오고 있다.
새벽과 함께 기운이 다시 솟는다.
붉은 태양과 함께 찾아올 수 없는 여명이지만  불면의 고개를 넘어 지난한 5시간  어둠의
터널을 지나  만나는 새벽은 작은 환희와 감동이었다.
이렇듯 장대한 대자연의 모습을 갑갑한  어둠 속에 가두어 둔 채로 반디처럼 빛나는 이마의
불빛만으로  때론 솟구치고 때로는 무너져 내리는 대지의 굴곡을 순례의 길처럼  더듬어
왔으니  그 후련함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으랴.
어둠은 친구의 졸음마저 걷어갔다.

가성산 가는 길도 눌의산 못지 않다 .
골짜기 까지 떨어지는가 싶더니 가파른 오르막의 연속이다.
가득한 눈은 75KG가 실린 등산화를 자꾸 아래로 밀어 내려고만 한다 .
체력소모로 인해 요구루트와 팥빵 두개 마져 모두 먹어 버렸다.
나중에는 목이 말라 빙결된 눈 꽃을 아이스크림처럼 따먹고 소복히 쌓인 눈을 한 움쿰씩
집어서 먹으면서 가성산에 올랐다.
눈을 먹는 건 좋은데 흰 눈이 입언저리에 닿으니 부는 바람에 입이다 얼얼하다
이걸 보면 마누라는 뭐라고 할까?

눈을 먹고 나니 요즘 황사가 심해 대기중에 중금속이 많이 함유되어 있다고 하는 말이 퍼뜩
떠오른다.
이젠 심산의 눈으로도 그 옛날 눈을 받아 먹던 아름답던 시절의 동심을 떠올릴 수가 없다.
 
몇 번을 미끄러지고 가지 끝에 대롱거리며 가성산에 올랐다.
산 봉우리가 온통 흰 눈이다.
나리는 눈발과 산 안개에 쌓인 고봉은 발아래  격랑과 같은 여정을 굽어보며  표호하는
허세를 허락하지 않았다  
눈이 흩날리는 정상에서 사진 한 방을 찍고 장갑을 깔고 앉았다.
잠시 머무는 그 자유시간에 자유시간을 두개나 까서 먹으니 겨우 허기가 진정된다.
눈 밭일 망정 6시간 만에 처음 엉덩이를 땅에 붙여 본다.
갑작스럽게 피로와 추위가 엄습해 온다.
20분쯤 있으니 씩씩거리며 속속 후진들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상당히 빨리 움직여 왔는데 예상외로 빨리 따라 붙었다.
아마도 앞에서 러셀을 해가면서 진행하느라 우리의  체력소모가 더 많았고 생각하는 것
보다 등반 속도가 느렸던 모양이다.
30분쯤 되자 15명이 모두 모였다.
모두들 탈진 일보직전처럼 정상의 눈 밭에 그냥 드러누워 버린다 .
여선생님을 포함한 아줌마 두 명도 거품을 물어서인지 입술 주위를 허옇게  해 가지고
잔뜩 흐뜨러진 모습으로 주저 앉는다.
모두들 혀를 내두르는 산행이다.
잠을 자지 않고 끝도 없는 눈 길을 헤멘데다가 비무장 산행이라고 먹을 것도 부실하게 챙겨
간 결과 이리라….
궤방령 까지는 한시간 정도 남았다고 했다.
내려가는 길이니 별로 힘든 길은 아니겠지만 지금까지의 체력소모가 너무 컸기에
궤방령 까지 완전히 내려섰다가 다시 시작해야할 6시간의  2차 산행이 모두들 엄두가 나지
않는 모양이다.

