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은 월출산 종주를 11시 30분 천황사매표소에서 시작합니다.
천황사에서 도갑사까지 6시간 종주를 위해서 우리는 수도권에서 1천리(410.3km)를 달려왔습니다.
아름다움을 소유하려면 이렇게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이니까요.
산악인들이 월악산 종주의 들머리로 영암읍 천황사(天皇寺) 쪽을 선호하는 것은 월출산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곳이어서도 그렇지만, 그보다 이 코스는 천황봉까지의 지름길이요, '월출산- '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구름다리를 향한 직행 길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호사다마(好事多魔)란 말 같이 어제 내리던 비가 아직 물러가지 않았는지 궂은 비와 안개가 우리들을 우울하게 하고 있습니다.
*. 선인들의 월출산 자랑
젊디젊은 시절이었습니다.
버스를 타고 아내와 함께 호남 벌판을 달리다가 서울 도봉산과 강원도 설악산과도 같이 뿔이 돋은 듯한 요란한 산봉우리들을 보고 옆 사람들에게 물어 보았다가 그 대답으로 들은 산이 월출산이었습니다.
그 월출산을 유홍준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지요.
-처음 보는 사람에게 월출산은 마냥 신기하기만 하다. 완만한 곡선의 산등성이 끊기듯 이어지더니 너른 벌판에 어떻게 저러한 골산(骨山)이 첩첩히 쌓여 바닥부터 송두리째 몸을 내보이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신령스럽기도 하고, 조형적이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대한이 회화적이다.
조선 초 성종 시대를 살다가 간 영남학파의 종주였던 대학자 김종직도 월출산을 지나면서 오르지 못하는 심정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는 것을 제가 시조로 의역해 보았습니다.
月出山頭日出光(월출산두일출광)
淰淰野雲收洞穴(심심야운수동혈)
稜稜秋骨倚穹蒼(능릉추골의궁창)
浮生强半聞名久(부생강반문명구)
絶頂難攀問俗忙(절정난반문속망)
彷佛伽倻眞足喜(방불가야진족희)
無端馬上憶吾鄕(무단마상억오향).
-佔畢齋集/金宗直
월출산 일출 속에 하늘 찌르는 가을 봉들
그 이름만 듣고 살던 인생 후반 길에도
말 타고
바라보기만 하니 바쁨도 죄로구나
-일만 시조 역
생육신의 한 분이신 매월당 김시습도 월출산의 달뜨는 아름다운 모습에 놀라 이를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달은 청천에서 뜨지 않고 이 산간에 오르더라.
-월출산 / 김시습
월출산은 전남 5대산이라는 남원의 지리산, 정읍의 내장산, 장흥의 천관산, 승주의 조계산 등과 같이 육산(肉山, 흙산)이 아니고 바위산인 것이 수석 전시장 같은 기기묘묘한 바위가 많은 산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월출산을 호남의 소금강(小金剛)이라 부릅니다. 이 월출산국립공원은 1973년부터 도립공원이던 곳을 1988년 도갑사지역을 한데 묶어 19번째로 국립공원으로 승격된 국립공원으로 면적은 56.1㎢로 국립공원 중에서는 제일 작습니다.
*. 왜 월출산(月出山)이라 하였을까요
월출산(月出山)은 영암지역에서 달을 제일 먼저 맞이하는 곳으로 달이 뜰 무렵에 바라보는 경치가 가장 아름답다고 하여 월출산이라고 하였답니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월출산은 신라 때에는 월나산(月奈山), 고려 때는 月生山(월생산)이라 하다가 月出山(월출산)이라 하게 된 것은 조선시대부터입니다.
月出(월출)이란 달돋이를 말하는 보통명사로 산에 달이 있으면 어느 산이나 월출산이 되는 것인데, 왜 영암의 이 산만이 고유명사로 산 이름을 월출산(月出山)이라 붙박았을까요.
이 해답을 지리적인 조건과 월악산이 육산(肉山)이 아닌 골산(骨山)인 것에서 찾아 볼 수 있겠습니다. 월출산은 산 속에 있는 산이 아니라, 곡창지대인 드넓은 영암, 강진 평야 서해안 바닷가에 홀로 우뚝 솟아 있는 바위산[骨山]입니다.
