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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너는 어느 별에서 왔니?

너는 어느 별에서 왔니 ?

류시화가 묻는 말이다.

 

막내가 그랬다.

아빠의 전생은  서기 400년 경 포루투칼의 보석세공사인데 여자래

그리고 예술과 문학에 심취했던.

 

컴퓨터에 태어난 날과 시간을 넣고 나온 정보가 얼마나 신빙성이 있으랴만 어떤 기준을 가지고 저런 데이터를 만들어 내는지 궁금하긴 하다.

 

류시화는 자기가 북극성에서 온 여행자라 했다.

지구별을 여행하는 여행자

 

우리는 모두 여행자다.

우리는 떠나게 되어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도 많지 않다

떠날 땐 모든 것을 놓고 빈 몸으로 떠나야 한다.

여행의 목적을 잃어버리고 여행지에 집착한다면

그 집착이 사라질 때 까지

언제라도 다시 그 장소에 태어나야 한다.

우리가 무의식 중에서도 잊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어디서 왔으며 어딘가를 향해 가고

가고 있는 도중 이라는 사실이다.

 

맞는 말일까?

유전자에 이미 프로그램되어진 여행자의 본능이란?

미지의 낯선 곳에 버려지고 싶은 갈망

그냥 아무런 변화 없이 하루를 그저 넘기고 싶지 않다는 모험심

그가 나를 닮은 건지

묘하게 나의 방랑벽을 합리화 해 준다.

그에게서 풀냄새와 바람냄새가 날 것 같았다.

나는 늘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멀리 떠나지 못했다.

그렇다고 떠나지 않은 주말은 별로 없었다.

점점 더 영토확장의 열망을 키워 간 인디언처럼

나의 여행지와 시간의 지평은 그렇게 확장되어 갔다.

스스로 개척한 드넓은 영토를 가로질러 패주하는 날

고립된 절벽에서 늑대의 울음으로 슬퍼하던 늙은 추장처럼

세월이 많이 지난 날

어느 흔적 없는 길목에서 아쉬움과 회한의 눈물을 흘릴지 모르겠지만

 

어렸을 때부터 나에게는 한가지

고칠 수 없는 습관이 있었다.

그것은 집을 떠나 멀리 까지 갔다가 돌아 오는 일이었다.

그 나이에 내가 갈 수 있는 곳까지 가능한 한

멀리 가는 것을 나는 좋아했다.

시간이 늦으면 그 마을의 어느 마을의 집에 들어가 잠을 자기도 했다.

산 너머 다른 세계로 가는 것이 나는 그렇게 가슴 두근거릴 수 없었다.

 

어렸을 때 나는 아이들을 몰고 다니는 걸 좋아했다.

아이들과 노는 것도 재미 있었지만 멀리 보이는 산과 가보지 못한 곳까지 가려면 혼자는 겁이

나서 갈 수가 없었다.

친구들은 나의 이야기를 좋아했고 나는 그 대가로 탐험의 원정대를 꾸렸다.

키를 따라 간이 커가면서는 혼자 산이며 들판으로 쏘다녔다.

그래서 고급정보는 내가 단연 최고였다.

메뚜기와 개구리가 많은 논

풍뎅이와 산딸기가 많은 산

고기가 많은 개천

못을 납작하게 갈리기 좋은 철길 등등

무턱대고 걷기는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레 몸에 배었고 군대시절 보병주특기로 엄청난 걷기 훈련을 통해 내공이 깊어졌다.

방랑벽을 누르지 못해 수 많은 산들과 백두대간 길을 주유하면서 느리게 사는 즐거움을 깨달아 갔고 걸으며 명상하고 마음을 수양하는 도인의 경지를 흉내 내고 있다.

 

집이 없는 자는 집을 그리워하고

집이 있는 자는 빈 들녘의 바람을 그리워한다.

나 집을 떠나 길 위에 서서 생각하니

삶에서 잃을 것도 없고 얻은 것도 없다

모든 것들이 빈 들녘의 바람처럼

세월을 몰고 다만 멀어져 갔다.

