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자와 산자의 가을
사촌형의 죽음이 스스로를 다시 돌아 볼 시간을 주었다.
올 해는 한 주도 산을 거르지 않았는데
형의 죽음으로 정확히 두 주를 산에서 멀어 있었다.
누군가는 그렇게 갑자기 떠날 수도 있는 것이다.
세상은 저렇게 눈부신데
누군가의 존재가 바람처럼 사라지는 것이다.
세상은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가고…
그래서 잠시 만사가 시들해지고 산다는 것이 허무해졌다.
가슴이 가을을 느끼지 않았으면 더 오래 침묵했을지 모를 일이다.
가을 이라고 한다.
나는 아직 살아 있었다.
시청 앞 밤 11시
황량한 도심의 스산한 바람이 부는 길
나는 왜 또 여기서 기다리는가?
허무와 삶의 허기는 다시 떠나고 싶다
지난 폭염의 기억은 아직 추억으로 가지 않은 채
계절의 길목을 서성이는데
가슴은 가을을 먼저 느끼는 모양이다.
가을이다.
그저 잿빛 하늘아래 머물 수 없는
산행지 : 큰옥수골 – 황철봉 – 울산바위 – 신흥사
산행일 : 2006년 9월 24일
날 씨 : 맑음
동 행 : 귀연산우회
소요시간 : 10시간 20분
산행시작 : 04 :30
합수부 : 05:20
985.8봉 : 06:30
음지백판골갈림길 : 08:00
주능선 : 08:30
황철봉 : 09:20
1318.8봉 : 09:50
너덜지대 끝 : 11:20
울산바위 앞 전망바위 : 12:05
울산바위 북쪽정상 : 13:10
흔들바위 : 14:10
신흥사 : 14:40
소공원 : 14:52
버스에서
허공달님과 몇 마디 나누다 잠에 빠졌다.
4시 30분 휴게소에서 이른 아침을 먹을 때 까지…
어디서나 잘 먹고 잘 잘 수 있다면
인생 행복의 반쯤은 먹고 들어 가는 거다.
그 열악한 환경의 충분한 잠으로 눈부신 가을날의 산책을 예약해 버렸다.
다시 강원도
잊혀진 추억과의 만남은 언제나 가슴을 설레이게 한다.
얼마 만인가?
소스라치는 차가움으로 내 목과 팔을 휘감아
코를 뻥 뚫어 대는 이 시원한 새벽 공기
어렴풋한 실루엣으로 다가오는 푸근한 산릉의 모습 위로
쏟아질 듯 맑은 무수한 별들
잊혀진 계절의 상념이 어둠을 가르고
가을은 코 끝으로 온다.
큰 옥수골
계곡 길이 이 정도면 양반이다.
오지의 희미한 산길을 걸어가리란 막연한 추측은 빗나가 버렸다.
어둠 아래 잠시 방황하기도 했지만
우리만 걷는 길은 생각보다 평온하고 평탄하다.
올라 갈수록 물소리가 더 커지는데
하늘에서 초롱거리는 별빛과 이마의 불 빛 하나로 어둠에 묻힌 계곡을
밝힐 수 없다.
각시 얼굴도 못보고 장가가는 삼돌이처럼 보지 못하는 답답함과 아쉬움이
남는 길이다.
그저 계곡의 탕탕한 물소리로 계곡의 수려함을 상상하고
발 아래 푹신한 낙엽의 감촉과 낙엽이 흩어 놓는 냄새로 가을을 느낀다.
후각과 촉감이 먼저 느끼는 가을이다.
계곡의 새벽
계곡의 어둠과 빛이 만나는 성스러운 시간은 계곡의 물소리가 잦아들던
합수점을 지나 조용히 찾아왔다.
어둠 속에서 휴식하다 다시 출발하고 잠시 눈을 들었을 때
어두운 수림 사이로 능선 위 희끄므레한 하늘이 찾아와 있었다.
그 빛은 계곡의 돌이며 이슬 맺힌 풀 위에 서둘러 내려 앉는다.
새벽은 깊은 계곡의 풀잎에 숨어 늦잠을 자다 화들짝 놀라 깨어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다가와서는 그렇게 가을의 들창을 열어 제친다.
가을이 오는 길목을 거닐며
눈부신 태양의 붉은 빛이 쏟아지는 능선위로 가을이 달려간다.
냄새와 피부에 닿은 바람의 감촉으로 느끼던 가을이 이제 눈앞에서
구체화 되어 있다.