그 암산이 하늘을 향하여 검은 실루엣의 기괴한 연봉을 이룬 스카이라인에다가 휘영청 달 밝은 밤이 더하면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그것은 한 폭의 풍경화요, 한 편의 시처럼 아름다움이 될 것입니다. 그 산 위에 올라가 서해를 배경으로 하는 낙조나 월출은 또한 얼마나 환상적인 장관일까요.
-영암 송계천 골짜기 동쪽 능선에 있는 둥근 바위를 월대(月臺)라고 한다는데 '추석날 밤 월대(月臺)에 올라서 달맞이를 해보지 않은 사람'은 영암 사람이 아니다.'('한국명산기' 김장호 저 참고)라는 말을 놓고 보면 영암 사람들에게 달은 다른 고장 사람들 이상의 뜻을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 영암(靈岩)의 유래
월출산은 영암과 강진의 접경에 있는 산이지만 영암의 진산(鎭山)입니다. 그 靈岩(영암)이란 이름도 월출산의 바위와 연관되어 이에 얽힌 다음과 같은 이야기로 전하여 옵니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옛날 월출산에는 움직이는 세 개의 바위[動石]가 운무봉에 하나, 나머지 둘은 도갑과 용암 아래에 있었다. 그 바위들에게는 신령스러운 기운이 있어서, 이 산 아래 고을 사람 중에 그 영기(靈氣)를 받아 큰 인물이 난다고 하였다. 중국인들이 이를 걱정하여 그 바위를 몰래 아래로 밀어 떨어뜨렸더니, 그 중 한 바위는 스스로 도로 기어올라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사람들이 이 바위를 신령스런 바위라 하여 靈岩(영암)이라 하였고 그로부터 이 산 아래 마을 이름을 '靈巖'(영암)이라 부르게 되었다. 구정봉 아래에 있는 흔들바위로 '動石'이라 새겨진 바위가 그것이다.
이 도갑사가 있는 구림(鳩林)이 도선국사(道詵國師)의 출생지요, 구림의 성기동은 천자문 10권과 논어 1권을 일본에 전하며 일본의 고대문화에 크게 기여한 왕인(王仁) 박사의 출생지입니다. 영암은 한국 제일의 민요가수 하춘하의 고향이기도 하구요.
*. 하춘하의 고향 영암
성공한 사람이란 어떠한 사람을 두고 말하는 것일까요.
좋은 일로, 자기가 모르는 많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 이름을 기억해 줄 때, 우리는 그 사람을 성공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하춘하의 고향 영암' 하면 우리 국민 중에는 영암은 잘 몰라도, 민요 가수 하춘하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기에 영암을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효석이 '메밀꽃 필 무렵'으로 그의 고향 봉평을 빛내듯이, '칠갑산'과 '소양강처녀' 같은 대중 예술이 어떤 특정한 지역을 알리는 데에 무엇보다 더 크게 기여하는 것을 보아 오지 않았습니까?
저는 지금 며칠 전 MP3에 다운 받은 하춘하의 '영암아리랑'을 들으며 천황사 못 미쳐 있는 노래비를 지나가고 있습니다. 우측 노래비는 하춘하가 노래한 '영암아리랑비'요, 좌측은 해남 출신 윤선도가 월출산을 노래한 시조입니다.
그러나 등산객들은 어느 누구 하나 이를 둘러보는 사람이 섭섭하게도 없습니다. 산에 오르는 사람들은 등산에 바쁘고, 하산하는 사람은 하산에만 바쁠뿐입니다.
영암고을에 둥근 달이 뜬다
달이 뜬다 달이 뜬다
정든 둥근 달이 뜬다
월출산 천황봉에
보름달이 둥근 달이 뜬다
아리랑 동동 쓰리랑 동동
에헤야 에헤야 어서와 데야
달 보는 아리랑 님 보는 아리랑 ♩♫ ♬
-영암 아리랑 1절
月出山이 놉더마는 미운 거시 안개로다.