어떤 자는 울면서 웃는 날을 그리워하고

웃는 자는 또 웃음 끝에 다가 올 웃음을 두려워한다.

나 길가에 피어난 꽃에게 묻는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았으며

또 무엇을 위해 살지 않았는가를

살아 있는 자는 죽을 것을 염려하고

죽어가는 자는 더 살지 못했음을 아쉬워한다.

자유가 없는 자는 자유를 그리워하고 

어떤 나그네는 자유에 지쳐 길가에 쓰러진다.

 

1994년 류시화가 삶이 내게 가르쳐 준 것들에서 서문으로 가늠한 말이다.

 

인생은 가벼운 수필 같아야 한다.

무릉객이 한 말이다.

살아 있는 자체가 축복이고 기쁨이 아닐까?

더 고결하고 숭고한 그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 인생이라면 그 짧은 인생이란 여행길에서

너무 많은 것을 잃고 떠나가야 할지 모른다.

 

더 큰 슬픔을 작게 하고 더 작은 기쁨을 크게 할 수 있는 지혜를 배우고

슬픔보다는 기쁨을 더 누리고 자신을 기쁘게 하는 세상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찾아 즐거운 여행을 계속해가는 것이 우리의 삶의 의미여야 하지 않을까?

 

명상이란 결국 내가 사라져 자연과 존재가 하나가 되는 일이라고 한다면 기도 역시 어떤 의미에서는 마찬가지다.

그것은 내가 사라져서 신이 내 안에 들어오는 일이다.

 

나의 길은 언제나 명상에 닿아 있었다.

매일 아침 1시간 15분에 걸쳐 걸어 가는 나의 출근길

하천 두렁에 솟아 오르는 초록의 풀잎을 바라 볼 때에도

자욱하게 피어나는 물안개 아래 얕은 개울을 퍼덕거리며 헤엄쳐 오르는 잉어 떼를 바라보는 도심의 하천에서도

그리고 바람에 낙엽이 뒹구는 아파트이 숲에서도 

 

무수한 산을 걸어 먼 길을 떠날 때는 또 어떤가?

그냥 묵묵히 걷기만 할까?

고원에서 붉게 떠오르는 태양과 마주할 때

흰 눈이 천지를 뒤덮고 앞이 보이지 않는 눈보라가 바람을 타고 내 귀에서 서럽게 울 때

 

조금은 슬프고 외롭기도 하고

가슴이 뛰고 또 기쁨이 넘치던

조용히 내 가슴을 흔드는 것들이 있었다.

그 가슴 뒤에는 언제나 편안함과 작은 깨달음의 느낌이 다가 온 듯하다.

설명하기 어려운 황홀한 즐거움과

내 세상의 무게를 새털처럼 가볍게 만드는 고요와 평안

 

강물에 작은 돌들이 부딪히며 흐르는 소리

 떨어지는 나뭇잎의 속삭임

이파리에 붙었다가 껍질을 내던지는 어린 매미의 소리

바람에 덧문이 여닫히는 소리

그것들에 귀 기울이면서 나는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와 만날 수 있었다

 

바람과 나무와 물

명상이 정말 대단한 것이 아니라면 

산속에서 만난 것들과 나누는 침묵의 교류에는 언제나 또 다른 나와 명상이 자리를 함께했다.

자신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은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다고 했던가?

여기 나르시즘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혼자 있음이 외로움이 아니라는 걸 안 때부터

세상에 가장 죽이 잘 맞는 친구가 란 걸 알고부터

혼자 떠나는 길에서 세상과 더 수다스런 대화를 한다는 걸 안 때부터

나는 늘 혼자 여행길에 목말라 했다.

 

남도의 물길에서 올라 통통배 따라 섬으로 오르는 봄이 그리워 질 때

남들이 알지 못하는 비밀의 정원 그 고요와 적막이 그리워 질 때

아름다운 세상을 노래하는 단풍들이 숲길에 떨어지는 모습이 보고 싶을 때

춤추며 내려오는 고원의 눈 밭에 나 홀로 서고 싶을 때

텅 빈 내면의 하늘 속으로 떠오르는 붉은 태양이 보고 싶은 때도. 