서슬 푸른 초목의 푸르름은 벌써 그 강렬한 빛을 잃고 편안하고 부드러운
다갈색의 가을 색조로 바뀌어 간다,.
무한한 성장과 무성함을 위해 목메던 그 여름의 신화는 시간 속에 조용히 잠들고
이제 가던 길을 멈추고 잠시 자신을 돌아보고 들판을 바라보아야 할 계절이다
초조함과 조급함에서 깨어나 더 원숙함과 여유로움으로 가슴을 열어야 할 가을이다.
노루궁뎅이 버섯을 세번 보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보는 버섯인데 희한하게 생겼다.
좀 작은 걸루 2개를 집에 가져 왔는데
마눌이 큰일 난다구 아이들 못 먹게 해서 혼자 다 삶아 먹었다.
추억을 따라 가는 길
설레임을 따라 가는 길
4년 만에 잊었던 여인을 다시 만난다.
먼 발치에서 그녀의 모습이 보인다.
가을색 옷을 갈아 입고
여전히 변치 않는 화사한 미소를 날리고 있다.
첫 만남의 도도함은 사라지고
기다림에 지친 외로움도 없다
격정과 열정은 세월에 풍화되고
세월을 달관한 원숙함이 따뜻함으로 미소에 배어나는
그렇게 편안하고 그윽한 얼굴이다.
나도 그렇게 그녀를 닮아 갔을까?
세월은 많이도 흘렀다.
백두대간의 시작점에서 두번 째 출정 길
내가 정말 해낼 수 있을까 걱정하던 그 시간도
서둘러 과거의 강으로 갔고
나는 시간이 풀어 놓은 추억과 감동을 배낭에 담으며
바람처럼 그 눈부신 세월을 밟고 지나갔다.
온갖 세상의 아름다움이 그 길 위에 있었다.
참으로 많은 것은 찾았던 4년이 그렇게 빨리 흘렀다
백두대간을 종주할 수 있었음은 행운이었고
그 장정을 끝내고 삶과 자연에 대한 더 깊은 애정과
따뜻한 사랑을 간직할 수 있음은
살아가는 날의 기쁨이었다.
성하의 여름
거친 숨을 몰아 쉬며 종횡하던 능선을 바라본다.
아침 햇살이 쏟아지던
황철봉 아래 너덜이 그렇게 넓었었구나.
너덜을 지난 대간의 꿈이 저항령 위 1249봉은 멀리1326봉을 거쳐 갈기를 휘날리며
공룡능선으로 진군하고 있다.
그날의 함성과 함께 멀리 대청봉이 보인다.
산릉은 부드러운 색감으로 지나온 세월만큼
설악의 깊이를 드러내고 있다.
시원한 고원의 바람을 맞으며 세월의 시름에 잠긴다.
내 발길이 머문 곳의 흔적은 없어도
난 그 여름의 전설을 알고 있다.
내 머리엔
살아가는데 필요하다는 이유로
21세기의 잡다한 지식들이 채워져 있지만
지금은 아무 생각하기 싫다.
오늘은 그저 흘러가는 산릉과
고원의 투명한 바람과
푸른 하늘과 감미로운 9월의 태양 빛 만을 기억하고 싶다.
개똥철학
산은 삶의 지침을 돌려 놓은 스승이었고
우울할 때 위안이 되는 친구였고
기다림과 그리움의 여인이었다.
언제나 슬퍼하지도 배반하지도 않는 고혹의 여인
그 여인을 만나는 가을 하늘은 그렇게 드맑았다.
인생의 멋과 맛이란
불혹을 훌쩍 넘어서야 아는 것이다.
가슴이 울리는 대로 살아라….
그냥 흘러 보내기엔 너무 아깝고 짧은 인생 아닌가?
그림이 좋으면 그림을 그리고
바다가 보고 싶으면 바다로 가는 거다.
소년은 서둘러 꿈을 버리고
눈물과 감동은 지나간 순수의 궤적을 따라
그렇게 빨리 떠나가 버리듯이
세월은 그렇게 빠른 거란 걸
더 많이 나이 먹고 더 많이 잃어 보기 전엔 도저히 알 수 없음이라
항상 내 곁에 머물 것 같았던
우리 기쁜 젊은 날은 떠났고
사십 고개는 오래 전에 넘어 버렸다.