天皇 第一峰을 일시에 가리와라.
두어라 해 퍼딘 뒤면 안개 아니 걷으랴
-'山中新曲' 중 '朝霧謠'/윤선도 .
*. 천황사 갈림길
주차장에서 1km 오른 곳에 갈림길이 있습니다.
우측으로 가면 100m 거리에 원효대사가 지었다는 천황사를 볼 수 있으련만 이곳도 수많은 등산객들이 그냥 지나칠 뿐입니다. 0.9km 가면 있다는 구름다리 보기가 급한 모양입니다. 천황사 쪽에 안내판이 있는데도. 그냥입니다.
그런데 그 제목의 사자사목탑지(師子寺木塔址)의 한자 '師子寺'는 '獅子寺'의 잘못이니 이를 바로잡아야 할 것 같습니다. 본문 내용도 그렇지만 '獅子寺'는 사자봉(獅子峰) 기슭에 있는 절이니까요.
-사자사는 월출산 사자봉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그동안 천황사라 불리었는데 제1차 발굴조사에서 목탑유구와 '獅子寺'라는 명문이 출토되어 절 이름이 밝혀졌다. ~(후략) -사자사 목탑지(師子寺木塔址, 전남 지방기념물제197호)
*. 월출산의 명소 구름다리
천황사에서 시작하는 산길은 가파른 남성적인 골산(骨山) 길입니다. 그래서 천황봉까지 오르려면 체력 소모가 많은 길이지만 대신 도갑사에서 오르는 길보다는 짧은 거리지요.
도갑사에서 구정봉 천황사로 향하는 남쪽 산들은 여성적인 산으로 비교적 경사가 완만한 육산(肉山)이지만 계속 오름길로서 천황사 길보다 멉니다. 게다가 천황사 길은 이름도 멋진 '바람골', '바람폭포'와 이 산의 명물인 '구름다리'를 건너 통천문(通天門)을 지나 천황봉(天皇峰)에 이르는 직 코스이구요.
천황사를 못 미쳐서 두 갈래 갈림길이 있습니다.
오른쪽 길은 폭포가 바람에 흩어지면 등산객이 이슬을 맞듯이 지나면서 이 산에서 구하기 힘든 식수(월출산에 두 군데밖에 없음)를 구할 수 있는 바람 폭포로 해서 천황봉을 이르는 지름 길이요, 좌측 길은 구름다리로 해서 통천문(通天門)을 지나 천황봉에 이르는 길입니다.
협곡을 따라 불어오는 바람이 얼마나 많기에 골 이름도, 폭포 이름도 바람골이라 했을까요? 1km를 갔는가, 구름다리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구름다리란 길 위로 하늘 높이 가로질러 놓은 다리로 한자어로 운교(雲橋)라 하는 것입니다.
-월출산 구름다리는 매봉과 사자봉을 연결하는 다리입니다. 이 구름다리는 1978년에 시공되어 월출산의 명물로서 탐방객들의 사랑을 받아왔으나 시설이 노후되어서 안전을 위해서 2006년에 재시공한 다리입니다. 지면에서 다리까지 1백 20m의 높이를 가로지르는 이 다리는 해발고 510m로 국내에선 가장 높은 다리요, 길이도 한국에서 가장 길다는 연장 54m요, 통과 폭도 1.0m의 한국을 대표하는 다리입니다.
그런데 한여름에도 구름다리를 건너다보면 지금까지 흘려온 땀이 식은땀으로 변하게 되던, 바람에도 흔들리는 스릴 넘치는 옛날 구름다리가 그리워 지니 웬일이지요?
*. 최고봉 천황봉
산(山) 하나 되는 거다
많은 봉(峰) 지나고서
그 한 봉(峰)에 서는 거고
정상(頂上)에
나를 더하여
조망(眺望) 하루 되는 거다.