 

새벽에 혼자 떠나는 여행 길의 기쁨과

세상에서 가장 죽이 잘 맞는 나와 떠나는 여행길의 낭만을 알까?  

 

신은 내가 신을 바라보는 바로 그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계신다

중세의 신비가 마이스터애크하르트가 한 말이고

신은 내가 신의 말을 듣는 내 귀로 내 말을 듣고 계신다.

류시화가 한 말이다.

 

나는 나의 길을 갈 뿐이다.

가끔 시공을 초월하는 존재를 느끼긴 하지만

그 존재를 의식해서 내 행동이 제약 받거나 바뀌지는 않는다.

신 앞에서 소망을 말하거나 기도를 하지만 

그건 나의 꿈을 확인하는 것이고 단지 그 꿈을 방해하는 것들로부터 보호를 요청하는 것이다.

 

류시화는 강물이 말하는 소리를 듣는다고 했다.

 

이파리 속에서 얼어 죽은 벌레  한 마리가  흙 위로 나뒹구는 것을 바라보는 순간에

우리가 사랑이나 진리나 행복이라고 이름 붙인 것들의 정체가 확연히 드러나곤 하는 것이었다.

空의 세계

저녁 강물을 바라보며 앉아 있을 때 내가 왜 나이고 내가 왜 나의 존재의 바람 없는 구멍 속으로 마구 빨려 들어가야 하는 것인지.

 

할아버지 무덤 옆에서 어둠이 다가 오는 모습을 지켜 보았다.

몇 일을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는데도 언제나 다가오는 모습을 들키지 않고 어둠은 내 곁에 다가와 있었다.

그저 바쁘고 번잡하게 살았는데 이제 희끗한 세월이 내 머리에 내려 앉고 사십고개를 훌쩍

넘어 지천명을 바라보는 한 남자가 우두커니 서 있다.

지금 가장 기쁨 이었던 시절이라고 생각했던 지난  날에는 그 기쁨의 의미를 몰랐었고 철들면서

는  기쁨보다 슬픔에 더 통절했고 사십고개를 훌쩍 넘어서야 구름 같은 세상의 이치에 조금 다가간 듯하다.

 

삶의 어떤 길을 걸어 가던지 늘 그대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생각하라

나는 누구인가 라는 근본적인 질문에서 달아나지 마라

슬프면 때로 슬피 울라

그리고 무엇이 참 슬픈가를 생각하라

그대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고 또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려고 하지 않는 것

그것이 참 슬플 것이다.

 

ㅋㅋㅋ 나는 무릉객이다.

나는 누구인가?

내 부모님의 아들이고

한 여자의 남편이고

두 아이의 아버지다.

내가 생성한 우주를 통치하고 운영하는 책임자

내가 힘들고 찡그린 얼굴을 하면 많은 사람이 슬퍼하기에

나는 강해야 하고 언제나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보여야 하지.

별로 힘든 건 없지만 내가 떠바치는 우주의 무게가 부담스러울 때도 있지만

모두 내가 선택한 운명인 걸.

답답하긴 하지

빛나는 날개를 가지고 창공을 날아오르지 못하고 있으니.

5일쯤은 내 우주의 번영을 위해 일해야 하고 하루쯤 내 우주의 입주자들과 보내야 하고

내가 원하는 곳으로 비행할 수 있는 시간은 하루 정도

아직 나를 만나고 기쁨을 만나는 그 시간을 더 늘릴 수는 없다네. 

 

하지만 내 우주의 짐을 벗어 버리는 날은 점점 다가오고 있고

난 훌훌 날아갈 준비를 하고 있지

인생 뭐 거창할 거 있나

내 우주의 평화가 유지되고

일주일에 하루쯤 가슴이 울리는 대로 살면 그걸로 족하지

 

 

바람이 불러서

흰구름이 나를 유혹하여서 나는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어느날 일체를 버리고 성급히 인도로 갔다.

그 곳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내 삶이 어디로 흘러 가는지 무슨 의미 속에서

하루하루가 지나가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내 젊은 날이 다 가버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시는 오지 못한 그날들이.

