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영화

라디오스타 - 이동진 영화평

쉽다 깊다 좋다 - 라디오스타
  2006/09/26 20:30
이동진      조회 5236  추천 11

 

 

쉽다. 깊다. 좋다.

관객의 마음을 가져간다.

입으로 웃으면서 눈으로 울게 만드는

라디오 스타(28일 개봉)의 가장 큰 매력은

그 넉넉함에 있다.

 

왕의 남자로 정점에 오른 이준익 감독은

삶의 여백을 쓰다듬는 넉넉한 손길로

이 소박한 영화에 특별한 감동을 불어넣었다.

스타일로 승부하는 영화들이 초반에 넋을 빼놓다가

중반 이후 힘이 빠지는 경우가 많은 데 비해,

이야기와 인물에 집중한 이 작품은

뒤로 갈수록 더 큰 흡인력을 발휘한다.

 

한때 최고 인기를 누렸던 가수 최곤(박중훈)은

이젠 인기가 떨어져 찾는 곳이 거의 없지만

자신이 아직 스타라고 굳게 믿는다.

20년 가깝게 그를 돌봐준 매니저 박민수(안성기)는

최곤이 또다시 폭행으로 사고를 치자

합의금 마련을 위해 강원도 영월의

라디오 DJ 자리를 제안한다.

마지못해 지방 방송국 프로그램을 맡게 된 최곤은

원고도 무시한 채 멋대로 진행하지만

솔직한 방송이 오히려 큰 호응을 불러일으킨다.

 

라디오 스타의 캐스팅은 

충무로가 한국영화 팬들을 위해

오래 전부터 준비해온 선물 같다.

그 자체로 지난 20년간

한국영화의 역사인 안성기와 박중훈은

영화 안팎을 넘나들며 배우의 존재감을 강렬하게 발산,

다른 연기자를 떠올릴 수 없게 하는 연기를 했다.

 

영화 밖의 이력과 영화 안의 상황이 종종 겹치는 박중훈은

이 영화에서 삶 전체의 무게를 실어 연기한다.

지방 방송국 DJ로 처음 인사할 때

가수왕 최곤입니다라고 내뱉은 뒤에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듯 88년도라고

살짝 덧붙였던 퇴물 스타

작품 말미에 전국 방송 첫 회를 맞아

88년도 가수왕 최곤입니다라고

자연스레 말한다.

철없던 스타가 좌절을 겪으며

현실을 인정하고 성숙해지는 과정을

표현하는 데 집중한 박중훈의 연기는

후반으로 갈수록 더 강력한 위력을 발휘한다.

결정적으로 두 번 터뜨리는 클라이맥스 장면 외에도,

공개방송 무대에 서기를

극구 사양했던 이유에 대해

노래하고 싶어질까봐라고 나중에 아무렇지도 않게

슬쩍 내뱉는 장면에서조차

그는 아픈 내면을 제대로 실어낸다.

 

이 영화의 안성기는 눈부시다.

그렇게 오랜 세월 연기를 하고도

아직까지 관객을 감동시킬 수 있는

캐릭터가 남아 있는 배우를 지켜보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자가 겹치면 안 좋다는 PD의 말에

민주주의의 의의는 네 번이나 들어간다며 너스레를 떨 때,

비 오는 날 방송국 건물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담배를 피우며 전화할 때,

그리고 버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최곤의 우는 목소리를 들으면서

처연한 표정으로 팔다남은 김밥을 꾸역꾸역 삼킬 때,

안성기는 무장해제된 관객들의 가슴 속으로

깊숙이 파고든다.

 

술에 잔뜩 취한 젊은 PD는 퇴락한 최곤에게

차라리 그때 은퇴를 했으면 전설로라도 남았을 거 아냐

라며 아픈 곳을 찌른다.

이어 박민수에겐

아저씬 가족도 없어요?라고 쏘아붙인다.

뻔히 보이는 데도 해결할 수 없는 삶의 딜레마가 있다.

경쟁과 효율로 양 바퀴 추동력을 얻는 시대,

그러나 어떤 바보같은 사람들은

함께 어깨를 겯고 멀리 돌아가는 길을 택한다.

 

라디오 스타는 크게 꾼 꿈일수록

그 그림자가 크고 짙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영화다.

그런데도 감독은 탄식하기보다는

그늘 속으로 촛불을 들고

또박또박 걸어들어간다.

 

세월을 적잖이 흘려보낸 사람이라면,

그 촛불 하나로 추위와 어둠이 걷힐 수 없다는 것쯤은 안다.

그래도 지금 이 순간,

그 가녀린 촛불은 충분히 밝고 따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