-등산(登山)이란
옛날에는 구름다리를 건너갔다가 길이 없어서 다시 돌아왔는데 지금은 그 건너 사자봉(408m)으로 오르는 90도에 가까운 암벽에 옛날에 없던 오르내리는 길이 구별된 멋진 쇠층계가 끝도 없이 계속됩니다. 오르던 쇠층계는 산을 휘돌며 멋을 부리기도 하며 지그재그로 오르내리기 45분 만에 사람 하나 겨우 지나갈 만한 바위굴 통천문(通天門)에 도달했습니다.
천황봉(天皇峰)에 이르는 문이라 하여 통천문(通天門)이라 하였다는 이문을 지나면 바람골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과 함께 영암의 영산강 물줄기가 한눈으로 들어온다는데 연무는 안타깝게도 시야를 막습니다.
통천문부터는 고진감래(苦盡甘來)란 말이 실감납니다. 그만큼 아까보다 편한 길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이 산은 예로부터 시인묵객들이 즐겨 찾던 곳이라서 그 흔적이 바위 곳곳에 있으니 여기서부터 정상을 오르는 암벽을 유심히 살펴보며 가야 합니다. 다음은 그 바위에 있다는 시 한 구입니다.
-'四海無家病比丘'(사해무가병비구)
신라 때 한 비구스님이 밧줄에 대롱대롱 매달려 바위에 새겼다는 시구입니다. 이를 새겨 보면 '병(病)든 비구(比丘)에게는 세상에 거(居)할 집이 없구나.' 인데 여기서 이 비구 스님의 병(病)은 무슨 병일까요? 그냥 질병이 아니고 도(道)를 깨우치지 못한 형이상학적인 병(病)입니다. 저는 자연을 사랑하는 천석고황(泉石膏황)이란 병에 걸린 사람이구요.
-예로부터 전하여 오는 말에 월출산 천황봉에 세 번 오르는 이는 자기가 소원하던 일을 이루게 된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저도 요번으로 세 번째 천황봉을 오릅니다. 처음에는 아내와 천황사에서 올라 금릉경포대로 내려갔고, 50대 초반에는 직장 동료와 함께 천황사로 해서 도갑사로 내려갔습니다. 이번에는 고희(古稀)의 나이로 세 번째 올랐으니 지금 나의 소망은 무엇일까요.
그 소원은 안으로만 간직하렵니다. 자고로 비밀이 없는 사람은 재산이 없는 자라고 하니까요.
천신만고 끝에 천황봉에 올라와 보니, 정상석은 자연석 그대로를 이용하여 세워 놓았고, 중앙 바닥의 황동 판의 이정표가 박혀 있고, 월출산소사지(月出山小祀趾) 비가 있는 것이 이색적입니다.
'소사지(小祀趾)'란 신라 때부터 임란 때까지 천신(天神)이 깃든 산 봉우리에서 하늘에 국태민안(國泰民安)을 위해서 제사를 지내던 제사 터로 국내 현존하는 3곳 중 하나랍니다.
천황봉 정상에 서면 월출산 주위에는 사방 백리 내에 큰 산이 없어서 남으로 해남의 두륜산(703m)과 북동쪽으로 광주의 무등산(1,186.8m)과 얼마 전에 다녀온 추월산(秋月山, 731.2m)이나 그 아래로 승주의 조계산(884.3m) 등을 쉽게 살필 수 있다 합니다.
*. 구정봉 가는 길
구정봉 가는 길은 바위들의 나라, 바위들의 세상입니다. 멀리 앞뒤로 들쑥날쑥하게 둘러싸인 바위 능선이 있고, 가까이 보이는 바위 바위들은 갖가지 형상을 한 것이 억만년 세월을 두고 깎이우고 씻긴 모양이 부드러운 선을 창공에 그리며 서 있습니다.
이 아름다운 광경과 같은 것을 일찌기 송강 정철은 관동별곡에서 지금의 저의 마음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 萬 二千峰을 歷歷히 혜여하니 峰마다 맺혀 있고 끝마다 서린 기운 맑거든 조티 마나 조커든 맑디 마나, 저 기운 흩어 내어 人傑을 만들고자, 形容도 그지없고 體勢도 하도 할싸. 天地間 삼기실 제 自然이 되연마는 이제 와 보게 되는 有情도 有情할사.