그래서 나는 인도로 갔다.

 

그는 매인 일이 없었고

책임질 일도 없었고

아니 떠나고자 하는 열망이 나보다 훨씬 강했지

그는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고 자신의 우주를 만들지 않았지

어쩌면 그 방랑의 운명이 잉태한 유전자의 힘이 어떤 전통보다 다른 소중한 것들을 관장하는

것들보다 훨씬 강했을 테지..

그는 궁색했지만 새처럼 자유로웠고

언제나 자유로운 영혼을 꿈꿀 수 있었겠지.

소중한 많은 것을 얻었겠지만

우리가 중요하다 중요치 않다 말하는 것들이란 모두 사람들의 가치관에 따라 다른 것이라

그처럼 살았건

나처럼 살았건

어느 것이 더 멋진 삶이라 규정하기 어려운 거 아닌가?

그것이 바라고 원하던 즐거운 항해였다면 그걸로 충분한 인생  이겠지. 

원래 삶이란 원하는 것 모두를 갖게 하지는 않는 법이라

 

나는 더 기다려야 한다.

훌훌 날아갈 수 있는 자유로운 그 날을

거기엔 너무 함정이 많기는 하다.

너무 빨리 은퇴하여 경제적으로 독립되지 못할 수도 있고

내 육신이 병들 수도 있고

내 육신 보다 마음이 먼저 늙어 버릴 수도 있고.

 

은퇴하고도 세상의 아름다움을 찾아 떠날 수 없다면 난 어느 길목에 앉아 목놓아 울어야 할

것이다.

그가 부러울 것이다..

훌쩍 떠났고

수 많은 세상을 돌아 보고 많은 깨달음을 얻었고

이젠 궁색하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자유와 명성을 누리는 그가.

 

현실 속에 있든 현실 속을 떠나든 마음의 평화에 이르지 못한다면 결국 네가 하는 모든 일들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너는 많은 일을 하면서도 삶의 고달픔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다.

행복과 즐거움도 잠깐이고 습관적인 삶의 반복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사는 것이 아니다.

너는 영리하지만 지혜와 거리가 멀고 어떤 것을 성취하지만 새로운 욕망이 너를 괴롭히며 사랑을 갈구하지만 일순간 후에는 시들해 지고 만다.

그러한 너의 인생이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나의 삶은 어디를 향해 흘러가고 있는가?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리고 과연 매 순간마다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있는가?

 

너의 삶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그 모든 것을 흐르는 구름이라 생각하라

그리고 너는 푸른 하늘로 남아 있어라.

쉴새 없이 흐르는 구름이 되지 말고

너를 주시하는 자 되라

그러면 너는 사념에서 해방될 것이다.

 

자신의 사념에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사람

내면의 본성에 따라 자유롭게 사는 사람이 있었다.

나에게 있어서 종교는 그러한 사람으로 가까이 가는 길이었다.

동양에서는 그런 사람을 도인이라 불렀고 서양에서는 성자라 불렀다.

 

류시화는 길잡이 늑대 이야기를 하고 있다.

Guiding Wolf

인디언 전사들이 숲에서 사냥을 하다 길을 잃었을 대 길을 안내해주는 늑대로

그 안내를 받으려면 정직성,성실성,선량함 그리고 남을 보살피는 너그러운 마음을 갖추어야

한다고 한다.

우린 인생길을 위해 길잡이 늑대 한 마리 키우고 있는가?

 

누구에게나 길잡이 늑대가 있다.

세상을 살아 오면서 어떤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이끌려 가는 나를 느낄 수 있다.

내가 여기까지 오고 또 인생의 여러 길목에서 어떤 결정을 내릴 때 그것은 설명하기 어려운

미묘한 느낌과 마음의 울림으로 나타나 나를 여기까지 몰고 왔다.

지나고 난 다음 그 때 그랬으면 하고 후회하기도 하지만 어쩌면 그렇게 되도록 이미 정해져 있었

는지도  모른다.