여기에 남긴 지난 내 발자국 위로 순식간에 4년의 세월이 퇴적되었듯이
나의 세월은 생각보다 더 빨리 늙어갈지 모른다.
어느날 갑자기 아름다움을 찾아가는 여행을 끝내야 할지 모른다.
병들어 움직이지 못하거나
삶에 지친 가엾은 영혼이 의욕의 날개를 접거나…
종삼이 형의 죽음처럼
저기 아름다운 풍경은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르고
또 몇 년이 흐른 후에나 한 번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수많은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은
생각보다 더 짧을지도 모른다.
행복은 살아있는 자들의 특권이고
영속하지 않는 삶의 유한함이라 더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소중한 우리의 시간들은 흐르고 있다.
떠날 수 있을 때 떠나고
춤은 출 수 있을 때 추어야 한다.
수많은 평범한 날들을 기쁨과 감동이 가득한 축제의 나날로 만들어 가는 것은
삶은 대하는 결국 나의 태도에 달린 것이다.
어떤 질문
친구를 만났다.
돈을 많이 벌었냐고 묻는다.
그래 엄청 벌었다.
싯가로 환산하면 수십억은 될 껄
내가 가는 곳이 길이었고
내가 길은 낸 곳이 나의 영지였다.
나는 팔리지 않은 광활한 땅을 소유한 대지주고
경매가 되지 않는
대자연의 아름다운 명품들만 수집하고 소장한다네
보유자산의 근거는 수 많은 추억과 몇 장의 사진
그리고 내가 남긴 몇 줄의 글
투자수익은
무릉도원으로 낸 길
언제나 그곳을 떠 올리고 찾아갈 수 있는 내 머리 속의 지도
또 있다.
계절이 바뀔 때 마다 고이는 그리움
감동으로 따뜻해진 가슴
그리고 21세기 교각 같은 튼튼한 내 다리
살아 온 것처럼
나의 살아가는 날도 정해져 있다
다만 살아가는 방법을 내가 선택할 뿐이지
울산바위
울릉도에서 죽도록 따라오던 죽도처럼
능선 먼발치에서 오랫동안 따라오던 대청봉이 이별의 손수건을 흔들고 나서
미시령을 바라보며 마지막 너덜을 내려서면서부터 울산바위가 계속 따라 온다.
설악 신령님의 고집도 엔간하다.
지난 번 신선봉 주유 땐 자욱한 안개를 풀어 하산할 때까지 울산바위
그림자도 보여주지 않더니
오늘은 시종일관 맑은 하늘아래
흰 빛에 빛나는 울산바위를 한 점 티없이 보여 주신다.
그래서 죽는 날까지 산을 떠날 수 없는 거다.
골짜기며 능선마다 배어 있는
내 땀의 의미와
가슴 시린 풍경과 추억을 잊을 수 없는 거다.
허공을 선회하는 독수리의 정수리에 걸터앉아
고원의 바람을 가른다.
우측으로 집채 만한 바위가 달려가고
앞으로는 동해바다가 있다.
별로 힘들지 않게 오른 북쪽의 울산바위에서
또 새로운 설악세상을 바라본다.
내 가슴 속에서 항상 출렁이는 바다와
유물처럼 떠도는 기억들
철제 계단이 설치되어 있는 울산바위 정상루트는 두 번 올랐었다.
오늘에사 처음 알았다.
북쪽으로 바위를 따라 길을 낼 수 있고
거기에도 신의정원이 있음을….
처음으로 대하는 아름다운 풍경과 새로운 사실들
물드는 단풍을 따라 가는 가을의 상념
이래저래 즐거운 가을산책 길이다
하산길에서
흔들바위가 저렇게 작았나?
울산바위를 먼저 보고 흔들 바위를 바라보아서 인지
세상 두루두루 너무 돌아다닌 탓인지…
바위 옆에서 한가로운 나른한 휴식들이 정겨워 보인다.
신흥사, 소공원, 권금성은 이제 동네절이고 동네 공원이다.
1년에 너댓 번은 댕겨가니 이젠 일상처럼 익숙하고 무덤덤해졌다.
이젠 지겨워 올해는 그만 와야겠다.
그래도 11시간 설악에 묻혀 있었는데 다리도 안 아프고
가슴이 뿌듯한 걸 보면 가을에 거닐만한 괜찮은 산책 길이었다.
오징어회와 고등어회에 걸친 한잔의 소주 맛도 짜릿했고….
다시 기억하고 싶은 날이다.
4년 전 어느 특별한 하루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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