*. 베틀바위의 전설
다리로 걷는 건데 왜 이리 숨이 찰까
땀 뻘뻘 숨 헉헉~ 천황봉 가는 길
인생도
등산 길인가
왜 이리 힘이 들까
-등산
산에 오면 보통 힘이 드는 것이 아닙니다. 게다가 나와 같은 칠순 나이에 건강한 젊은이들을 따라 산을 종주한다는 것은 고행을 자초하는 일입니다. 이 젊은 산꾼들은 구정봉도 생략하고 도갑사를 향한 모양이지만 그 구정봉을 보려고 온 제가 어찌 생략할 수 있을까요. 구정봉 오르는 길 우측에 베틀굴(일명 陰水窟)이 있었습니다.
-임진왜란 때였다. 이 근방에 사는 사람들이 난을 피해서 이곳에 숨어 살 때 부녀자들이 베를 짰다는 전설에서 생긴 이름이다. 굴의 깊이가 10m 쯤 되는데. 굴속에는 항상 음수(陰水)가 고여 있어 사람들이 음굴(淫窟) 또는 음혈(陰穴)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는 굴 입구는 물론 내부의 모습이 마치 여성의 국부(局部)와 같은 형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굴이 천황봉에서 바람재 이르기 직전에 있는 남근석(男根石)을 마주 보고 있는 음양 조화의 모습을 보면 월출산의 신비에 감탄하게 된다는데 너무 힘이 들어서 그 생각을 잊고 왔군요. 더구나 남근석 꼭대기 귀두 위에는 봄이 되면 철쭉꽃이 피어나서 생명의 신비를 더하여 준다는데 말입니다.
*. 구정봉(730m)의 전설
베틀굴에서 100m 위에 있는 구정봉에 올라서도 그 표지가 자세하지 않아서 구정봉이 어딘지 몰라서 헤매였습니다. 비슷하다 하는 곳에서 사진 몇 장을 찍고 부랴부랴 서둘러 도갑사길로 들어서지 않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일행에게서 너무 뒤떨어져서 그분들에게 걱정거리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월출산을 영암에서 보면 영암의 천황봉과 강진의 구정봉 두 줄기로 나누어 볼 수가 있습니다. 선인들은 지금처럼 높이로 따지지 않고 주봉(主峰)을 구정봉(九井峰)으로 본 것 같습니다. 구정봉에는 천황봉보다 더 많은 명소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 남쪽으로 그 유명하다는 무위사(無爲寺), 서쪽으로는 천년 고찰 도갑사(道岬寺)가 있는 것도 그렇습니다.
그래선가요, 구정봉 주위에는 천황봉과 달리 전설 또한 여러 가지가 전하여 옵니다.
-九井峰(구정봉)이란 이름처럼, 구정봉은 정상에 크고 작은 9개의 웅덩이[風化穴]가 있는데 화강암이 오랜 세월 동안 물에 삭아서 생긴 가마솥 같은 웅덩이로 큰 것은 지름이 3m, 깊이가 50cm나 된다. 그 속에는 신기하게도 물이 항상 고여 있는데 옛날에는 그 웅덩이에 아홉 마리 이무기가 살았다.
-중국인들이 조선을 약하게 만들려고 풍수설을 거꾸로 가르쳐 주는 것을 도선(道詵) 대사가 알았다. 그래서 이들을 혼내 주려고 도술로 조화를 부려 디딜방아를 찧어 구정봉의 9개 우물을 만들며 위협할 때 생긴 것이다.