마치 인생이 큰 틀과 밑그림은 만들어져 있고 그 틀 안에서의 사소한 변화만을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 갈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것처럼

 

사실 너무 인생을 깊이 파고들면 허무해진다.

궁극은 죽음의 종말에 맞닿아 있다.

내세가 있고 윤회가 있지만 가시화된 세계가 아니고 또 윤회마저도 전생의 기억을 간직하지 않는다.

내세를 위해 현실을 희생하는 것은 어리석다는 생각이 든다.

내세가 있을지도 모른다.

내세의 영생을 누리기 위해 현세를 인고하고 또 하고자 하는 많은 것을 포기하는 것은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의미와 상반되는 것은 아닐까?

현세의 삶에 근거한 내세의 행복한 삶을 누가 규정할 것이며 그 기준은 무엇인가?

종교와 신이 해답이라고 하지만

류시화의 말처럼 기독교와 성서는 오랜 기간 무수한 사람들의 전파와 서로 다른 해석을

통해 본질이 훼손되었는지도 모른다.

 

매 순간마다 평화를 누린다는 것은 불가능 할 것이다.

우리는 이세상에서 단순히 살아 가기 위해서도 수 많은 대가와 세금을 치러야 하니까

돈을 벌어야 하고

어쩔 수 없는 전쟁을 해야 하고

때로는 상처를 입고 신음할 때도 있으니까.

 

그냥 인정하자. 다 사는 게 그런 거라고

그리고 한 번씩 뜨거워지고 또 무언가에 목마름을 느낄 때

샘으로 가자.

깊은 산 속에서 흘러내려 맑게 고여 넘실대며 언제라도 가슴의 갈증을 후련히 풀어헤치는 그 곳이 있다면 삶은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도 좋지 않을까?

일주일에 하루쯤 가슴이 울리는 대로 살 수 있다면

단조로운 일상에서도 삶의 의미와 기쁨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류시화가 이야기하는 샴발라

인도 북부의 어느 지역에 있다는 전설의 왕국으로 절대 평온의 세계라 한다.

그곳은 큰 의식이 모든 물질계와 현상계를 지배하는 세계로 그곳에는 언제나 절대 평온만이 있으며 과거 현재 미래가 동시에 존재한다..

우리나라의 이어도 같은 곳이다.

 

사념의 구름위로 날아라. 사념의 구름 위를 걸어라

그리고 절대평온의 샴발라에 이르라

 

절대 평온의 세계란 사람의 가슴 속에 있는 세계가 아닐까?

속세를 떠나 도의 길로 들어선 도인들 아니고는 도달할 수 없는 궁극의 깨달음은 그저 어렴풋이 느낄 수 있는 것만으로 우린 충분할지 모른다.

그 희미한 깨달음마저도 오랜 시간과 세월 그리고 내 안의 또 다른 나와 수 많은 교류를  통해 얻어진 것이었다.

 

마눌이 물었다.

생일선물로 무엇을 해줄까?

갖고 싶은 것이 생각나지 않는다.

이미 내가 갖고자 했던 것들은 모두 가지고 있다.

더 바랄게 없는 나의 삶 아닌가?

다만 정신적으로 채워지지 않은 그 무엇이 남아 있겠지만

만일 그것도 채워져 있다고 믿는다면 그걸로 족한 것 아닐까?

더 높은 것을 추구할 생각이 없는 거나 이미 추구 했다고 믿는 거나 추구하려고 기를 쓰는 거나 무엇이 더 좋고 나쁨인가?

 

백조는 날아 갔다.

산 너머 호수로

이 작은 연못에서

왜 자꾸 백조를 찾고 있는가?

그대 어리석은 수행자여

백조는 날아갔다.

산 너머

빛의 호수로

백조는 가 버렸다.

허공에 아무런 자국 남기지 않고

 

까비르

 

 

임종을 맞이한 랍비 주시기가 주위에 모인 사람들에게 또는 자기 자신에게 말했다.

신은 나에게 왜 너는 모세와 같은 삶을 살지 않았는가? 라고 묻지 않을 것이요 그보다도  너는 왜 주시기의 삶을 살지 않았는가? 라고 물을 것이오

 

그려 !