눈이 덮인 길일 망정 다시 기운을 차리고 빠른 속도로 하산하는데 휘돌아 흘러내리는 능선
이 장쾌하다.
눈 안개도 거치고 사방이 시야에 들어온다
해발이 점점 낮아 지는 곳에서 햇빛 마저 구름 밖으로 고개를 내민다.
표고가 내려가고 있으니 점점 적설이 줄어들고 하산이 훨씬 수월해진다.
40분쯤 걸었나 훤히 보이는 들판 근처 까지 내려 왔는데 고개를 가르는 길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그저 밭 들과 공장인 듯한 건물이 보인다.
멀리 황악산이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황악산으로 이어지는 산세의 흐름이 다시 앞산으로 연결 되어 있는데 사태의 추이를 보자니
궤방령은 앞에 보이는 산을 다시 넘어야 할 것 같다.
우~씨

산너머 산
이제는 배가 몹시 고프다.
눈은 황톳길과 버무려져  먹을 눈도 없다.
하나의 산을 넘 다시 나타나는 산들
다 내려섰다고 생각한 곳에서 다시 세 개의 작은 산을 넘자 궤방령은 홀연히 산허리에 기대
어 나타났다.
아침 8시 50분
6시간이면 족하리라던 오늘의 1차 구간 산행은 7시간 30분 만에 그렇게 마무리되었고 나는
허기 일보직전에서 1차 집결지에 무사히 도착해서 2진이 도착하기 전에 김밥두줄과  김치
찌개 세그릇을 순식간에 먹어치워 버렸다.
올려다 본 황악산은 거대한 위용으로 산정에는 온통 흰 눈을 뒤집어 쓴 채 기다리고 있다
밥은 먹어 살 것 같긴 하지만 저 산을 넘어 다시 우두령까지 7시간 산행을 계속해나갈 체력
이 내게 남아있는 걸까?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겨를도 없다.
일단은 눈을 붙여야 한다.
뒤이어 속속 도착하는 팀들이 식사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눈을 감고 버스에 누웠다.
얕은 잠이 들었었는데  김대장이 눈 좀 부치고 11시에 다시 출정을 한다고 큰 소리로 이야기
하는 통에 잠에서 깨었다.
역시 김강쇠답다.
50이 넘은 나이에도 지친 표정하나 없이 다음 일정을 못박아 버린다 .
모두들 술렁이고 포기한다는 사람들이 속출한다.
김대장은 밥먹으러 가고
버스에 남은 사람들 사이에는 많은 말들이 오간다.
“백두대간에 목숨걸 일 있냐?”
“7시간 걸린다던 길을 9시간 걸렸는데 잠도 안 잔 상태에서 눈이 가득한 황악산을 어떻게
6시간 만에 내려올 수 있냐?”
“이동거리도 짧은데 5시간 어둠속에 산행하고 겨우 3시간 밝을 때 산행 했는데 한 숨도 안
자고 이렇게 무식하게 산행할 필요가 무엇이냐?”
“올해 안에 백두대간 마무리 못하면 어떠냐? 오늘은 여기서 마무리하자 “
사실 김대장의 객기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1~2시간 휴식한 후 저렇게 하얗게 눈을
이고 있는 문수봉과  황악산 구간 통과는 지금 상태로는 무리다.
특히 1000고지가 넘어서는 황악산은 한겨울 적설량이 만만치 않은 상태에서 그 위에 다시내
린 눈으로  등산시간을 예측할 수 없다.
강행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중간에 탈출로를 찾아 내려와야 할 것이다.
게다가 지금의 탈진한 체력상태로는 우리 중 누군가는 예기치 않은 위험에 직면할 수 있다.

다행히 산행종료는 합리적인 의견수렴과 협의를 통해 결정되었다.
나는 아침 10시도 채 안된 시간에 모처럼 쏟아지는 황금 빛 햇살을 차창 밖으로 바라보며
귀로에 올랐다.
황악산은 가득한 흰 눈을 머리에 이고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거대하게 솟아 있다.
저런 모습이라면 환상적인 설경을 만날 수 잇는 절호의 찬스인데….
새로운  산들에서 전혀 새로운 얼굴들로 다가오는  물릴 수 없는  멋진 설원의 풍광들이
아쉽게 뒷덜미를 당기고 있다.
잠만 자고 출발을 했어도 도전해 볼 만한 코스 였는데…….
나는 불면으로 흐트러진 신체리듬 때문에 하루종일 비몽사몽의 무기력한 시간을 보낼 수 밖에 없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