위와 같이 구정봉의 어원을 용과 도선(道詵) 대사와 연관되는 전설도 있지만, 부정적인 인물로 못된 장사에 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옛날 영암 구림 마을에 동지친이란 장사 아기가 태어났다. 세살에 맷돌을 들어올리더니 7살에는 나뭇짐을 지고 다녀서 마을 사람을 놀라게 하였다. 어느 날 한 노승이 찾아 와서 '좋은 스승을 만나 가르치지 않으면 비운에 빠질 수 있다.' 하였다 어머니는 이를 걱정하여 노인을 따라 가게 하여 금강산에 가서 10여년을 도술을 배우고 돌아왔다. 그러나 동지친은 심술과 행실이 좋지 않아서 어머니와 이웃 어른들의 말을 거역하며 하늘을 욕하며 오만과 만용을 부리며 큰 걱정거리가 되는 일만 하고 다녔다. 이를 전해 들은 옥황상제가 크게 노하여 "네 행실을 보니 공명심과 욕되는 만용에만 도술을 쓰는구나."하고 구정봉에 올라와 심술부리는 동지친에게 아홉 번의 벼락을 내려 죽여 버렸다. 그때 남은 벼락의 흔적이 구정봉 아홉 구덩이다.
*. 국보 144호 마애여래 좌상
구정봉 바로 아래 북서쪽 500m 지점에 마애여래좌상이 있습니다. 1970년 2월 12일 영암 주민에 의해서 발견되고, 72년 4월 6일에 국보 144호로 지정된 마애여래좌상입니다. 이를 보려면 능선 길에서 0.5km를 내려갔다가 다시 원점 회귀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산 꾼들은 앞만 보고 달리는 말(馬)과 같아서, 이 유서 깊은 1천 6백여 년 전의 해발 700m의 자연암벽에 새긴 이 귀한 마애여래좌상도 그냥 본 것으로 치고 지나치고 간 모양입니다. 집에서 떠나올 때 무슨 일이 있어도 가보아야겠다고 벼르고 왔지만 저도 생략하고 가버린 일행을 부지런히 뒤좇아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은 겨울이라 도갑사 쪽에서 올라오는 사람이 그친 지도 오랜 시간이었습니다.
- 우리나라에서 국보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신라 말에서 고려 초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 마애여래좌상(국보 제144호)은 구정봉(해발 738m)에서 약 500m 지점 아래에 자연 암벽에서 만나 볼 수가 있다. 1,300여 년 전 백제 유민들이 조각하였다는 이 불상은 절벽의 큰 바위에 큰 액자 같은 바위를 네모지게 움푹 파고, 석굴암 본존불의 2배가 넘는 총 높이 8.6m의 여래의 좌상을 그 감실 속에 각가지 무늬의 광배와 함께 70cm나 되는 깊이로 양각(陽刻)하여 놓았다. 이 불상은 그 크기가 웅장한데다가 얼굴이 원만하고, 귀는 어깨까지 내려와 있으며, 큰 머리 가느다란 신체 등 부분적으로는 불균형 한 것 같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뛰어난 균형미를 자랑한다. 그 조각 수법이 섬세하고 치밀하고 정묘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또한 오른 손 옆에 86cm의 선재동자상(善財童子像)이 부처님을 향하여 예배하는 모습이 있어 멋지고 더욱 이채롭다.
이 대좌 아래에는 배례석(拜禮席)이 있고 그 바로 아래에 평평한 절터가 있는데, 거기에 샘물이 있다는 것을 보면 여기가 불상을 모시던 용암사라는 절터인 모양입니다.
-(안장헌님 사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서)
구구정봉에서 방금 다녀온 천황봉을 바라봅니다. 산에 와서 한 발 한 발지나온 능선과 봉들을 되돌아보면 나의 발자취를 보는 것 같아서 그 모습은 너무나 아름다운 정경이요 행복이 되는 일입니다. 우리들의 살아온 길도 저렇게 아름다웠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 오이를 먹으며 가는 도갑사 길
구정봉에서 억새밭으로 유명한 '미왕재'를 향하는 길은 내리막 하산 길입니다.
미왕재는 도갑사와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875년에 창건했다는 극락보전(국보13호)으로 유명한 무위사(無爲寺)와의 갈림길이지만 그 지역은 요즈음은 휴식년제(2006년 말까지)로 통금 지역입니다.
이곳은 옛날에는 숲이었지만 어느 해 산불이 크게 난 후 억새밭이 되어 가을이면 은빛 물결이 아름다워서 구름다리와 함께 월출산의 또하나의 자랑거리로 명소가 되었습니다.