인생이란 제멋에 사는 거여.

산이 좋으면 산으로 가고

바다가 보고 싶으면 바다로 가고

잠자고 싶으면 잠자고

무엇인가를 위해서, 또 누군가를 위해 무엇을 할 때를 제외하고 스스로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살아 갈 수 있는 것

그게 살아가는 행복이지 뭐 별건가?

 

 

 

잘랄루딘 루미 (사랑이  왔다)

 

사랑이 왔다.

그것은 나를 죽였으며

그 대신 사랑하는 이로 내 존재를 채웠다.

내게는 단지 이름만 남아 있을 뿐

다른 모든 것은 그의 것이었다.

그대의 마음속에 있는 모든 얼굴을 버려라

그래서 그대의 마음은 온건히 그의 얼굴로 채워라

내 가슴이여 어디에 있는가?

나는 그것을 그의 곁에서 발견한다.

내 영혼이여 어디로 갔는가?

나는 그것을 그의 머리카락 속에서 발견한다.

목이 말라 물을 마실 때

나는 물 속에 비친 그의 모습을 본다.

 

삶고 죽음은 등을 맞대고 있다.

존재를 의식함은 살아 있는 것의 출발점이지만 때론 우리는 스스로를 잃어 버리기도 하고 또 잃어 버려야 흔쾌한 삶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무언가에 빠지고

무언가에 취하고

가끔 차가운 이성을 버리고 더 격정적이고 인간적인 감정에 흐느끼는

그대는 따뜻하고 슬픈 시인 이어라

울고 웃다가 정색을 하고 

다시 배낭을 맨 채 먼 길을 떠나는 우리는 기쁨의 여행자이다.

 

류시화가 말했다.

우리가 살아 가는 삶의 길목에서 깊은 통찰력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도처에서 스승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꼭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자연이 우리의 스승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의 본질에서 벗어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삶이 곧 스승이며 그 삶 속에서 살아 있는 눈으로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다.

 

류시화에 따르면  인도에서 쉰살의 나이는 산을 바라보는 나이라고 한단다.

이제 오십 년 동안 세속의 삶을 누렸으니 그 모든 것으로부터 떠나서 진리와 마음의 평화를 찾을 때가 왔다는 뜻이란 거다.

그래서 예순을 산으로 가는 나이라 한다.

인도에서 산은 신이 기거하는 장소이고 또 욕망에 쉽게 이끌리는 인간이 신이 되기를 꿈꾸는 장소인 것이다.

 

저 산이 스승이 아니라고 누가 얘기할 수 있을까?

누군가는 나무를 보고

누군가는 숲을 보고 바람을 만난다.

누군가는 그 속에서 무엇인가를 털어내고 또 무엇인가에서 벗어나려 하고

또 누군가는 삶의 아픔과 화해하고 희망을 바라 본다.

나는 산에서 삶을 본다

그래서 오늘도 누군가는 산 속을 온종일 걸어가고

누군가는 산을 꿈꾸며 배낭을 꾸린고

또 누군가는 산에서 나오려 하지 않는다.

 

종교관도 인생관도 그와는 너무나 비슷한 게 많았다.

난 오래 전  삶이란 낙서의 글에서 이렇게 썼다.

 

“사람은 누구나 가슴에 향기를 품고 태어났다.

잘난 사람은 잘난 대로 못난 사람은 못난 대로 향기가 있는 것이다.

그저 함께 있으면 그 향기가 짙어오고

멀리 있으면 그리움이 향기에 배어 올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늙어 가면 좋겠다.

 

세상에 배울 것들이 오직 처세와 기술 뿐이랴?

세상에 배울 수 있는 것이 책과 선생 뿐일까?

우리는 아이에게서도 배우고 , 젊은 직원에서도 배우고 세월과 경험에서도 배운다.

그리고 자연이야말로 우리의 가장 위대한 스승이다.

자연 앞에 있는 시간은 늘 특별한 시간이고 행복한 시간이다.

그 멋진 풍경은 신이 나에게만 특별히 내려준 선물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남도의 봄을 마중 가는 혼자만의 여행길에서 어느 섬에 올랐을 때 감상문은 이랬다.