산행을 위해 준비해 온 오이를 먹다 보니 지금 향하는 해남의 대흥사의 말사라는 도갑사를 세웠다는 풍수지리설의 원조 도선(道詵)대사의 전설이 생각납니다.
(한국민족문학대백과사전 도선대사 그림)
-신라 시절 어느 해 겨울 영암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구림(鳩林)에 사는 최씨 처녀가 성기천 냇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데 떠내려 오는 오이가 있어 그걸 건져 내었더니 그 후 태기가 있어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다. 처녀 몸으로 아이를 낳는데다가 아이의 얼굴마저 뒤틀려 있었다. 최씨 처녀는 동내 이목이 두려워 아이를 숲 속에 버리고 돌아왔다. 7일째 되던 날 모정을 이기지 못한 최씨가 그 자리에 가보니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이를 비둘기들이 털을 뽑아 감싸 주고, 학은 날개로 품어주며 뭔가를 먹이고 있었다. 이에 비로소 하늘이 내린 귀한 자식인 줄 깨닫고 집에 데려다 키우다가 문수사 주지에게 맡겨 기르도록 하였다.
도선(道詵)은 자라서 우리나라 최초의 풍수지리설의 대가가 되었다. ‘도선비기’라는 비결서를 쓰기도 하였다. 신라 말에 개성의 왕릉의 집에 갔을 때 ‘2년 뒤에 반드시 고귀한 사람이 태어날 것이다.’라고 고려 태조 왕건의 태어남을 예언하여서 고려 태조 이후 고려왕들에게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고려 태조 왕건이 자손들을 훈계하기 위해서 지은 훈요10조(訓要十條) 중 2조에 이런 글이 있다. '여기 사원들은 모두 도선이 산수의 순역(順逆)을 점쳐서 정한 자리에 개창한 것이다. 도선은 일찍이 "내가 점쳐서 정한 곳 이외에 함부로 사원을 세우면 지덕을 손상하여 국운이 길하지 못하리라. 신라 말엽에 사찰을 함부로 이곳저곳에 세웠기 때문에 지덕을 손상하여 나라가 멸망하였으니 경계하여야 한다." '
-도선이 태어난 동내 이름을 ‘鳩林’(구림)라 하는 것은 비둘기 '鳩'(구) 자로 위에서 말한 도선의 출생과 관계된 전설적인 지명이다. 이 도선이 자라서 중국에 다녀와서 이 문수사 절터에 절을 세우니 그 절이 바로 도갑사(道岬寺)였다.
*. 죄인의 마음으로의 귀향길
산에 가서 절을 만난다는 것은 보너스를 받는 것처럼 흐뭇한 일입니다. 도갑사(道岬寺) 같은 이름난 절을 만난다는 것은 더 더욱 가슴을 설레게 하는 일이 됩니다.
그러나 오늘은 겨울이라 밤장낮단(夜長晝短)인데다가 도갑사 못미쳐서부터 헤드렌턴을 켜야 할 정도로 어두워 졌습니다. 방금 터지기 시작한 핸드폰에서는 일행이 모두 나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입니다. 가득이나 느린 데다가 산의 곳곳을 욕심내고 사진을 찍으며 다니는 사람이었으니 저런 노인을 왜 데리고 왔나 하였을 것입니다. 천리 길이라 아무리 바삐 달려가도 밤 12시 이전에는 도착할 수 없으니 지금부터 수도권까지 내내 저는 죄인의 마음으로 가야 할 것이니 큰 일 났습니다. 그보다 다시는 이 산악회에 함께 따라나설 용기마저 잃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거닐어 보고 싶었던 '해탈문'(국보 제50호)을 향하여 난 100m의 오솔길도, 미륵전 내에 있다는 하나의 돌로 된 높이 3m의 석조여래좌상(보물 제89호)은 물론, 이 절의 곳곳에 어린 도선대사의 향취 등을 글로 그림으로 남긴다는 것은 다 허사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예로부터 시는 소리 있는 그림이요[詩有聲之畵], 그림은 소리 없는 시[畵無聲之詩]라 하던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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