 

“인생성공 단십백을 아나?

한평생을 살다가 죽을 때 단 한명의 진정한 스승과 열명의 진정한 친구

그리고 백권의 좋은 책을 기억할 수 있다면 성공한 거라더군

난 한 명의 진정한 스승과 한 명의 진정한 친구

정말 좋은 한 권의 책을 알고 있지

자연

그 살아가는 날의 기쁨

 

 

 

저 비위 구름위로 올라가면 태양이 있듯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 속에는 또 다른 세계가 있고 그 곳에는 다시 우리가 들어갈 또 다른

세계가 있음에도 우리는 곧잘 그 사실을 잊는다.

그리고 지금 이순간이 영원하리라 생각한다.

 

그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고 나는 불멸의 어떤 것을 꿈꾸었나?

얼마나 많은 순간들이 내 손가락 사이에서 모래알처럼 빠져나간 것이랴?

삶과 죽음이 맞물려 돌아가는 이곳에 우리가 집착할 것이 무엇이고 굳이 초월할 것이 또 무어냐?

 

뜨거운 태양 아래서 우리는 그 길고 지루했던

비의 계절을 잊었다.

누군가 또 태양 아래서 영원한 제국을 이야기 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 거짓말처럼 겨울이 찾아 오리라.

하지만 적도 어딘가에는 여전히 뜨거운 태양이 이글거릴 것이다.

내 안의 불꽃은 이미 봄을 바라 보고

나는 벌써 겨울을 잊었다.

 

철 들고 바라보는 인생이란 얼마나 짧은 것인가?

청춘이란 얼마나 빨리 흘러 가는 것인가?

긴 시간의 계곡에서 찰라를 살아가는 인간이 영생과 불멸을 꿈꾼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더 많은 아름다움을 둘러보고 더 많은 기쁨을 누리고 더 많은 행복을 찾는데도 너무 짧은 우리의 삶이 아닌가?

 

생과 사의 윤회에서 벗어나는 길은 인식의 완전에 이르는 길이다.

불멸의 깨달음으로 그것과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은 成佛이고 救援이다.

그렇지 못한 죽은 자는 또다시 생로병사의 굴레를 계속해야 한다.

아무리 많은 미련이 남더라도 그 미련은 우리가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씨앗이 된다.

미련은 슬픔을 남기고 슬픔은 한이 된다.

 

흰두교도들은 죽은자를 꽃과 함께 갠지스강으로 흘려 보낸다.

갠지스 강은 큰 바다로 흘러 가기 대문에 결국 인간은 아트만 즉 큰나(大我)에서 나와서 큰나로 돌아 간다고 그들은 믿는다.

 

히말라야의 티벳인은 시체를 토막내서 콘도르에게 주고 뼈는 움푹 패인 구멍에 넣고 빻아서 가루를 만들어 바람에 뿌린다.

그리고 샤만이 나와 그 새들과 대화한다.

새들이 죽은 자가 가는 곳을 말해 준다고 한다..

 

인디안들은 죽은 자의 시체를 초막 위에 놓는다.

새들이 시체를 뜯어 먹고 영혼은 새들의 목을 타고 비상하여 조상들의 세계로 날아 올라간다고 믿는다.

 

세상사람 모두가 여행자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내가 빌린 것이다.

나는 아직도 그의 눈을 잊지 못한다.

아무런 인간의 욕망에도 때 묻지 않은 그 눈

신을 찾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눈을 통해 신이

나를 들여다 보는 듯하던 그 눈.

 

 

길을 잃었다고?

길을 잃지 않았으면 어디로 갈 건데?

우린 참으로 오래 전부터 길을 잃고 방황하지 않았나?

내가 찾고자 한 것들을 찾지 못한 채

우리는 죽음의 길로 가지 않는가?

그것이 무엇이던 찾지 않아도 좋다.

아니 찾았다고 생각해도 괜찮다.

죽음 앞에서 인간의 삶이란 언제나 미완 이니까..

 

죽음!

저 뜨거운 태양처럼 확고불변한 진리

우리 인생은 그 죽음 앞에서 한 마리 불나방이 일으키는 바람이다.

삶과 죽음은 하나

그래서 삶의 부질 없는 것들에 심각하게 매달리지 않는 것처럼 죽음에 대해서 그렇게 심각할 필요가 있을까?

삶이란 곧 죽음으로 가는 여행이거늘

천하를 호령하던 사람들도 한 줌 흙으로 가고

가난한 시인도 고단한 삶의 어깨를 한 평의 땅에 기대었다.

많은 것을 가진 자나

삶의 무게에 허덕이다 길을 떠난 자나 모두 빈 손으로 늦지 않게 주토를 밟았다.

욕심과 집착이란 그 죽음 앞에서 얼마나 부질 없는가?

 

내 죽은 뒤에도

산에는 여전히 꽃이 피고 녹음이 우거지고 나비가 날 것이다.

 

기뻐하라 !

행복하라 !

그 것이 인생이 주는 영원한 진리와 깨우침일 것이다.

 

 

고뇌하는 너의 가슴 속에서만

영겁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모든 마당과

모든 숲

모든 집 속에서

그리고 모든 사람들 속에서

영원히 볼 수 있어야 한다.

목적지에서

모든 여행길에서

모든 순례길 에서

영원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묵타난다

                  

 

삶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다.

하나는 방황이고 하나는 여행이다.

내면의 방황이 끝날 때 삶의 진정한 여행이 시작된다.

현실 속에 진리가 있고 깨달음이 있다.

삶은 방황이다.

 

류시화는 술회한다.

그 많은 여행길이 영적인 평화보다 더 큰 혼돈을 가져왔음을.

그 어린 시절 비밀의 장소에 대한 깊은 인식과 사라지지 않는 영적인 충격이 끊임 없는 여행과 추구의 끈이었음을

 

빈터에서 나는 왕이었고

나는 우주의 지배자였으며

꿈꾸는 몽상가였다.

 

내 모든 추구가 그날 구원의 숲 속에서 달 빛 속에서 훔쳐 보았던 광경을 되찾지 위함이었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영원한 것을 찾아서 많은 길을 여행해 왔지만 결국 어린시절 그 숲에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했다.

어쩌면 젊은 날의 나는 젊은 날에 꿈꾸어서는 안될 것들을 꿈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붉은 잎

 

하루가 얼마나 깊고

덧없는지를 느끼지 않아도 좋을

그 다음 날이 왔고

그 날은 오래 잊혀지지 않았다.

붉은 잎. 붉은 잎. 하늘을 떠가는 붉은 잎들

모든 흐름이 나와 더불어 움직여 가고

또 갑자기 멈춘다.

여기 이 구름들과 끝이 없는 넓은 강물들

어떤 섬세하고 불타는 삶을 나는 가지려고 했었다.

그리고 그것을 가졌었다.

그렇다 다만 그것들은

얼마나 하찮았던가

여기 이 붉은 잎. 붉은 잎들

허공에 떠가는 더 많은 붉은 잎들

바람도 자고 물도 맑은 날에

나는 외로움이 구름을 끌어 당기는 곳

그것들은 멀게 있다.  더 멀리에

그리고 때로는 걷잡을 수 없는 흐름이

그것들을 겨울하늘 위에서 소용돌이치게 하고

순식간에 차가운 얼음위로 끌어 올린다. 

 

 

나뭇잎 하나가

바람에 실려 가지에서 떨어진다.

그러다가 갑자기

나뭇가지로 다시 올라 간다.

아니 나비였구나.!

 

 

슬픔도

사랑도

기쁨도

모두 내 가슴에 있다.

 

인생이란 그렇게 심각한 게 아닐 것이다.

늑대처럼 들판을 뛰어 다니는 원시의 삶이 더 행복할 수 있고

박봉을 쪼개어 오랫동안 모은 돈으로 여행을 떠나는 자가 더 행복할 수 있다.

5만원 짜리 식사 보다 3500원 짜리 국밥이 훨씬 맛있을 수 있는 게 인생이다.

 

그냥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열심히 살자